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에 버려진 개인정보…입학원서 등 마구 노출

입력 2025.02.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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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개인 정보가 그대로 다 있다니까. 봐봐"

얼마 전 취재진에게 제보 영상이 전달됐습니다. 2012년에 문을 닫은 한 대학교에서 촬영된 것이었습니다. 10대 학생들이 지난달 촬영한 영상인데, 학교에 방치돼 있던 입학원서가 그대로 찍혀있었습니다.

개인정보가 담긴 입학원서가 촬영된 제보 영상개인정보가 담긴 입학원서가 촬영된 제보 영상

제보를 받고 취재진도 현장을 가봤습니다. 폐교된 대학, 정문은 굳게 닫혀 있고 '출입 금지'란 팻말이 보였습니다. 해당 학교 재단에 허락을 받은 뒤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대학 본부 건물로 가는 언덕에는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건물에는 깨진 유리창과 널브러져 있는 집기류가 먼저 보였습니다.

폐교 안으로 들어가 는 취재진의 모습폐교 안으로 들어가 는 취재진의 모습

10여 년째 방치된 학교 건물 안에는 벽에 온갖 낙서가 가득했습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누가 걸어오는 것처럼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보니, 제보 영상에 봤던 각종 서류가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특히 입학원서가 눈에 띄었습니다. 폐교한 대학에 2000년 12월에 지원한 학생들의 사진과 주민등록번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 폐교 체험 유튜브 방송에 개인정보 유출 잇따라

취재진에 앞서 한 폐교 체험 유튜버도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는 학교 강의실과 생활관 등 학교 곳곳을 돌면서 촬영했고, 영상에는 훼손된 학교 시설뿐만 아니라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도 나왔습니다.

다른 폐교에서도 개인정보가 노출된 영상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폐교된 강원도의 한 대학교에서도 한 남성이 무단 침입한 뒤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를 그대로 촬영해 방송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민이 해당 유튜버를 경찰에 신고했는데, 영상에서 이 남성은 학생들의 이름은 물론 외모 평가까지 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폐교에 몰래 들어가서 개인 방송을 하는 유튜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교에 방치됐던 민감한 개인 정보까지 유출하는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왜 폐교에 남아 있는 개인정보들은 파기되지 않고 방치된 걸까요?

■ 뒤늦게 만들어진 폐교 기록 관리 규정...소급 적용은 어려워

정부는 2020년 사립학교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폐교의 기록물을 관리하는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해당 조항에는 폐교에서 발생하는 기록물을 지정된 기관으로 옮겨 관리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담당 기관으로 교육부 산하 한국사학진흥재단이 지정됐고, 2021년 교육부 고시가 만들어지면서 이관해야 하는 문서들의 종류도 구체화했습니다.


문제는 법이 시행되기 전에 문을 닫은 학교입니다. 이미 폐교한 대학에는 법을 소급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까지 폐교한 대학은 모두 22곳인데, 시행령 이전에 문을 닫은 곳은 16곳입니다. 이 대학들은 학적부만 이관된 상태로, 입학원서 등 기록물에 대해서는 한국사학진흥재단이 가져올 근거가 없습니다.

한국사학진흥재단은 시행령 이전에 문 닫은 학교 16곳에 대해서는 기증 형식으로 기록물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이 기증 의사를 밝히면 현장 조사를 진행한 다음에 자료를 옮기는 방식입니다. 앞서 취재진이 방문했던 학교도 이런 방식으로 기록물 이전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 부실했던 현장 조사...1명이 전국 폐교 담당

한국사학진흥재단은 지난해 1월 이 학교에 현장 조사를 나가기도 했습니다. 폐교 전체를 돌면서 조사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6월 이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입학원서가 나오는 영상은 최근에 촬영됐습니다. 결국 현장 조사에서 기록물을 꼼꼼하게 살피지 못하고 이관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단 측은 부실한 현장 조사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조사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난해까지 현장 조사 인원이 단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담당자 혼자 전국의 폐교 19곳을 돌며 현장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 겁니다.


또 재단으로 이관된 기록물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된 경우가 많습니다. 관련 규정상 공적 기록물만 가져올 수 있는데, 폐교 특성상 사적 기록물과 공적 기록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혼자서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부실한 현장 조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당 담당자는 "이번에 논란이 된 학교는 재단 직원 도움 없이 혼자서 폐교에 들어가 휴대전화 불빛 하나에 의존해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며, "현장 조사 업무뿐만 아니라 그동안 이관된 기록물 65만 개도 혼자서 관리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 늘어나는 폐교...제도 개선 위해 인력과 예산 확충 시급

학령인구 감소로 문 닫는 대학이 늘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부 추산으로 학교 운영이 한계에 부딪힌 대학이 30곳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폐교하는 대학들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기록물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준비 없이 갑자기 폐교하면 기록물 분실은 물론 채권·채무 등 재산 관계 정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폐교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관계 기관의 인력과 예산 확보에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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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2-09 11: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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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개인 정보가 그대로 다 있다니까. 봐봐"

얼마 전 취재진에게 제보 영상이 전달됐습니다. 2012년에 문을 닫은 한 대학교에서 촬영된 것이었습니다. 10대 학생들이 지난달 촬영한 영상인데, 학교에 방치돼 있던 입학원서가 그대로 찍혀있었습니다.

