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 버리고 무장투쟁, 항일 명장 양기하

입력 2025.05.09 (19:47) 수정 2025.05.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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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복 80주년을 맞아 잊혀지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보도 순서입니다.

오늘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관직을 버린 채 만주로 망명해 무장 투쟁을 지휘하다 순국한 계룡 출신의 항일명장, 하산 양기하 선생의 결기 넘치는 삶을 돌아봅니다.

백상현 기자입니다.

[리포트]

1878년, 지금의 계룡시에서 태어난 양기하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공주군수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1910년 주권을 잃자 관직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독립운동의 중요 근거지였던 중국 서간도 지역에서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독립단을 결성해 무장 투쟁을 펼쳤습니다.

특히 당시 7가살(可殺)로 불리던 친일 부호 등을 암살하는 과정에서 설계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은지/독립기념관 연구위원 : "국내로 독립군을 보내서 군자금을 모집하는가 하면 국내의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리거나 일제의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외교 분야에서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21년 상해로 간 양기하 선생은 임시정부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도의원으로 선출돼 활동하면서 같은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 회의가 열리자 동료 의원 25명과 독립청원서를 발송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외교 노선의 한계를 느끼고 이듬해 다시 무장 투쟁에 나서 군인 양성과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병회를 설립했습니다.

[김은지/독립기념관 연구위원 :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군사 그리고 군비가 있어야 된다.' 그것을 양성하기 위한…."]

하지만 만주에서 이어간 무장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무장 투쟁에 힘쓰던 양기하 장군은 1932년 중국에서 일본군 경찰대와 만주군의 협공을 받아 끝내 전사했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생가터는 수풀이 우거진 채 방치돼 있다시피 합니다.

[김용우/마을 이장 : "'아 그래도 위인들이 계셨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는 후손으로서 그걸(환경 조성) 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직 조국 독립을 길만 바라본 항일 명장 양기하, 투쟁의 역사로 기록된 선생의 삶은 큰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KBS 뉴스 백상현입니다.

촬영기자:유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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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직 버리고 무장투쟁, 항일 명장 양기하
    • 입력 2025-05-09 19:47:07
    • 수정2025-05-09 22:00:30
    뉴스7(대전)
[앵커]

광복 80주년을 맞아 잊혀지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보도 순서입니다.

오늘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관직을 버린 채 만주로 망명해 무장 투쟁을 지휘하다 순국한 계룡 출신의 항일명장, 하산 양기하 선생의 결기 넘치는 삶을 돌아봅니다.

백상현 기자입니다.

[리포트]

1878년, 지금의 계룡시에서 태어난 양기하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공주군수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1910년 주권을 잃자 관직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독립운동의 중요 근거지였던 중국 서간도 지역에서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독립단을 결성해 무장 투쟁을 펼쳤습니다.

특히 당시 7가살(可殺)로 불리던 친일 부호 등을 암살하는 과정에서 설계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은지/독립기념관 연구위원 : "국내로 독립군을 보내서 군자금을 모집하는가 하면 국내의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리거나 일제의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외교 분야에서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21년 상해로 간 양기하 선생은 임시정부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도의원으로 선출돼 활동하면서 같은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 회의가 열리자 동료 의원 25명과 독립청원서를 발송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외교 노선의 한계를 느끼고 이듬해 다시 무장 투쟁에 나서 군인 양성과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병회를 설립했습니다.

[김은지/독립기념관 연구위원 :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군사 그리고 군비가 있어야 된다.' 그것을 양성하기 위한…."]

하지만 만주에서 이어간 무장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무장 투쟁에 힘쓰던 양기하 장군은 1932년 중국에서 일본군 경찰대와 만주군의 협공을 받아 끝내 전사했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생가터는 수풀이 우거진 채 방치돼 있다시피 합니다.

[김용우/마을 이장 : "'아 그래도 위인들이 계셨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는 후손으로서 그걸(환경 조성) 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직 조국 독립을 길만 바라본 항일 명장 양기하, 투쟁의 역사로 기록된 선생의 삶은 큰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KBS 뉴스 백상현입니다.

촬영기자:유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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