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a/fckeditor/new/image/2025/02/14/299931739501711252.jpg)
■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건가?
'불쾌했다. 좀 매운 떡볶이 맛 정도를 생각했는데, 예상치를 수십 배 상회하는 캡사이신의 강도가 느껴졌다. 충격, 세상에... 이걸 사람 먹으라고 만든 건가. 실험이래도, 먹거리로 지나친 거 아닌가!'
그러나 암만 불닭 맛없다고 해봤자 소용없다. (농심 종목토론방의 글 제목이다)
맵찔이는 손도 못 대는 이 제품이 라면 세상을 바꿨으니까.
삼양식품이 사상 처음으로 농심을 제쳤다. 불닭볶음면 덕이다. 2024년 영업이익이 3,400억 원대. 같은 기간 농심은 1,600억 원에 그쳤다. 매출로는 농심이 삼양의 2배인데 (3조 4천억 원 vs 1조 7천억 원) 놀라운 일이다.
PER(주가수익비율)로 보면 어떨까. PER은 주가를 1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값으로, 기업의 수익성 대비 주가 수준을 나타낸다. 숫자가 높을수록 '현재의 수익성보다 높은 시장평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보통 '성장주'라고 한다.
삼양이 농심을 제친단 낌새는 지난해 초부터 감지됐다. 깜짝 실적을 눈치챈 투자자들이 먼저 주식 매수에 나섰다. 주가가 치솟았고, 자연히 PER이 치솟았다. 당시 언론은 농심의 PER이 12배에 불과한데 삼양은 32배라고 썼다. 투자자들이 그만큼 해당 기업의 '미래 성장성'을 높이 평가했다.
![](/data/fckeditor/new/image/2025/02/14/299931739509398410.png)
그리고 투자자들의 예상은 현실이 됐다. 2024년 실적이 발표된 2월 현재, 삼양식품의 시가총액(약 6조 원)은 1년보다 350% 올라, 제자리걸음 한 농심(약 2조 원)의 약 세 배가 되었다. '신라면'으로 상징되는 부동의 업계 1위 농심을 만년 3등이 제치는 파란이 일어났다.
과도한 멀티플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황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각 기업 실적이 향후 2년 정도 지속된다면 농심의 영업이익이 2천억 원대에 머무는 동안 삼양은 5천억 원을 돌파한다. (네이버 종목 분석에 기재된 시장 컨센서스 기준)
다윗이 골리앗을 꺾었다. 해외 신규시장 덕분이다. 라면은 한국인만 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 인구는 고정되어 있으니, 식료품 시장에서 급성장이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K컬처의 유행과 함께 코리안 푸드 열풍이 불었다. '어마어마하게 매운 불닭면 챌린지'는 유튜브 인기 콘텐츠가 됐다. 해외에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됐다. 한국인은 5천만이지만, 세계는 80억이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마치 테크 기업처럼 치솟았다.
작고한 경영 이론의 대가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이 보았다면 이렇게 외쳤을 거다.
"이게 파괴적 혁신입니다"
![@삼양식품](/data/fckeditor/new/image/2025/02/14/299931739500286935.png)
■ 파괴적 혁신, 처음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인다
비슷한 일이 반도체 세계에서도 일어났다. HBM이다.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에서 삼성전자를 멀찌감치 제쳤다.(반도체 부문 기준) 올해는 격차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가장 비싼 최신 HBM'은 올해도 하이닉스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연관 기사]
젠슨, 삼성이 왜 HBM을 새로 설계해야 하죠?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48051&ref=A
크리스텐슨은 이번에도 외쳤을 거다. "HBM도 일종의 파괴적 혁신입니다"
파괴적 혁신은 기업 운명을 바꾼다. 그 한 예로 플래시메모리는 HDD를 사멸시켰다. 저장장치 시장을 완전히 재편했고, 애플이 이끄는 모바일 혁신의 핵심 부품이 됐다. 기존 HDD 기업은 시장에서 사라진다.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자 필름 업계 선두 코닥이 사라진 것처럼.
왜 과거의 승자는 사라질까? 기존 선두기업은 이 파괴적 혁신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파괴적 혁신은 처음에는 이상해 보인다. 크리스텐슨의 분류에 따르면 파괴적 혁신에는 두 종류(저가형/ 신시장 창출형)가 있는데, 둘 다 그렇다. 우선 저가형 파괴적 혁신은 기존 제품보다 열등해보인다.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는 기존의 5.25인치 대비 비싸고 효율도 떨어졌다. 플래시메모리 역시 HDD보다 덮어쓰기 성능은 떨어졌다.
