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5·18] 문학 소녀는 왜 시민군이 되었나…‘양림동 소녀’ 임영희
입력 2024.07.22 (14:40)
수정 2024.07.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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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임영희
-1956년생
-5·18 당시 현대문화연구소 활동, 송백회 간사
-광주YWCA 극회 '광대' 단원
-前 오월항쟁동지회 여성부장
-일촌공동체 이사
-그림책 작가
-광주5·18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
그녀의 집은 무등산 자락에 있다. 전남 화순군 화순읍을 지나 찾아가니 아담한 단독 주택이 나왔다. 좁고 기다란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서는데, 그녀가 나와 있었다. 집 현관문 신발장에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부화했다며, 다른 출입구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5·18 시민군 임영희'. 새 한 마리의 생명에 발걸음조차 조심하는 왜소한 체구의 그녀는 어쩌다 무시무시한 '5·18 시민군'으로 불리는 삶을 살게 됐을까. 그녀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마항쟁 뒤 12·12 사태…서울의 봄 왔을 때 '불길한 예감'
그녀가 인터뷰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오른쪽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고 몸의 중심축이 무너졌다. 촬영기자가 자세를 고쳐주면 어떻겠냐 얘기했더니, "제가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각도가 삐뚤어지면 삐뚤어진 대로 하죠. 이 다리가 계속 아프니까요 요즘." 68살, 그녀는 십여 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다. 54살이었다. 그 뒤로 오른쪽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말도 어눌하다. 그나마 재활 운동을 통해 많이 회복한 상태다. 그 불편함이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몸을 돌보려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지었고, 불편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코로나 때 집 밖을 나가지 못하면서 아들이 권한 일이라고 했다.
그녀의 고향은 전남 진도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뭍으로 유학을 보내 광주로 나왔다. 광주 수피아여중, 수피아여고를 졸업했다('수피아'는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있다. 그녀가 펴낸 책의 제목은 '양림동 소녀-나의 오월이 시작되는 곳'이다). 시를 좋아하는 꿈많은 소녀였단다. 교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무등문학상'에 당선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에서 공장 생활을 하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광주에 간판을 건 '현대문화연구소' 활동을 했다. 이름처럼 '현대 문화'를 연구하는 곳은 아니었고, 유신 시절 운동권 단체가 합법 단체로 활동을 못 하니 만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주로 제적당한 학생들이 활동하는 단체에서 여성부 간사를 맡았다. 그러면서 YWCA 극회 '광대' 단원으로 들어갔는데, 관객들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연습 중에 5·18을 만났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부마항쟁 이후 12·12 사태가 터졌을 때,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죠. 서울의 봄이 왔을 때 우리들 일부에서는 '뭔가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지 않나'. 그런 말씀을 윤한봉 선생님이 하셨거든요. 그 말씀 하실 때가 1980년 5월 5일 야유회에 가서 그 말씀을 하셨어요. … 1980년 5월 18일 오전에 광대 팀들이 현대극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전남고시학원에 공수 부대원들 난입해서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저희들이 본 거죠. 그게 5·18에 참여했던 첫 시위였던 것 같습니다." |
그녀는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왜곡 보도한 언론에 분노했다. 화염병을 만들어 광주MBC에 던졌다. 하지만 그 옆 상가 건물만 조금 타고 말았단다. 그 후 시위대에 섞여 시위하다가 잡히거나 곤봉에 두들겨 맞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했다. 물리적인 시위는 남자들이 앞장섰을 법한데, 남다른 상황이 있었는지 물었다.
"총을 주라고 하니까 '군대도 안 갔다 온 여자들이 왜, 어떻게 총을 드느냐' 반대를 해서 결국은 못 했는데, 그럼 수류탄 던지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라 그러니까 '안 된다'고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하겠다'고…그때는 상당한 용기도 물론 가졌었지만, 그전에 저는 약간의 운동 경력이 있잖아요. 유인물을 돌린다거나 해서 경찰에 서너 번 잡혀 갔다가 온 경험이 있고, 그리고 그때 병원에 실려 가거나 광주시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은 말할 필요가 없죠. 같이 행동해야 하잖아요." |
■5·18 해방 공간은 서로 돕고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공동체'
계엄군이 물러나고 시위는 더 조직화 됐다. 광대팀은 YWCA에서 먹고 자며 도청 앞 분수대 궐기대회를 진행했다. 그녀가 맡은 일은 '모금 조장'이었다. 물론 모금뿐 아니라 대자보도 쓰고, 분수대 올라가서 시 낭독도 하고, 여러 일을 도맡았다. 그녀는 5·18을 현대사 사건 중에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었다고 얘기했다. 계엄군을 몰아내고 잠깐 찾아온 '해방 공간'을 얘기하면서 그녀의 눈이 빛났다.
