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한평생 ‘이산의 한’…한 권 책으로
입력 2025.04.19 (08:35)
수정 2025.04.19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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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피난길이 긴 이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산가족에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깊게 남아있는데요.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간절히 바라는 이산가족의 사연 하나하나가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헤어진 가족의 기억을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기록입니다.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시간들과 오랜 기다림의 기록을 정미정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1950년 6.25 전쟁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2025년 2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4,416명 중 생존자는 36,550명.
전체의 약 27.2%에 불과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현재 3만 6천여 명의 이산가족 평균 연령은 83세가 되십니다. 80대 이상의 고령이 많다 보니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 확인이나 상봉을 못 한 채 돌아가시는 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온몸을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더 늦기 전에 꼭 남겨야 할 기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산가족의 기억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전달하는 날입니다.
["생애보 전달하러 왔습니다. 2개월 만에 또 찾아뵙습니다."]
생애보의 주인공은 70여 년의 세월 동안 헤어진 가족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는 장천식 씨.
고향의 추억은 물론 삶의 씨줄과 날줄을 고스란히 이 책에 풀어냈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에서 살 때, 어렸을 때 생활 모습과 (피난) 나와서 교직 생활하면서 보람된 이야기 이런 것이 수록돼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2023년부터 이들의 생애사를 남기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25편의 생애보가 발간됐습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가족과) 헤어지게 된 배경, 그리고 헤어지기 전과 헤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자서전적인 성격으로 저희가 생애보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6개월 동안 구술과 검수를 거쳐 정성스레 엮은 기록이 마침내 주인공에게 전달됩니다.
장천식 할아버지는 아직도 또렷하게 고향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소정리 494번지.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제 여동생 둘하고 그렇게 살았죠."]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깝지만 먼 나의 고향."]
책 제목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책 제목 마음에 드세요?) 네, 아주 참 마음에 쏙 듭니다.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내 고향 거기만 못 가는구나’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 애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생애보는 이산가족의 생애를 기록한 사료이자, 언젠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해질 간절한 편지라고 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저희가 생애보를 총 한 분당 다섯 권을 제작합니다. 그중에 특히 두 권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달하는 목적으로 저희가 갖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터졌던 전쟁.
당시 스물셋이던 청년은, 홀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인천에서 대부도 가실 때 이야기인가 봐요."]
곧 돌아갈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97살인 지금까지도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당분간 한두 달 그저 피난했다가 돌아오면 되겠지. 석 달 안에 고향에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분단 이후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네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는데요.
["1957년도인가, 1958년도인가 그렇게 됩니다."]
1950년부터 40년 넘게 교직에 몸담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헤어진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끝내 달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부모님은 몸이 허약하셨는데 말년에는 누가 보살폈을까. 보답을 못 해 드린 것이 무척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2000년 처음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2018년까지 21차례의 대면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진행됐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산가족이 단 한 번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7조에 의해서 이산가족 재회 사업을 하도록 명시돼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에 제안하면서 현재까지 저희가 정부와 함께 협력해서 이산가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아무런 소식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가 떠오른다. 가슴이 저린다."]
눈을 감으면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한 이산가족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긴 세월의 이야기를 담은 생애보를 안고,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양이 고향인 임화숙 씨에게 전달된 책자.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 생애보 작업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슬픈 이야기지만 언니들 세 분이 이북에 있어요. 그런데 헤어진 다음에 70년이 넘었는데 마음속에만 있죠. 헤어진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꼭 남기고 싶었어요.
특히나 피난길에 납북된 아버지는 긴 시간 그리움으로 남았는데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나눈 따뜻한 기억은 열여섯 살, 그때의 시간에 멈춰 서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자상하시고, 인자하셔서 흔한 말로 계집애 이런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임화숙 씨가 아버지에게 건넸던 마지막 한마디는 생애보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이 없고 음식을 잡수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나면 국립도서관으로 가게 될 거라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아버지 만나면 아버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햇살이 따뜻해지는 봄.
이 계절이 오면, 고향 생각은 더욱 사무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봄 되면 모란봉에 올라가면 그 꽃이 진달래, 개나리, 벚꽃 아주 만발해요. 진짜 가고 싶어요. 진짜 너무너무.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긴 세월의 설움을 묻어두고, 오직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 바람은 오늘도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어 나부끼고 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우리 1세대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래요. 나도 10년을 살겠어요? 내일도 모르지만 어쨌든지 이산가족이 서로 소식이라도 알 수 있도록 그걸 이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피난길이 긴 이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산가족에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깊게 남아있는데요.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간절히 바라는 이산가족의 사연 하나하나가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헤어진 가족의 기억을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기록입니다.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시간들과 오랜 기다림의 기록을 정미정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1950년 6.25 전쟁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2025년 2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4,416명 중 생존자는 36,550명.