신시장 창출형 혁신은 수요가 별로 크지 않다. HBM이 그렇다. D램 여러 장을 붙이는 기술은 어려운데, 수율도 떨어진다. 그래서 비싸다. 게다가 부피도 크다. 부피가 크면 모바일에서는 쓸 수 없고, 서버 시장에서는 가성비가 떨어진다. 즉, 기존 클라이언트는 필요하지 않은 제품이다. 오직 게임용 그래픽칩 만들던 작은 회사, 이를테면 AMD나 엔비디아만 원한다.
그래서 혁신은 처음에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난 뒤 혁신 제품의 성능이 개량되거나, 외국인들이 라면을 먹기 시작하거나, AI 출현 등으로 IT 시장이 급변한 뒤에야 '파괴적 혁신'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 신라면은 불닭볶음면이 무섭지 않았다, 처음에는
![](/data/fckeditor/new/image/2025/02/14/299931739501008343.jpg)
농심을 예로 들면, 신라면이 잘 팔리는데 다른 걸 개발할 필요가 없다. 농심이라고 신제품 개발 안해봤을까. 수없이 많은 신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놔봤지만, 결국엔 신라면만 살아남았다. 경쟁사에서 꼬꼬면이 나와서 한동안 힘들었는데, 그것도 지나가는 유행이 되고 말았다. 돌고 돌아 신라면의 세상이었다. 그러니 신제품에 투자할 동기가 적다. 게다가 오직 맵기만 해서 먹기도 어려운 제품이 혁신이라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삼성도 그랬다. D램 최강자 30년, 대량으로 상품을 만들어서 애플이나 인텔 같은 거대 클라이언트에 넘기는 비즈니스가 주력이다. 대부분의 매출은 이 소수의 큰 고객에게서 나온다. 그들이 HBM을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HBM은 만들기도 까다로워서 일반 D램 라인을 멈춰 세우고, HBM만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 찍기만 하면 돈을 버는 라인을 세우면 단기적으로 손해다. 게임 그래픽칩 회사를 빼면 수요도 불분명한 제품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을까?
ROI(Return on Invest : 투자 대비 수익)가 나오나, 계산기 두드린다. '혁신하느라 영업이익이 좀 줄었습니다' 하면 주주들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농심처럼 삼성도 혁신에 나설 동기(Incentive)가 부족했다. 처음에는.
그런데 2등 기업 입장은 다르다. 하이닉스는 어차피 규모에서 삼성을 이길 수 없다. 삼성은 스마트폰도 있고, 가전도 있고, 파운드리도 있지만 하이닉스는 D램뿐이다. 그러니 시장이 작더라도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HBM도 해볼 만한 도전이다. 처음부터.
똑같은 틈새시장도 기업 규모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매출이 200조 원이 넘는 삼성에 1조가 될까말까한 HBM 시장은 너무 작아 보일 수 있지만, 매출이 20~30조(2019~2020년 기준)에 불과한 하이닉스에게는 작긴 해도 유의미한 시장이다. 처음부터.
크리스텐슨은 그래서 선도기업은 파괴적 혁신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고 했다. 재무적으로 분석을 하면 할 수록 '혁신을 하지 않아야 할 근거'만 탄탄해진다. 더 열심히 기획하고, 고객과 친화적인 태도로 노력할수록 그렇다.
이게 선두기업의 딜레마이고, 영원히 위대한 기업이 없는 이유다. 크리스텐슨이 파괴적 혁신을 논증한 책의 제목도 혁신기업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lema)다. 삼성이 걸려든 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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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삼성, 빠져나올 확률은?
위대했던 기업이 정체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명맥은 유지할까, 아니면 위기로 치달을까?
통계적 확률은 위기를 가리킨다. 거대기업의 성장 정체를 연구한 매튜 S 올슨 등은 거대기업의 87%가 정체에 빠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결론 내렸다. 부활하는 기업은 1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사라지는 기업들의 퇴장에 '소프트 랜딩'은 없다. 에너지를 다 쏟아낸 기업은 서서히 둔화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돌처럼 급격히 추락한다. 1955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에서 포천 100대 기업에 포함되었던 500개 이상의 대기업을 실증 조사한 결과다. (스톨포인트, 매튜 S. 올슨, 데릭 반 베버)
기업은 처음에는 성장하고 때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만, 결국은 대부분 소멸의 길로 향한다. 100년 기업은 없다. 상식적인 이야기이고, 통계적으로도 평범한 사실이다.