임영희 씨가 5·18을 소재로 직접 그린 그림
"모든 사람이 서로를 위로해주고 서로 안도의 웃음을 짓고, 서로서로 계엄군을 물리쳤다는 그런 것들이…김밥, 음료수 다 넘쳐나도록 해(도와)주고 시민들이 모든 동네에 자발적으로 나와서 청소하고 그런 광경을 …내 생애에 우리가 꿈꿨던 운동의 이상 꼭짓점, 그런 사회가 현실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
계엄군의 최후통첩과 진압은 그녀의 '유토피아'를 무참히 짓밟았다. 계엄군이 재진입한 새벽 5월 27일 그녀는 광주YWCA에 있었다. 광대 단원들과 여러 청년 몇십 명이 둘러앉았단다.
"물 한 잔씩 마시면서 오늘 저녁에 죽으면 내일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한마디씩 다 돌아가면서 하고 내일은 생과 사가 갈릴 날이니까…시간이 되니까 갑자기 비상이 걸린 거에요. 여자들은 나가라고 그래서 '못 나간다' '나가라'. 박용준이랑 그 친구들이 뒤에서 들더니 막 밀어 올려서 사다리로 올려버려요. 그래서 그 옆이 병원인데 병원 쪽으로 넘어서 골목으로 나왔어요."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엄군의 들것에 실린 시민군의 시체를 봤고, 아는 언니 집에 숨어 지내다가 사흘 뒤 고속버스가 개통 한 날 서울로 도망쳤다. 수녀원을 거쳐 이어진 도피 생활, 그녀를 따라붙은 건 죄책감과 불면증이었다. 도망 다니는 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5·18 알리기에 나섰다고 했다. '투사회보', '시민에게 드리는 글',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요구' 등 5·18 당시 시위에 사용한 유인물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돌렸는데, 대학가에 뿌려졌을 거라고 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나에게 가치 있지 않을까…"
광대 단원들은 교도소에 가거나 도망가거나 취업해 뿔뿔이 흩어졌고, 광주로 돌아와 다시 만든 게 '갈릴리'라는 단체다. 활동 공간을 내줬던 교회 이름에서 따왔다. 그리고 또 '테이프 작업'을 했다. 이번에는 노래가 실렸다. 5·18을 상징할 만한 독립군가, 민중가요, 가스펠 송 스물 몇 곡을 담았다고 했다. 1980년 12월(지금 생각해보면 대범했고 아찔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란 제목의 음반(?)이 만들어졌다. 후일 황석영 작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며 그 노래를 녹음한 가수 오정묵 씨에게 곡을 맡겼다. 아다시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을 위한 노래였다. "황석영 씨 말이 '(김)종률이 너는 목소리가 너무 미성이어서 이게 귀혼곡이니까 안 맞고 호소력이 짙은 오정묵이가 불러라' 그랬어요." 역사의 귀퉁이에 그녀의 사랑이 있다. 오정묵 씨는 그녀의 남편이다. '무등의 꿈'이란 5·18 내용을 각색한 마당공연을 만들어 전남 보성, 구례, 서울 등지에서 무대에 올렸다고 했다.
