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쑤시개 꽂힌 듯’…해안가 전봇대 백여 개, 왜? [주말엔]
입력 2024.07.20 (07:00)
수정 2024.07.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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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섬과 고즈넉한 바다가 어우러진 경남 남해군 이동면의 한 해안도로입니다.
이 해안도로는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걷기 좋은 평평한 길이 어우러져 주민은 물론 관광객 사이에서도 인기입니다.
남해군은 이곳을 '바다 정원'으로 만들겠다며, 일부 구간에 9억 천만 원을 들여 조경수를 심기도 했습니다.
■ 열흘 만에 전봇대 '백여 개'…"이쑤시개 박힌 것 같아"
시민들이 조경수와 전봇대가 심어진 해안 도로를 뛰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해안도로 풍경이 크게 망가지고 있다는 주민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전력이 해안도로를 따라 대규모 전봇대 설치 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해안 도로변을 따라 전봇대 기둥이 곳곳에 세워졌다.
공사가 시작된 건 지난달 중순, 한전은 해안도로를 따라 전봇대를 무더기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불과 열흘 만에 100여 개에 이르는 시멘트 기둥이 남해군 해안가에 꽂혔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전봇대 공사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해안도로가 마치 거대한 이쑤시개가 박힌 것처럼 흉물스럽게 변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정영표 / 남해군 이동면 초양마을 "해안도로 전망을 좋게 하려고 남해군이 돈까지 투자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전봇대를 심으면 정말 황당하죠. 기둥만 꽂아도 저렇게 흉한데, 전선까지 연결되면 얼마나 보기 싫겠어요. 남해 하늘에 거미줄 치는 것도 아니고…." |
■ '주민 몰래' 마구잡이로 꽂은 전봇대…한전 "설명 의무 없어"
해안도로 주변 6개 마을 주민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하고 있다.
한국전력은 이 공사를 주민들 '몰래' 진행했습니다.
전봇대가 해안도로와 주변 마을 6곳을 통과하며 줄지어 세워지는 동안, 주민설명회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왜, 얼마나 많이 설치하는지, 실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전봇대'에 의아함을 느낀 주민들은 결국, 군청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전력이 전력 공급을 위해 선로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공사를 '진행'한 곳도 공사를 '허가'한 곳도 알고 있는데, 정작 이해 당사자인 지역 주민들은 몰랐던 겁니다.
조병래 / 남해 '고압선 신설' 반대대책위원장 "처음에 땅을 막 파길래 나무 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엄청 큰 전봇대를 심는 거예요. 얘네들이 인적 드문 곳만 골라서 몰래 심고 다니니까, 전봇대 공사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죠. 개인 땅에도 전봇대를 세웠는데, 땅 주인도 전혀 몰랐다니까요." |
■ '2만 2천 볼트' 고압 전류…지중화 구간 '고작 14%'
주택 바로 옆에도 전봇대가 고지 없이 그대로 세워졌다.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선로 공사는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공사 경로에 따라 주민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일자 한국전력과 남해군은 뒤늦게 주민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정식 공사 명칭은 '남해군 일반용 고압선 신설 공사'.
올해 말까지 한전 남해변전소가 있는 남해읍부터 미조면까지 22.9㎸라는 고압 선로를 설치하는 내용입니다.
한국전력과 남해군이 공개한 배전선로 현황. 전체 구간은 30km에 이른다.
전체 공사 구간은 30km! 전봇대 430여 개로 전선을 잇는 '가공 구간'이 25.6㎞, 전선을 땅 속에 묻는 '지중화 구간'이 4.3㎞입니다.
미관과 시민 안전을 위해 전선 지중화를 시행하는 최근 분위기와 달리, 지중화 구간은 고작 14% 수준에 불과합니다.
한전과 남해군은 2만 2천 볼트 고압 전선을 땅 위로 25㎞나 깔면서도 주민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겁니다.
한국전력 경남본부 관계자 "법령에서 주민 설명회 개최를 의무로 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자치단체에 시설 계획을 허가받아서 적법 절차를 거쳐서 진행했습니다." |
남해군 관계자 "한전의 선로 공사 허가 조건에 (주민) 민원이 생기면 허가받은 업체 측에서 해결한다는 문구들을 넣어둬서, (주민들에게) 별도 고지하지 않았습니다." |
■ 전기 사용은 '대형 리조트'·공사비 부담은 '한국 전력'…"결국 주민만 희생"
주민들이 화가 나는 것은 전봇대 수백 개를 새로 놓고 전기를 쓰게 되는 주체입니다.
