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주 6일제’ 시행…득 될까, 독 될까?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4.07.02 (08:44) 수정 2024.07.0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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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인 그리스의 근로 시간이 더 길어질 전망입니다. 현지시각 1일부터 소매업, 농업, 서비스업 등 일부 업종에 한해 주 6일 근무제가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국과 독일, 스페인 등 일부 유럽 기업들이 주 4일제를 도입하며 근로 시간을 점차 줄여가고 있는 흐름과는 정반대의 결정인 셈입니다.

그리스는 주 6일제 도입 이유로 초과 근무 근로자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들었습니다. 기존 법정 노동 시간이 40시간으로 제한돼 일부 노동자들이 초과 근무를 하고도 수당 등을 받지 못하는 관행이 빈번했는데 이를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인구 감소와 높은 실업률로 인해 노동시장에 숙련된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도입의 배경 중 하나입니다.

■ 주 6일 근무 시 최대 48시간 노동…"주 5일제 없앨 것"

지난해 9월 통과된 새 노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소매업, 농업, 서비스업 등 일부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주 6일을 일할 경우 최대 48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해당 직종의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에게 하루 최대 2시간씩 추가 근무 또는 매일 8시간씩 주 6일간 근무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근로자들은 추가 근무로 통상 임금의 40%의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고, 휴일 근무의 경우 통상 임금의 115%를 추가 수당으로 받게 됩니다.

주 48시간 근무를 채택하기로 한 고용주는 근무가 시작되기 최소 하루 전엔 근로자에게 통보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근로자들은 고용주의 추가 근무 요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있지만, 그동안 그리스는 근로 감독을 사실상 제대로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근로자가 장시간 추가 노동을 강요받더라도 순순히 수용할 수밖에 없을 거란 지적이 나옵니다.

아리스 카자코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 노동법 교수는 새 법안이 "주 5일 근무제를 영원히 없애버릴 것"이라며 주 6일 근무를 표준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6월 재선에 성공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지난해 6월 재선에 성공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

■ 경제 낙제점에서 우등생으로…전환점 만든 총리의 자신감?

그리스는 2008년 금융 위기 여파로 2010년 국가 부도 위기까지 몰려 구제 금융을 받았던 나라입니다. 경제는 4분의 1로 쪼그라들었고, 국민들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은 채 실업자가 됐으며, 한때 유로존 탈퇴 위기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 3,200억 유로에 달하는 구제 금융을 받는 대신 강도 높은 개혁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공무원 수를 대폭 감축하고 세금 인상, 각종 민영화 조치와 복지 혜택 축소 등의 긴축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위기에 내몰렸던 그리스 경제는 2019년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의 집권 이후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기업 관련 규제는 과감하게 줄이고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을 추진하며 시장 친화적인 경제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 지표는 확연히 개선됐습니다. 그리스는 2021년 8.5%, 2022년 5.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EU 평균 경제성장률(2021년 5.4%, 2022년 3.5%)을 웃도는 수치입니다.

2022년 3월엔 부채를 상환하며 구제 금융을 졸업했고, 지난해 10월엔 국제신용평가사 S&P와 피치가 그리스의 국가신용등급을 '투자 적격'으로 상향하기도 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근원물가상승률과 인플레이션 폭, GDP 증가율 등 5가지 지표를 종합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의 경제 성적을 매겼는데, 그리스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국가 부실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그리스의 놀라운 반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높은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은 그리스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특히 20%를 웃도는 청년 실업률에 젊은 층은 생계비 부족을 호소하며 지난 4월엔 총파업과 시위를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성장의 과실이 국민 삶 곳곳에 아직까지는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에 지난해 6월 재선에 성공한 미초타키스 총리는 한 달에 780유로인 최저임금을 임기를 마치는 2027년까지 월 950유로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주 6일제 도입 역시 마초타키스 총리의 친기업·친시장 정책의 하나로 풀이됩니다. 고용주들이 추가 채용 없이도 기존 근로자들에게 추가 근무를 시킬 수 있어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주변 관광객들.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주변 관광객들.