그걸 다들 알고 있어서 걱정이 크다.
그래서 돕자는 얘기가 쏟아진다. 규제를 완화하고 지원을 강화하자, 외부에서 삼성을 도와야 한다는 논의다.
■ 삼성 특별법이 만들어지면 삼성이 되살아날까
①52시간 규제 완화?
실리콘밸리는 밤낮없이 돌아가고 타이완의 TSMC는 직원의 피땀을 '갈아 넣는데', 삼성은 52시간 규제 때문에 혁신 역량을 잃었다는 시각이 있다.
오해다. 똑같이 52시간 규제를 적용받는 SK하이닉스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반증이다. 52시간제가 혁신의 장애물이라면 하이닉스가 HBM 혁신을 했을 리 없다.
최근 민주당 이용우 의원이 낸 자료에 따르면, 근무시간과 혁신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인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R&D를 목적으로 2023년 7건, 2024년 1~10월 15건의 특별 연장근로를 신청해 승인을 받았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는 한 건도 신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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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증언을 들어봐도 결론은 같다. 삼성 직원들이 평균적으로 연장근무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임금구조에 있다. 삼성은 주 40시간에 4.5시간 정도를 더한 포괄 근로를 적용한다. 44.5시간까지는 추가 수당이 발생하지 않는 셈이다. 4시간 안팎을 더 근무하나 칼퇴근 하나 급여가 같다. 직원들은 묻는다. "일을 더 해도 돈을 안 주는데 누가 초과근무를 하려고 합니까?" 인센티브 구조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52시간이 부족하기는커녕 시간외 근무 자체가 많지 않다는 증언이 나온다.
SK하이닉스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회사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겠습니까. 하지만 복지는 괜찮은 편이에요. 근무시간요? 아무리 바빠도 52시간 벗어난 적은 없는 거 같은데요?" 이 직원은 HBM3E 개발 TF에서 일했다.
미래를 봐도 그렇다. 안 그래도 청년은 이공계를 기피한다. 보상이 박해서다. 대신 의대로 몰린다. 안정적이면서도 보상도 후하다. '더 많은 노동시간, 더 저녁이 없는 삶'이 뉴노멀이 된다면 인재는 장기적으로 더더욱 삼성전자와 같은 직장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노동 규제 완화가 단기적 수익성이나 개발기간 단축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야 있겠으나 '혁신'과는 무관해 보인다는 얘기다. 또, 현실적으로 장시간 노동으로 지속 가능한 혁신을 불러올 방법이 2025년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② 투자할 돈을 지원하면?
삼성이 혁신할 수 있게 정부가 세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투자세액공제나 보조금 등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어떤가.
역시 오해다. 삼성은 사내에 100조 이상의 사내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 안 그래도 돈은 많다. 부잣집이 혁신을 못 한 것이다. 돈이 저절로 혁신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당장 삼성의 투자 금액을 보라. 삼성은 최근 3년 동안 지속적으로 매년 50조 원 안팎의 거대한 설비투자를 했다. R&D 투자 역시 연간 20조 원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성과가 미미할 뿐이다.
기존의 자체 투자 금액과 비교하면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자금은 미미할 것이다.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게 혁신의 근본적 마중물일 리는 없다.
즉, 바깥에서 도와서 혁신 엔진에 불을 켜는 손쉬운 방법은 없다. 도와주면 틀림없이 얼마간 도움은 되겠으나, 혁신에 어려움을 겪는 삼성을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한다. 문제는 내부에 있기에,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
■ 결국 답은 혁신, '불닭볶음면' 같은 제품을 내놓느냐
기승전 혁신이다. 내부 쇄신이다. 이 혁신의 불꽃이 다시 피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바깥의 지원도 '백약이 무효'다. '불닭볶음면' 같은 혁신 제품을 다시 내놓을 수 있나? 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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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현 상태다. 삼성은 불닭볶음면(즉, HBM) 만 못 만드는 게 아니다. D램 메모리의 본원적 경쟁력에서 뒤지고 있다. 위중하다. 돈이나 규제 완화보다 시급한 것은 내부 개혁이다. 지금까지 여섯 편의 기사를 통해 살펴본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해법 몇 가지를 아래에 담았다.
