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불꽃 가네코 후미코…“내 이름은 박문자”
입력 2025.02.28 (21:45)
수정 2025.02.2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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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중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혀진 분들이 많습니다.
독립운동의 대가를 바란 건 아니겠지만,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KBS대전총국에서는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지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잊혀지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세종시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고, 남편인 박열 열사와 항일투쟁에 앞장 선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불꽃같은 생애를 돌아봅니다.
박연선 기자입니다.
[리포트]
["박열과 같이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일본 판사에게 공범을 자처하며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처벌해 달라고 나서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 열사와 함께 일왕 암살 계획을 세우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18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독립유공자에 추서됐습니다.
1903년생인 후미코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10대 시절, 세종시 부강면에서 7년을 보냈습니다.
이곳은 후미코 씨가 살았던 집터입니다.
당시 이 인근에는 한국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불우한 가정사에 일본을 떠나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친척 고모집에서도 식모나 다름없이 학대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후미코는 부강공립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노영민/부강초등학교 교사 : "지금의 '수우미양가'에 해당하는 그 당시 '갑을병정'으로 표기돼 있는데, 대부분 갑, 가끔 을이 있는 것으로 봐서 학업에 굉장히 열심히 정진하셨던 것으로…."]
후미코는 1919년 부강역에서 만세운동을 지켜보며 조선인들의 처지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했습니다.
이어 일본으로 돌아가 수년간 고학을 이어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박열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의기투합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규상/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 추진위원장 : "부강헌병대를 본 거예요. 보면 모진 매를 맞고 있는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걸 보고 나서 '아, 일본은 이게 아닌데, 우리가 바꿔야 하는데', 이런 걸 느꼈던 거예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 때 보호 검속 명목으로 경찰에 구금됐다가, 일왕 처단 계획 등이 밝혀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사를 받으며 일제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전향을 제의받았지만 단연히 거부하면서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1926년, 23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이름은 남편 박열의 성을 딴 한국 이름 '박문자'였습니다.
KBS 뉴스 박연선입니다.
촬영기자:유민철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중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혀진 분들이 많습니다.
독립운동의 대가를 바란 건 아니겠지만,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KBS대전총국에서는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지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잊혀지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세종시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고, 남편인 박열 열사와 항일투쟁에 앞장 선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불꽃같은 생애를 돌아봅니다.
박연선 기자입니다.
[리포트]
["박열과 같이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일본 판사에게 공범을 자처하며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처벌해 달라고 나서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 열사와 함께 일왕 암살 계획을 세우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18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독립유공자에 추서됐습니다.
1903년생인 후미코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10대 시절, 세종시 부강면에서 7년을 보냈습니다.
이곳은 후미코 씨가 살았던 집터입니다.
당시 이 인근에는 한국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불우한 가정사에 일본을 떠나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친척 고모집에서도 식모나 다름없이 학대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후미코는 부강공립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노영민/부강초등학교 교사 : "지금의 '수우미양가'에 해당하는 그 당시 '갑을병정'으로 표기돼 있는데, 대부분 갑, 가끔 을이 있는 것으로 봐서 학업에 굉장히 열심히 정진하셨던 것으로…."]
후미코는 1919년 부강역에서 만세운동을 지켜보며 조선인들의 처지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했습니다.
이어 일본으로 돌아가 수년간 고학을 이어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박열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의기투합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규상/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 추진위원장 : "부강헌병대를 본 거예요. 보면 모진 매를 맞고 있는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걸 보고 나서 '아, 일본은 이게 아닌데, 우리가 바꿔야 하는데', 이런 걸 느꼈던 거예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 때 보호 검속 명목으로 경찰에 구금됐다가, 일왕 처단 계획 등이 밝혀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사를 받으며 일제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전향을 제의받았지만 단연히 거부하면서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1926년, 23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이름은 남편 박열의 성을 딴 한국 이름 '박문자'였습니다.
KBS 뉴스 박연선입니다.
