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실향민 품은 마을…문화 공간 재탄생
입력 2025.05.10 (08:29)
수정 2025.05.1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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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 보내신 분들 많을 텐데요.
하지만 이즈음이면 고향 생각이 더 깊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쪽 땅에서 북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실향민들인데요.
인천 미추홀구의 작은 언덕 위, ‘아리마을’엔 전쟁 통에 삶터를 잃은 실향민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 뿌리내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궈냈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엔 고향의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지금은 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데요.
정미정 리포터가 소개합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인천의 어느 작은 마을.
햇살이 스며드는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렇게 골목골목마다 아리마을의 역사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담장 아래에는 색도 향기도 제각각인 꽃들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전합니다.
마침 화단을 손질하는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꽃이 만발한 마을에 생기가 감도는데요.
["(지금 뭐 하고 있으신 거예요?) 아리마을 꽃을 심고 있습니다. (아리마을 꽃.) 네."]
깜짝 인사에, 덩달아 웃음꽃이 번집니다.
["선물! (저 받아도 되는 거예요?) 네."]
다정한 온기를 품은 아리마을.
이곳에는 아리고 쓰린 실향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6.25 전쟁과 1.4 후퇴 때 피난민들이 오셔서 자리를 잡아서 허허벌판이었던 데가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자리를 한 분 한 분 잡다 보니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셨죠. 아리마을이라고 하는 것도 ‘아리고 쓰리다’라고 하는 것."]
아리마을에는 갈 수 없는 고향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담장마다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가며 그 애틋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은 골목길에 벽화들이 길동무하듯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옛날 감성 그대로.) 네, 옛날 감성으로."]
1960년대 이후부터, 그 시절의 생활 풍경을 담은 그림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우리가 또 설명하는 거죠. 아빠 시대에는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을 특유의 역사와 정취 덕분에 드라마 촬영지로 주목받기도 했는데요.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난 김종섭 할아버지.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일신면 제산리. (주소를 다 기억하신다.) 네 그거는 기억해요."]
6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남으로 피난 왔다고 합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다 죽어가는 걸 업고 나와서 그래도 이날 이때까지 산 거예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남녘 땅에서 어린 소년의 삶은 그리 녹록하진 않았습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생한 거 생각하면 말도 못 하죠. 여기 넘어와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염전에 바로 들어간 거죠. 그래서 염전 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먹고 하다 보니까 인천으로 와서 취직한다 해서 여기 와서 살게 됐어요."]
오랜 세월 실향민들의 벗이 되어준 느티나무 앞에서, 나지막이 남은 소망을 이야기하는데요.
["그냥 고향이나 한번 밟는 게 원이지."]
주민들은 수시로 느티나무 아래 모여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눴고, 봄이 오면 이렇게 꽃을 가꿉니다.
[이점덕/아리마을 주민 :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다 함께 (꽃을 심어요.) 마을 저 위로 가면 또 꽃길이 있어요. 다 자기 집 앞에 자기가 나와서 꽃을 가꿉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리마을의 마을 꽃, ‘사피니아’입니다.
["(심으신 꽃이 무슨 꽃이에요?) 사피니아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합니다’라는 뜻이랍니다."]
함께해서 행복하다는 주민들로 사랑방 앞이 북적이는데요.
아리마을 최고령 김정녀 할머니가 살갑게 맞이합니다.
["(너무 정정하세요.) 잔치했어요. (잔치도 하셨어요?) 100세 잔치. (저 나중에 꿈이 100세 생일파티 하는 건데.)"]
[김정녀/아리마을 주민 : "백령도가 옛날에 이북이야. 이북인데 백령도 출생 이야, 내가. 백령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20대에 피난을 와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는 할머니.
피난민들에게 마을은 제2의 고향이 됐는데요.
이날 사랑방에선 이들을 위한 작은 잔치가 마련됐습니다.
[최혜숙/아리마을 주민 :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이렇게 많이 잘 차려놓고 모이라 그래서 모였어요."]
