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화폭에 담은 그리움…이산가족의 애환

입력 2024.09.28 (08:50) 수정 2024.09.2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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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2018년 8월,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에서 개최됐습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170가족 830여 명이 해후하는 모습은 깊은 울림을 안겼는데요.

하지만, 이날 이후 이산가족 간의 상봉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현재 이산가족의 3분의 2 정도가 이미 80세 이상 고령이 되었고,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습니다.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다는 이산가족의 목소리를 〈통일로 미래로〉에서 들어보았습니다.

[리포트]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이하는 이산가족의 날 기념식.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이산가족들이 행사장을 찾았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향한 애끊는 마음, 북녘을 향한 헌화와 묵념으로 달래보는데요.

지난 8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13만 4천여 명 가운데, 생존자는 3만 7천여 명, 전체의 28% 정도에 불과합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지만 가족의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들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절절한 사연과 함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습니다.

이산가족의 날을 기념해 마련된 전시장.

휴전선을 상징하는 철조망에는 남북 교류의 희망이 담긴 띠가 묶여 있고, 색 바랜 편지와 물품들은 이산가족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반가운 날이라 비로소 입을 열어 몇 마디 하였소. 당신 편지가 나의 굳은 마음 문을 열어준 셈이오."]

6.25 전쟁 직전 아내에게 전달된 편지는 남편의 마지막 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시장에는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쪽 가족에게서 받은 항아리, 반지와 같은 물건들도 함께 전시됐는데요.

가족과 생이별할 만큼 급박했던 전쟁 당시의 분위기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윤이서/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 : "1.4 후퇴 때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듯이 너무 추운 날이다 보니까 저렇게 보자기를 (아이) 머리에 씌워서 데리고 내려왔다고 해요."]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헤어질 당시 부모·형제의 모습은 여전히 기억이 또렷합니다.

[김의두/이산가족 : "그걸 잘게 썰어서 주면서 '누나나 형 말 잘 들으면 또 맛있는 거 준다'했던 그런 추억의 맛이 지금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윤이서/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 : "엄마가 어렸을 때 자기 전에 문어 썰어서 입에 넣어주고 그런 추억이 있는 분인데 뒤에 오는 배 타고 따라서 곧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길로 마지막으로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거예요."]

저마다 짙은 그리움을 품은 채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이산가족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전시장을 찾은 안춘자 할머니도 그중 한 명입니다.

["(할머님은 언제, 몇 살 때 이산가족이 되셨어요?) 7살이요. 7살 때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폭격을 당해서 집이 다 파괴되고…."]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지만, 14살 터울이었던 큰 오빠의 목소리는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안춘자/이산가족 : "춘자야, 춘자야 그러지. '우리 춘자, 오빠하고 놀자' 그렇게 데리고 나가서 놀고 그런 기억이 나요."]

큰오빠, 안길성 씨는 전쟁 중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고 합니다.

[안춘자/이산가족 : "(오빠가) 안 가려고 그러니까 그냥 막 와서 협박을 하고 총 들이대고 안 가면 여기서 죽여 버린다 그러고…."]

이후 큰오빠의 소식은 완전히 끊겨버렸는데요.

전쟁 이후, 혈혈단신 살아온 할머니의 사연에 손녀의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김송미/안춘자 씨 손녀 : "저는 지금 너무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쟁과 분단의 아픔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통에 사진 한 장 챙기지 못한 이산가족들은 망향의 한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내기도 했는데요.

[이동표/이산가족 : "동생 둘 있거든 그런데 걔들 안부를 전할 수도 없고 방법이 없잖아."]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는 남성의 모습.

여기엔 어느 실향민 화가의 모습이 투영됐습니다.

이동표 화백은 전쟁이 멈춘 이후 71년 동안 마음속에 쌓여온 한과 그리움을 미술 작품에 꾹꾹 눌러 담아냈습니다.

혼이 돼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다는, 어느덧 아흔이 넘어선 노 작가의 희망 사항을 들어보시죠.

이동표 화백의 작업실로 향하는 길.

이 화백이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줍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남북의 창'이 밥보다 중요하지. 꼭 보지, 기다렸다 봐."]

이 화백은 6.25 전쟁 참전 유공자이자, 실향민, 그리고 이산가족입니다.

