‘우리는 왜 총을 들었나’ 5·18 항쟁 지도부 총 경비책임자 위성삼 [영상채록5·18]

입력 2024.06.21 (11:32) 수정 2024.06.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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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위성삼
-前 5·18 민중항쟁동지회 부회장
-前 5·18 구속자협의회 간사
-前 5·18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 간사
-前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전남본부 사무차장
-5·18기록관 해설사

광주 전일빌딩 245 에서 해설 중인 위성삼 씨

■"군인들이 정말 총을 쐈냐?"…"그럼 우리도 총을 가져야겠다"

군대를 다녀온 뒤 복학해 조선대학교 4학년에 다니던 위성삼 씨의 시위 참여는 여느 대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사적인 분노' 그것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의 일입니다.

"한일극장 근처에 대학생들이 다니는 술집도 많고 그랬는데, 오후 되니까 시위가 확산해서 난리인 거에요. 그래서 밖에서 보니까 젊은 학생들만 보면 후려치는 거예요. 저도 대학생이잖아요. 그때부터 시위에 참여하게 되지요."

위성삼 씨는 광주고 앞 계림동 시위에도 참여합니다. 거기서 5·18 최초 발포가 이뤄집니다. 총을 맞은 고등학생은 학교 후배였습니다.

"(시위대가) 짚뭇을 장갑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른 거예요. 장갑차 뚜껑 위에. 그런데 그 불이 땅바닥으로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들어서 그 위에 다시 올렸죠. 올리니까 장갑차에 있는 군인이 한순간에 총을 쏘더라고 '다다다닥'... 그때까지만 해도 총소리 처음 들어본 거 아니에요. '이 총은 공포탄이다 공포탄' 제가 이렇게 악을 썼고, 그래도 무서우니까 사람들이 비 오면 처마 밑으로 비 안 맞게 숨듯이 딱 숨는 거예요. 그런데 한참 있으니까 고등학생한테 피가 흐르는 거예요. 명찰을 보니 조대부고생, 저도 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알아봤죠. 야간생은 하얀 실로 명찰을 꿰매서, '야간생이다'."

5월 21일. 위 씨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 상황을 알리려 전남 영암, 목포 방면으로 차(시내 버스)를 몰았습니다. 여러 대가 따라붙었습니다. 나주 남평 정도에서 어떤 시민이 차를 세우더랍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한 상황을 알려줬다고 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말 총을 쐈냐?' 정말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흥분하고, 그럼 우리도 총을 가져야 되겠다. …나주경찰서 오른쪽에 무기고가 있는데, 렌터카가 딱 밀어버린 거예요 무기고를. …남평파출소 거기 가보니까, 탄약고에 수류탄이 있잖아요."

시위를 다른 지역에 알리려 나섰던 길이, 무장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등학생을 포함해 무장 시민 20여 명을 이끌게 됐습니다. 오발 사고 등을 막기 위해 간단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위성삼 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발포로 군인들이 시민들을 쏴 죽이는 모습을 본 시민들은 광주 외곽 경찰서와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시민들의 분노와 무장 앞에 계엄군들은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성삼 씨는 조선대학교 병원 후문, 학동 시장 인근 사진관 건물 2층에 올라가 철수하는 군인들을 향해 총을 쐈다고 했습니다.

■무기 반납 주장에 "다 죽여버린다" 주장한 '극렬'

'해방구'가 된 공간에서 위성삼 씨는 전남도청에 차려진 항쟁 지도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강경한 조직이 어딘지를 물었고, '조사부(치안 질서 위배자 조사 역할 담당)'에 자원했습니다. 위 씨는 당시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내부 의견 충돌이 가장 어려웠다고 얘기했습니다. 위 씨는 강경파 쪽이었습니다.

"26일 오후 4시 정도인가, '무기를 반납합시다' 막 방송을 한 거예요. 그럼 이거 안 되잖아요. '무기를 반납하자'와 '반납하지 말자' 그 싸움이 제일 어려운 거예요. 무기를 반납하면 어떻겠어요? 사과 한 번도 않고 학살했잖아요. 또 무기 반납하면, 우리들을 (신변 안전) 보장해줘야 될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보복이 없다거나, 도민장 장례 그런 부분들. 책임자 처벌을 확실하게 한다거나, 그런 것 없이 무기만 달랑 주면 뭐 할 거예요.…방송을 한 놈을 찾으려고 해도 못 찾겠더라고요. 그래서 총기를 장전해서 '다 죽여버린다' 그러니까 방송 중단하고 무기를 놔두고 나간 거예요. 상황실장 박남선에게 보고하니까, 2층에 가서 어른들 앞에 총을 쏜 거예요. 그래서 무기 반납이 안 되는 거예요."