① 리더십이 재정립돼야 한다. 삼성이 스마트폰에서 애플과 멀어지는 이유는 소프트웨어를 포기한 리더십 때문이다. 파운드리도 리더십 문제다. 돈을 안 써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이 '따라잡겠다'면서 돈을 퍼부었지만 실패했다. 30년간 앞서가던 범용 D램이나, 특수 D램인 HBM에서 뒤처지는 것 역시 리더십의 실패다. 기본에서 뒤처지고, 미래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혁신하지 못했다. 삼성의 실패는 결국 모두 리더십의 실패다. 따라서 리더십이 먼저 다시 서야 한다. 시장은 지난 연말 삼성이 임원 인사로 이 리더십을 바로잡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그 인사에서는 리더십 변화로 인식될 만한 요소를 찾기 힘들었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변화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②재무적 관리가 혁신을 저해하는 현상을 극복해내야 한다. GM 부회장 출신인 밥 러츠는 재무관리자들을 냉소적으로 '빈 카운터스(콩 세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본질가치보다 재무제표 숫자를 중시하면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단 얘기다. 삼성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판이 거세다. 다만 '재무를 고려하지 마라'고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주식회사가 재무 관리를 안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돈 계산이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시스템 구축이다. 관료화된 조직이 혁신을 방해하지 않게 하는 리더십, 시장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혁신을 수없이 실험해 볼 수 있는 조직 구조 설계다. ③ 결국은 인재다. 혁신은 사람이 한다. (특히 청년이 한다) 젊은 인재를 더 많이 모아야 하고, 그들이 혁신을 향하게 해야 한다. 결국 인센티브 구조다. 혁신하면 보상을 받는 구조가 명확해져야 한다. MZ 세대는 먼 훗날 호봉이 올랐을 때가 아니라 지금 당장 성과에 따라 보상받길 원한다. 노동 조건 악화는 거꾸로 가는 길이다. ④ 또 협력이다. 엔비디아와 TSMC의 협력, SK하이닉스와 패키징 기업 간의 협력, 수많은 오픈 이노베이션이 보여주는 길은 명확하다. 이제 혁신은 혼자 하기 힘든 작업이 됐다. 함께 해야 한다. 갑을 관계라는 수직적 먹이사슬에 익숙해진 기업, 큰 기업과 큰 거래만 하던 기업인 삼성에는 이 길이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서 앞서있는 기업들의 역량을 충분히 인정하며 협력하는 연습을 빠르게 하지 않으면, 그래서 앞으로도 혁신을 혼자서만 하려고 하면 전망은 밝지 않다. 수많은 IP와 패키징 기술을 가진 기업들과의 수평적 협업, 또 앞서 언급한 리벨리온 같은 작은 기업과의 협력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야 한다. ⑤ 내부에서 못하면 밖에서 사 오는 M&A도 한 방법이다. 문제는 삼성이 M&A로 혁신 모멘텀을 마련한 적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의 컴퓨터 제조 기업 AST를 인수했다가 거대한 적자를 보고 발을 뺀 것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지금은 구글의 품에 가 있고, 삼성의 소프트웨어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 안드로이드 인수 실패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삼성에 인수 제안을 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한 안드로이드 창업주 앤디 루빈에게 '인원 6명으로 어떻게 OS를 만드냐?'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들은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 M&A는 늘 다짐하는 길이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길이다. 한종희 부회장은 이미 지난 2021년,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를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2023년 1월 CES에서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2024년 1월 CES에서도 “삼성의 리더십 강화를 위한 대형 M&A 준비를 착실히 해오고 있다”며 “잘되고 있다”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올해도 한 부회장은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말했지만, 여전히 안갯속이다. |
위기의 삼성을 조망하는 연속기사입니다. 다양한 기업과 비교하고, 여러 전문가의 분석을 경청하며 삼성의 현주소를 살핍니다. 구독해 두시면, 삼성 위기의 이유와 극복의 실마리를 살필 수 있습니다. ① [D램] 젠슨, 삼성이 왜 HBM을 새로 설계해야 하죠? ② [모바일] 애플과 삼성의 격차, 이제는 17배 ③ [파운드리] 삼성도 TSMC처럼 망하던 기업 '세계 1위' 만들 수 있나 ④ [세 번째 사과] 축제인 하이닉스, 세 번째 사과가 두려운 삼성 ⑤ [딥시크와 삼성] 딥시크가 준 AI 희망, 삼성의 희망과 무관하다 ⑥ [불닭볶음면과 삼성] 삼성전자도 불닭볶음면을 내놓을 수 있을까 (추후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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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도 불닭볶음면을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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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2-15 11:00:46
![](/data/fckeditor/new/image/2025/02/14/299931739501711252.jpg)
■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건가?