황해도에서 피난 와 척박했었던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이웃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같은 고향이라도 할매는 먼저 나오시고 나는 늦게 나왔죠. (몇 살에 나오셨어요?) 8살 때 나왔어요. 인천 (피난) 와서 천막을 치고 사람 자는데 이렇게 보따리로 칸을 막고 살더라고요."]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카네이션으로 달래보는데요.
문득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다른 데는 기억이 없는데, 저 월래도, 백령도 거기서 살던 생각. 우리 엄마가 (생각나요.) 실향의 그리움을 품고."]
["한 많은 대동강아 잘 있느냐."]
마을을 일궈온 이들의 삶은 이제 또 다른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은례/아리마을 주민협의회 총무 :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꿋꿋하게 진짜 생활력 하나로 이렇게 견디면서 살아오신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다 이겨내신 분들이니까 그리고 또 이분들이 저희를 단합시킨 거예요."]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는 아리마을.
그 중심에는 과거 마을의 공동목욕탕이던 ‘양지탕’이 있습니다.
37년간 공중목욕탕이었던 이곳은 이제는 마을 주민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록관 역할도 한다는데요.
지금 들어가 보실까요?
한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목욕탕.
이제는 마을의 문화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데요.
[이은례/아리마을 주민 : "(때 밀어 드립니다. 인터폰을 이용해 주세요. 귀중품은 카운터에 보관하라고.) 가급적이면 훼손하지 않고 옛날 (정취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1982년부터 37년간 운영된 목욕탕을 지자체에서 매입한 뒤,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거쳐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난 겁니다.
[김희선/미추홀구청 자치협력과 주무관 : "여기 계신 주민분들이 직접 사업에 참여하셔서 불편한 점들을 말씀해 주시고 이렇게 어울림 공간을 만들면서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공사 당시 사진을 담은 지하 보일러실은 마을의 역사를 품은 기록관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아리마을 꽃 축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데요.
한 마을에서 꽃처럼 피어난 실향민들의 삶.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남북한이 교류할 수 있다고 하면 저희들이 앞으로 그분들 또 모시고 갈 수 있도록, 이북에서 넘어오셔서 여기까지 오셔서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구나 그걸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려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녘을 향한 통일의 염원과 함께, 아리마을은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 보내신 분들 많을 텐데요.
하지만 이즈음이면 고향 생각이 더 깊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쪽 땅에서 북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실향민들인데요.
인천 미추홀구의 작은 언덕 위, ‘아리마을’엔 전쟁 통에 삶터를 잃은 실향민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 뿌리내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궈냈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엔 고향의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지금은 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데요.
정미정 리포터가 소개합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인천의 어느 작은 마을.
햇살이 스며드는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렇게 골목골목마다 아리마을의 역사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담장 아래에는 색도 향기도 제각각인 꽃들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전합니다.
마침 화단을 손질하는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꽃이 만발한 마을에 생기가 감도는데요.
["(지금 뭐 하고 있으신 거예요?) 아리마을 꽃을 심고 있습니다. (아리마을 꽃.) 네."]
깜짝 인사에, 덩달아 웃음꽃이 번집니다.
["선물! (저 받아도 되는 거예요?) 네."]
다정한 온기를 품은 아리마을.
이곳에는 아리고 쓰린 실향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6.25 전쟁과 1.4 후퇴 때 피난민들이 오셔서 자리를 잡아서 허허벌판이었던 데가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자리를 한 분 한 분 잡다 보니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셨죠. 아리마을이라고 하는 것도 ‘아리고 쓰리다’라고 하는 것."]
아리마을에는 갈 수 없는 고향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담장마다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가며 그 애틋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은 골목길에 벽화들이 길동무하듯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옛날 감성 그대로.) 네, 옛날 감성으로."]
1960년대 이후부터, 그 시절의 생활 풍경을 담은 그림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우리가 또 설명하는 거죠. 아빠 시대에는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을 특유의 역사와 정취 덕분에 드라마 촬영지로 주목받기도 했는데요.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난 김종섭 할아버지.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일신면 제산리. (주소를 다 기억하신다.) 네 그거는 기억해요."]
