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내려놓은 4성 장군…죽어서도 한국 지키겠다는 노병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4.06.25 (09:04)
수정 2024.06.2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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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내가 너를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중략) 한국의 길거리에는 너와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어린 소년들이 아주 많단다. (중략) 너와 같은 어린 소년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우리가 여기에 왔단다."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 프랑스 대대를 이끌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기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 일부입니다.
몽클라르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르비크 전투 승리를 지휘했던 전쟁 영웅으로, 종전 이후 중장으로 진급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외인부대 감독관을 맡고 있던 몽클라르 장군은 한국으로의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당시 대대급 규모 부대의 파병이 결정되자 몽클라르 장군은 자신이 해당 부대의 지휘관이 되겠다며 스스로 네 계급 강등까지 자청했습니다. 강력한 참전 의지에 4성 장군(프랑스는 준장부터 2성 장군)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유엔군 소속 프랑스대대를 이끌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프랑스군 대대 지휘관으로 참전한 몽클라르 장군.
■ 중공군 맞선 유엔군 첫 승전보 지평리 전투 승전 이끌어
징집이 아닌 오직 지원병만으로 구성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1월 전선에 처음 투입됐습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가장 대표적인 승전은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치러진 지평리 전투입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승전고를 울린 최초의 전투로, 이후 38선 회복의 밑거름이자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계기로 평가됩니다.
세계 1·2차 대전을 두루 경험했던 백전노장이었던 몽클라르 장군은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 5천 명을 이끌고 5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항했습니다. 중공군의 피리와 나팔 소리에 병사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다는 걸 간파한 몽클라르는 사이렌을 울려 '맞불'을 놨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매고 백병전까지 직접 뛰어들며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중공군의 사상자 수는 5천 명에 달했고, 반면 미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는 10분의 1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10대 1 열세에도 대승을 거두면서 중공군 투입 이후 연전연패를 이어갔던 UN군의 사기는 반전됐고, 전쟁의 판도를 뒤바꿨습니다.
우리 정부는 몽클라르 장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며 지난 2022년 별 4개가 새겨진 조선시대 지휘봉인 등채를 전달했습니다. 6·25 전쟁 참전을 위해 중장 계급장인 별 4개를 포기했던 몽클라르 장군의 계급을 다시 복원한다는 의미였습니다.
2022년 11월 조선시대 지휘봉인 등채를 전달받은 몽클라르 장군 후손들.
■ "죽어서도 한국 지키겠다." 참전 노병의 바람
올해 94세로 6·25 전쟁 때 프랑스대대 이등병으로 참전했던 세르주 아르샹보 씨는 KBS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70여 년 전 일인데도 여전히 당시 전투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세 번 파병 중 2진으로 투입된 아르샹보 씨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와 티본 고지 전투를 가장 힘겨웠던 전투로 기억했습니다.
아르샹보 씨는 "당시 중공군 공격으로 전우가 두 동강 나 숨졌다. 소속된 분대에서 무사했던 건 내가 유일했다"며 "아군과 적군의 시신이 뒤섞인 참호 안에서 보름 동안 생활한 기억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이 제2의 조국이라는 노병의 마지막 바람은 전우들이 있는 부산 유엔 기념공원에 안장되는 것입니다.
정전 이후 70년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오물 풍선 도발 등 북한 관련 소식을 뉴스로 챙겨본다는 아르샹보 씨는 자신이 안장된 뒤 북한군이 또다시 남침한다면 "무덤에서 나와 총을 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프랑스대대 소속 이등병으로 참전한 세르주 아르샹보 씨.
■ 참전 장병 대비 전사자 1위…"'잊혀진 전쟁' 안 돼"
6·25 전쟁 당시 3,421명이 참전한 프랑스는 전사자 수가 292명으로, 참전 장병 대비 전사자 비율(약 8.5%)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이제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는 25명으로 파악되는데,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한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리 4구 센강 변에 세워져 있는 6·25 전쟁 참전 기념비.
파리 4구의 센강 변엔 6·25 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엔 그동안 프랑스가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글귀와 적혀 있고, 하단 동판엔 북한·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프랑스 대대 소속 292명의 이름이 빠짐없이 새져겨 있습니다.