5·18 최후 항쟁지인 전남도청에서 연행된 사람들(KBS 자료 화면)

군인들의 진압 작전에 대비, 도청 주변으로 시민군을 배치시키고 대응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다시피 참혹한 진압이었습니다. 팔에 유탄을 맞고 부상을 당한 위 씨도 계엄군에 투항했습니다. 입고 있던 흰 와이셔츠 위에 글씨가 쓰여졌습니다. '극렬'. 그 글씨를 보고 보는 군인마다 자기에게 발길질을 했다고 했습니다. 위씨는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극렬'이란 글자만 지워져도 매를 덜 맞을까 싶어 화장실 변기 물에 옷을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더랍니다.

"매직으로 써놓은 것이 지워지겠습니까? (조사받을 때는) 그놈이라도 입고 나가야 되니까 축축한 옷을 배 위에 딱 놔두고 말려요. 그럼 뜨뜻하면 다시 그놈을 입어."

■"5·18 진상규명 활동이 6월 항쟁으로 이어져"…"민주주의는 소중한 것, 항시 기억해야"

위성삼 씨는 '계엄법 위반 및 내란'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에 집행유예 2년 6개월을 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습니다. 매 한 대에 1년 감형이라 생각하며, 무기고 탈취 등 여러 사실을 숨긴 덕이 컸습니다.
이후 위성삼 씨는 5·18과 관련된 활동,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하며 활동가의 삶을 삽니다. 특히 광주는 5·18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87년 6월 항쟁을 맞았다고 설명합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도 어디서 띄웠느냐. 바로 광주에서 띄웠어요. 그러니까 87년이면 (5·18) 7주기가 되잖아요. 7주기 행사에 민주헌법 쟁취 국민 선언문을 몰래 거기서 뿌려버려요. 서울에서는 못 하고. 그 부분이 6.10 항쟁으로 가는 거예요."

1987년에 열린 5·18 희생자 추모식

오늘날 5·18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5·18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6월 항쟁 기간 투신하고 분신했습니까? 그건 5·18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한 거예요. 다 그것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그렇게 소중하다는 것, 먼 역사를 지나온 것 같지만 바로 현실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를 항시 기억해야 한다고 봅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는 믿겨지지 않는 밝은 인상을 한 위성삼 씨는 단체 방문객이 있다며, 해설을 하러 바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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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6-21 11: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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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일빌딩 245 에서 해설 중인 위성삼 씨

■"군인들이 정말 총을 쐈냐?"…"그럼 우리도 총을 가져야겠다"

군대를 다녀온 뒤 복학해 조선대학교 4학년에 다니던 위성삼 씨의 시위 참여는 여느 대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사적인 분노' 그것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의 일입니다.

"한일극장 근처에 대학생들이 다니는 술집도 많고 그랬는데, 오후 되니까 시위가 확산해서 난리인 거에요. 그래서 밖에서 보니까 젊은 학생들만 보면 후려치는 거예요. 저도 대학생이잖아요. 그때부터 시위에 참여하게 되지요."

위성삼 씨는 광주고 앞 계림동 시위에도 참여합니다. 거기서 5·18 최초 발포가 이뤄집니다. 총을 맞은 고등학생은 학교 후배였습니다.

"(시위대가) 짚뭇을 장갑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른 거예요. 장갑차 뚜껑 위에. 그런데 그 불이 땅바닥으로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들어서 그 위에 다시 올렸죠. 올리니까 장갑차에 있는 군인이 한순간에 총을 쏘더라고 '다다다닥'... 그때까지만 해도 총소리 처음 들어본 거 아니에요. '이 총은 공포탄이다 공포탄' 제가 이렇게 악을 썼고, 그래도 무서우니까 사람들이 비 오면 처마 밑으로 비 안 맞게 숨듯이 딱 숨는 거예요. 그런데 한참 있으니까 고등학생한테 피가 흐르는 거예요. 명찰을 보니 조대부고생, 저도 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알아봤죠. 야간생은 하얀 실로 명찰을 꿰매서, '야간생이다'."

5월 21일. 위 씨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 상황을 알리려 전남 영암, 목포 방면으로 차(시내 버스)를 몰았습니다. 여러 대가 따라붙었습니다. 나주 남평 정도에서 어떤 시민이 차를 세우더랍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한 상황을 알려줬다고 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말 총을 쐈냐?' 정말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흥분하고, 그럼 우리도 총을 가져야 되겠다. …나주경찰서 오른쪽에 무기고가 있는데, 렌터카가 딱 밀어버린 거예요 무기고를. …남평파출소 거기 가보니까, 탄약고에 수류탄이 있잖아요."

