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으로 억울한 옥살이 44년 만에 무죄 “공포 되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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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비상계엄 당시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구금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반공법 위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한 피해자가 44년 7개월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재심 선고를 앞두고 또다시 내려진 비상계엄에 재판이 중단될 위기까지 겪은 피해자는 되살아난 공포와 불안에 "두 번 다시 나와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이번 사태를 비판했습니다.
■ 술자리에서 한 말 빌미로 억울한 옥살이…학교에서도 해직
부산대학교 외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경남 통영에서 교사로 일한 이태영 씨는 비상계엄이 이어지던 1980년 2월, 방위병 소집 영장을 받고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방위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그런데 교육 훈련을 받던 이 씨를 부산 제501보안부대가 갑자기 붙잡아갔습니다. 당시 한 훈련병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관들로부터 심하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소원 수리문을 썼다가 다음날 보안대로 연행돼 취조를 받았고, 며칠 뒤 영장도 없이 구속됐다는 게 이 씨의 말입니다.
당시 24살이었던 이 씨는 구금된 채로 폭행 등 갖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보안대가 주장하는 혐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보안대는 이 씨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말들이 북한 괴뢰 집단을 찬양하는 등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해 지금의 국가보안법인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는데요. 군사법원에 넘겨진 이 씨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도소를 나온 이 씨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교육청 징계위원회에서 퇴직 처분을 받아 해직됐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학원 강사로 일했지만, 보안대가 계속 찾아와 결국 해고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1990년까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부산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아내 마저 '빨갱이 마누라'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질곡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는 이 씨는 "유대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 평생 따라다닌 '범죄자 꼬리표'…44년 만에 무죄 선고
이 씨는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사 자료 등을 구할 수 없어 번번이 좌절해야 했는데요. 십수 년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1999년 다시 교단에 설 수 있게 됐지만 반공법을 위반한 범죄자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던 2021년 이 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지난 4월 국가 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아 지난 6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부산지법 형사5부는 오늘(11일) 열린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1980년 당시 이 씨가 구속영장 없이 8일 동안 불법 구금됐고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채 보안대 소속 수사관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이 씨가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은 증거 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이 씨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발언은 개인적 의견 표명에 불과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을 과장해 표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씨의 말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 암 투병 중 필담으로 전한 소회…"나 같은 피해자 또 있어선 안 돼"
선고 직후 담담한 표정으로 법정을 빠져나온 이 씨는 가족과 지인들이 건넨 꽃다발을 받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이 씨는 암 투병으로 말을 할 수 없어 아내를 통해 필담으로 소회를 밝혔는데요. 이 씨는 "머리와 마음이 무거운 바위에 항상 짓눌려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걸 다 내려놓은 기분"이라고 전했습니다.
선고 전 또다시 비상계엄을 겪어야 했던 이 씨와 이 씨 가족은 되살아난 공포와 불안으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무죄 판결 역시 없었을 것"이라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지만 직접 그 상황을 겪고 긴 세월을 힘들게 살았던 만큼, 다시는 젊은 세대들이 이 같은 피해를 보고 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재판을 받느라 건강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이 씨는 당분간 치료에 전념하며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를 검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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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으로 억울한 옥살이 44년 만에 무죄 “공포 되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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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12-11 16:55:41
- 수정2024-12-11 16:56:37
■ 술자리에서 한 말 빌미로 억울한 옥살이…학교에서도 해직
부산대학교 외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경남 통영에서 교사로 일한 이태영 씨는 비상계엄이 이어지던 1980년 2월, 방위병 소집 영장을 받고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방위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그런데 교육 훈련을 받던 이 씨를 부산 제501보안부대가 갑자기 붙잡아갔습니다. 당시 한 훈련병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관들로부터 심하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소원 수리문을 썼다가 다음날 보안대로 연행돼 취조를 받았고, 며칠 뒤 영장도 없이 구속됐다는 게 이 씨의 말입니다.
당시 24살이었던 이 씨는 구금된 채로 폭행 등 갖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보안대가 주장하는 혐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보안대는 이 씨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말들이 북한 괴뢰 집단을 찬양하는 등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해 지금의 국가보안법인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는데요. 군사법원에 넘겨진 이 씨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도소를 나온 이 씨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교육청 징계위원회에서 퇴직 처분을 받아 해직됐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학원 강사로 일했지만, 보안대가 계속 찾아와 결국 해고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1990년까지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부산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아내 마저 '빨갱이 마누라'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질곡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는 이 씨는 "유대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 평생 따라다닌 '범죄자 꼬리표'…44년 만에 무죄 선고
이 씨는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사 자료 등을 구할 수 없어 번번이 좌절해야 했는데요. 십수 년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1999년 다시 교단에 설 수 있게 됐지만 반공법을 위반한 범죄자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던 2021년 이 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지난 4월 국가 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아 지난 6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부산지법 형사5부는 오늘(11일) 열린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1980년 당시 이 씨가 구속영장 없이 8일 동안 불법 구금됐고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채 보안대 소속 수사관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이 씨가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은 증거 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이 씨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발언은 개인적 의견 표명에 불과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을 과장해 표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씨의 말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 암 투병 중 필담으로 전한 소회…"나 같은 피해자 또 있어선 안 돼"
선고 직후 담담한 표정으로 법정을 빠져나온 이 씨는 가족과 지인들이 건넨 꽃다발을 받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이 씨는 암 투병으로 말을 할 수 없어 아내를 통해 필담으로 소회를 밝혔는데요. 이 씨는 "머리와 마음이 무거운 바위에 항상 짓눌려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걸 다 내려놓은 기분"이라고 전했습니다.
선고 전 또다시 비상계엄을 겪어야 했던 이 씨와 이 씨 가족은 되살아난 공포와 불안으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무죄 판결 역시 없었을 것"이라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지만 직접 그 상황을 겪고 긴 세월을 힘들게 살았던 만큼, 다시는 젊은 세대들이 이 같은 피해를 보고 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밝혔습니다.
재판을 받느라 건강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이 씨는 당분간 치료에 전념하며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를 검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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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위지 기자 allway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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