'불쾌했다. 좀 매운 떡볶이 맛 정도를 생각했는데, 예상치를 수십 배 상회하는 캡사이신의 강도가 느껴졌다. 충격, 세상에... 이걸 사람 먹으라고 만든 건가. 실험이래도, 먹거리로 지나친 거 아닌가!'
그러나 암만 불닭 맛없다고 해봤자 소용없다. (농심 종목토론방의 글 제목이다)
맵찔이는 손도 못 대는 이 제품이 라면 세상을 바꿨으니까.
삼양식품이 사상 처음으로 농심을 제쳤다. 불닭볶음면 덕이다. 2024년 영업이익이 3,400억 원대. 같은 기간 농심은 1,600억 원에 그쳤다. 매출로는 농심이 삼양의 2배인데 (3조 4천억 원 vs 1조 7천억 원) 놀라운 일이다.
PER(주가수익비율)로 보면 어떨까. PER은 주가를 1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값으로, 기업의 수익성 대비 주가 수준을 나타낸다. 숫자가 높을수록 '현재의 수익성보다 높은 시장평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보통 '성장주'라고 한다.
삼양이 농심을 제친단 낌새는 지난해 초부터 감지됐다. 깜짝 실적을 눈치챈 투자자들이 먼저 주식 매수에 나섰다. 주가가 치솟았고, 자연히 PER이 치솟았다. 당시 언론은 농심의 PER이 12배에 불과한데 삼양은 32배라고 썼다. 투자자들이 그만큼 해당 기업의 '미래 성장성'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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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투자자들의 예상은 현실이 됐다. 2024년 실적이 발표된 2월 현재, 삼양식품의 시가총액(약 6조 원)은 1년보다 350% 올라, 제자리걸음 한 농심(약 2조 원)의 약 세 배가 되었다. '신라면'으로 상징되는 부동의 업계 1위 농심을 만년 3등이 제치는 파란이 일어났다.
과도한 멀티플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황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각 기업 실적이 향후 2년 정도 지속된다면 농심의 영업이익이 2천억 원대에 머무는 동안 삼양은 5천억 원을 돌파한다. (네이버 종목 분석에 기재된 시장 컨센서스 기준)
다윗이 골리앗을 꺾었다. 해외 신규시장 덕분이다. 라면은 한국인만 먹는 음식인 줄 알았다. 인구는 고정되어 있으니, 식료품 시장에서 급성장이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K컬처의 유행과 함께 코리안 푸드 열풍이 불었다. '어마어마하게 매운 불닭면 챌린지'는 유튜브 인기 콘텐츠가 됐다. 해외에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됐다. 한국인은 5천만이지만, 세계는 80억이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마치 테크 기업처럼 치솟았다.
작고한 경영 이론의 대가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이 보았다면 이렇게 외쳤을 거다.
"이게 파괴적 혁신입니다"
![@삼양식품](/data/fckeditor/new/image/2025/02/14/299931739500286935.png)
■ 파괴적 혁신, 처음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인다
비슷한 일이 반도체 세계에서도 일어났다. HBM이다.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에서 삼성전자를 멀찌감치 제쳤다.(반도체 부문 기준) 올해는 격차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가장 비싼 최신 HBM'은 올해도 하이닉스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연관 기사]
젠슨, 삼성이 왜 HBM을 새로 설계해야 하죠?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48051&ref=A
크리스텐슨은 이번에도 외쳤을 거다. "HBM도 일종의 파괴적 혁신입니다"
파괴적 혁신은 기업 운명을 바꾼다. 그 한 예로 플래시메모리는 HDD를 사멸시켰다. 저장장치 시장을 완전히 재편했고, 애플이 이끄는 모바일 혁신의 핵심 부품이 됐다. 기존 HDD 기업은 시장에서 사라진다.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자 필름 업계 선두 코닥이 사라진 것처럼.
왜 과거의 승자는 사라질까? 기존 선두기업은 이 파괴적 혁신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파괴적 혁신은 처음에는 이상해 보인다. 크리스텐슨의 분류에 따르면 파괴적 혁신에는 두 종류(저가형/ 신시장 창출형)가 있는데, 둘 다 그렇다. 우선 저가형 파괴적 혁신은 기존 제품보다 열등해보인다.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는 기존의 5.25인치 대비 비싸고 효율도 떨어졌다. 플래시메모리 역시 HDD보다 덮어쓰기 성능은 떨어졌다.
