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앞장섰는데…국가 폭력에 희생

입력 2025.07.09 (07:43) 수정 2025.07.09 (08:0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KBS 청주방송총국의 '광복 80주년' 기획 보도, 다섯 번째 순서입니다.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했는데 광복 후, 우리 군경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독립운동 활동을 제대로 인정받긴커녕, 유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자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박태수 씨의 아버지 고 박기철 선생은 1930년부터 15년간 영동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청년회를 조직해 항일 운동에 나섰습니다.

[박태수/고 박기철 선생 아들 : "동네마다 다니면서 항일 고취라든가 문맹자 한글 교육이라든가 (활동을 하셨고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렇게 하셨죠."]

하지만 이런 항일 활동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심지어 해방 뒤에는 보도연맹 관련자로 몰려 군경에 희생당했습니다.

남은 가족들도 10여 년간 "간첩이 남파하면 접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감시당했습니다.

[박태수/고 박기철 선생 아들 : "참 기구한 운명이죠. 6·25 사변이 나면서 정부에서 요구하는 피치 못할 보도연맹이라는 데 가입하게 되고, 그걸로 인해서 군경에 의해서 학살을 당한 거죠."]

홍우영 씨의 아버지 고 홍가륵 선생은 의열단의 단원으로 일제에 맞서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이후 시국 사건에 연루돼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뒤 1950년,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에서 민간인 100여 명과 우리 군·경에게 학살당했습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홍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하지만 지자체의 사방댐 공사와 간벌 사업으로 매장 추정지가 훼손돼 유해는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홍우영/고 홍가륵 선생 아들 : "사방댐 공사를 지으면서 (유해 매장 추정지가) 완전히 매몰됐어요. 훼손시켜 버렸어요. 아무 때라도 모여서 찾아가서 인사라도 드릴만한 장소, 이걸 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민간인이 해방 이후, 보도 연맹 등 시국 사건에 연루돼 희생당했습니다.

일부 후손들은 나라에서 감시당했고, 부모가 독립운동을 했어도 연좌제 우려 때문에 자녀에게 숨기기도 했습니다.

[박만순/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훌륭한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오신 분들이 있죠."]

광복 80년.

이후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인 실태와 현황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KBS 뉴스 이자현입니다.

촬영기자:김성은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독립운동 앞장섰는데…국가 폭력에 희생
    • 입력 2025-07-09 07:43:26
    • 수정2025-07-09 08:07:56
    뉴스광장(청주)
[앵커]

KBS 청주방송총국의 '광복 80주년' 기획 보도, 다섯 번째 순서입니다.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했는데 광복 후, 우리 군경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독립운동 활동을 제대로 인정받긴커녕, 유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자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박태수 씨의 아버지 고 박기철 선생은 1930년부터 15년간 영동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청년회를 조직해 항일 운동에 나섰습니다.

[박태수/고 박기철 선생 아들 : "동네마다 다니면서 항일 고취라든가 문맹자 한글 교육이라든가 (활동을 하셨고요). '우리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렇게 하셨죠."]

하지만 이런 항일 활동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심지어 해방 뒤에는 보도연맹 관련자로 몰려 군경에 희생당했습니다.

남은 가족들도 10여 년간 "간첩이 남파하면 접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감시당했습니다.

[박태수/고 박기철 선생 아들 : "참 기구한 운명이죠. 6·25 사변이 나면서 정부에서 요구하는 피치 못할 보도연맹이라는 데 가입하게 되고, 그걸로 인해서 군경에 의해서 학살을 당한 거죠."]

홍우영 씨의 아버지 고 홍가륵 선생은 의열단의 단원으로 일제에 맞서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이후 시국 사건에 연루돼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뒤 1950년,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에서 민간인 100여 명과 우리 군·경에게 학살당했습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홍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하지만 지자체의 사방댐 공사와 간벌 사업으로 매장 추정지가 훼손돼 유해는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홍우영/고 홍가륵 선생 아들 : "사방댐 공사를 지으면서 (유해 매장 추정지가) 완전히 매몰됐어요. 훼손시켜 버렸어요. 아무 때라도 모여서 찾아가서 인사라도 드릴만한 장소, 이걸 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민간인이 해방 이후, 보도 연맹 등 시국 사건에 연루돼 희생당했습니다.

일부 후손들은 나라에서 감시당했고, 부모가 독립운동을 했어도 연좌제 우려 때문에 자녀에게 숨기기도 했습니다.

[박만순/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 :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훌륭한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오신 분들이 있죠."]

광복 80년.

이후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인 실태와 현황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KBS 뉴스 이자현입니다.

촬영기자:김성은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청주-주요뉴스

더보기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