[이동표/이산가족 : "19살 때 미술전문학교 2학년 때 6.25가 났어. 그때 부모님과 헤어져서 이쪽으로 내려왔어."]

전쟁과 분단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이어온 한국 '분단 미술' 1세대 작가이기도 한데요.

작업실을 가득 채운 그림들.

북녘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 전반에 나타냈습니다.

["(고향 기억이 나세요?) 고향 기억은 아주 너무나 선명하게 나지."]

[이동표/이산가족 : "(고향이 어디세요?) 황해도 벽성군 동원면 주산리. 잡곡을 (머리에) 이고서 다니고 아기 업고 누나 쫓아다니는 거 아버지는 저쪽에서 일하다 참견하는 거."]

군 생활 후 남한에 정착한 이동표 화백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고, 19살 당시 부모님과 헤어졌던 순간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돼 있습니다.

["부모와 헤어지던 곳. 1950년 8월 28일. 이곳이 이동표가 태어난 초가집이다."]

92세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어서 가자! 늦으면 아버지, 엄마 안 계신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지극했던 사랑을 떠올리면 구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앞섭니다.

["(아버님 생각 많이 나세요?) 물론 기가 막히게 나는 거지. 매일 안 날 때가 없어. (무슨 말을 제일 처음에 하고 싶으세요?) 아버지 나 없는 기간에 어떻게 사셨나요. 이 자식 아무것도 못 하고 지금까지 있었나이다."]

속절없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은 거두었다는 이동표 화백.

이제 혼이 되어서라도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합니다.

[이동표/이산가족 : "허가증을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갈 거 아니야. 혼길이래야 갈 수 있어. 죽어서래야."]

가족과 만날 수 없다면 소식만이라도 닿을 수 있기를.

[안춘자/이산가족 : "편지가 오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편지를 써서 오빠한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통일이 하루빨리 돼서 만나고 그랬으면 제가 소원이 그거 하나뿐입니다."]

흩어진 가족을 곧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살아온 70여 년의 세월.

다시 모여 살아보자는 이산가족의 바람은 긴 세월에 퇴색하기는커녕 새록새록 간절해지고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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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화폭에 담은 그리움…이산가족의 애환
    • 입력 2024-09-28 08:50:31
    • 수정2024-09-28 08:57:57
    남북의 창
[앵커]

지난 2018년 8월,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금강산에서 개최됐습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170가족 830여 명이 해후하는 모습은 깊은 울림을 안겼는데요.

하지만, 이날 이후 이산가족 간의 상봉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현재 이산가족의 3분의 2 정도가 이미 80세 이상 고령이 되었고,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습니다.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알고 싶다는 이산가족의 목소리를 〈통일로 미래로〉에서 들어보았습니다.

[리포트]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이하는 이산가족의 날 기념식.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이산가족들이 행사장을 찾았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향한 애끊는 마음, 북녘을 향한 헌화와 묵념으로 달래보는데요.

지난 8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13만 4천여 명 가운데, 생존자는 3만 7천여 명, 전체의 28% 정도에 불과합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지만 가족의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들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절절한 사연과 함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습니다.

이산가족의 날을 기념해 마련된 전시장.

휴전선을 상징하는 철조망에는 남북 교류의 희망이 담긴 띠가 묶여 있고, 색 바랜 편지와 물품들은 이산가족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반가운 날이라 비로소 입을 열어 몇 마디 하였소. 당신 편지가 나의 굳은 마음 문을 열어준 셈이오."]

6.25 전쟁 직전 아내에게 전달된 편지는 남편의 마지막 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시장에는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쪽 가족에게서 받은 항아리, 반지와 같은 물건들도 함께 전시됐는데요.

가족과 생이별할 만큼 급박했던 전쟁 당시의 분위기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윤이서/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 : "1.4 후퇴 때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듯이 너무 추운 날이다 보니까 저렇게 보자기를 (아이) 머리에 씌워서 데리고 내려왔다고 해요."]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헤어질 당시 부모·형제의 모습은 여전히 기억이 또렷합니다.

[김의두/이산가족 : "그걸 잘게 썰어서 주면서 '누나나 형 말 잘 들으면 또 맛있는 거 준다'했던 그런 추억의 맛이 지금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윤이서/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 : "엄마가 어렸을 때 자기 전에 문어 썰어서 입에 넣어주고 그런 추억이 있는 분인데 뒤에 오는 배 타고 따라서 곧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길로 마지막으로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거예요."]

