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작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밤비'의 주인공. 흰색 점무늬와 큰 눈, 쫑긋한 귀가 특징인 이 동물, 바로 꽃사슴입니다.
아기 꽃사슴 밤비의 탄생 소식을 들은 숲속의 동물 친구들이 밤비를 보러 달려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꽃사슴은 그만큼 귀엽고 예쁜 동물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특히, 생태계에서 늘 포식자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의 위태로운 지위가 이런 이미지를 더 두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꽃사슴이 포식자 행세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천적이 없는 작은 섬에서 꽃사슴이 섬의 푸릇한 것은 모두 먹어 치우는 바람에 초목이 성하지 않습니다. 생태계는 물론 주민들까지 피해가 커지자, 정부는 급기야 꽃사슴을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하기로 했습니다.

꽃사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흑화한 밤비' 꽃사슴에 초토화된 섬을 <더 보다>가 다녀왔습니다.

전남 영광에서 뱃길로 2시간. 서쪽 영해의 경계에 있는 섬, 안마도.
말의 안장을 닮았다 하여 ‘안마’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섬엔 17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철마다 바다에서 민어와 조기, 꽃게를 잡고, 지네가 많이 나기로 유명해 봄이면 지네잡이도 활기를 띱니다.
그런데, 이 섬에서 지네보다 더 유명한 동물 바로 꽃사슴입니다. 처음엔 가축으로 들여와 버려진 꽃사슴들은 이제 섬을 둘러싼 산과 숲을 모두 점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경계하고 밤에 주로 활동하는 동물이지만, 이 섬에선 대낮에도 민가 근처까지 내려와 풀을 뜯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이 섬에 살고 있는 꽃사슴은 937마리. 섬 주민의 5배가 넘습니다.

타이완꽃사슴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보통 10여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1년에 한 번, 한 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먹이는 풀과 나뭇잎인데, 안마도의 숲은 1천 마리에 가까운 꽃사슴의 터전으로는 너무 좁습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꽃사슴 같은 경우는 성체 한 마리당 하루에 약 2kg 정도의 먹이가 필요한데, 2kg 정도 되면 자기 몸의 부피 정도 되는 먹이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먹이 활동을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안마도에도 어둠이 내립니다.
이제, 섬의 주인이 꽃사슴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김진수 / 안마도 신기리 이장 물이 있으니까 파란 것(이파리)도 있지만 물이 있으니까 내려오지. 낮에는 풀 뜯어 먹다가 물 마시러 오는 거지. 그리고 이제 산에는 또 풀이 많이 없잖아요. |
한두 마리가 노닐던 낮과 달리 수십 마리의 사슴 떼가 마을 어귀로 내려옵니다.
하늘 위에서 적외선으로 열을 감지하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해 보니 사슴 떼가 빨갛게 드러납니다.


바닷가를 제외한 마을의 동쪽과 남쪽, 북쪽에서 서식하던 사슴들이 일제히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온순해 보이는 꽃사슴이 어둠 속에선 무법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도로를 건너더니, 낮에 친 그물의 빈틈을 비집고 모내기를 앞둔 논으로 침투합니다.

논과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뜯어먹는가 하면, 민가 바로 옆 텃밭까지 노립니다.
최근 5년간 이 섬의 농작물 피해는 1억 6천여만 원으로 추산됩니다.

기자 : 이렇게 내려오면 그러면 언제까지 있어요? 김진수 이장 : 거의 아침까지 해 뜰 때까지 있죠. 이제 돌아다니죠. |
날이 다시 밝았습니다. 주민들은 간밤에 꽃사슴 떼가 허물고 간 그물을 고칩니다. 농번기를 앞두고, 일손이 두 배로 듭니다.
"뜯어 먹고 벼 익으면 익은 대로 다 잘라먹고 다 훑고 다니고…. 얼마나 황당하겠소. 화가 나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누가 그렇다고 해서 보상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안마도 주민1 "마늘 같은 것도 다 쟤네들이 발로 저기 해버리고, 어르신들이 손자들이라도 오면 고구마라도 하나씩 주려고 심으면 고구마도 다 발로 파먹어 버리고 김장거리도 다 육지에서 조달해 와야 해요." -안마도 주민2 |