전체의 약 27.2%에 불과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현재 3만 6천여 명의 이산가족 평균 연령은 83세가 되십니다. 80대 이상의 고령이 많다 보니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 확인이나 상봉을 못 한 채 돌아가시는 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온몸을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더 늦기 전에 꼭 남겨야 할 기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산가족의 기억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전달하는 날입니다.
["생애보 전달하러 왔습니다. 2개월 만에 또 찾아뵙습니다."]
생애보의 주인공은 70여 년의 세월 동안 헤어진 가족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는 장천식 씨.
고향의 추억은 물론 삶의 씨줄과 날줄을 고스란히 이 책에 풀어냈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에서 살 때, 어렸을 때 생활 모습과 (피난) 나와서 교직 생활하면서 보람된 이야기 이런 것이 수록돼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2023년부터 이들의 생애사를 남기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25편의 생애보가 발간됐습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가족과) 헤어지게 된 배경, 그리고 헤어지기 전과 헤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자서전적인 성격으로 저희가 생애보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6개월 동안 구술과 검수를 거쳐 정성스레 엮은 기록이 마침내 주인공에게 전달됩니다.
장천식 할아버지는 아직도 또렷하게 고향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소정리 494번지.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제 여동생 둘하고 그렇게 살았죠."]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깝지만 먼 나의 고향."]
책 제목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책 제목 마음에 드세요?) 네, 아주 참 마음에 쏙 듭니다.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내 고향 거기만 못 가는구나’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 애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생애보는 이산가족의 생애를 기록한 사료이자, 언젠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해질 간절한 편지라고 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저희가 생애보를 총 한 분당 다섯 권을 제작합니다. 그중에 특히 두 권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달하는 목적으로 저희가 갖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터졌던 전쟁.
당시 스물셋이던 청년은, 홀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인천에서 대부도 가실 때 이야기인가 봐요."]
곧 돌아갈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97살인 지금까지도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당분간 한두 달 그저 피난했다가 돌아오면 되겠지. 석 달 안에 고향에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분단 이후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네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는데요.
["1957년도인가, 1958년도인가 그렇게 됩니다."]
1950년부터 40년 넘게 교직에 몸담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헤어진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끝내 달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부모님은 몸이 허약하셨는데 말년에는 누가 보살폈을까. 보답을 못 해 드린 것이 무척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2000년 처음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2018년까지 21차례의 대면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진행됐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산가족이 단 한 번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7조에 의해서 이산가족 재회 사업을 하도록 명시돼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에 제안하면서 현재까지 저희가 정부와 함께 협력해서 이산가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아무런 소식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가 떠오른다. 가슴이 저린다."]
눈을 감으면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한 이산가족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긴 세월의 이야기를 담은 생애보를 안고,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양이 고향인 임화숙 씨에게 전달된 책자.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 생애보 작업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슬픈 이야기지만 언니들 세 분이 이북에 있어요. 그런데 헤어진 다음에 70년이 넘었는데 마음속에만 있죠. 헤어진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꼭 남기고 싶었어요.
특히나 피난길에 납북된 아버지는 긴 시간 그리움으로 남았는데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나눈 따뜻한 기억은 열여섯 살, 그때의 시간에 멈춰 서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자상하시고, 인자하셔서 흔한 말로 계집애 이런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임화숙 씨가 아버지에게 건넸던 마지막 한마디는 생애보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이 없고 음식을 잡수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나면 국립도서관으로 가게 될 거라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아버지 만나면 아버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햇살이 따뜻해지는 봄.
이 계절이 오면, 고향 생각은 더욱 사무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봄 되면 모란봉에 올라가면 그 꽃이 진달래, 개나리, 벚꽃 아주 만발해요. 진짜 가고 싶어요. 진짜 너무너무.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긴 세월의 설움을 묻어두고, 오직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 바람은 오늘도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어 나부끼고 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우리 1세대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래요. 나도 10년을 살겠어요? 내일도 모르지만 어쨌든지 이산가족이 서로 소식이라도 알 수 있도록 그걸 이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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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로 미래로] 한평생 ‘이산의 한’…한 권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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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4-19 08:35:15
- 수정2025-04-19 08:46:38

[앵커]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피난길이 긴 이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산가족에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깊게 남아있는데요.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간절히 바라는 이산가족의 사연 하나하나가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헤어진 가족의 기억을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기록입니다.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시간들과 오랜 기다림의 기록을 정미정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1950년 6.25 전쟁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2025년 2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4,416명 중 생존자는 36,550명.