6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남으로 피난 왔다고 합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다 죽어가는 걸 업고 나와서 그래도 이날 이때까지 산 거예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남녘 땅에서 어린 소년의 삶은 그리 녹록하진 않았습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생한 거 생각하면 말도 못 하죠. 여기 넘어와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염전에 바로 들어간 거죠. 그래서 염전 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먹고 하다 보니까 인천으로 와서 취직한다 해서 여기 와서 살게 됐어요."]
오랜 세월 실향민들의 벗이 되어준 느티나무 앞에서, 나지막이 남은 소망을 이야기하는데요.
["그냥 고향이나 한번 밟는 게 원이지."]
주민들은 수시로 느티나무 아래 모여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눴고, 봄이 오면 이렇게 꽃을 가꿉니다.
[이점덕/아리마을 주민 :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다 함께 (꽃을 심어요.) 마을 저 위로 가면 또 꽃길이 있어요. 다 자기 집 앞에 자기가 나와서 꽃을 가꿉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리마을의 마을 꽃, ‘사피니아’입니다.
["(심으신 꽃이 무슨 꽃이에요?) 사피니아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합니다’라는 뜻이랍니다."]
함께해서 행복하다는 주민들로 사랑방 앞이 북적이는데요.
아리마을 최고령 김정녀 할머니가 살갑게 맞이합니다.
["(너무 정정하세요.) 잔치했어요. (잔치도 하셨어요?) 100세 잔치. (저 나중에 꿈이 100세 생일파티 하는 건데.)"]
[김정녀/아리마을 주민 : "백령도가 옛날에 이북이야. 이북인데 백령도 출생 이야, 내가. 백령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20대에 피난을 와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는 할머니.
피난민들에게 마을은 제2의 고향이 됐는데요.
이날 사랑방에선 이들을 위한 작은 잔치가 마련됐습니다.
[최혜숙/아리마을 주민 :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이렇게 많이 잘 차려놓고 모이라 그래서 모였어요."]
황해도에서 피난 와 척박했었던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이웃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같은 고향이라도 할매는 먼저 나오시고 나는 늦게 나왔죠. (몇 살에 나오셨어요?) 8살 때 나왔어요. 인천 (피난) 와서 천막을 치고 사람 자는데 이렇게 보따리로 칸을 막고 살더라고요."]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카네이션으로 달래보는데요.
문득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다른 데는 기억이 없는데, 저 월래도, 백령도 거기서 살던 생각. 우리 엄마가 (생각나요.) 실향의 그리움을 품고."]
["한 많은 대동강아 잘 있느냐."]
마을을 일궈온 이들의 삶은 이제 또 다른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은례/아리마을 주민협의회 총무 :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꿋꿋하게 진짜 생활력 하나로 이렇게 견디면서 살아오신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다 이겨내신 분들이니까 그리고 또 이분들이 저희를 단합시킨 거예요."]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는 아리마을.
그 중심에는 과거 마을의 공동목욕탕이던 ‘양지탕’이 있습니다.
37년간 공중목욕탕이었던 이곳은 이제는 마을 주민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록관 역할도 한다는데요.
지금 들어가 보실까요?
한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목욕탕.
이제는 마을의 문화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데요.
[이은례/아리마을 주민 : "(때 밀어 드립니다. 인터폰을 이용해 주세요. 귀중품은 카운터에 보관하라고.) 가급적이면 훼손하지 않고 옛날 (정취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1982년부터 37년간 운영된 목욕탕을 지자체에서 매입한 뒤,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거쳐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난 겁니다.
[김희선/미추홀구청 자치협력과 주무관 : "여기 계신 주민분들이 직접 사업에 참여하셔서 불편한 점들을 말씀해 주시고 이렇게 어울림 공간을 만들면서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공사 당시 사진을 담은 지하 보일러실은 마을의 역사를 품은 기록관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아리마을 꽃 축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데요.
한 마을에서 꽃처럼 피어난 실향민들의 삶.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남북한이 교류할 수 있다고 하면 저희들이 앞으로 그분들 또 모시고 갈 수 있도록, 이북에서 넘어오셔서 여기까지 오셔서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구나 그걸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려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녘을 향한 통일의 염원과 함께, 아리마을은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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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5-10 08: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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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 보내신 분들 많을 텐데요.