경남 남해군 미조면에 건설되는 한 대형 리조트
현재 공사 구간 끝자락인 남해군 미조면에는 대형 리조트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내년 완공 예정으로 객실 450개와 야외 공연장, 카페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춰 개장 이후 대규모 전력 소비가 불가피합니다.
이 때문에 리조트 측이 한전에 10,000㎾ 전력 공급을 신청했고, 한전은 인근 변전소부터 리조트까지 고압 선로 30km를 설치하려던 겁니다.
지역 주민이 쓰는 것이 아닌, 사실상 특정 업체를 위한 공사라는 비난이 나오는 이윱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체 공사비 64억 5천만 원 가운데 한국전력은 62억 3천만 원을, 리조트는 나머지 2억 2천만 원만 부담하는 것입니다.
한국전력과 남해군이 특정 업체만을 위한 사실상 '전용 선로'를 개설하면서, 미관을 해치는 등 주민들만 희생시킨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조현종 / 남해군 남해읍 섬호마을 "리조트에 전기 넣어준다고 공사비도 내주고, 마을이랑 해안도로는 쑥대밭으로 만들고…. 한전이 완전히 남해 군민들만 무시하는 거죠. 제주도나 거제도 한 번 가보세요. 거기도 리조트 다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해안도로에 전봇대 마구잡이로 꽂아서 전기를 넣는지요." |
■ 남해군 "허가 취소 가능성 검토"…한전 "적법 절차에 따라 공사"
현재 해당 선로 공사는 주민 반발로 잠시 중단된 상태입니다.
주민들은 남해를 망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한국전력과 남해군에 원상 복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전선을 지중화하거나 다른 경로를 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남해군은 "의도치 않게 주민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며, "공사 허가 과정에서 사업자 준수 사항에 '민원 해결'을 명시한 만큼, 한국전력 측에 허가 취소 가능성과 함께 민원을 해결하라고 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전력 경남본부
한국전력 측은 "한국전력은 모든 고객에게 보편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의무가 있다"며, " 리조트 측 요청에 따라 최적의 공급 방안을 정했고, 적법 절차에 따라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이번 선로 공사는 "남해군의 발전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설비 투자"라며, "앞으로 남해군과 협조해 주민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주민들이 요구하는 선로 변경이나 지중화에 대해서는 "기존 국도 주변은 이미 전봇대나 장애물이 많아 어렵고, 추가 비용 문제로 지중화도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지역 사회 소통 없이 공사를 강행한 부분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느냐는 KBS 취재진 질문에, 한국전력은 "위법 행위가 아니어서 사과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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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쑤시개 꽂힌 듯’…해안가 전봇대 백여 개, 왜? [주말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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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7-20 07:00:22
- 수정2024-07-20 07:00:54
크고 작은 섬과 고즈넉한 바다가 어우러진 경남 남해군 이동면의 한 해안도로입니다.
이 해안도로는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걷기 좋은 평평한 길이 어우러져 주민은 물론 관광객 사이에서도 인기입니다.
남해군은 이곳을 '바다 정원'으로 만들겠다며, 일부 구간에 9억 천만 원을 들여 조경수를 심기도 했습니다.
■ 열흘 만에 전봇대 '백여 개'…"이쑤시개 박힌 것 같아"
그런데 최근 이 해안도로 풍경이 크게 망가지고 있다는 주민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전력이 해안도로를 따라 대규모 전봇대 설치 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공사가 시작된 건 지난달 중순, 한전은 해안도로를 따라 전봇대를 무더기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불과 열흘 만에 100여 개에 이르는 시멘트 기둥이 남해군 해안가에 꽂혔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전봇대 공사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해안도로가 마치 거대한 이쑤시개가 박힌 것처럼 흉물스럽게 변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정영표 / 남해군 이동면 초양마을 "해안도로 전망을 좋게 하려고 남해군이 돈까지 투자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전봇대를 심으면 정말 황당하죠. 기둥만 꽂아도 저렇게 흉한데, 전선까지 연결되면 얼마나 보기 싫겠어요. 남해 하늘에 거미줄 치는 것도 아니고…." |
■ '주민 몰래' 마구잡이로 꽂은 전봇대…한전 "설명 의무 없어"
한국전력은 이 공사를 주민들 '몰래' 진행했습니다.
전봇대가 해안도로와 주변 마을 6곳을 통과하며 줄지어 세워지는 동안, 주민설명회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왜, 얼마나 많이 설치하는지, 실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전봇대'에 의아함을 느낀 주민들은 결국, 군청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전력이 전력 공급을 위해 선로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공사를 '진행'한 곳도 공사를 '허가'한 곳도 알고 있는데, 정작 이해 당사자인 지역 주민들은 몰랐던 겁니다.