전체의 약 27.2%에 불과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현재 3만 6천여 명의 이산가족 평균 연령은 83세가 되십니다. 80대 이상의 고령이 많다 보니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 확인이나 상봉을 못 한 채 돌아가시는 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온몸을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더 늦기 전에 꼭 남겨야 할 기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산가족의 기억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전달하는 날입니다.
["생애보 전달하러 왔습니다. 2개월 만에 또 찾아뵙습니다."]
생애보의 주인공은 70여 년의 세월 동안 헤어진 가족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는 장천식 씨.
고향의 추억은 물론 삶의 씨줄과 날줄을 고스란히 이 책에 풀어냈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에서 살 때, 어렸을 때 생활 모습과 (피난) 나와서 교직 생활하면서 보람된 이야기 이런 것이 수록돼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2023년부터 이들의 생애사를 남기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25편의 생애보가 발간됐습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가족과) 헤어지게 된 배경, 그리고 헤어지기 전과 헤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자서전적인 성격으로 저희가 생애보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6개월 동안 구술과 검수를 거쳐 정성스레 엮은 기록이 마침내 주인공에게 전달됩니다.
장천식 할아버지는 아직도 또렷하게 고향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소정리 494번지.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제 여동생 둘하고 그렇게 살았죠."]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깝지만 먼 나의 고향."]
책 제목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책 제목 마음에 드세요?) 네, 아주 참 마음에 쏙 듭니다.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내 고향 거기만 못 가는구나’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 애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생애보는 이산가족의 생애를 기록한 사료이자, 언젠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해질 간절한 편지라고 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저희가 생애보를 총 한 분당 다섯 권을 제작합니다. 그중에 특히 두 권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달하는 목적으로 저희가 갖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터졌던 전쟁.
당시 스물셋이던 청년은, 홀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인천에서 대부도 가실 때 이야기인가 봐요."]
곧 돌아갈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97살인 지금까지도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당분간 한두 달 그저 피난했다가 돌아오면 되겠지. 석 달 안에 고향에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분단 이후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네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는데요.
["1957년도인가, 1958년도인가 그렇게 됩니다."]
1950년부터 40년 넘게 교직에 몸담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헤어진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끝내 달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부모님은 몸이 허약하셨는데 말년에는 누가 보살폈을까. 보답을 못 해 드린 것이 무척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2000년 처음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2018년까지 21차례의 대면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진행됐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산가족이 단 한 번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7조에 의해서 이산가족 재회 사업을 하도록 명시돼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에 제안하면서 현재까지 저희가 정부와 함께 협력해서 이산가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아무런 소식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가 떠오른다. 가슴이 저린다."]
눈을 감으면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한 이산가족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긴 세월의 이야기를 담은 생애보를 안고,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양이 고향인 임화숙 씨에게 전달된 책자.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 생애보 작업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슬픈 이야기지만 언니들 세 분이 이북에 있어요. 그런데 헤어진 다음에 70년이 넘었는데 마음속에만 있죠. 헤어진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꼭 남기고 싶었어요.
특히나 피난길에 납북된 아버지는 긴 시간 그리움으로 남았는데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나눈 따뜻한 기억은 열여섯 살, 그때의 시간에 멈춰 서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자상하시고, 인자하셔서 흔한 말로 계집애 이런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임화숙 씨가 아버지에게 건넸던 마지막 한마디는 생애보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이 없고 음식을 잡수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나면 국립도서관으로 가게 될 거라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아버지 만나면 아버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햇살이 따뜻해지는 봄.
이 계절이 오면, 고향 생각은 더욱 사무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봄 되면 모란봉에 올라가면 그 꽃이 진달래, 개나리, 벚꽃 아주 만발해요. 진짜 가고 싶어요. 진짜 너무너무.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긴 세월의 설움을 묻어두고, 오직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 바람은 오늘도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어 나부끼고 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우리 1세대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래요. 나도 10년을 살겠어요? 내일도 모르지만 어쨌든지 이산가족이 서로 소식이라도 알 수 있도록 그걸 이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피난길이 긴 이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산가족에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깊게 남아있는데요.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단 한 번의 만남이라도 간절히 바라는 이산가족의 사연 하나하나가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헤어진 가족의 기억을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기록입니다.