저마다 짙은 그리움을 품은 채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이산가족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전시장을 찾은 안춘자 할머니도 그중 한 명입니다.

["(할머님은 언제, 몇 살 때 이산가족이 되셨어요?) 7살이요. 7살 때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폭격을 당해서 집이 다 파괴되고…."]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지만, 14살 터울이었던 큰 오빠의 목소리는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안춘자/이산가족 : "춘자야, 춘자야 그러지. '우리 춘자, 오빠하고 놀자' 그렇게 데리고 나가서 놀고 그런 기억이 나요."]

큰오빠, 안길성 씨는 전쟁 중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고 합니다.

[안춘자/이산가족 : "(오빠가) 안 가려고 그러니까 그냥 막 와서 협박을 하고 총 들이대고 안 가면 여기서 죽여 버린다 그러고…."]

이후 큰오빠의 소식은 완전히 끊겨버렸는데요.

전쟁 이후, 혈혈단신 살아온 할머니의 사연에 손녀의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김송미/안춘자 씨 손녀 : "저는 지금 너무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쟁과 분단의 아픔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통에 사진 한 장 챙기지 못한 이산가족들은 망향의 한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내기도 했는데요.

[이동표/이산가족 : "동생 둘 있거든 그런데 걔들 안부를 전할 수도 없고 방법이 없잖아."]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는 남성의 모습.

여기엔 어느 실향민 화가의 모습이 투영됐습니다.

이동표 화백은 전쟁이 멈춘 이후 71년 동안 마음속에 쌓여온 한과 그리움을 미술 작품에 꾹꾹 눌러 담아냈습니다.

혼이 돼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다는, 어느덧 아흔이 넘어선 노 작가의 희망 사항을 들어보시죠.

이동표 화백의 작업실로 향하는 길.

이 화백이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줍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남북의 창'이 밥보다 중요하지. 꼭 보지, 기다렸다 봐."]

이 화백은 6.25 전쟁 참전 유공자이자, 실향민, 그리고 이산가족입니다.

[이동표/이산가족 : "19살 때 미술전문학교 2학년 때 6.25가 났어. 그때 부모님과 헤어져서 이쪽으로 내려왔어."]

전쟁과 분단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이어온 한국 '분단 미술' 1세대 작가이기도 한데요.

작업실을 가득 채운 그림들.

북녘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 전반에 나타냈습니다.

["(고향 기억이 나세요?) 고향 기억은 아주 너무나 선명하게 나지."]

[이동표/이산가족 : "(고향이 어디세요?) 황해도 벽성군 동원면 주산리. 잡곡을 (머리에) 이고서 다니고 아기 업고 누나 쫓아다니는 거 아버지는 저쪽에서 일하다 참견하는 거."]

군 생활 후 남한에 정착한 이동표 화백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고, 19살 당시 부모님과 헤어졌던 순간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돼 있습니다.

["부모와 헤어지던 곳. 1950년 8월 28일. 이곳이 이동표가 태어난 초가집이다."]

92세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어서 가자! 늦으면 아버지, 엄마 안 계신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지극했던 사랑을 떠올리면 구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앞섭니다.

["(아버님 생각 많이 나세요?) 물론 기가 막히게 나는 거지. 매일 안 날 때가 없어. (무슨 말을 제일 처음에 하고 싶으세요?) 아버지 나 없는 기간에 어떻게 사셨나요. 이 자식 아무것도 못 하고 지금까지 있었나이다."]

속절없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은 거두었다는 이동표 화백.

이제 혼이 되어서라도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합니다.

[이동표/이산가족 : "허가증을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갈 거 아니야. 혼길이래야 갈 수 있어. 죽어서래야."]

가족과 만날 수 없다면 소식만이라도 닿을 수 있기를.

[안춘자/이산가족 : "편지가 오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편지를 써서 오빠한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통일이 하루빨리 돼서 만나고 그랬으면 제가 소원이 그거 하나뿐입니다."]

흩어진 가족을 곧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살아온 70여 년의 세월.

다시 모여 살아보자는 이산가족의 바람은 긴 세월에 퇴색하기는커녕 새록새록 간절해지고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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