패트릭 보두앙 프랑스 참전용사협회장은 KBS 취재진과 만나 "프랑스 역사책에서 한국 전쟁은 아주 간단히 언급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며 "프랑스 내에선 한국 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도 불린다며, 우리는 프랑스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계속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료조사:김세현, 자료 제공: 주프랑스대사관 무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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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 내려놓은 4성 장군…죽어서도 한국 지키겠다는 노병 [특파원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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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6-25 09:04:30
- 수정2024-06-25 09:09:22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내가 너를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중략) 한국의 길거리에는 너와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어린 소년들이 아주 많단다. (중략) 너와 같은 어린 소년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우리가 여기에 왔단다."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 프랑스 대대를 이끌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기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 일부입니다.
몽클라르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르비크 전투 승리를 지휘했던 전쟁 영웅으로, 종전 이후 중장으로 진급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외인부대 감독관을 맡고 있던 몽클라르 장군은 한국으로의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당시 대대급 규모 부대의 파병이 결정되자 몽클라르 장군은 자신이 해당 부대의 지휘관이 되겠다며 스스로 네 계급 강등까지 자청했습니다. 강력한 참전 의지에 4성 장군(프랑스는 준장부터 2성 장군)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유엔군 소속 프랑스대대를 이끌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 중공군 맞선 유엔군 첫 승전보 지평리 전투 승전 이끌어
징집이 아닌 오직 지원병만으로 구성된 프랑스 대대는 1951년 1월 전선에 처음 투입됐습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가장 대표적인 승전은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치러진 지평리 전투입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승전고를 울린 최초의 전투로, 이후 38선 회복의 밑거름이자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계기로 평가됩니다.
세계 1·2차 대전을 두루 경험했던 백전노장이었던 몽클라르 장군은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 5천 명을 이끌고 5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항했습니다. 중공군의 피리와 나팔 소리에 병사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다는 걸 간파한 몽클라르는 사이렌을 울려 '맞불'을 놨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매고 백병전까지 직접 뛰어들며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중공군의 사상자 수는 5천 명에 달했고, 반면 미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는 10분의 1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10대 1 열세에도 대승을 거두면서 중공군 투입 이후 연전연패를 이어갔던 UN군의 사기는 반전됐고, 전쟁의 판도를 뒤바꿨습니다.
우리 정부는 몽클라르 장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며 지난 2022년 별 4개가 새겨진 조선시대 지휘봉인 등채를 전달했습니다. 6·25 전쟁 참전을 위해 중장 계급장인 별 4개를 포기했던 몽클라르 장군의 계급을 다시 복원한다는 의미였습니다.
■ "죽어서도 한국 지키겠다." 참전 노병의 바람
올해 94세로 6·25 전쟁 때 프랑스대대 이등병으로 참전했던 세르주 아르샹보 씨는 KBS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70여 년 전 일인데도 여전히 당시 전투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세 번 파병 중 2진으로 투입된 아르샹보 씨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와 티본 고지 전투를 가장 힘겨웠던 전투로 기억했습니다.
아르샹보 씨는 "당시 중공군 공격으로 전우가 두 동강 나 숨졌다. 소속된 분대에서 무사했던 건 내가 유일했다"며 "아군과 적군의 시신이 뒤섞인 참호 안에서 보름 동안 생활한 기억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이 제2의 조국이라는 노병의 마지막 바람은 전우들이 있는 부산 유엔 기념공원에 안장되는 것입니다.
정전 이후 70년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오물 풍선 도발 등 북한 관련 소식을 뉴스로 챙겨본다는 아르샹보 씨는 자신이 안장된 뒤 북한군이 또다시 남침한다면 "무덤에서 나와 총을 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 참전 장병 대비 전사자 1위…"'잊혀진 전쟁' 안 돼"
6·25 전쟁 당시 3,421명이 참전한 프랑스는 전사자 수가 292명으로, 참전 장병 대비 전사자 비율(약 8.5%)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이제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는 25명으로 파악되는데,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한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리 4구의 센강 변엔 6·25 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엔 그동안 프랑스가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글귀와 적혀 있고, 하단 동판엔 북한·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프랑스 대대 소속 292명의 이름이 빠짐없이 새져겨 있습니다.
패트릭 보두앙 프랑스 참전용사협회장은 KBS 취재진과 만나 "프랑스 역사책에서 한국 전쟁은 아주 간단히 언급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며 "프랑스 내에선 한국 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도 불린다며, 우리는 프랑스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계속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자료조사:김세현, 자료 제공: 주프랑스대사관 무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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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락규 기자 rockyo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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