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저 아시죠?” 한마디에 털린 지갑…일본 노령자 노린 사기 기승

입력 2025.05.13 (15:31) 수정 2025.05.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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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선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을 상대로 돈을 가로채는 부동산 범죄가 잇따르면서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월드 이슈, 이랑 기자와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대체 고령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사기를 벌인 건가요?

[기자]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을 꼭 집어서 먼저 '아는 척'을 했습니다.

"저 아시죠?" 이렇게 접근하면서 원래 알던 사람인 척 경계심을 무너뜨렸는데요.

혼자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86살 여성.

어느 날부터인가 부동산업자가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기억하시죠"라며 안부를 건네고 방문을 몇 차례 하더니, 친분이 쌓이자 월세가 보장되는 아파트 지분을 사라고 권유했는데요.

아파트 지분이란 서류상 방을 N의 1로 쪼갠 겁니다.

노인은 결국 우리 돈 4천만 원 정도를 투자했지만, 월세는 몇 번 입금된 뒤 뚝 끊겼습니다.

[부동산 사기 피해 노인 :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계약의) 세부 내용도 무슨 소리인지 그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간토 지방에 사는 89세 남성 역시 "3년 전 신세를 졌다, 감사하다"는 말에 속아 넘어갔는데요.

아파트 지분 377분의 1을 우리 돈 1,500만 원에 매입했지만 역시나 사기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애초부터 노인이 사는 집을 노리고 접근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는 집에서 계속 살게 해주겠다, 세금 안 내도 된다며, 복잡한 설명 끝에 집을 시세 반값에 넘기라고 하는 겁니다.

도쿄 경시청은 이런 식으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50건 이상의 계약을 체결하고 1년 사이 7억 엔 이상을 가로챈 일당을 검거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인지 능력이 떨어지거나 치매인 노령자만 골라서 범행을 한 거죠?

[기자]

피해자를 찾기 위해 먼저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요.

한마디로 사전 조사를 한 거죠.

일본 경찰에 붙잡힌 사기 조직 일당은 80세 이상 고령자 약 9만 명의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그런 뒤에 전화를 하거나 집에 찾아가서 노령자들의 인지 능력을 파악했는데요.

예를 들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주문 감사합니다. 주문하신 상품을 발송하겠습니다."라고 말해도 치매 노인의 경우 주문하지 않았어도 "네"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약한 인지 장애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노인을 식별했고요.

혼자 사는지,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지, 재정 상황은 어떤지 캐물었는데요.

그 뒤에는 가족이나 손해 등의 단어를 언급해 불안 심리를 자극하면서, 매입 안 하면 손해인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사기 피해 노인 가족 : "아버지 나이의 인지 수준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앵커]

일본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지 않았습니까?

고령자들이 늘어나는 만큼 이런 범죄에 대한 우려도 클 것 같은데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인 데다 치매 노인도 급속히 늘고 있는데요.

일본의 치매 노인은 올해 470만 명대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 후생노동성 연구팀은 2040년에는 그 수가 584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측했는데요.

일본 노인의 약 15%, 그러니까 6명 중 1명꼴로 치매를 앓게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또 치매까지는 아니지만 약한 인지 장애가 있는 노인은 6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치매 환자가 보유한 금융 자산은 2040년 197조 엔이 넘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는데요.

우리 돈 약 천9백조 원 정도 되는 돈이, 어찌 보면 범죄 집단의 목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앵커]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기자]

일본도 아직 정부 차원에서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는데요.

전문가들은 일단 '가족 신탁' 등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나루모토 진/교토부립의과대학 교수 : "인지 기능이 저하될수록 주변에 '나는 문제없다, 괜찮다'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 하는데요.

그래서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령자가 건강할 때 사전에 가족이나 지인과 신탁 계약을 맺고,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 관리를 위탁하라는 건데요.

상속이나 증여와 달리 재산의 소유자는 부모로 남아 있지만, 재산이 자녀의 이름으로 관리되기 때문에 피해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서 내용을 공증받고, 위탁 관리자 외에도 감독자를 두는 등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난해 우리나라도,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는데요.

우리도 이런 범죄를 막을 예방법을 찾는 일이 절실해 보입니다.

