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사, 갖은 압박”…플랫폼 ‘을’ 보호는?

입력 2024.08.23 (06:0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계약서 쓸 때 당사자들을 보통 '갑과 을'로 쓰죠. 요즘엔 이걸 'A와 B'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여러 기업들이 해온 이른바 '갑질'로 인해 갑과 을의 어감이 변질 되어서일 겁니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입점 브랜드와 체결한 계약서인 파트너십 협약서에도 '갑과 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입점 브랜드는 A, 무신사는 B로 쓰여 있습니다.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 "타 플랫폼과 거래하려면 합의해야"

KBS가 입수한 한 신생 브랜드와 무신사 간 협약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제3조. 입점 브랜드가 무신사 외에 다른 온라인 판매처에서 상품을 팔려면, 사전에 합의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상품 유통 범위도 좁혀 놨습니다. 입점 브랜드가 상품 일체를 팔 수 있는 경로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와 무신사 둘 중 하나입니다.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업을 넓히는 것 자체가 계약 위반일 수 있는 겁니다.

이 외에도 입점 브랜드는 매출이 무신사에 집중될 수 있도록 가격과 재고 관리도 다른 판매처들보다 불리하지 않은 판매 조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물론 무신사의 의무도 계약서 한 페이지에 걸쳐 길게 적혀 있습니다.

무신사는 입점 브랜드에 상품 판매가의 일정 부분을 '파트너 성장지원금'으로 지원하고, 홍보와 판매촉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 "무신사 말이면 밥 먹다 말고도 튀어 나가야"

무신사는 10대부터 30대, 이른바 MZ세대의 이용률이 독보적으로 높은 1위 패션플랫폼입니다.

영향력이 큰 만큼 일부 입점 브랜드에는 부담도 컸습니다.

무신사 입점 브랜드 대표
"많은 브랜드의 거의 모든 매출이 무신사에서 나올 만큼 절대적이에요. 무신사의 말을 따를 건지 안 따를 건지는 사업을 접을 건지 안 접을 건지나 마찬가지예요. (무신사가 부르면) 사업 안 접을 거면 거의 밥 먹다 말고도 튀어 나가야죠."

무신사가 성장 지원금 일부를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이 아니라 '광고' 등으로 제공하더라도, 일부 입점 브랜드들은 계약서상 의무와 제한을 하나하나 지켜야 했다고 호소했습니다.

한 입점 브랜드는 5년 넘게 무신사와 거래했지만, 다른 플랫폼과 거래를 트면 갖은 압박에 시달렸다고 말합니다.

무신사 입점 브랜드 대표
"한두 달 전에 프로모션을 하자고 얘기가 다 끝나 있었는데 2주, 3주 뒤에 '갑자기 취소됐다, 윗선에서 이 브랜드랑 안 했으면 좋겠다'고. (타 플랫폼과 거래하면) 노출에서도 빼고, 프로모션에서도 뺄 건데 그러면 매출이 확 줄지 않을까라는, 협박으로 들렸던 것 같아요."

전통적인 하도급과 유통 등 산업 분야에서 벌어졌던 '갑질'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무신사는 이에 대해 판매처를 일부 제한하는 것은 브랜드의 자율적 선택에 달려 있으며, 회사의 지원에 대한 무임승차 예방을 위해 업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별도 '갑질 방지법' 없는 이커머스 분야

플랫폼에서 '갑질'이 있더라도 직접적으로 규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커머스 분야에 특화된 이른바 '갑을 관계법'이 없어섭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갑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분야에 걸쳐 '갑질 방지법'들을 만들어왔습니다. 하도급·가맹·대규모유통업·대리점 4개 분야에 이런 법들이 제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건설사나 프랜차이즈 본사, 대형마트 등이 '을'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맺으면 그 자체로 위법입니다.

하지만 플랫폼과 이커머스 분야에는 이런 형식의 명확한 법이 없습니다.

공정위가 2021년 1월 이커머스판 갑질 방지법인 온라인플랫폼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당시 이커머스 업계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자율 규제로도 충분히 '갑질'을 막을 수 있는데 규제 법안을 만들면 혁신이 저해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후 국정 과제에 따라 공정위는 오픈마켓과 플랫폼의 갑을관계를 자율 규제에 맡기고 있습니다.

'갑질 방지법'이 없더라도 플랫폼들의 갑질 문제에 공정거래법 등 다른 법을 적용할 수 있지만, 막상 적용하려면 까다롭습니다.

■ 플랫폼은 고속성장…'을' 보호 속도는?

플랫폼을 포함한 이커머스 시장은 고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장 규모가 2019년 137조 원에서 2021년 190조 원, 2023년 229조 원으로 그야말로 껑충껑충 뛰고 있습니다.

무신사도 지난해 1조 원에 달하는 매출을 거뒀습니다. 2018년 매출 1천억 원대를 기록했는데, 5년 만에 10배 가까이 성장한 겁니다.

