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 전공의’ 겨냥한 ‘부역자’ 낙인…상담 지원은 유명무실

입력 2024.09.12 (16:19) 수정 2024.09.1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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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의사'라는 조롱 섞인 제목으로 그동안 복귀 전공의 등의 신상정보를 공개해 온 인터넷 사이트에, 최근 공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수련병원의 하반기 모집에 응시해 이번 달부터 수련을 시작한 전공의들의 실명 등을 게시하면서, 공개된 신상 정보를 내리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압박하는 겁니다.

비록 온라인 게시판에서지만 '부역자' 꼬리표가 따라붙는 현실에서 전공의들은 의료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전공의 '피해 신고' 78건… 꾸준히 등장하는 '블랙리스트'

보건복지부가 오늘(1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전공의 보호신고센터에 지난 6개월간 접수된 '피해 신고'는 78건입니다.

복귀 시, 이후 경력에 불이익은 없는지 등을 문의하는 보호상담 신청 건수는 11건이었습니다.


주로 복귀 전공의와 근무 중인 전임의·교수의 신상을 이른바 '블랙리스트'로 공개하거나 협박성·비방성 게시글을 올린 사례로, 복지부는 이 중 31건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부는 작성자가 특정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6개월간 '블랙리스트' 공개는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비방 수위도 높아졌습니다. 방식은 더 교묘해졌습니다.

전공의 집단 사직 직후인 3월에는 의료인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메디스태프'에서 병원에 남은 전공의들 신상이 '참의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공개됐고, 6월에는 의대생과 전임의도 포함한 '복귀 의사 리스트'가 공유됐습니다.

이어 7월에는 SNS인 텔레그램 채팅방('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이 개설됐고, 지난달부터는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아카이브 형식의 사이트('감사한 의사 명단')가 등장했습니다.


'제보'를 바탕으로 의사면허번호와 연락처, SNS 계정 같은 개인정보부터 근무 이력, 가족 신상, 외모 평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평판까지 그대로 박제됐습니다.

■ 6개월째 전공의 전담 상담 '0건'… 피해 구제는 요원

정부가 연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엄단 방침을 강조한 만큼 수사는 빠르게 이뤄지고 있지만, 가해자 처벌과 별개로 '명단 공개'의 피해자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건강보험공단이 서미화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건보공단이 3월 20일부터 운영중인 전공의 전담 피해 상담 창구에 접수된 상담 신청은 6개월째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전공의 이탈로 수련 및 근무하는 전공의가 적어 보도자료 배포를 통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접수된 상담 건이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감사한 의사 명단'에 이름이 오른 복귀 전공의만 수백 명 규모지만 상담 요청이 1건도 없는 건, 폐쇄적인 의료계 분위기도 원인으로 꼽힙니다.

신상 정보가 계속 인터넷을 떠도는 데 부담을 느낀 대상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임용을 포기하거나 다시 병원을 떠난 경우도 있는 걸로 전해졌습니다.

서 의원은 “알려지지 않은 피해 사례가 더 있을 텐데 정작 전공의 인권 보호를 위한 상담 창구는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면서 “고립되고 있는 복귀 전공의들과 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료인들을 위해 정부가 책임 있는 자세로 피해 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 의료계도 '자성' 촉구 잇따라… '내부 갈등' 우려도

의료 현장의 최전선인 응급실 의료진까지 '부역자'로 이름이 오르자, 의사들 사이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신봉식 대한분만병의원협회장은 "개인적인 소신이나 대학병원 교수들과의 관계, 가정 상황에 따라 환자 곁으로 돌아간 의사들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붙이는 것이야말로 의사 자질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일각에선 일부의 블랙리스트 문제만 부각돼 본질이 묻힐까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대한의사협회는 그제 블랙리스트 작성과 유포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내면서 '단일대오'를 강조했습니다.


사직 전공의 출신인 임진수 의사협회 기획이사는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의료계 내부 자정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별개로 의사 악마화에 앞장서고 일선 의료진에게 모멸감을 준 정부가 나서서 엄정 대응을 운운하는 건 대단한 촌극"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개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은식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 (9일, 서울경찰청 출석 당시)

"전공의 집단 사직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 (9일, 서울경찰청 출석 당시)

집단 사직을 부추긴 혐의와 관련해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전공의 대표들은 "사직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앞서 전공의 900명은 사직서 제출 이후 정부의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등은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라며, 정부 행정명령을 근거로 사직 처리를 미룬 병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는데요.