꽃사슴이 헤집은 건 농작물뿐만이 아닙니다. 섬의 생태계는 이미 초토화됐습니다.
봄을 맞아 숲이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듯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니 웬만한 풀은 성한 데가 없습니다.
"지금 이맘때면 풀이 많이 나 있거든요. 근데 없잖아요. 지금 거기가 이제 사슴이 안 먹는 풀은 좀 길잖아, 저런 거는. 사슴이 여기는 워낙 노니까 풀이 안 나 풀이." |
수풀이 우거질 계절이지만, 흙이 그대로 드러났고 나무는 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저희가 작년에 (안마도에) 조사를 가보니까 사실 이 하층 식생은 거의 황폐화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먹을 게 없어서 이제 어떻게 보면 먹기 불편한 이 수목의 수피 같은 것들을 주로 이제 먹으면서 관목이나 교목류들이 고사를 하는 상황입니다. |

군락을 이루던 꾸지뽕나무는 사슴의 표적이 되면서 이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정종우 /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꽃사슴 같은 경우에는 식물의 나뭇가지나 줄기를 정말 잘 먹습니다. 그래서 거의 다 초토화되는 그런 어떤 결과를 초래하죠. 그래서 식물도 영향을 받고 그 식물을 먹고 살던 다른 초식동물들과 그 초식동물들을 먹고 살거나 아니면 거기에 관련돼서 살던 그런 동물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
꽃사슴이 처음부터 안마도에 살았던 건 아닙니다.
1980년대, 한 주민이 이웃 섬 죽도에 가축으로 들여온 게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버려진 사슴들이 점차 섬 환경에 적응한 겁니다.
연약해 보이는 꽃사슴의 생존력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먹이가 부족하거나 영역 싸움에서 밀리면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헤엄쳐 인근 섬으로 건너갑니다.
한 주민은 바다에 조업을 나갔다가 사슴을 잡아 온 경우도 봤다고 전했습니다.

경남 창원 진해 앞바다의 작은 섬, 우도.
축구장 열 개 넓이의 이 섬도 꽃사슴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500미터 떨어진 무인도, 소쿠리섬에 사는 꽃사슴이 건너와 농작물을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밭에 철조망을 쳐놓으니까 망정이지 그물을 해 놓으면 사슴이 그 밑으로 들어간다고 밑으로. 머리를 넣어서. 그래서 밑으로 들어가서 온 밭을 난장판을 치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 우도 주민 |
소쿠리섬에 꽃사슴이 발을 디딘 건 2008년, 당시 진해시가 소쿠리섬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타이완꽃사슴 10마리를 들여왔습니다.

꽃사슴으로 유명해지며 지금은 캠핑 명소가 됐습니다.

야영객들에겐 마냥 귀엽기만 하지만, 60마리 넘게 늘어난 꽃사슴 떼가 시도 때도 없이 오가며 텃밭을 망치는 바람에 우도 주민 50여 가구는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마당에서 꽃사슴을 목격했던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마당에 있는 채소들 싹 다 다 따서 먹고 다 먹고 지금 오이(모종)도 새로 사 왔거든요. 하나도 없어요. 다 따먹고 그다음에 저쪽에 있는 과일나무도 그렇고 이쪽에 있는 대파도 그렇고" |
숲이 울창하던 소쿠리섬의 생태계도 안마도처럼 위협받는 상황.
창원시는 섬에 울타리를 치고, 꽃사슴 수컷을 중성화시키는 등 대책을 찾고 있습니다.

1993년 KBS 뉴스 사슴이 놀던 전설의 한라산을 꿈꾸며 한 독지가가 이렇게 사슴을 한라산국립공원에 풀어놓았습니다. 한라산에서 뛰놀며 자라게 된 꽃사슴은 한 마리에 백만 원가량인 대만산(타이완산) 다섯 마리입니다. |
세계자연유산이자 국립공원인 한라산. 여기도 외래종 꽃사슴은 '점령군'입니다. 1992년부터 수년간 한 사람이 임의로 꽃사슴을 풀어놓은 게 시작이었습니다.