촬영기자:유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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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2-28 21:45:16
- 수정2025-02-28 22: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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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중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혀진 분들이 많습니다.
독립운동의 대가를 바란 건 아니겠지만,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KBS대전총국에서는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지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잊혀지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세종시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고, 남편인 박열 열사와 항일투쟁에 앞장 선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불꽃같은 생애를 돌아봅니다.
박연선 기자입니다.
[리포트]
["박열과 같이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일본 판사에게 공범을 자처하며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처벌해 달라고 나서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 열사와 함께 일왕 암살 계획을 세우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18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독립유공자에 추서됐습니다.
1903년생인 후미코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10대 시절, 세종시 부강면에서 7년을 보냈습니다.
이곳은 후미코 씨가 살았던 집터입니다.
당시 이 인근에는 한국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불우한 가정사에 일본을 떠나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친척 고모집에서도 식모나 다름없이 학대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후미코는 부강공립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노영민/부강초등학교 교사 : "지금의 '수우미양가'에 해당하는 그 당시 '갑을병정'으로 표기돼 있는데, 대부분 갑, 가끔 을이 있는 것으로 봐서 학업에 굉장히 열심히 정진하셨던 것으로…."]
후미코는 1919년 부강역에서 만세운동을 지켜보며 조선인들의 처지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했습니다.
이어 일본으로 돌아가 수년간 고학을 이어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박열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의기투합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규상/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 추진위원장 : "부강헌병대를 본 거예요. 보면 모진 매를 맞고 있는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걸 보고 나서 '아, 일본은 이게 아닌데, 우리가 바꿔야 하는데', 이런 걸 느꼈던 거예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 때 보호 검속 명목으로 경찰에 구금됐다가, 일왕 처단 계획 등이 밝혀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사를 받으며 일제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전향을 제의받았지만 단연히 거부하면서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1926년, 23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이름은 남편 박열의 성을 딴 한국 이름 '박문자'였습니다.
KBS 뉴스 박연선입니다.
촬영기자:유민철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중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혀진 분들이 많습니다.
독립운동의 대가를 바란 건 아니겠지만,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KBS대전총국에서는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지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잊혀지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세종시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고, 남편인 박열 열사와 항일투쟁에 앞장 선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불꽃같은 생애를 돌아봅니다.
박연선 기자입니다.
[리포트]
["박열과 같이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일본 판사에게 공범을 자처하며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처벌해 달라고 나서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 열사와 함께 일왕 암살 계획을 세우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18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독립유공자에 추서됐습니다.
1903년생인 후미코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10대 시절, 세종시 부강면에서 7년을 보냈습니다.
이곳은 후미코 씨가 살았던 집터입니다.
당시 이 인근에는 한국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불우한 가정사에 일본을 떠나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친척 고모집에서도 식모나 다름없이 학대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후미코는 부강공립심상소학교와 고등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노영민/부강초등학교 교사 : "지금의 '수우미양가'에 해당하는 그 당시 '갑을병정'으로 표기돼 있는데, 대부분 갑, 가끔 을이 있는 것으로 봐서 학업에 굉장히 열심히 정진하셨던 것으로…."]
후미코는 1919년 부강역에서 만세운동을 지켜보며 조선인들의 처지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했습니다.
이어 일본으로 돌아가 수년간 고학을 이어가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박열 등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의기투합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규상/가네코후미코 선양사업 추진위원장 : "부강헌병대를 본 거예요. 보면 모진 매를 맞고 있는 조선인들을, 억압하는 걸 보고 나서 '아, 일본은 이게 아닌데, 우리가 바꿔야 하는데', 이런 걸 느꼈던 거예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 때 보호 검속 명목으로 경찰에 구금됐다가, 일왕 처단 계획 등이 밝혀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사를 받으며 일제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전향을 제의받았지만 단연히 거부하면서 결국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1926년, 23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이름은 남편 박열의 성을 딴 한국 이름 '박문자'였습니다.
KBS 뉴스 박연선입니다.
촬영기자:유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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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선 기자 zi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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