다시 5·18로 돌아와 여전히 5·18 알리기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대해 물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그녀는 그림책을 내고, 아들과 독립 영화를 찍고, 5·18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을 하며 지낸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같이 해야 한다는 게 그때 우리들의 목표였어요. 그래서 저도 어떤 사회적인 명예나 그런 것보다도 내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나에게 가치가 있지 않을까… 광주의 정신이 많이 알려지고 또 이런 정신이 그 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장애인 운동이랄지 성 소수자 운동이랄지, 이런 여러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것이 오월 정신을 이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소소하지만, 책과 영화를 통해서 또 광주를 알리는 역할이 제1번 목적이고 두 번째는 젊은 청소년을 통해서 미래의 가치를 할 수 있는 활동을 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불편한 손으로 삐뚤빼뚤 그리는 그림이 양림동 문학 소녀에서 5·18 시민군이 된 임영희 씨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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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7-22 14:40:43
- 수정2024-07-22 18:26:56
# 임영희<br />-1956년생<br />-5·18 당시 현대문화연구소 활동, 송백회 간사<br />-광주YWCA 극회 '광대' 단원<br />-前 오월항쟁동지회 여성부장<br />-일촌공동체 이사<br />-그림책 작가<br />-광주5·18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
그녀의 집은 무등산 자락에 있다. 전남 화순군 화순읍을 지나 찾아가니 아담한 단독 주택이 나왔다. 좁고 기다란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서는데, 그녀가 나와 있었다. 집 현관문 신발장에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부화했다며, 다른 출입구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5·18 시민군 임영희'. 새 한 마리의 생명에 발걸음조차 조심하는 왜소한 체구의 그녀는 어쩌다 무시무시한 '5·18 시민군'으로 불리는 삶을 살게 됐을까. 그녀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마항쟁 뒤 12·12 사태…서울의 봄 왔을 때 '불길한 예감'
그녀가 인터뷰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오른쪽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고 몸의 중심축이 무너졌다. 촬영기자가 자세를 고쳐주면 어떻겠냐 얘기했더니, "제가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각도가 삐뚤어지면 삐뚤어진 대로 하죠. 이 다리가 계속 아프니까요 요즘." 68살, 그녀는 십여 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다. 54살이었다. 그 뒤로 오른쪽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말도 어눌하다. 그나마 재활 운동을 통해 많이 회복한 상태다. 그 불편함이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몸을 돌보려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지었고, 불편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코로나 때 집 밖을 나가지 못하면서 아들이 권한 일이라고 했다.
그녀의 고향은 전남 진도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뭍으로 유학을 보내 광주로 나왔다. 광주 수피아여중, 수피아여고를 졸업했다('수피아'는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있다. 그녀가 펴낸 책의 제목은 '양림동 소녀-나의 오월이 시작되는 곳'이다). 시를 좋아하는 꿈많은 소녀였단다. 교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무등문학상'에 당선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에서 공장 생활을 하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광주에 간판을 건 '현대문화연구소' 활동을 했다. 이름처럼 '현대 문화'를 연구하는 곳은 아니었고, 유신 시절 운동권 단체가 합법 단체로 활동을 못 하니 만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주로 제적당한 학생들이 활동하는 단체에서 여성부 간사를 맡았다. 그러면서 YWCA 극회 '광대' 단원으로 들어갔는데, 관객들은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연습 중에 5·18을 만났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부마항쟁 이후 12·12 사태가 터졌을 때,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었죠. 서울의 봄이 왔을 때 우리들 일부에서는 '뭔가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지 않나'. 그런 말씀을 윤한봉 선생님이 하셨거든요. 그 말씀 하실 때가 1980년 5월 5일 야유회에 가서 그 말씀을 하셨어요. … 1980년 5월 18일 오전에 광대 팀들이 현대극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전남고시학원에 공수 부대원들 난입해서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저희들이 본 거죠. 그게 5·18에 참여했던 첫 시위였던 것 같습니다." |
그녀는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왜곡 보도한 언론에 분노했다. 화염병을 만들어 광주MBC에 던졌다. 하지만 그 옆 상가 건물만 조금 타고 말았단다. 그 후 시위대에 섞여 시위하다가 잡히거나 곤봉에 두들겨 맞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했다. 물리적인 시위는 남자들이 앞장섰을 법한데, 남다른 상황이 있었는지 물었다.
"총을 주라고 하니까 '군대도 안 갔다 온 여자들이 왜, 어떻게 총을 드느냐' 반대를 해서 결국은 못 했는데, 그럼 수류탄 던지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라 그러니까 '안 된다'고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하겠다'고…그때는 상당한 용기도 물론 가졌었지만, 그전에 저는 약간의 운동 경력이 있잖아요. 유인물을 돌린다거나 해서 경찰에 서너 번 잡혀 갔다가 온 경험이 있고, 그리고 그때 병원에 실려 가거나 광주시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은 말할 필요가 없죠. 같이 행동해야 하잖아요." |
■5·18 해방 공간은 서로 돕고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공동체'
계엄군이 물러나고 시위는 더 조직화 됐다. 광대팀은 YWCA에서 먹고 자며 도청 앞 분수대 궐기대회를 진행했다. 그녀가 맡은 일은 '모금 조장'이었다. 물론 모금뿐 아니라 대자보도 쓰고, 분수대 올라가서 시 낭독도 하고, 여러 일을 도맡았다. 그녀는 5·18을 현대사 사건 중에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었다고 얘기했다. 계엄군을 몰아내고 잠깐 찾아온 '해방 공간'을 얘기하면서 그녀의 눈이 빛났다.