가깝지만 닿을 수 없는 고향의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시간들과 오랜 기다림의 기록을 정미정 리포터가 만나봤습니다.
[리포트]
1950년 6.25 전쟁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2025년 2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4,416명 중 생존자는 36,550명.
전체의 약 27.2%에 불과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현재 3만 6천여 명의 이산가족 평균 연령은 83세가 되십니다. 80대 이상의 고령이 많다 보니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 확인이나 상봉을 못 한 채 돌아가시는 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온몸을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이산가족 생애보는 더 늦기 전에 꼭 남겨야 할 기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산가족의 기억을 담은 한 권의 책을 전달하는 날입니다.
["생애보 전달하러 왔습니다. 2개월 만에 또 찾아뵙습니다."]
생애보의 주인공은 70여 년의 세월 동안 헤어진 가족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는 장천식 씨.
고향의 추억은 물론 삶의 씨줄과 날줄을 고스란히 이 책에 풀어냈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에서 살 때, 어렸을 때 생활 모습과 (피난) 나와서 교직 생활하면서 보람된 이야기 이런 것이 수록돼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2023년부터 이들의 생애사를 남기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25편의 생애보가 발간됐습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가족과) 헤어지게 된 배경, 그리고 헤어지기 전과 헤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자서전적인 성격으로 저희가 생애보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6개월 동안 구술과 검수를 거쳐 정성스레 엮은 기록이 마침내 주인공에게 전달됩니다.
장천식 할아버지는 아직도 또렷하게 고향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장천식/이산가족 :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 소정리 494번지.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제 여동생 둘하고 그렇게 살았죠."]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깝지만 먼 나의 고향."]
책 제목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책 제목 마음에 드세요?) 네, 아주 참 마음에 쏙 듭니다.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 내 고향 거기만 못 가는구나’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 애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생애보는 이산가족의 생애를 기록한 사료이자, 언젠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해질 간절한 편지라고 합니다.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저희가 생애보를 총 한 분당 다섯 권을 제작합니다. 그중에 특히 두 권은 북에 있는 가족에게 전달하는 목적으로 저희가 갖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터졌던 전쟁.
당시 스물셋이던 청년은, 홀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인천에서 대부도 가실 때 이야기인가 봐요."]
곧 돌아갈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97살인 지금까지도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당분간 한두 달 그저 피난했다가 돌아오면 되겠지. 석 달 안에 고향에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분단 이후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네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는데요.
["1957년도인가, 1958년도인가 그렇게 됩니다."]
1950년부터 40년 넘게 교직에 몸담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헤어진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끝내 달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장천식/이산가족 : "부모님은 몸이 허약하셨는데 말년에는 누가 보살폈을까. 보답을 못 해 드린 것이 무척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2000년 처음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2018년까지 21차례의 대면 상봉과 7차례의 화상 상봉이 진행됐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산가족이 단 한 번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윤지영/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장 :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제7조에 의해서 이산가족 재회 사업을 하도록 명시돼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에 제안하면서 현재까지 저희가 정부와 함께 협력해서 이산가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아무런 소식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가 떠오른다. 가슴이 저린다."]
눈을 감으면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한 이산가족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긴 세월의 이야기를 담은 생애보를 안고,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양이 고향인 임화숙 씨에게 전달된 책자.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 생애보 작업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슬픈 이야기지만 언니들 세 분이 이북에 있어요. 그런데 헤어진 다음에 70년이 넘었는데 마음속에만 있죠. 헤어진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꼭 남기고 싶었어요.
특히나 피난길에 납북된 아버지는 긴 시간 그리움으로 남았는데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나눈 따뜻한 기억은 열여섯 살, 그때의 시간에 멈춰 서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자상하시고, 인자하셔서 흔한 말로 계집애 이런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임화숙 씨가 아버지에게 건넸던 마지막 한마디는 생애보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이 없고 음식을 잡수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밥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나면 국립도서관으로 가게 될 거라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아버지 만나면 아버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햇살이 따뜻해지는 봄.
이 계절이 오면, 고향 생각은 더욱 사무칩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봄 되면 모란봉에 올라가면 그 꽃이 진달래, 개나리, 벚꽃 아주 만발해요. 진짜 가고 싶어요. 진짜 너무너무.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긴 세월의 설움을 묻어두고, 오직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은 바람은 오늘도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어 나부끼고 있습니다.
[임화숙/이산가족 : "우리 1세대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래요. 나도 10년을 살겠어요? 내일도 모르지만 어쨌든지 이산가족이 서로 소식이라도 알 수 있도록 그걸 이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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