안마도에서 봤던 것과 같은 타이완꽃사슴, 우리 고유종 노루 멸종위기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노루보다 덩치가 크고 먹이 경쟁에서 앞서기 때문입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만약에 같이 살고 있는 같은 우제류인 고라니나 노루가 있다면 그런 사슴들한테는 굉장히 위협이 되겠죠. 왜냐하면 서식지나 먹이 경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같은 종들끼리 같은 생활사를 공유하는 종들끼리 서식을 한다'라고 하면 굉장히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
결국, 해결책은 인위적으로 꽃사슴의 개체 수를 줄이는 겁니다.
지난 4월 환경부는 꽃사슴을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하기 위해 관련법 시행령 등의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꽃사슴이, 사람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형주 /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 ‘외래종 동물을 데리고 와서 가축화하겠다’라고 한 시도 자체가 조금 부적절했다고 보고요. 그게 누구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들여올 때는 들여오고 그게 문제가 발생하면 이제 그 이후에야 이제 어떤 야생동물로 또 지정하고 포획하고 이제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해 왔거든요. |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인 가축 유기에 대한 처벌과 해외에서 동물을 반입할 때의 규정을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됩니다.
정종우 /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거의 모든 야생동물을 수입하는 걸 원천적으로 금지하고요. 우리가 허락한 화이트리스트, 백색 목록을 만들어서 그 종만 수입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엄격하게 바뀌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백색 목록에 900여 종에 이르는 동물이 지정될 전망이라, 외래종 유입을 막는 효과가 작을 거란 지적도 나옵니다.
이형주 /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 종을 지정하는 걸 보면 사전 예방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도가 운용될 것이냐 하는 물음이 있어요. 애초에 이것을 엄격하게 제한을 하자는 거였는데 이렇게 굉장히 많은 종을 열어둘 거면 사실상 그 제도 자체의 취지를 살리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겠다는 거죠. |

섬의 생태계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회복하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계적으로 포획 작업이 진행돼야 하고 연차별 단기 포획이 시작되면 한 10년 정도 후에는 어느 정도 생태계가 복원될 거라고 판단하거든요. |

인간의 욕심과 방심 때문에 애꿎은 꽃사슴만 유해동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처분하는 방식에도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형주 / 동물복지연구소 '어웨어' 대표 동물이 겪는 경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포획하는 방식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 이런 것들에 대해 동물의 고통을 좀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반영되었는가가 중요할 것으로 보여요. |

문제를 일으킨 것도, 이제 해결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입니다.
정종우 /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우리 인간에 맞춰서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바꿔왔기 때문에 지금의 생태계 위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죠. 우리가 조금의 불편을 좀 감수하면서 다른 생물과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꽃사슴 #타이완꽃사슴 #안마도 #소쿠리섬 #유해야생동물 #환경부 #국립공원 #밤비 #사슴 #생태계 #먹이사슬 #굴업도 #난지도 #노루 #고라니 #한라산
취재:석민수
촬영:강우용
편집:김기곤
그래픽:장수현
리서처:한혜민
조연출:심은별 이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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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보다] 두 얼굴의 꽃사슴
-
- 입력 2025-06-01 23:15:34
- 수정2025-06-01 23:29:45
1942년 작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밤비'의 주인공. 흰색 점무늬와 큰 눈, 쫑긋한 귀가 특징인 이 동물, 바로 꽃사슴입니다.
아기 꽃사슴 밤비의 탄생 소식을 들은 숲속의 동물 친구들이 밤비를 보러 달려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꽃사슴은 그만큼 귀엽고 예쁜 동물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특히, 생태계에서 늘 포식자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의 위태로운 지위가 이런 이미지를 더 두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꽃사슴이 포식자 행세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천적이 없는 작은 섬에서 꽃사슴이 섬의 푸릇한 것은 모두 먹어 치우는 바람에 초목이 성하지 않습니다. 생태계는 물론 주민들까지 피해가 커지자, 정부는 급기야 꽃사슴을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하기로 했습니다.

꽃사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흑화한 밤비' 꽃사슴에 초토화된 섬을 <더 보다>가 다녀왔습니다.

전남 영광에서 뱃길로 2시간. 서쪽 영해의 경계에 있는 섬, 안마도.
말의 안장을 닮았다 하여 ‘안마’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섬엔 17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철마다 바다에서 민어와 조기, 꽃게를 잡고, 지네가 많이 나기로 유명해 봄이면 지네잡이도 활기를 띱니다.
그런데, 이 섬에서 지네보다 더 유명한 동물 바로 꽃사슴입니다. 처음엔 가축으로 들여와 버려진 꽃사슴들은 이제 섬을 둘러싼 산과 숲을 모두 점령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경계하고 밤에 주로 활동하는 동물이지만, 이 섬에선 대낮에도 민가 근처까지 내려와 풀을 뜯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이 섬에 살고 있는 꽃사슴은 937마리. 섬 주민의 5배가 넘습니다.

타이완꽃사슴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보통 10여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1년에 한 번, 한 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먹이는 풀과 나뭇잎인데, 안마도의 숲은 1천 마리에 가까운 꽃사슴의 터전으로는 너무 좁습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꽃사슴 같은 경우는 성체 한 마리당 하루에 약 2kg 정도의 먹이가 필요한데, 2kg 정도 되면 자기 몸의 부피 정도 되는 먹이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먹이 활동을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안마도에도 어둠이 내립니다.
이제, 섬의 주인이 꽃사슴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김진수 / 안마도 신기리 이장 물이 있으니까 파란 것(이파리)도 있지만 물이 있으니까 내려오지. 낮에는 풀 뜯어 먹다가 물 마시러 오는 거지. 그리고 이제 산에는 또 풀이 많이 없잖아요. |
한두 마리가 노닐던 낮과 달리 수십 마리의 사슴 떼가 마을 어귀로 내려옵니다.
하늘 위에서 적외선으로 열을 감지하는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해 보니 사슴 떼가 빨갛게 드러납니다.