영상편집:김주은 이은빈/자료조사:이장미/그래픽제작:여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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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13 15:31:58
    • 수정2025-05-13 15: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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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선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을 상대로 돈을 가로채는 부동산 범죄가 잇따르면서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월드 이슈, 이랑 기자와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대체 고령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사기를 벌인 건가요?

[기자]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을 꼭 집어서 먼저 '아는 척'을 했습니다.

"저 아시죠?" 이렇게 접근하면서 원래 알던 사람인 척 경계심을 무너뜨렸는데요.

혼자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86살 여성.

어느 날부터인가 부동산업자가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기억하시죠"라며 안부를 건네고 방문을 몇 차례 하더니, 친분이 쌓이자 월세가 보장되는 아파트 지분을 사라고 권유했는데요.

아파트 지분이란 서류상 방을 N의 1로 쪼갠 겁니다.

노인은 결국 우리 돈 4천만 원 정도를 투자했지만, 월세는 몇 번 입금된 뒤 뚝 끊겼습니다.

[부동산 사기 피해 노인 :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계약의) 세부 내용도 무슨 소리인지 그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간토 지방에 사는 89세 남성 역시 "3년 전 신세를 졌다, 감사하다"는 말에 속아 넘어갔는데요.

아파트 지분 377분의 1을 우리 돈 1,500만 원에 매입했지만 역시나 사기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애초부터 노인이 사는 집을 노리고 접근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는 집에서 계속 살게 해주겠다, 세금 안 내도 된다며, 복잡한 설명 끝에 집을 시세 반값에 넘기라고 하는 겁니다.

도쿄 경시청은 이런 식으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50건 이상의 계약을 체결하고 1년 사이 7억 엔 이상을 가로챈 일당을 검거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인지 능력이 떨어지거나 치매인 노령자만 골라서 범행을 한 거죠?

[기자]

피해자를 찾기 위해 먼저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요.

한마디로 사전 조사를 한 거죠.

일본 경찰에 붙잡힌 사기 조직 일당은 80세 이상 고령자 약 9만 명의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그런 뒤에 전화를 하거나 집에 찾아가서 노령자들의 인지 능력을 파악했는데요.

예를 들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주문 감사합니다. 주문하신 상품을 발송하겠습니다."라고 말해도 치매 노인의 경우 주문하지 않았어도 "네"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약한 인지 장애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노인을 식별했고요.

혼자 사는지,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지, 재정 상황은 어떤지 캐물었는데요.

그 뒤에는 가족이나 손해 등의 단어를 언급해 불안 심리를 자극하면서, 매입 안 하면 손해인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사기 피해 노인 가족 : "아버지 나이의 인지 수준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앵커]

일본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지 않았습니까?

고령자들이 늘어나는 만큼 이런 범죄에 대한 우려도 클 것 같은데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인 데다 치매 노인도 급속히 늘고 있는데요.

일본의 치매 노인은 올해 470만 명대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 후생노동성 연구팀은 2040년에는 그 수가 584만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측했는데요.

일본 노인의 약 15%, 그러니까 6명 중 1명꼴로 치매를 앓게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또 치매까지는 아니지만 약한 인지 장애가 있는 노인은 6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치매 환자가 보유한 금융 자산은 2040년 197조 엔이 넘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는데요.

우리 돈 약 천9백조 원 정도 되는 돈이, 어찌 보면 범죄 집단의 목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앵커]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기자]

일본도 아직 정부 차원에서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는데요.

전문가들은 일단 '가족 신탁' 등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나루모토 진/교토부립의과대학 교수 : "인지 기능이 저하될수록 주변에 '나는 문제없다, 괜찮다'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 하는데요.

그래서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령자가 건강할 때 사전에 가족이나 지인과 신탁 계약을 맺고,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 관리를 위탁하라는 건데요.

상속이나 증여와 달리 재산의 소유자는 부모로 남아 있지만, 재산이 자녀의 이름으로 관리되기 때문에 피해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서 내용을 공증받고, 위탁 관리자 외에도 감독자를 두는 등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난해 우리나라도,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는데요.

우리도 이런 범죄를 막을 예방법을 찾는 일이 절실해 보입니다.

영상편집:김주은 이은빈/자료조사:이장미/그래픽제작:여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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