임영희 씨가 5·18을 소재로 직접 그린 그림
"모든 사람이 서로를 위로해주고 서로 안도의 웃음을 짓고, 서로서로 계엄군을 물리쳤다는 그런 것들이…김밥, 음료수 다 넘쳐나도록 해(도와)주고 시민들이 모든 동네에 자발적으로 나와서 청소하고 그런 광경을 …내 생애에 우리가 꿈꿨던 운동의 이상 꼭짓점, 그런 사회가 현실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
계엄군의 최후통첩과 진압은 그녀의 '유토피아'를 무참히 짓밟았다. 계엄군이 재진입한 새벽 5월 27일 그녀는 광주YWCA에 있었다. 광대 단원들과 여러 청년 몇십 명이 둘러앉았단다.
"물 한 잔씩 마시면서 오늘 저녁에 죽으면 내일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한마디씩 다 돌아가면서 하고 내일은 생과 사가 갈릴 날이니까…시간이 되니까 갑자기 비상이 걸린 거에요. 여자들은 나가라고 그래서 '못 나간다' '나가라'. 박용준이랑 그 친구들이 뒤에서 들더니 막 밀어 올려서 사다리로 올려버려요. 그래서 그 옆이 병원인데 병원 쪽으로 넘어서 골목으로 나왔어요."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엄군의 들것에 실린 시민군의 시체를 봤고, 아는 언니 집에 숨어 지내다가 사흘 뒤 고속버스가 개통 한 날 서울로 도망쳤다. 수녀원을 거쳐 이어진 도피 생활, 그녀를 따라붙은 건 죄책감과 불면증이었다. 도망 다니는 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5·18 알리기에 나섰다고 했다. '투사회보', '시민에게 드리는 글',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요구' 등 5·18 당시 시위에 사용한 유인물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 돌렸는데, 대학가에 뿌려졌을 거라고 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나에게 가치 있지 않을까…"
광대 단원들은 교도소에 가거나 도망가거나 취업해 뿔뿔이 흩어졌고, 광주로 돌아와 다시 만든 게 '갈릴리'라는 단체다. 활동 공간을 내줬던 교회 이름에서 따왔다. 그리고 또 '테이프 작업'을 했다. 이번에는 노래가 실렸다. 5·18을 상징할 만한 독립군가, 민중가요, 가스펠 송 스물 몇 곡을 담았다고 했다. 1980년 12월(지금 생각해보면 대범했고 아찔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란 제목의 음반(?)이 만들어졌다. 후일 황석영 작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며 그 노래를 녹음한 가수 오정묵 씨에게 곡을 맡겼다. 아다시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을 위한 노래였다. "황석영 씨 말이 '(김)종률이 너는 목소리가 너무 미성이어서 이게 귀혼곡이니까 안 맞고 호소력이 짙은 오정묵이가 불러라' 그랬어요." 역사의 귀퉁이에 그녀의 사랑이 있다. 오정묵 씨는 그녀의 남편이다. '무등의 꿈'이란 5·18 내용을 각색한 마당공연을 만들어 전남 보성, 구례, 서울 등지에서 무대에 올렸다고 했다.
다시 5·18로 돌아와 여전히 5·18 알리기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대해 물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그녀는 그림책을 내고, 아들과 독립 영화를 찍고, 5·18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을 하며 지낸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같이 해야 한다는 게 그때 우리들의 목표였어요. 그래서 저도 어떤 사회적인 명예나 그런 것보다도 내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나에게 가치가 있지 않을까… 광주의 정신이 많이 알려지고 또 이런 정신이 그 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장애인 운동이랄지 성 소수자 운동이랄지, 이런 여러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것이 오월 정신을 이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소소하지만, 책과 영화를 통해서 또 광주를 알리는 역할이 제1번 목적이고 두 번째는 젊은 청소년을 통해서 미래의 가치를 할 수 있는 활동을 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불편한 손으로 삐뚤빼뚤 그리는 그림이 양림동 문학 소녀에서 5·18 시민군이 된 임영희 씨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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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호 기자 menbal@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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