하지만 이즈음이면 고향 생각이 더 깊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쪽 땅에서 북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실향민들인데요.
인천 미추홀구의 작은 언덕 위, ‘아리마을’엔 전쟁 통에 삶터를 잃은 실향민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 뿌리내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궈냈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엔 고향의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지금은 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데요.
정미정 리포터가 소개합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인천의 어느 작은 마을.
햇살이 스며드는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렇게 골목골목마다 아리마을의 역사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담장 아래에는 색도 향기도 제각각인 꽃들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전합니다.
마침 화단을 손질하는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꽃이 만발한 마을에 생기가 감도는데요.
["(지금 뭐 하고 있으신 거예요?) 아리마을 꽃을 심고 있습니다. (아리마을 꽃.) 네."]
깜짝 인사에, 덩달아 웃음꽃이 번집니다.
["선물! (저 받아도 되는 거예요?) 네."]
다정한 온기를 품은 아리마을.
이곳에는 아리고 쓰린 실향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6.25 전쟁과 1.4 후퇴 때 피난민들이 오셔서 자리를 잡아서 허허벌판이었던 데가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자리를 한 분 한 분 잡다 보니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셨죠. 아리마을이라고 하는 것도 ‘아리고 쓰리다’라고 하는 것."]
아리마을에는 갈 수 없는 고향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담장마다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가며 그 애틋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은 골목길에 벽화들이 길동무하듯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옛날 감성 그대로.) 네, 옛날 감성으로."]
1960년대 이후부터, 그 시절의 생활 풍경을 담은 그림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우리가 또 설명하는 거죠. 아빠 시대에는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을 특유의 역사와 정취 덕분에 드라마 촬영지로 주목받기도 했는데요.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난 김종섭 할아버지.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일신면 제산리. (주소를 다 기억하신다.) 네 그거는 기억해요."]
6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남으로 피난 왔다고 합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다 죽어가는 걸 업고 나와서 그래도 이날 이때까지 산 거예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남녘 땅에서 어린 소년의 삶은 그리 녹록하진 않았습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생한 거 생각하면 말도 못 하죠. 여기 넘어와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염전에 바로 들어간 거죠. 그래서 염전 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먹고 하다 보니까 인천으로 와서 취직한다 해서 여기 와서 살게 됐어요."]
오랜 세월 실향민들의 벗이 되어준 느티나무 앞에서, 나지막이 남은 소망을 이야기하는데요.
["그냥 고향이나 한번 밟는 게 원이지."]
주민들은 수시로 느티나무 아래 모여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눴고, 봄이 오면 이렇게 꽃을 가꿉니다.
[이점덕/아리마을 주민 :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다 함께 (꽃을 심어요.) 마을 저 위로 가면 또 꽃길이 있어요. 다 자기 집 앞에 자기가 나와서 꽃을 가꿉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리마을의 마을 꽃, ‘사피니아’입니다.
["(심으신 꽃이 무슨 꽃이에요?) 사피니아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합니다’라는 뜻이랍니다."]
함께해서 행복하다는 주민들로 사랑방 앞이 북적이는데요.
아리마을 최고령 김정녀 할머니가 살갑게 맞이합니다.
["(너무 정정하세요.) 잔치했어요. (잔치도 하셨어요?) 100세 잔치. (저 나중에 꿈이 100세 생일파티 하는 건데.)"]
[김정녀/아리마을 주민 : "백령도가 옛날에 이북이야. 이북인데 백령도 출생 이야, 내가. 백령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20대에 피난을 와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는 할머니.
피난민들에게 마을은 제2의 고향이 됐는데요.
이날 사랑방에선 이들을 위한 작은 잔치가 마련됐습니다.
[최혜숙/아리마을 주민 :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이렇게 많이 잘 차려놓고 모이라 그래서 모였어요."]
황해도에서 피난 와 척박했었던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이웃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같은 고향이라도 할매는 먼저 나오시고 나는 늦게 나왔죠. (몇 살에 나오셨어요?) 8살 때 나왔어요. 인천 (피난) 와서 천막을 치고 사람 자는데 이렇게 보따리로 칸을 막고 살더라고요."]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카네이션으로 달래보는데요.