바닷가를 제외한 마을의 동쪽과 남쪽, 북쪽에서 서식하던 사슴들이 일제히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온순해 보이는 꽃사슴이 어둠 속에선 무법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도로를 건너더니, 낮에 친 그물의 빈틈을 비집고 모내기를 앞둔 논으로 침투합니다.

논과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뜯어먹는가 하면, 민가 바로 옆 텃밭까지 노립니다.
최근 5년간 이 섬의 농작물 피해는 1억 6천여만 원으로 추산됩니다.

기자 : 이렇게 내려오면 그러면 언제까지 있어요? 김진수 이장 : 거의 아침까지 해 뜰 때까지 있죠. 이제 돌아다니죠. |
날이 다시 밝았습니다. 주민들은 간밤에 꽃사슴 떼가 허물고 간 그물을 고칩니다. 농번기를 앞두고, 일손이 두 배로 듭니다.
"뜯어 먹고 벼 익으면 익은 대로 다 잘라먹고 다 훑고 다니고…. 얼마나 황당하겠소. 화가 나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누가 그렇다고 해서 보상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안마도 주민1 "마늘 같은 것도 다 쟤네들이 발로 저기 해버리고, 어르신들이 손자들이라도 오면 고구마라도 하나씩 주려고 심으면 고구마도 다 발로 파먹어 버리고 김장거리도 다 육지에서 조달해 와야 해요." -안마도 주민2 |

꽃사슴이 헤집은 건 농작물뿐만이 아닙니다. 섬의 생태계는 이미 초토화됐습니다.
봄을 맞아 숲이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듯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니 웬만한 풀은 성한 데가 없습니다.
"지금 이맘때면 풀이 많이 나 있거든요. 근데 없잖아요. 지금 거기가 이제 사슴이 안 먹는 풀은 좀 길잖아, 저런 거는. 사슴이 여기는 워낙 노니까 풀이 안 나 풀이." |
수풀이 우거질 계절이지만, 흙이 그대로 드러났고 나무는 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저희가 작년에 (안마도에) 조사를 가보니까 사실 이 하층 식생은 거의 황폐화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먹을 게 없어서 이제 어떻게 보면 먹기 불편한 이 수목의 수피 같은 것들을 주로 이제 먹으면서 관목이나 교목류들이 고사를 하는 상황입니다. |

군락을 이루던 꾸지뽕나무는 사슴의 표적이 되면서 이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정종우 /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꽃사슴 같은 경우에는 식물의 나뭇가지나 줄기를 정말 잘 먹습니다. 그래서 거의 다 초토화되는 그런 어떤 결과를 초래하죠. 그래서 식물도 영향을 받고 그 식물을 먹고 살던 다른 초식동물들과 그 초식동물들을 먹고 살거나 아니면 거기에 관련돼서 살던 그런 동물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
꽃사슴이 처음부터 안마도에 살았던 건 아닙니다.
1980년대, 한 주민이 이웃 섬 죽도에 가축으로 들여온 게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버려진 사슴들이 점차 섬 환경에 적응한 겁니다.
연약해 보이는 꽃사슴의 생존력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먹이가 부족하거나 영역 싸움에서 밀리면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헤엄쳐 인근 섬으로 건너갑니다.
한 주민은 바다에 조업을 나갔다가 사슴을 잡아 온 경우도 봤다고 전했습니다.

경남 창원 진해 앞바다의 작은 섬, 우도.
축구장 열 개 넓이의 이 섬도 꽃사슴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500미터 떨어진 무인도, 소쿠리섬에 사는 꽃사슴이 건너와 농작물을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밭에 철조망을 쳐놓으니까 망정이지 그물을 해 놓으면 사슴이 그 밑으로 들어간다고 밑으로. 머리를 넣어서. 그래서 밑으로 들어가서 온 밭을 난장판을 치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 우도 주민 |
소쿠리섬에 꽃사슴이 발을 디딘 건 2008년, 당시 진해시가 소쿠리섬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타이완꽃사슴 10마리를 들여왔습니다.

꽃사슴으로 유명해지며 지금은 캠핑 명소가 됐습니다.

