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자 무죄·동승자 유죄…법 농락하는 편법 기승

입력 2024.07.23 (16:58) 수정 2024.07.2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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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주단속 피해 도망간 운전자 '무죄'

2022년 11월 16일 밤,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의 한 도로.
직장 동료를 태우고 차를 몰던 50살 김 모 씨는 도로 앞에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관들을 발견했습니다.

김 씨는 곧바로 차량에서 내려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48살 채 모 씨는 경찰관에게 "내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망간 김 씨를 대신해 음주측정에 응했습니다.
이른바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겁니다.

최근, 청주지방법원은 채 씨에게 범인도피 혐의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음주단속을 피해 도망간 김 씨는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됐지만,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 "음주운전 의심돼도, 명확한 입증 없으면 처벌 못 해"

형사 재판에서 법원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중 하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범죄 사실이 증명됐는지' 여부입니다.
객관적인 증거 없이 심증이나 추론 등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유죄를 인정했을 때,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주운전 관련 사건에서 자주 듣는 '위드마크 공식'은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이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이런 객관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계산 방법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술을 몇 병 마셨으니 혈중알코올농도는 몇 %였을 것이다"는 식의 간단한 공식은 아닙니다.
피의자가 마신 술의 종류와 양, 음주 시작과 종료 시각, 체중, 성별, 체내 흡수율과 알코올 분해 정도를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전제 사실 가운데 하나라도 오류나 불확실한 점이 있으면 객관적 증거로 삼기 어렵습니다.

위에 언급한 사건의 경우, 김 씨는 음주단속을 피해 도망갔기 때문에 곧바로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동승자가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두 달 뒤에야 김 씨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당연하게도 위드마크 공식을 위한 기본 전제 사실부터 명확한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검찰은 식당 CCTV 분석 등을 통해 김 씨가 술을 마신 사실을 확인하고 위드마크 공식으로 0.048%라는 혈중 알코올농도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 당시 피고인의 체중이나 음주 속도, 함께 먹던 음식의 양 등 알코올 분해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지난 20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에서 발생한 음주 운전 의심 사고.지난 20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에서 발생한 음주 운전 의심 사고.

■ '술타기, 운전자 바꿔치기, 측정 거부'… 꼼수 활개

사법 체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근 음주측정 시간 지연, 운전자 바꿔치기, 이른바 '술타기'로 불리는 추가 음주 등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기 위한 각종 편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새벽에도 충북 청주에서 갓길에 주차된 차량을 들이받고 상가로 돌진하는 음주 의심 사고를 낸 40대 운전자는 경찰의 음주 측정 요구를 세 번이나 거부했습니다.
음주측정 거부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고지를 받고서야, 채혈에 응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조사가 이뤄진 것은 약과입니다.
지난해 6월 충북 영동군에서는 음주 의심 사고를 낸 57살 정 모 씨가 편의점으로 달려가 '추가 음주'를 하는 수법으로 수사에 혼선을 줬습니다.

정 씨의 의도대로, 1심에서는 "추가 음주량을 빼면 사고 당시 혈중 알코올농도가 형사처벌 기준에 못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항소심에 이르러서야 종이컵에 소주가 남아있던 사진 등 보강 증거를 토대로 정 씨의 추가 음주량을 다시 계산해, 유죄로 뒤집혔습니다.

지난 4월에는 충북 진천군에서 또 한 번의 '운전자 바꿔치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술에 취한 남녀가 함께 탔던 차가 상가로 돌진했는데, 남성이 운전했다고 주장한 최초 진술과 달리 실제로는 여성이 운전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겁니다.

결국, 이 여성에 대해서는 사고 직후 음주 측정이 이뤄지지 못했고, 뒤늦게 식당 CCTV 등을 통해 혈중 알코올농도를 추산해 음주운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이 여성의 '음주운전' 혐의가 명확하게 입증될런지, 공방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지난 4월 29일, 충북 진천군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상가로 돌진하는 모습.지난 4월 29일, 충북 진천군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상가로 돌진하는 모습.

■ 여론 들끓는데… 대책 마련은 지지부진

이런 악질 음주운전 범죄에 국회와 검찰도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대검찰청은 지난 5월, 법무부에 '음주 교통사고 후 의도적 추가 음주'를 처벌할 수 있는 형사처벌 규정을 신설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22대 국회에서는 민형배·신영대·이해식 의원이 음주운전 적발을 피하기 위한 '추가 음주'를 처벌하도록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단 한 차례도 개정안에 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론은 들끓고 있습니다.
'도로 위 흉기'라고도 불리는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 자체도 국민의 법 감정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를 피하려는 편법이 활개를 치는데도 행정·입법·사법부가 모두 손을 놓고 있다는 겁니다.