사직과 마찬가지로 의료현장 복귀와 잔류도 개인의 선택인만큼 같은 기준으로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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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의사'라는 조롱 섞인 제목으로 그동안 복귀 전공의 등의 신상정보를 공개해 온 인터넷 사이트에, 최근 공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수련병원의 하반기 모집에 응시해 이번 달부터 수련을 시작한 전공의들의 실명 등을 게시하면서, 공개된 신상 정보를 내리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압박하는 겁니다.

비록 온라인 게시판에서지만 '부역자' 꼬리표가 따라붙는 현실에서 전공의들은 의료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전공의 '피해 신고' 78건… 꾸준히 등장하는 '블랙리스트'

보건복지부가 오늘(1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전공의 보호신고센터에 지난 6개월간 접수된 '피해 신고'는 78건입니다.

복귀 시, 이후 경력에 불이익은 없는지 등을 문의하는 보호상담 신청 건수는 11건이었습니다.


주로 복귀 전공의와 근무 중인 전임의·교수의 신상을 이른바 '블랙리스트'로 공개하거나 협박성·비방성 게시글을 올린 사례로, 복지부는 이 중 31건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부는 작성자가 특정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6개월간 '블랙리스트' 공개는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비방 수위도 높아졌습니다. 방식은 더 교묘해졌습니다.

전공의 집단 사직 직후인 3월에는 의료인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메디스태프'에서 병원에 남은 전공의들 신상이 '참의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공개됐고, 6월에는 의대생과 전임의도 포함한 '복귀 의사 리스트'가 공유됐습니다.

이어 7월에는 SNS인 텔레그램 채팅방('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이 개설됐고, 지난달부터는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아카이브 형식의 사이트('감사한 의사 명단')가 등장했습니다.


'제보'를 바탕으로 의사면허번호와 연락처, SNS 계정 같은 개인정보부터 근무 이력, 가족 신상, 외모 평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평판까지 그대로 박제됐습니다.

■ 6개월째 전공의 전담 상담 '0건'… 피해 구제는 요원

정부가 연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며 엄단 방침을 강조한 만큼 수사는 빠르게 이뤄지고 있지만, 가해자 처벌과 별개로 '명단 공개'의 피해자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란 쉽지 않습니다.

건강보험공단이 서미화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건보공단이 3월 20일부터 운영중인 전공의 전담 피해 상담 창구에 접수된 상담 신청은 6개월째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전공의 이탈로 수련 및 근무하는 전공의가 적어 보도자료 배포를 통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접수된 상담 건이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감사한 의사 명단'에 이름이 오른 복귀 전공의만 수백 명 규모지만 상담 요청이 1건도 없는 건, 폐쇄적인 의료계 분위기도 원인으로 꼽힙니다.

신상 정보가 계속 인터넷을 떠도는 데 부담을 느낀 대상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임용을 포기하거나 다시 병원을 떠난 경우도 있는 걸로 전해졌습니다.

서 의원은 “알려지지 않은 피해 사례가 더 있을 텐데 정작 전공의 인권 보호를 위한 상담 창구는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면서 “고립되고 있는 복귀 전공의들과 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료인들을 위해 정부가 책임 있는 자세로 피해 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 의료계도 '자성' 촉구 잇따라… '내부 갈등' 우려도

의료 현장의 최전선인 응급실 의료진까지 '부역자'로 이름이 오르자, 의사들 사이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신봉식 대한분만병의원협회장은 "개인적인 소신이나 대학병원 교수들과의 관계, 가정 상황에 따라 환자 곁으로 돌아간 의사들에게 배신자 프레임을 붙이는 것이야말로 의사 자질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일각에선 일부의 블랙리스트 문제만 부각돼 본질이 묻힐까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대한의사협회는 그제 블랙리스트 작성과 유포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내면서 '단일대오'를 강조했습니다.


사직 전공의 출신인 임진수 의사협회 기획이사는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의료계 내부 자정이 필요한 부분"이라며 "별개로 의사 악마화에 앞장서고 일선 의료진에게 모멸감을 준 정부가 나서서 엄정 대응을 운운하는 건 대단한 촌극"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개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은식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 (9일, 서울경찰청 출석 당시)

"전공의 집단 사직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 (9일, 서울경찰청 출석 당시)

집단 사직을 부추긴 혐의와 관련해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전공의 대표들은 "사직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앞서 전공의 900명은 사직서 제출 이후 정부의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등은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라며, 정부 행정명령을 근거로 사직 처리를 미룬 병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는데요.

사직과 마찬가지로 의료현장 복귀와 잔류도 개인의 선택인만큼 같은 기준으로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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