야영객들에겐 마냥 귀엽기만 하지만, 60마리 넘게 늘어난 꽃사슴 떼가 시도 때도 없이 오가며 텃밭을 망치는 바람에 우도 주민 50여 가구는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마당에서 꽃사슴을 목격했던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마당에 있는 채소들 싹 다 다 따서 먹고 다 먹고 지금 오이(모종)도 새로 사 왔거든요. 하나도 없어요. 다 따먹고 그다음에 저쪽에 있는 과일나무도 그렇고 이쪽에 있는 대파도 그렇고" |
숲이 울창하던 소쿠리섬의 생태계도 안마도처럼 위협받는 상황.
창원시는 섬에 울타리를 치고, 꽃사슴 수컷을 중성화시키는 등 대책을 찾고 있습니다.

1993년 KBS 뉴스 사슴이 놀던 전설의 한라산을 꿈꾸며 한 독지가가 이렇게 사슴을 한라산국립공원에 풀어놓았습니다. 한라산에서 뛰놀며 자라게 된 꽃사슴은 한 마리에 백만 원가량인 대만산(타이완산) 다섯 마리입니다. |
세계자연유산이자 국립공원인 한라산. 여기도 외래종 꽃사슴은 '점령군'입니다. 1992년부터 수년간 한 사람이 임의로 꽃사슴을 풀어놓은 게 시작이었습니다.

안마도에서 봤던 것과 같은 타이완꽃사슴, 우리 고유종 노루 멸종위기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노루보다 덩치가 크고 먹이 경쟁에서 앞서기 때문입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만약에 같이 살고 있는 같은 우제류인 고라니나 노루가 있다면 그런 사슴들한테는 굉장히 위협이 되겠죠. 왜냐하면 서식지나 먹이 경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같은 종들끼리 같은 생활사를 공유하는 종들끼리 서식을 한다'라고 하면 굉장히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
결국, 해결책은 인위적으로 꽃사슴의 개체 수를 줄이는 겁니다.
지난 4월 환경부는 꽃사슴을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하기 위해 관련법 시행령 등의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꽃사슴이, 사람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형주 /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 ‘외래종 동물을 데리고 와서 가축화하겠다’라고 한 시도 자체가 조금 부적절했다고 보고요. 그게 누구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들여올 때는 들여오고 그게 문제가 발생하면 이제 그 이후에야 이제 어떤 야생동물로 또 지정하고 포획하고 이제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해 왔거든요. |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인 가축 유기에 대한 처벌과 해외에서 동물을 반입할 때의 규정을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됩니다.
정종우 /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거의 모든 야생동물을 수입하는 걸 원천적으로 금지하고요. 우리가 허락한 화이트리스트, 백색 목록을 만들어서 그 종만 수입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엄격하게 바뀌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백색 목록에 900여 종에 이르는 동물이 지정될 전망이라, 외래종 유입을 막는 효과가 작을 거란 지적도 나옵니다.
이형주 /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 종을 지정하는 걸 보면 사전 예방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도가 운용될 것이냐 하는 물음이 있어요. 애초에 이것을 엄격하게 제한을 하자는 거였는데 이렇게 굉장히 많은 종을 열어둘 거면 사실상 그 제도 자체의 취지를 살리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겠다는 거죠. |

섬의 생태계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회복하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김철영 / 국립생태원 외래생물팀 계장 (국립공원공단 파견)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계적으로 포획 작업이 진행돼야 하고 연차별 단기 포획이 시작되면 한 10년 정도 후에는 어느 정도 생태계가 복원될 거라고 판단하거든요. |

인간의 욕심과 방심 때문에 애꿎은 꽃사슴만 유해동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처분하는 방식에도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형주 / 동물복지연구소 '어웨어' 대표 동물이 겪는 경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포획하는 방식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식, 이런 것들에 대해 동물의 고통을 좀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반영되었는가가 중요할 것으로 보여요. |

문제를 일으킨 것도, 이제 해결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입니다.
정종우 /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 우리 인간에 맞춰서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바꿔왔기 때문에 지금의 생태계 위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죠. 우리가 조금의 불편을 좀 감수하면서 다른 생물과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꽃사슴 #타이완꽃사슴 #안마도 #소쿠리섬 #유해야생동물 #환경부 #국립공원 #밤비 #사슴 #생태계 #먹이사슬 #굴업도 #난지도 #노루 #고라니 #한라산
취재:석민수
촬영:강우용
편집:김기곤
그래픽:장수현
리서처:한혜민
조연출:심은별 이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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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수 기자 ms@kbs.co.kr
석민수 기자의 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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