신시장 창출형 혁신은 수요가 별로 크지 않다. HBM이 그렇다. D램 여러 장을 붙이는 기술은 어려운데, 수율도 떨어진다. 그래서 비싸다. 게다가 부피도 크다. 부피가 크면 모바일에서는 쓸 수 없고, 서버 시장에서는 가성비가 떨어진다. 즉, 기존 클라이언트는 필요하지 않은 제품이다. 오직 게임용 그래픽칩 만들던 작은 회사, 이를테면 AMD나 엔비디아만 원한다.
그래서 혁신은 처음에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난 뒤 혁신 제품의 성능이 개량되거나, 외국인들이 라면을 먹기 시작하거나, AI 출현 등으로 IT 시장이 급변한 뒤에야 '파괴적 혁신'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 신라면은 불닭볶음면이 무섭지 않았다,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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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을 예로 들면, 신라면이 잘 팔리는데 다른 걸 개발할 필요가 없다. 농심이라고 신제품 개발 안해봤을까. 수없이 많은 신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놔봤지만, 결국엔 신라면만 살아남았다. 경쟁사에서 꼬꼬면이 나와서 한동안 힘들었는데, 그것도 지나가는 유행이 되고 말았다. 돌고 돌아 신라면의 세상이었다. 그러니 신제품에 투자할 동기가 적다. 게다가 오직 맵기만 해서 먹기도 어려운 제품이 혁신이라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삼성도 그랬다. D램 최강자 30년, 대량으로 상품을 만들어서 애플이나 인텔 같은 거대 클라이언트에 넘기는 비즈니스가 주력이다. 대부분의 매출은 이 소수의 큰 고객에게서 나온다. 그들이 HBM을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HBM은 만들기도 까다로워서 일반 D램 라인을 멈춰 세우고, HBM만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 찍기만 하면 돈을 버는 라인을 세우면 단기적으로 손해다. 게임 그래픽칩 회사를 빼면 수요도 불분명한 제품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을까?
ROI(Return on Invest : 투자 대비 수익)가 나오나, 계산기 두드린다. '혁신하느라 영업이익이 좀 줄었습니다' 하면 주주들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농심처럼 삼성도 혁신에 나설 동기(Incentive)가 부족했다. 처음에는.
그런데 2등 기업 입장은 다르다. 하이닉스는 어차피 규모에서 삼성을 이길 수 없다. 삼성은 스마트폰도 있고, 가전도 있고, 파운드리도 있지만 하이닉스는 D램뿐이다. 그러니 시장이 작더라도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HBM도 해볼 만한 도전이다. 처음부터.
똑같은 틈새시장도 기업 규모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매출이 200조 원이 넘는 삼성에 1조가 될까말까한 HBM 시장은 너무 작아 보일 수 있지만, 매출이 20~30조(2019~2020년 기준)에 불과한 하이닉스에게는 작긴 해도 유의미한 시장이다. 처음부터.
크리스텐슨은 그래서 선도기업은 파괴적 혁신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고 했다. 재무적으로 분석을 하면 할 수록 '혁신을 하지 않아야 할 근거'만 탄탄해진다. 더 열심히 기획하고, 고객과 친화적인 태도로 노력할수록 그렇다.
이게 선두기업의 딜레마이고, 영원히 위대한 기업이 없는 이유다. 크리스텐슨이 파괴적 혁신을 논증한 책의 제목도 혁신기업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lema)다. 삼성이 걸려든 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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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삼성, 빠져나올 확률은?
위대했던 기업이 정체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명맥은 유지할까, 아니면 위기로 치달을까?
통계적 확률은 위기를 가리킨다. 거대기업의 성장 정체를 연구한 매튜 S 올슨 등은 거대기업의 87%가 정체에 빠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결론 내렸다. 부활하는 기업은 1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사라지는 기업들의 퇴장에 '소프트 랜딩'은 없다. 에너지를 다 쏟아낸 기업은 서서히 둔화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돌처럼 급격히 추락한다. 1955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에서 포천 100대 기업에 포함되었던 500개 이상의 대기업을 실증 조사한 결과다. (스톨포인트, 매튜 S. 올슨, 데릭 반 베버)
기업은 처음에는 성장하고 때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만, 결국은 대부분 소멸의 길로 향한다. 100년 기업은 없다. 상식적인 이야기이고, 통계적으로도 평범한 사실이다.