문득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다른 데는 기억이 없는데, 저 월래도, 백령도 거기서 살던 생각. 우리 엄마가 (생각나요.) 실향의 그리움을 품고."]
["한 많은 대동강아 잘 있느냐."]
마을을 일궈온 이들의 삶은 이제 또 다른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은례/아리마을 주민협의회 총무 :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꿋꿋하게 진짜 생활력 하나로 이렇게 견디면서 살아오신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다 이겨내신 분들이니까 그리고 또 이분들이 저희를 단합시킨 거예요."]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는 아리마을.
그 중심에는 과거 마을의 공동목욕탕이던 ‘양지탕’이 있습니다.
37년간 공중목욕탕이었던 이곳은 이제는 마을 주민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록관 역할도 한다는데요.
지금 들어가 보실까요?
한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목욕탕.
이제는 마을의 문화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데요.
[이은례/아리마을 주민 : "(때 밀어 드립니다. 인터폰을 이용해 주세요. 귀중품은 카운터에 보관하라고.) 가급적이면 훼손하지 않고 옛날 (정취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1982년부터 37년간 운영된 목욕탕을 지자체에서 매입한 뒤,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거쳐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난 겁니다.
[김희선/미추홀구청 자치협력과 주무관 : "여기 계신 주민분들이 직접 사업에 참여하셔서 불편한 점들을 말씀해 주시고 이렇게 어울림 공간을 만들면서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공사 당시 사진을 담은 지하 보일러실은 마을의 역사를 품은 기록관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아리마을 꽃 축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데요.
한 마을에서 꽃처럼 피어난 실향민들의 삶.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남북한이 교류할 수 있다고 하면 저희들이 앞으로 그분들 또 모시고 갈 수 있도록, 이북에서 넘어오셔서 여기까지 오셔서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구나 그걸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려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녘을 향한 통일의 염원과 함께, 아리마을은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 보내신 분들 많을 텐데요.
하지만 이즈음이면 고향 생각이 더 깊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쪽 땅에서 북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실향민들인데요.
인천 미추홀구의 작은 언덕 위, ‘아리마을’엔 전쟁 통에 삶터를 잃은 실향민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 뿌리내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궈냈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엔 고향의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지금은 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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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시죠.
[리포트]
인천의 어느 작은 마을.
햇살이 스며드는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렇게 골목골목마다 아리마을의 역사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담장 아래에는 색도 향기도 제각각인 꽃들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전합니다.
마침 화단을 손질하는 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꽃이 만발한 마을에 생기가 감도는데요.
["(지금 뭐 하고 있으신 거예요?) 아리마을 꽃을 심고 있습니다. (아리마을 꽃.) 네."]
깜짝 인사에, 덩달아 웃음꽃이 번집니다.
["선물! (저 받아도 되는 거예요?) 네."]
다정한 온기를 품은 아리마을.
이곳에는 아리고 쓰린 실향의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6.25 전쟁과 1.4 후퇴 때 피난민들이 오셔서 자리를 잡아서 허허벌판이었던 데가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이 자리를 한 분 한 분 잡다 보니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셨죠. 아리마을이라고 하는 것도 ‘아리고 쓰리다’라고 하는 것."]
아리마을에는 갈 수 없는 고향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담장마다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가며 그 애틋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은 골목길에 벽화들이 길동무하듯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옛날 감성 그대로.) 네, 옛날 감성으로."]
1960년대 이후부터, 그 시절의 생활 풍경을 담은 그림들.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우리가 또 설명하는 거죠. 아빠 시대에는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을 특유의 역사와 정취 덕분에 드라마 촬영지로 주목받기도 했는데요.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난 김종섭 할아버지.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이 황해도 연백군 일신면 제산리. (주소를 다 기억하신다.) 네 그거는 기억해요."]
6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남으로 피난 왔다고 합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다 죽어가는 걸 업고 나와서 그래도 이날 이때까지 산 거예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남녘 땅에서 어린 소년의 삶은 그리 녹록하진 않았습니다.