조병래 / 남해 '고압선 신설' 반대대책위원장 "처음에 땅을 막 파길래 나무 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엄청 큰 전봇대를 심는 거예요. 얘네들이 인적 드문 곳만 골라서 몰래 심고 다니니까, 전봇대 공사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죠. 개인 땅에도 전봇대를 세웠는데, 땅 주인도 전혀 몰랐다니까요." |
■ '2만 2천 볼트' 고압 전류…지중화 구간 '고작 14%'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선로 공사는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공사 경로에 따라 주민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일자 한국전력과 남해군은 뒤늦게 주민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정식 공사 명칭은 '남해군 일반용 고압선 신설 공사'.
올해 말까지 한전 남해변전소가 있는 남해읍부터 미조면까지 22.9㎸라는 고압 선로를 설치하는 내용입니다.
전체 공사 구간은 30km! 전봇대 430여 개로 전선을 잇는 '가공 구간'이 25.6㎞, 전선을 땅 속에 묻는 '지중화 구간'이 4.3㎞입니다.
미관과 시민 안전을 위해 전선 지중화를 시행하는 최근 분위기와 달리, 지중화 구간은 고작 14% 수준에 불과합니다.
한전과 남해군은 2만 2천 볼트 고압 전선을 땅 위로 25㎞나 깔면서도 주민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겁니다.
한국전력 경남본부 관계자 "법령에서 주민 설명회 개최를 의무로 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자치단체에 시설 계획을 허가받아서 적법 절차를 거쳐서 진행했습니다." |
남해군 관계자 "한전의 선로 공사 허가 조건에 (주민) 민원이 생기면 허가받은 업체 측에서 해결한다는 문구들을 넣어둬서, (주민들에게) 별도 고지하지 않았습니다." |
■ 전기 사용은 '대형 리조트'·공사비 부담은 '한국 전력'…"결국 주민만 희생"
주민들이 화가 나는 것은 전봇대 수백 개를 새로 놓고 전기를 쓰게 되는 주체입니다.
현재 공사 구간 끝자락인 남해군 미조면에는 대형 리조트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내년 완공 예정으로 객실 450개와 야외 공연장, 카페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춰 개장 이후 대규모 전력 소비가 불가피합니다.
이 때문에 리조트 측이 한전에 10,000㎾ 전력 공급을 신청했고, 한전은 인근 변전소부터 리조트까지 고압 선로 30km를 설치하려던 겁니다.
지역 주민이 쓰는 것이 아닌, 사실상 특정 업체를 위한 공사라는 비난이 나오는 이윱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체 공사비 64억 5천만 원 가운데 한국전력은 62억 3천만 원을, 리조트는 나머지 2억 2천만 원만 부담하는 것입니다.
한국전력과 남해군이 특정 업체만을 위한 사실상 '전용 선로'를 개설하면서, 미관을 해치는 등 주민들만 희생시킨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조현종 / 남해군 남해읍 섬호마을 "리조트에 전기 넣어준다고 공사비도 내주고, 마을이랑 해안도로는 쑥대밭으로 만들고…. 한전이 완전히 남해 군민들만 무시하는 거죠. 제주도나 거제도 한 번 가보세요. 거기도 리조트 다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해안도로에 전봇대 마구잡이로 꽂아서 전기를 넣는지요." |
■ 남해군 "허가 취소 가능성 검토"…한전 "적법 절차에 따라 공사"
현재 해당 선로 공사는 주민 반발로 잠시 중단된 상태입니다.
주민들은 남해를 망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한국전력과 남해군에 원상 복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전선을 지중화하거나 다른 경로를 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남해군은 "의도치 않게 주민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며, "공사 허가 과정에서 사업자 준수 사항에 '민원 해결'을 명시한 만큼, 한국전력 측에 허가 취소 가능성과 함께 민원을 해결하라고 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전력 측은 "한국전력은 모든 고객에게 보편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의무가 있다"며, " 리조트 측 요청에 따라 최적의 공급 방안을 정했고, 적법 절차에 따라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이번 선로 공사는 "남해군의 발전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설비 투자"라며, "앞으로 남해군과 협조해 주민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주민들이 요구하는 선로 변경이나 지중화에 대해서는 "기존 국도 주변은 이미 전봇대나 장애물이 많아 어렵고, 추가 비용 문제로 지중화도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지역 사회 소통 없이 공사를 강행한 부분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느냐는 KBS 취재진 질문에, 한국전력은 "위법 행위가 아니어서 사과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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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관 기자 parol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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