그걸 다들 알고 있어서 걱정이 크다.
그래서 돕자는 얘기가 쏟아진다. 규제를 완화하고 지원을 강화하자, 외부에서 삼성을 도와야 한다는 논의다.
■ 삼성 특별법이 만들어지면 삼성이 되살아날까
①52시간 규제 완화?
실리콘밸리는 밤낮없이 돌아가고 타이완의 TSMC는 직원의 피땀을 '갈아 넣는데', 삼성은 52시간 규제 때문에 혁신 역량을 잃었다는 시각이 있다.
오해다. 똑같이 52시간 규제를 적용받는 SK하이닉스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반증이다. 52시간제가 혁신의 장애물이라면 하이닉스가 HBM 혁신을 했을 리 없다.
최근 민주당 이용우 의원이 낸 자료에 따르면, 근무시간과 혁신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인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R&D를 목적으로 2023년 7건, 2024년 1~10월 15건의 특별 연장근로를 신청해 승인을 받았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는 한 건도 신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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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증언을 들어봐도 결론은 같다. 삼성 직원들이 평균적으로 연장근무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임금구조에 있다. 삼성은 주 40시간에 4.5시간 정도를 더한 포괄 근로를 적용한다. 44.5시간까지는 추가 수당이 발생하지 않는 셈이다. 4시간 안팎을 더 근무하나 칼퇴근 하나 급여가 같다. 직원들은 묻는다. "일을 더 해도 돈을 안 주는데 누가 초과근무를 하려고 합니까?" 인센티브 구조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52시간이 부족하기는커녕 시간외 근무 자체가 많지 않다는 증언이 나온다.
SK하이닉스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회사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겠습니까. 하지만 복지는 괜찮은 편이에요. 근무시간요? 아무리 바빠도 52시간 벗어난 적은 없는 거 같은데요?" 이 직원은 HBM3E 개발 TF에서 일했다.
미래를 봐도 그렇다. 안 그래도 청년은 이공계를 기피한다. 보상이 박해서다. 대신 의대로 몰린다. 안정적이면서도 보상도 후하다. '더 많은 노동시간, 더 저녁이 없는 삶'이 뉴노멀이 된다면 인재는 장기적으로 더더욱 삼성전자와 같은 직장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노동 규제 완화가 단기적 수익성이나 개발기간 단축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야 있겠으나 '혁신'과는 무관해 보인다는 얘기다. 또, 현실적으로 장시간 노동으로 지속 가능한 혁신을 불러올 방법이 2025년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② 투자할 돈을 지원하면?
삼성이 혁신할 수 있게 정부가 세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투자세액공제나 보조금 등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어떤가.
역시 오해다. 삼성은 사내에 100조 이상의 사내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 안 그래도 돈은 많다. 부잣집이 혁신을 못 한 것이다. 돈이 저절로 혁신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당장 삼성의 투자 금액을 보라. 삼성은 최근 3년 동안 지속적으로 매년 50조 원 안팎의 거대한 설비투자를 했다. R&D 투자 역시 연간 20조 원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성과가 미미할 뿐이다.
기존의 자체 투자 금액과 비교하면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자금은 미미할 것이다.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게 혁신의 근본적 마중물일 리는 없다.
즉, 바깥에서 도와서 혁신 엔진에 불을 켜는 손쉬운 방법은 없다. 도와주면 틀림없이 얼마간 도움은 되겠으나, 혁신에 어려움을 겪는 삼성을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한다. 문제는 내부에 있기에,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
■ 결국 답은 혁신, '불닭볶음면' 같은 제품을 내놓느냐
기승전 혁신이다. 내부 쇄신이다. 이 혁신의 불꽃이 다시 피어나지 않으면 그 어떤 바깥의 지원도 '백약이 무효'다. '불닭볶음면' 같은 혁신 제품을 다시 내놓을 수 있나? 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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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현 상태다. 삼성은 불닭볶음면(즉, HBM) 만 못 만드는 게 아니다. D램 메모리의 본원적 경쟁력에서 뒤지고 있다. 위중하다. 돈이나 규제 완화보다 시급한 것은 내부 개혁이다. 지금까지 여섯 편의 기사를 통해 살펴본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해법 몇 가지를 아래에 담았다.
