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코스트 전 미 국무차관 별세…전두환에 ‘계엄 우려’ 전해
입력 2025.03.13 (19:41)
수정 2025.03.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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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미국 국무부 차관이 지난 8일 샌프란시스코 근교 자택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현지 시각 13일 NHK가 보도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고인은 1965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주일 미국대사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한 고인은 이후 주필리핀 대사와 국무부 차관을 지냈습니다.
고인은 국무부 차관 당시인 1987년 한국에서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고민한 것과 관련해 주미 대사에게 “설사 부득이한 경우라 하더라도 계엄령이나 위수령 선포 등 비상 수단을 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다양한 경로로 비상조치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의사를 한국 측에 전달했고,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습니다.
고인은 조지 H.W.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1989년 주일 대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걸프전에 일본 자위대 파견을 요구하고 미일 무역 마찰이 심각한 상황에서 쌀 시장 개방 등 규제 완화 압력을 가해 일본 측으로부터 ‘미스터 외압’으로도 불렸다고 NHK는 전했습니다.
주일 미국대사에서 물러난 뒤에는 브루킹스연구소 소장과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특별연구원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스탠퍼드대 홈페이지 캡처]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고인은 1965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주일 미국대사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한 고인은 이후 주필리핀 대사와 국무부 차관을 지냈습니다.
고인은 국무부 차관 당시인 1987년 한국에서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고민한 것과 관련해 주미 대사에게 “설사 부득이한 경우라 하더라도 계엄령이나 위수령 선포 등 비상 수단을 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다양한 경로로 비상조치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의사를 한국 측에 전달했고,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습니다.
고인은 조지 H.W.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1989년 주일 대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걸프전에 일본 자위대 파견을 요구하고 미일 무역 마찰이 심각한 상황에서 쌀 시장 개방 등 규제 완화 압력을 가해 일본 측으로부터 ‘미스터 외압’으로도 불렸다고 NHK는 전했습니다.
주일 미국대사에서 물러난 뒤에는 브루킹스연구소 소장과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특별연구원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스탠퍼드대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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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코스트 전 미 국무차관 별세…전두환에 ‘계엄 우려’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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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3-13 19:41:51
- 수정2025-03-13 20:01:14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미국 국무부 차관이 지난 8일 샌프란시스코 근교 자택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현지 시각 13일 NHK가 보도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고인은 1965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주일 미국대사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한 고인은 이후 주필리핀 대사와 국무부 차관을 지냈습니다.
고인은 국무부 차관 당시인 1987년 한국에서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고민한 것과 관련해 주미 대사에게 “설사 부득이한 경우라 하더라도 계엄령이나 위수령 선포 등 비상 수단을 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다양한 경로로 비상조치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의사를 한국 측에 전달했고,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습니다.
고인은 조지 H.W.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1989년 주일 대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걸프전에 일본 자위대 파견을 요구하고 미일 무역 마찰이 심각한 상황에서 쌀 시장 개방 등 규제 완화 압력을 가해 일본 측으로부터 ‘미스터 외압’으로도 불렸다고 NHK는 전했습니다.
주일 미국대사에서 물러난 뒤에는 브루킹스연구소 소장과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특별연구원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스탠퍼드대 홈페이지 캡처]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고인은 1965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주일 미국대사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한 고인은 이후 주필리핀 대사와 국무부 차관을 지냈습니다.
고인은 국무부 차관 당시인 1987년 한국에서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고민한 것과 관련해 주미 대사에게 “설사 부득이한 경우라 하더라도 계엄령이나 위수령 선포 등 비상 수단을 발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다양한 경로로 비상조치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의사를 한국 측에 전달했고,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습니다.
고인은 조지 H.W. 부시 행정부 시절이던 1989년 주일 대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걸프전에 일본 자위대 파견을 요구하고 미일 무역 마찰이 심각한 상황에서 쌀 시장 개방 등 규제 완화 압력을 가해 일본 측으로부터 ‘미스터 외압’으로도 불렸다고 NHK는 전했습니다.
주일 미국대사에서 물러난 뒤에는 브루킹스연구소 소장과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특별연구원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스탠퍼드대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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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원 기자 hey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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