개인정보가 담긴 입학원서가 촬영된 제보 영상
제보를 받고 취재진도 현장을 가봤습니다. 폐교된 대학, 정문은 굳게 닫혀 있고 '출입 금지'란 팻말이 보였습니다. 해당 학교 재단에 허락을 받은 뒤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대학 본부 건물로 가는 언덕에는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건물에는 깨진 유리창과 널브러져 있는 집기류가 먼저 보였습니다.

폐교 안으로 들어가 는 취재진의 모습
10여 년째 방치된 학교 건물 안에는 벽에 온갖 낙서가 가득했습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누가 걸어오는 것처럼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보니, 제보 영상에 봤던 각종 서류가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특히 입학원서가 눈에 띄었습니다. 폐교한 대학에 2000년 12월에 지원한 학생들의 사진과 주민등록번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 폐교 체험 유튜브 방송에 개인정보 유출 잇따라

취재진에 앞서 한 폐교 체험 유튜버도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는 학교 강의실과 생활관 등 학교 곳곳을 돌면서 촬영했고, 영상에는 훼손된 학교 시설뿐만 아니라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도 나왔습니다.

다른 폐교에서도 개인정보가 노출된 영상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폐교된 강원도의 한 대학교에서도 한 남성이 무단 침입한 뒤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를 그대로 촬영해 방송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민이 해당 유튜버를 경찰에 신고했는데, 영상에서 이 남성은 학생들의 이름은 물론 외모 평가까지 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폐교에 몰래 들어가서 개인 방송을 하는 유튜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교에 방치됐던 민감한 개인 정보까지 유출하는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왜 폐교에 남아 있는 개인정보들은 파기되지 않고 방치된 걸까요?

■ 뒤늦게 만들어진 폐교 기록 관리 규정...소급 적용은 어려워

정부는 2020년 사립학교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폐교의 기록물을 관리하는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해당 조항에는 폐교에서 발생하는 기록물을 지정된 기관으로 옮겨 관리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담당 기관으로 교육부 산하 한국사학진흥재단이 지정됐고, 2021년 교육부 고시가 만들어지면서 이관해야 하는 문서들의 종류도 구체화했습니다.


문제는 법이 시행되기 전에 문을 닫은 학교입니다. 이미 폐교한 대학에는 법을 소급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까지 폐교한 대학은 모두 22곳인데, 시행령 이전에 문을 닫은 곳은 16곳입니다. 이 대학들은 학적부만 이관된 상태로, 입학원서 등 기록물에 대해서는 한국사학진흥재단이 가져올 근거가 없습니다.

한국사학진흥재단은 시행령 이전에 문 닫은 학교 16곳에 대해서는 기증 형식으로 기록물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이 기증 의사를 밝히면 현장 조사를 진행한 다음에 자료를 옮기는 방식입니다. 앞서 취재진이 방문했던 학교도 이런 방식으로 기록물 이전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 부실했던 현장 조사...1명이 전국 폐교 담당

한국사학진흥재단은 지난해 1월 이 학교에 현장 조사를 나가기도 했습니다. 폐교 전체를 돌면서 조사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6월 이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입학원서가 나오는 영상은 최근에 촬영됐습니다. 결국 현장 조사에서 기록물을 꼼꼼하게 살피지 못하고 이관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단 측은 부실한 현장 조사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조사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난해까지 현장 조사 인원이 단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담당자 혼자 전국의 폐교 19곳을 돌며 현장 조사를 진행해야 하는 겁니다.


또 재단으로 이관된 기록물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된 경우가 많습니다. 관련 규정상 공적 기록물만 가져올 수 있는데, 폐교 특성상 사적 기록물과 공적 기록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혼자서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부실한 현장 조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당 담당자는 "이번에 논란이 된 학교는 재단 직원 도움 없이 혼자서 폐교에 들어가 휴대전화 불빛 하나에 의존해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며, "현장 조사 업무뿐만 아니라 그동안 이관된 기록물 65만 개도 혼자서 관리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 늘어나는 폐교...제도 개선 위해 인력과 예산 확충 시급

학령인구 감소로 문 닫는 대학이 늘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부 추산으로 학교 운영이 한계에 부딪힌 대학이 30곳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폐교하는 대학들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기록물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준비 없이 갑자기 폐교하면 기록물 분실은 물론 채권·채무 등 재산 관계 정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폐교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관계 기관의 인력과 예산 확보에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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