하지만 일부 입점 브랜드는 앞에서 말했던 이유로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무신사의 한 입점 브랜드 대표는 "단독(입점)을 하기 위한, 소위 말해서 개목걸이 같은 역할 같다"면서 "무신사라는 가두리에 가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산업 트렌드는 오프라인 유통업과 가맹업에서 오픈마켓, 이커머스로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을'들을 보호하기 위한 속도는 여전히 더딥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무신사, 갖은 압박”…플랫폼 ‘을’ 보호는?
    • 입력 2024-08-23 06:01:36
    심층K

계약서 쓸 때 당사자들을 보통 '갑과 을'로 쓰죠. 요즘엔 이걸 'A와 B'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여러 기업들이 해온 이른바 '갑질'로 인해 갑과 을의 어감이 변질 되어서일 겁니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입점 브랜드와 체결한 계약서인 파트너십 협약서에도 '갑과 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입점 브랜드는 A, 무신사는 B로 쓰여 있습니다.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 "타 플랫폼과 거래하려면 합의해야"

KBS가 입수한 한 신생 브랜드와 무신사 간 협약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제3조. 입점 브랜드가 무신사 외에 다른 온라인 판매처에서 상품을 팔려면, 사전에 합의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상품 유통 범위도 좁혀 놨습니다. 입점 브랜드가 상품 일체를 팔 수 있는 경로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와 무신사 둘 중 하나입니다.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업을 넓히는 것 자체가 계약 위반일 수 있는 겁니다.

이 외에도 입점 브랜드는 매출이 무신사에 집중될 수 있도록 가격과 재고 관리도 다른 판매처들보다 불리하지 않은 판매 조건을 제공해야 합니다.

물론 무신사의 의무도 계약서 한 페이지에 걸쳐 길게 적혀 있습니다.

무신사는 입점 브랜드에 상품 판매가의 일정 부분을 '파트너 성장지원금'으로 지원하고, 홍보와 판매촉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 "무신사 말이면 밥 먹다 말고도 튀어 나가야"

무신사는 10대부터 30대, 이른바 MZ세대의 이용률이 독보적으로 높은 1위 패션플랫폼입니다.

영향력이 큰 만큼 일부 입점 브랜드에는 부담도 컸습니다.

무신사 입점 브랜드 대표
"많은 브랜드의 거의 모든 매출이 무신사에서 나올 만큼 절대적이에요. 무신사의 말을 따를 건지 안 따를 건지는 사업을 접을 건지 안 접을 건지나 마찬가지예요. (무신사가 부르면) 사업 안 접을 거면 거의 밥 먹다 말고도 튀어 나가야죠."

무신사가 성장 지원금 일부를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이 아니라 '광고' 등으로 제공하더라도, 일부 입점 브랜드들은 계약서상 의무와 제한을 하나하나 지켜야 했다고 호소했습니다.

한 입점 브랜드는 5년 넘게 무신사와 거래했지만, 다른 플랫폼과 거래를 트면 갖은 압박에 시달렸다고 말합니다.

무신사 입점 브랜드 대표
"한두 달 전에 프로모션을 하자고 얘기가 다 끝나 있었는데 2주, 3주 뒤에 '갑자기 취소됐다, 윗선에서 이 브랜드랑 안 했으면 좋겠다'고. (타 플랫폼과 거래하면) 노출에서도 빼고, 프로모션에서도 뺄 건데 그러면 매출이 확 줄지 않을까라는, 협박으로 들렸던 것 같아요."

전통적인 하도급과 유통 등 산업 분야에서 벌어졌던 '갑질'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무신사는 이에 대해 판매처를 일부 제한하는 것은 브랜드의 자율적 선택에 달려 있으며, 회사의 지원에 대한 무임승차 예방을 위해 업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별도 '갑질 방지법' 없는 이커머스 분야

플랫폼에서 '갑질'이 있더라도 직접적으로 규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커머스 분야에 특화된 이른바 '갑을 관계법'이 없어섭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갑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분야에 걸쳐 '갑질 방지법'들을 만들어왔습니다. 하도급·가맹·대규모유통업·대리점 4개 분야에 이런 법들이 제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건설사나 프랜차이즈 본사, 대형마트 등이 '을'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맺으면 그 자체로 위법입니다.

하지만 플랫폼과 이커머스 분야에는 이런 형식의 명확한 법이 없습니다.

공정위가 2021년 1월 이커머스판 갑질 방지법인 온라인플랫폼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당시 이커머스 업계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자율 규제로도 충분히 '갑질'을 막을 수 있는데 규제 법안을 만들면 혁신이 저해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후 국정 과제에 따라 공정위는 오픈마켓과 플랫폼의 갑을관계를 자율 규제에 맡기고 있습니다.

'갑질 방지법'이 없더라도 플랫폼들의 갑질 문제에 공정거래법 등 다른 법을 적용할 수 있지만, 막상 적용하려면 까다롭습니다.

■ 플랫폼은 고속성장…'을' 보호 속도는?

플랫폼을 포함한 이커머스 시장은 고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장 규모가 2019년 137조 원에서 2021년 190조 원, 2023년 229조 원으로 그야말로 껑충껑충 뛰고 있습니다.

무신사도 지난해 1조 원에 달하는 매출을 거뒀습니다. 2018년 매출 1천억 원대를 기록했는데, 5년 만에 10배 가까이 성장한 겁니다.

하지만 일부 입점 브랜드는 앞에서 말했던 이유로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무신사의 한 입점 브랜드 대표는 "단독(입점)을 하기 위한, 소위 말해서 개목걸이 같은 역할 같다"면서 "무신사라는 가두리에 가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산업 트렌드는 오프라인 유통업과 가맹업에서 오픈마켓, 이커머스로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을'들을 보호하기 위한 속도는 여전히 더딥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