시위를 다른 지역에 알리려 나섰던 길이, 무장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등학생을 포함해 무장 시민 20여 명을 이끌게 됐습니다. 오발 사고 등을 막기 위해 간단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위성삼 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발포로 군인들이 시민들을 쏴 죽이는 모습을 본 시민들은 광주 외곽 경찰서와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시민들의 분노와 무장 앞에 계엄군들은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성삼 씨는 조선대학교 병원 후문, 학동 시장 인근 사진관 건물 2층에 올라가 철수하는 군인들을 향해 총을 쐈다고 했습니다.

■무기 반납 주장에 "다 죽여버린다" 주장한 '극렬'

'해방구'가 된 공간에서 위성삼 씨는 전남도청에 차려진 항쟁 지도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강경한 조직이 어딘지를 물었고, '조사부(치안 질서 위배자 조사 역할 담당)'에 자원했습니다. 위 씨는 당시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내부 의견 충돌이 가장 어려웠다고 얘기했습니다. 위 씨는 강경파 쪽이었습니다.

"26일 오후 4시 정도인가, '무기를 반납합시다' 막 방송을 한 거예요. 그럼 이거 안 되잖아요. '무기를 반납하자'와 '반납하지 말자' 그 싸움이 제일 어려운 거예요. 무기를 반납하면 어떻겠어요? 사과 한 번도 않고 학살했잖아요. 또 무기 반납하면, 우리들을 (신변 안전) 보장해줘야 될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보복이 없다거나, 도민장 장례 그런 부분들. 책임자 처벌을 확실하게 한다거나, 그런 것 없이 무기만 달랑 주면 뭐 할 거예요.…방송을 한 놈을 찾으려고 해도 못 찾겠더라고요. 그래서 총기를 장전해서 '다 죽여버린다' 그러니까 방송 중단하고 무기를 놔두고 나간 거예요. 상황실장 박남선에게 보고하니까, 2층에 가서 어른들 앞에 총을 쏜 거예요. 그래서 무기 반납이 안 되는 거예요."

5·18 최후 항쟁지인 전남도청에서 연행된 사람들(KBS 자료 화면)

군인들의 진압 작전에 대비, 도청 주변으로 시민군을 배치시키고 대응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다시피 참혹한 진압이었습니다. 팔에 유탄을 맞고 부상을 당한 위 씨도 계엄군에 투항했습니다. 입고 있던 흰 와이셔츠 위에 글씨가 쓰여졌습니다. '극렬'. 그 글씨를 보고 보는 군인마다 자기에게 발길질을 했다고 했습니다. 위씨는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극렬'이란 글자만 지워져도 매를 덜 맞을까 싶어 화장실 변기 물에 옷을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더랍니다.

"매직으로 써놓은 것이 지워지겠습니까? (조사받을 때는) 그놈이라도 입고 나가야 되니까 축축한 옷을 배 위에 딱 놔두고 말려요. 그럼 뜨뜻하면 다시 그놈을 입어."

■"5·18 진상규명 활동이 6월 항쟁으로 이어져"…"민주주의는 소중한 것, 항시 기억해야"

위성삼 씨는 '계엄법 위반 및 내란'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에 집행유예 2년 6개월을 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습니다. 매 한 대에 1년 감형이라 생각하며, 무기고 탈취 등 여러 사실을 숨긴 덕이 컸습니다.
이후 위성삼 씨는 5·18과 관련된 활동,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하며 활동가의 삶을 삽니다. 특히 광주는 5·18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87년 6월 항쟁을 맞았다고 설명합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도 어디서 띄웠느냐. 바로 광주에서 띄웠어요. 그러니까 87년이면 (5·18) 7주기가 되잖아요. 7주기 행사에 민주헌법 쟁취 국민 선언문을 몰래 거기서 뿌려버려요. 서울에서는 못 하고. 그 부분이 6.10 항쟁으로 가는 거예요."

1987년에 열린 5·18 희생자 추모식

오늘날 5·18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5·18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6월 항쟁 기간 투신하고 분신했습니까? 그건 5·18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한 거예요. 다 그것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그렇게 소중하다는 것, 먼 역사를 지나온 것 같지만 바로 현실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를 항시 기억해야 한다고 봅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는 믿겨지지 않는 밝은 인상을 한 위성삼 씨는 단체 방문객이 있다며, 해설을 하러 바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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