[김종섭/아리마을 주민 : "고생한 거 생각하면 말도 못 하죠. 여기 넘어와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염전에 바로 들어간 거죠. 그래서 염전 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먹고 하다 보니까 인천으로 와서 취직한다 해서 여기 와서 살게 됐어요."]
오랜 세월 실향민들의 벗이 되어준 느티나무 앞에서, 나지막이 남은 소망을 이야기하는데요.
["그냥 고향이나 한번 밟는 게 원이지."]
주민들은 수시로 느티나무 아래 모여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눴고, 봄이 오면 이렇게 꽃을 가꿉니다.
[이점덕/아리마을 주민 :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다 함께 (꽃을 심어요.) 마을 저 위로 가면 또 꽃길이 있어요. 다 자기 집 앞에 자기가 나와서 꽃을 가꿉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리마을의 마을 꽃, ‘사피니아’입니다.
["(심으신 꽃이 무슨 꽃이에요?) 사피니아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합니다’라는 뜻이랍니다."]
함께해서 행복하다는 주민들로 사랑방 앞이 북적이는데요.
아리마을 최고령 김정녀 할머니가 살갑게 맞이합니다.
["(너무 정정하세요.) 잔치했어요. (잔치도 하셨어요?) 100세 잔치. (저 나중에 꿈이 100세 생일파티 하는 건데.)"]
[김정녀/아리마을 주민 : "백령도가 옛날에 이북이야. 이북인데 백령도 출생 이야, 내가. 백령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20대에 피난을 와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는 할머니.
피난민들에게 마을은 제2의 고향이 됐는데요.
이날 사랑방에선 이들을 위한 작은 잔치가 마련됐습니다.
[최혜숙/아리마을 주민 :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이렇게 많이 잘 차려놓고 모이라 그래서 모였어요."]
황해도에서 피난 와 척박했었던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이웃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같은 고향이라도 할매는 먼저 나오시고 나는 늦게 나왔죠. (몇 살에 나오셨어요?) 8살 때 나왔어요. 인천 (피난) 와서 천막을 치고 사람 자는데 이렇게 보따리로 칸을 막고 살더라고요."]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카네이션으로 달래보는데요.
문득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김순초/아리마을 주민 : "다른 데는 기억이 없는데, 저 월래도, 백령도 거기서 살던 생각. 우리 엄마가 (생각나요.) 실향의 그리움을 품고."]
["한 많은 대동강아 잘 있느냐."]
마을을 일궈온 이들의 삶은 이제 또 다른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은례/아리마을 주민협의회 총무 :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꿋꿋하게 진짜 생활력 하나로 이렇게 견디면서 살아오신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다 이겨내신 분들이니까 그리고 또 이분들이 저희를 단합시킨 거예요."]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는 아리마을.
그 중심에는 과거 마을의 공동목욕탕이던 ‘양지탕’이 있습니다.
37년간 공중목욕탕이었던 이곳은 이제는 마을 주민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공간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기록관 역할도 한다는데요.
지금 들어가 보실까요?
한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목욕탕.
이제는 마을의 문화센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데요.
[이은례/아리마을 주민 : "(때 밀어 드립니다. 인터폰을 이용해 주세요. 귀중품은 카운터에 보관하라고.) 가급적이면 훼손하지 않고 옛날 (정취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1982년부터 37년간 운영된 목욕탕을 지자체에서 매입한 뒤,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거쳐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난 겁니다.
[김희선/미추홀구청 자치협력과 주무관 : "여기 계신 주민분들이 직접 사업에 참여하셔서 불편한 점들을 말씀해 주시고 이렇게 어울림 공간을 만들면서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공사 당시 사진을 담은 지하 보일러실은 마을의 역사를 품은 기록관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아리마을 꽃 축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은데요.
한 마을에서 꽃처럼 피어난 실향민들의 삶.
[박영복/아리마을 주민협의회장 : "남북한이 교류할 수 있다고 하면 저희들이 앞으로 그분들 또 모시고 갈 수 있도록, 이북에서 넘어오셔서 여기까지 오셔서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구나 그걸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려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녘을 향한 통일의 염원과 함께, 아리마을은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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