서원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김영식 교수는 "유사 범행을 막기 위해서는 '추가 음주' 행위 등이 일반 음주운전보다 훨씬 더 형사 사법 질서를 어지럽히는 나쁜 행위라는 것을 처벌로 보여줘야 한다"면서 "이른 시일 안에 이를 가중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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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주단속 피해 도망간 운전자 '무죄'

2022년 11월 16일 밤,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의 한 도로.
직장 동료를 태우고 차를 몰던 50살 김 모 씨는 도로 앞에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관들을 발견했습니다.

김 씨는 곧바로 차량에서 내려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48살 채 모 씨는 경찰관에게 "내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망간 김 씨를 대신해 음주측정에 응했습니다.
이른바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겁니다.

최근, 청주지방법원은 채 씨에게 범인도피 혐의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음주단속을 피해 도망간 김 씨는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됐지만,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 "음주운전 의심돼도, 명확한 입증 없으면 처벌 못 해"

형사 재판에서 법원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중 하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범죄 사실이 증명됐는지' 여부입니다.
객관적인 증거 없이 심증이나 추론 등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유죄를 인정했을 때,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주운전 관련 사건에서 자주 듣는 '위드마크 공식'은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이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이런 객관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계산 방법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술을 몇 병 마셨으니 혈중알코올농도는 몇 %였을 것이다"는 식의 간단한 공식은 아닙니다.
피의자가 마신 술의 종류와 양, 음주 시작과 종료 시각, 체중, 성별, 체내 흡수율과 알코올 분해 정도를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전제 사실 가운데 하나라도 오류나 불확실한 점이 있으면 객관적 증거로 삼기 어렵습니다.

위에 언급한 사건의 경우, 김 씨는 음주단속을 피해 도망갔기 때문에 곧바로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동승자가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두 달 뒤에야 김 씨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당연하게도 위드마크 공식을 위한 기본 전제 사실부터 명확한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검찰은 식당 CCTV 분석 등을 통해 김 씨가 술을 마신 사실을 확인하고 위드마크 공식으로 0.048%라는 혈중 알코올농도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 당시 피고인의 체중이나 음주 속도, 함께 먹던 음식의 양 등 알코올 분해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요소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지난 20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에서 발생한 음주 운전 의심 사고.
■ '술타기, 운전자 바꿔치기, 측정 거부'… 꼼수 활개

사법 체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근 음주측정 시간 지연, 운전자 바꿔치기, 이른바 '술타기'로 불리는 추가 음주 등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기 위한 각종 편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새벽에도 충북 청주에서 갓길에 주차된 차량을 들이받고 상가로 돌진하는 음주 의심 사고를 낸 40대 운전자는 경찰의 음주 측정 요구를 세 번이나 거부했습니다.
음주측정 거부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고지를 받고서야, 채혈에 응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조사가 이뤄진 것은 약과입니다.
지난해 6월 충북 영동군에서는 음주 의심 사고를 낸 57살 정 모 씨가 편의점으로 달려가 '추가 음주'를 하는 수법으로 수사에 혼선을 줬습니다.

정 씨의 의도대로, 1심에서는 "추가 음주량을 빼면 사고 당시 혈중 알코올농도가 형사처벌 기준에 못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항소심에 이르러서야 종이컵에 소주가 남아있던 사진 등 보강 증거를 토대로 정 씨의 추가 음주량을 다시 계산해, 유죄로 뒤집혔습니다.

지난 4월에는 충북 진천군에서 또 한 번의 '운전자 바꿔치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술에 취한 남녀가 함께 탔던 차가 상가로 돌진했는데, 남성이 운전했다고 주장한 최초 진술과 달리 실제로는 여성이 운전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겁니다.

결국, 이 여성에 대해서는 사고 직후 음주 측정이 이뤄지지 못했고, 뒤늦게 식당 CCTV 등을 통해 혈중 알코올농도를 추산해 음주운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이 여성의 '음주운전' 혐의가 명확하게 입증될런지, 공방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지난 4월 29일, 충북 진천군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상가로 돌진하는 모습.
■ 여론 들끓는데… 대책 마련은 지지부진

이런 악질 음주운전 범죄에 국회와 검찰도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대검찰청은 지난 5월, 법무부에 '음주 교통사고 후 의도적 추가 음주'를 처벌할 수 있는 형사처벌 규정을 신설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22대 국회에서는 민형배·신영대·이해식 의원이 음주운전 적발을 피하기 위한 '추가 음주'를 처벌하도록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단 한 차례도 개정안에 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론은 들끓고 있습니다.
'도로 위 흉기'라고도 불리는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 자체도 국민의 법 감정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를 피하려는 편법이 활개를 치는데도 행정·입법·사법부가 모두 손을 놓고 있다는 겁니다.

서원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김영식 교수는 "유사 범행을 막기 위해서는 '추가 음주' 행위 등이 일반 음주운전보다 훨씬 더 형사 사법 질서를 어지럽히는 나쁜 행위라는 것을 처벌로 보여줘야 한다"면서 "이른 시일 안에 이를 가중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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