■ 유럽서 근로시간 가장 길어…"산재 사망 늘 수도"

그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근로 시간이 긴 국가입니다.

OECD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그리스의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1,886시간으로 7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5위였던 한국(1,901시간)보다 15시간 적은 근로시간이며, EU 평균 근로시간(1,571시간)과 비교하면 315시간이나 많았습니다.

법이 시행된 뒤 '더 일해도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하게 되면서 그리스의 근로 시간은 더 길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주 6일 근무제로 인해 제조업 등 산업 분야에서 안전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그리스에서는 지난해 179명의 근로자가 산업 재해로 사망했는데, 이는 직전 해인 2022년 산업 재해 사망자 104명에서 1.7배 늘어난 수치입니다. 과도한 근로 시간으로 안전 사고가 더 발생할 거란 게 그리스 노동계의 목소리입니다.

■ 주 4일제 실험 도입하는 유럽 국가들…장단점도 뚜렷

그리스와 달리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속속 주 4일제 실험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지난 2월부터 40여 개 기업이 참여하는 주 4일 근무제 시범 프로젝트를 실시했습니다. 5일 동안 일하던 업무를 4일로 근무 일수를 줄이고 급여는 그대로 유지하는 게 핵심입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도 이 같은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최초로 주 4일 근무제를 입법화한 나라입니다. 2022년 11월부터 법안이 시행되면서 벨기에 근로자는 주 4일과 주 5일 중 하나를 선택해 근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하는 근로 시간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하루 일하는 시간을 1.5~2시간 늘리되 근무 일수는 줄이는 '압축형 주 4일제'인 셈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주 4일제를 도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여가 시간을 늘려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장단점도 뚜렷합니다. 갤럽의 연구에 따르면, 주 4일제로 인해 복지가 향상되고 만성적인 피로감(번 아웃)을 덜 느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공동체에서 분리돼 더 큰 단절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웃 국가들 대부분이 주 4일제 실험에 나서는 가운데 주 6일제를 선택한 그리스, 미초타키스 총리의 또 다른 성공 사례가 될지, 시대착오적 제도로의 역행이 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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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의 ‘주 6일제’ 시행…득 될까, 독 될까?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4-07-02 08:44:33
    • 수정2024-07-02 08: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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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인 그리스의 근로 시간이 더 길어질 전망입니다. 현지시각 1일부터 소매업, 농업, 서비스업 등 일부 업종에 한해 주 6일 근무제가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국과 독일, 스페인 등 일부 유럽 기업들이 주 4일제를 도입하며 근로 시간을 점차 줄여가고 있는 흐름과는 정반대의 결정인 셈입니다.

그리스는 주 6일제 도입 이유로 초과 근무 근로자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들었습니다. 기존 법정 노동 시간이 40시간으로 제한돼 일부 노동자들이 초과 근무를 하고도 수당 등을 받지 못하는 관행이 빈번했는데 이를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인구 감소와 높은 실업률로 인해 노동시장에 숙련된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도입의 배경 중 하나입니다.

■ 주 6일 근무 시 최대 48시간 노동…"주 5일제 없앨 것"

지난해 9월 통과된 새 노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소매업, 농업, 서비스업 등 일부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주 6일을 일할 경우 최대 48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해당 직종의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에게 하루 최대 2시간씩 추가 근무 또는 매일 8시간씩 주 6일간 근무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근로자들은 추가 근무로 통상 임금의 40%의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고, 휴일 근무의 경우 통상 임금의 115%를 추가 수당으로 받게 됩니다.

주 48시간 근무를 채택하기로 한 고용주는 근무가 시작되기 최소 하루 전엔 근로자에게 통보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근로자들은 고용주의 추가 근무 요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있지만, 그동안 그리스는 근로 감독을 사실상 제대로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근로자가 장시간 추가 노동을 강요받더라도 순순히 수용할 수밖에 없을 거란 지적이 나옵니다.

아리스 카자코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 노동법 교수는 새 법안이 "주 5일 근무제를 영원히 없애버릴 것"이라며 주 6일 근무를 표준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6월 재선에 성공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
■ 경제 낙제점에서 우등생으로…전환점 만든 총리의 자신감?