① 리더십이 재정립돼야 한다. 삼성이 스마트폰에서 애플과 멀어지는 이유는 소프트웨어를 포기한 리더십 때문이다. 파운드리도 리더십 문제다. 돈을 안 써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이 '따라잡겠다'면서 돈을 퍼부었지만 실패했다. 30년간 앞서가던 범용 D램이나, 특수 D램인 HBM에서 뒤처지는 것 역시 리더십의 실패다. 기본에서 뒤처지고, 미래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혁신하지 못했다. 삼성의 실패는 결국 모두 리더십의 실패다. 따라서 리더십이 먼저 다시 서야 한다. 시장은 지난 연말 삼성이 임원 인사로 이 리더십을 바로잡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그 인사에서는 리더십 변화로 인식될 만한 요소를 찾기 힘들었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변화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②재무적 관리가 혁신을 저해하는 현상을 극복해내야 한다. GM 부회장 출신인 밥 러츠는 재무관리자들을 냉소적으로 '빈 카운터스(콩 세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본질가치보다 재무제표 숫자를 중시하면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단 얘기다. 삼성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판이 거세다. 다만 '재무를 고려하지 마라'고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주식회사가 재무 관리를 안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돈 계산이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시스템 구축이다. 관료화된 조직이 혁신을 방해하지 않게 하는 리더십, 시장을 바꿀 수 있는 작은 혁신을 수없이 실험해 볼 수 있는 조직 구조 설계다. ③ 결국은 인재다. 혁신은 사람이 한다. (특히 청년이 한다) 젊은 인재를 더 많이 모아야 하고, 그들이 혁신을 향하게 해야 한다. 결국 인센티브 구조다. 혁신하면 보상을 받는 구조가 명확해져야 한다. MZ 세대는 먼 훗날 호봉이 올랐을 때가 아니라 지금 당장 성과에 따라 보상받길 원한다. 노동 조건 악화는 거꾸로 가는 길이다. ④ 또 협력이다. 엔비디아와 TSMC의 협력, SK하이닉스와 패키징 기업 간의 협력, 수많은 오픈 이노베이션이 보여주는 길은 명확하다. 이제 혁신은 혼자 하기 힘든 작업이 됐다. 함께 해야 한다. 갑을 관계라는 수직적 먹이사슬에 익숙해진 기업, 큰 기업과 큰 거래만 하던 기업인 삼성에는 이 길이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서 앞서있는 기업들의 역량을 충분히 인정하며 협력하는 연습을 빠르게 하지 않으면, 그래서 앞으로도 혁신을 혼자서만 하려고 하면 전망은 밝지 않다. 수많은 IP와 패키징 기술을 가진 기업들과의 수평적 협업, 또 앞서 언급한 리벨리온 같은 작은 기업과의 협력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야 한다. ⑤ 내부에서 못하면 밖에서 사 오는 M&A도 한 방법이다. 문제는 삼성이 M&A로 혁신 모멘텀을 마련한 적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의 컴퓨터 제조 기업 AST를 인수했다가 거대한 적자를 보고 발을 뺀 것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지금은 구글의 품에 가 있고, 삼성의 소프트웨어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 안드로이드 인수 실패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삼성에 인수 제안을 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한 안드로이드 창업주 앤디 루빈에게 '인원 6명으로 어떻게 OS를 만드냐?'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들은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 M&A는 늘 다짐하는 길이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길이다. 한종희 부회장은 이미 지난 2021년,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를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2023년 1월 CES에서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2024년 1월 CES에서도 “삼성의 리더십 강화를 위한 대형 M&A 준비를 착실히 해오고 있다”며 “잘되고 있다”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올해도 한 부회장은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말했지만, 여전히 안갯속이다. |
위기의 삼성을 조망하는 연속기사입니다. 다양한 기업과 비교하고, 여러 전문가의 분석을 경청하며 삼성의 현주소를 살핍니다. 구독해 두시면, 삼성 위기의 이유와 극복의 실마리를 살필 수 있습니다. ① [D램] 젠슨, 삼성이 왜 HBM을 새로 설계해야 하죠? ② [모바일] 애플과 삼성의 격차, 이제는 17배 ③ [파운드리] 삼성도 TSMC처럼 망하던 기업 '세계 1위' 만들 수 있나 ④ [세 번째 사과] 축제인 하이닉스, 세 번째 사과가 두려운 삼성 ⑤ [딥시크와 삼성] 딥시크가 준 AI 희망, 삼성의 희망과 무관하다 ⑥ [불닭볶음면과 삼성] 삼성전자도 불닭볶음면을 내놓을 수 있을까 (추후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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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민 기자 seo01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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