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아리랑 고개’를 아시나요? [창+]
입력 2024.08.14 (07:01)
수정 2024.08.1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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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해변에서 만난 사슴. 아카지마는 산호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섬이다.](/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208674.jpg)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산홋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 아카지마가 나타납니다.
주변 해역이 게라마 제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다이버의 천국이자 여름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 빛깔을 자랑하는 아카지마(島).](/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403431.jpg)
■ 아카지마에 솟은 '아리랑 고개'
![현지 주민이 직접 세운 ‘아리랑 고개’ 간판](/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272248.jpg)
아카지마는 태평양 전쟁 말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일대 지역 가운데서도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섬입니다. 그만큼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도 많습니다.
일본군이 미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는 건, 그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 군속'이 있었다는 말이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카지마 섬 중앙에 위치한 고개에 왜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조선 징용자들을 연구하며 섬 주민들을 만나온 오키모토 후키코 씨와의 인터뷰를 옮겨보겠습니다.
(아카지마 마을 주민들에게) 아리랑 고개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 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그곳에서 위안부들이 달래를 캤는데, 캐면서 아리랑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훈련 때) 무거운 걸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특공대 중 한 명이 조선인이었어요. 아카지마에 있던 자살특공정의 특공대 중 한 명이. 그래서 그 사람이 부른 게 시작이 아닌가 하는... 일본 병사들도 그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군도 아리랑을 불렀다고요? - 기자]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
■ 역사속 '아리랑' 기록으로 남은 2010년 KBS의 인터뷰
![드론으로 촬영한 아카지마의 아리랑 고개. 가운데 헬기 착륙장으로 보이는 곳이 고개의 정상으로 위안부 등이 저기에 올라 고개 넘어 북쪽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322850.jpg)
2010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아카지마를 찾은 KBS취재진은 가네시마 기쿠에 씨를 만납니다. 위안소에 밥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당시 모습을 기억해 냈고, '아리랑'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 가네시마 기쿠에/아카지마 주민(2010년 촬영)> 동쪽 집에 시노부, 아케미, 미하루 3명하고 스즈키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서쪽에는 마치코 씨, 아케미 언니, 고유키 언니, 고하나 언니 4명이 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죠. 늘 자매처럼 지냈거든요. 장난도 치고요. 이곳 마을 촌장이 부탁을 했어요. (위안소에) 밥만 좀 지어주지 않겠냐고요. ‘그럼 해보겠습니다’하고 군 경리부서로 가서 식량을 받아왔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로 말하던 것이 한국말로 바뀌고 다들 눈물을 흘리거나... [역시 생활이 고된 부분이...] 그렇죠. 모두 힘들었죠. 모르는 곳에 와서 그런 일까지 강제로 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불쌍해요. 화낼 때는 ‘못살겠다’고 말했죠 아마. [아리랑도 같이 부르곤 하셨어요?] 네. 아리랑도 종종 부르곤 했죠. |
카메라 앞에서 일본어 가사가 붙은 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렀던 가네시마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카지마에도 아리랑을 부를 수 있었던 주민들이 꽤 있었지만 이제 모두 유명을 달리하신 상태입니다.
오키나와 아리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에서 영상으로 남은 '기억의 아리랑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아리랑 가락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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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해변에서 만난 사슴. 아카지마는 산호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섬이다.](/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208674.jpg)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산홋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 아카지마가 나타납니다.
주변 해역이 게라마 제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다이버의 천국이자 여름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 빛깔을 자랑하는 아카지마(島).](/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40343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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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는 태평양 전쟁 말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일대 지역 가운데서도 미군이 가장 먼저 상륙한 섬입니다. 그만큼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도 많습니다.
일본군이 미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는 건, 그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 군속'이 있었다는 말이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카지마 섬 중앙에 위치한 고개에 왜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조선 징용자들을 연구하며 섬 주민들을 만나온 오키모토 후키코 씨와의 인터뷰를 옮겨보겠습니다.
(아카지마 마을 주민들에게) 아리랑 고개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 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그곳에서 위안부들이 달래를 캤는데, 캐면서 아리랑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훈련 때) 무거운 걸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거예요. 그 특공대 중 한 명이 조선인이었어요. 아카지마에 있던 자살특공정의 특공대 중 한 명이. 그래서 그 사람이 부른 게 시작이 아닌가 하는... 일본 병사들도 그 언덕을 올라갈 때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위안부만이 아니라, 일본군도 아리랑을 불렀다고요? - 기자]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
■ 역사속 '아리랑' 기록으로 남은 2010년 KBS의 인터뷰
![드론으로 촬영한 아카지마의 아리랑 고개. 가운데 헬기 착륙장으로 보이는 곳이 고개의 정상으로 위안부 등이 저기에 올라 고개 넘어 북쪽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data/fckeditor/new/image/2024/08/13/290411723536322850.jpg)
2010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아카지마를 찾은 KBS취재진은 가네시마 기쿠에 씨를 만납니다. 위안소에 밥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당시 모습을 기억해 냈고, '아리랑'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 가네시마 기쿠에/아카지마 주민(2010년 촬영)> 동쪽 집에 시노부, 아케미, 미하루 3명하고 스즈키라는 남자가 있었어요. 서쪽에는 마치코 씨, 아케미 언니, 고유키 언니, 고하나 언니 4명이 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죠. 늘 자매처럼 지냈거든요. 장난도 치고요. 이곳 마을 촌장이 부탁을 했어요. (위안소에) 밥만 좀 지어주지 않겠냐고요. ‘그럼 해보겠습니다’하고 군 경리부서로 가서 식량을 받아왔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로 말하던 것이 한국말로 바뀌고 다들 눈물을 흘리거나... [역시 생활이 고된 부분이...] 그렇죠. 모두 힘들었죠. 모르는 곳에 와서 그런 일까지 강제로 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불쌍해요. 화낼 때는 ‘못살겠다’고 말했죠 아마. [아리랑도 같이 부르곤 하셨어요?] 네. 아리랑도 종종 부르곤 했죠. |
카메라 앞에서 일본어 가사가 붙은 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렀던 가네시마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카지마에도 아리랑을 부를 수 있었던 주민들이 꽤 있었지만 이제 모두 유명을 달리하신 상태입니다.
오키나와 아리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사기획 창 '오키나와 아리랑'에서 영상으로 남은 '기억의 아리랑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아리랑 가락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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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홈페이지 https://news.kbs.co.kr/vod/program.do?bcd=0039&ref=pMe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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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기자 neos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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