그리스는 2008년 금융 위기 여파로 2010년 국가 부도 위기까지 몰려 구제 금융을 받았던 나라입니다. 경제는 4분의 1로 쪼그라들었고, 국민들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은 채 실업자가 됐으며, 한때 유로존 탈퇴 위기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 3,200억 유로에 달하는 구제 금융을 받는 대신 강도 높은 개혁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공무원 수를 대폭 감축하고 세금 인상, 각종 민영화 조치와 복지 혜택 축소 등의 긴축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위기에 내몰렸던 그리스 경제는 2019년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의 집권 이후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기업 관련 규제는 과감하게 줄이고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을 추진하며 시장 친화적인 경제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 지표는 확연히 개선됐습니다. 그리스는 2021년 8.5%, 2022년 5.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EU 평균 경제성장률(2021년 5.4%, 2022년 3.5%)을 웃도는 수치입니다.

2022년 3월엔 부채를 상환하며 구제 금융을 졸업했고, 지난해 10월엔 국제신용평가사 S&P와 피치가 그리스의 국가신용등급을 '투자 적격'으로 상향하기도 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근원물가상승률과 인플레이션 폭, GDP 증가율 등 5가지 지표를 종합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의 경제 성적을 매겼는데, 그리스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국가 부실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그리스의 놀라운 반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높은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은 그리스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특히 20%를 웃도는 청년 실업률에 젊은 층은 생계비 부족을 호소하며 지난 4월엔 총파업과 시위를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성장의 과실이 국민 삶 곳곳에 아직까지는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에 지난해 6월 재선에 성공한 미초타키스 총리는 한 달에 780유로인 최저임금을 임기를 마치는 2027년까지 월 950유로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주 6일제 도입 역시 마초타키스 총리의 친기업·친시장 정책의 하나로 풀이됩니다. 고용주들이 추가 채용 없이도 기존 근로자들에게 추가 근무를 시킬 수 있어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주변 관광객들.
■ 유럽서 근로시간 가장 길어…"산재 사망 늘 수도"

그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근로 시간이 긴 국가입니다.

OECD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그리스의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1,886시간으로 7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5위였던 한국(1,901시간)보다 15시간 적은 근로시간이며, EU 평균 근로시간(1,571시간)과 비교하면 315시간이나 많았습니다.

법이 시행된 뒤 '더 일해도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하게 되면서 그리스의 근로 시간은 더 길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주 6일 근무제로 인해 제조업 등 산업 분야에서 안전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그리스에서는 지난해 179명의 근로자가 산업 재해로 사망했는데, 이는 직전 해인 2022년 산업 재해 사망자 104명에서 1.7배 늘어난 수치입니다. 과도한 근로 시간으로 안전 사고가 더 발생할 거란 게 그리스 노동계의 목소리입니다.

■ 주 4일제 실험 도입하는 유럽 국가들…장단점도 뚜렷

그리스와 달리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속속 주 4일제 실험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지난 2월부터 40여 개 기업이 참여하는 주 4일 근무제 시범 프로젝트를 실시했습니다. 5일 동안 일하던 업무를 4일로 근무 일수를 줄이고 급여는 그대로 유지하는 게 핵심입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도 이 같은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최초로 주 4일 근무제를 입법화한 나라입니다. 2022년 11월부터 법안이 시행되면서 벨기에 근로자는 주 4일과 주 5일 중 하나를 선택해 근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하는 근로 시간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하루 일하는 시간을 1.5~2시간 늘리되 근무 일수는 줄이는 '압축형 주 4일제'인 셈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주 4일제를 도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여가 시간을 늘려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장단점도 뚜렷합니다. 갤럽의 연구에 따르면, 주 4일제로 인해 복지가 향상되고 만성적인 피로감(번 아웃)을 덜 느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공동체에서 분리돼 더 큰 단절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웃 국가들 대부분이 주 4일제 실험에 나서는 가운데 주 6일제를 선택한 그리스, 미초타키스 총리의 또 다른 성공 사례가 될지, 시대착오적 제도로의 역행이 될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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