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참사 후 3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06.02.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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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내일이면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지 3년째가 됩니다.

떠 올리기 조차 싫은 당시 사고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는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뉴스 따라잡기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취재했습니다.

홍희정 기자!

당시 희생자도 많았지만 부상자도 참 많았죠?

<리포트>

네, 2003년 2월 18일, 한 방화범의 어이없는 소행으로 빚어진 대구지하철 참사는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었는데요.

이후, 부상자 가운데 4명은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다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아직도 그때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지금도 그날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3주기를 이틀 앞둔 어제, 유가족들은 사고가 일어났던 대구 중앙로역을 찾았습니다.

사고 이후 깔끔한 모습으로 새 단장된 중앙로역.

그러나 그 한쪽에는 그날의 참사 현장을 보여주는 추모의 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못다한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사랑한다, 보고 싶다며 써놓은 짧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애절한데요.

시커먼 재로 뒤덮인 물품 보관함과 녹아 내린 공중전화 부스도 그 때 처참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터뷰> 송춘녀(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 "(아들이)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 해 경영대학을 다니고, 일본에도 일 년 동안 유학을 갔다 오는 등 혼자 벌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어요. 그 날 출장 가다가 (이런 변을 당했어요.) 장가도 못 갔어요."

사고 이후 매일 이 곳을 찾아 아들의 명복을 빈다는 어머니.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까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다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인터뷰> 송춘녀(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 "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말로 표현 못하죠. 매일 잠도 못 자요. 잠이 들어도 아들이 소리치는 것 같아, 현아 언제 오냐고..."

딸같이 여겼던 며느리를 잃고, 시어머니도 한없는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인터뷰> 박한숙(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 " 말도 못하지. 아들네 집만 가면 눈물 나고 아무리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해도 안정이 안 돼요."

아비규환의 참사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도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2003년 2월 18일, 절에 간다며 대구지하철 1호선 1080호에 올랐던 신영순 씨.

신 씨는 사고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 착란 증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정신이 오락가락 온전치 못하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신영순(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 " 우리 집은 텔레비전도 안 보는 집이야. 텔레비전도 고장 났고..."

지하철역 안에 갇혀 있었던 당시의 공포 때문인지 신 씨는 잠시도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고만 한다는데요.

<인터뷰> 김남준(남편) : " (아내는) 계속 불 꺼달라고 고함 지르죠. 불 꺼달라고 (이웃들한테) 고함 질러요. (돌아다니면서요?) 그렇죠. 차 전조등도 불붙은 걸로 착각하고 그것도 끄라며 계속 불 끄라고 고함 질렀어요."

게다가 신씨는 사고 이후 빨간색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내다 버리곤 한다는데요.

남편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아내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인터뷰> 김남준(남편) : "지하철 사고 이후 (아내가) 갖다 버린 물건을 돈으로 따지면 몇 백만 원은 됩니다. 옷과 가정에 필요한 가전제품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아내가 사고 이후, 이상 증세를 보이자 남편 김 씨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가족을 돌보며 살림을 도맡았습니다.

게다가 아들 마저 어린 시절 사고로 정신 지체 장애자가 된 상태여서 김 씨 역시 아내와 아들을 돌보느라 지쳐 보였습니다.

사고 후 받은 4,000여만 원의 보상금은 이미 병원 치료비와 세 식구 생활비로 쪼개 쓰다 보니 신 씨 가족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는데요.

남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씨는 벌써 몇 시간째 골목 구석 구석을 맴돌고만 있는데요.

<인터뷰> 김남준 (남편) : "(힘들다고) 내가 죽을 수도 없고, 죽는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참 사는 게 말이 아닙니다."

사고 전동차 1079호에 올랐던 43살 김수남씨 역시 극심한 사고 후유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몸도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보상금 때문에 남편과 이혼까지 하고, 현재는 부상자대책위원회에서 얻어준 월세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요.

정신질환에 하반신 통증으로 움직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수남(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 " 감기도 잘 걸리고 그래요. 고통이 심하죠. (어떤 고통이 심하세요?) 그냥 마음이 불안하고 말이 좀 잘 안돼요."

지하철 참사로 가정이 풍비박산난데 이어, 김 씨는 보상금 5,000만 원마저 평소 알고 지내온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모조리 잃었었다고 하는데요.

이 때문에 김씨는 한때 노숙자 생활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황영택(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대책위원회) : "(김씨는) 사고 이후, 보상금을 받고 난 뒤에 사기를 한 번 당했어요. 우리도 잘 몰랐는데 대구역 대합실에서 먹고 자면서 노숙자처럼 생활하더라고요."

기초 생활 수급자인 김씨는 현재 폐품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요.

이혼 후 함께 살던 딸도 현재는 전 남편에게 맡겨놓은 상태입니다.

자신이 정신질환으로 병원을 다녀야 해 어쩔 수 없었다는데요.

하지만 늘 딸 걱정입니다.

<인터뷰> 김수남(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 " (딸이 가장 보고 싶으세요?) 네. 아직 학교 다니니까 내가 지금 전화는 못하고 애가 사춘기라 (염려스러워) 잘 못 보죠."

김 씨는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해 딸을 데려오고 싶지만 최근엔 음성 언어 장애까지 나타나는 등 상태가 더 나빠져만 가고 있다는데요.

이처럼 부상자 대부분은 김 씨처럼 뒤늦게 찾아온 음성 언어 장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터뷰> 최홍식(음성언어의학연구소 소장) : "생존자 대부분은 유독가스가 있는 환경에서 적어도 10분 정도 기침하는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탁하게 변하거나 기침을 많이 하게 됩니다. 가래가 생기다 보니까 뱉어내고, 복합작용을 해서 성대가 많이 붓고 여러 가지 합병증을 낳게 되거든요."

부상자들은 사고 후 바로 나타난 신경, 정신 관련 질환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았지만, 이처럼 뒤늦게 여러 가지 후유증이 나타날 줄은 알지도 못했고, 또 시에서도 추가 보상은 어렵다는 입장이어서, 부상자들의 마음고생은 더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동우(대구 지하철사고 부상자대책위원회 위원장) : "지금 당연히 이비인후과 음성언어장애가 지하철 사고로 인해 발생된 후유증이라고 (시에서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추가 보상을) 줄 수 있는 법규가 없다면서 재판으로 몰아가니까 거기서 우리 부상자들은 더 고통스러워하죠."

대구 시청에서는 뒤늦게 나타난 후유증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는데요.

<인터뷰> 전청수(대구시청 부상자지원반 지원반장) : "향후에 더 이상 보상금에 대해서 민형사상 책임을 논하지 않겠다 하는 합의를 했었고, 딱한 사정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저희들 입장에서는 임의대로 인정해서 지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통해 후유증이) 인정이 되어야 지급이 가능합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후 3년, 그러나 유족들과 부상자들은 하루도 그날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을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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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2-17 08: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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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내일이면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지 3년째가 됩니다. 떠 올리기 조차 싫은 당시 사고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는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뉴스 따라잡기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취재했습니다. 홍희정 기자! 당시 희생자도 많았지만 부상자도 참 많았죠? <리포트> 네, 2003년 2월 18일, 한 방화범의 어이없는 소행으로 빚어진 대구지하철 참사는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었는데요. 이후, 부상자 가운데 4명은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다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아직도 그때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지금도 그날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3주기를 이틀 앞둔 어제, 유가족들은 사고가 일어났던 대구 중앙로역을 찾았습니다. 사고 이후 깔끔한 모습으로 새 단장된 중앙로역. 그러나 그 한쪽에는 그날의 참사 현장을 보여주는 추모의 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못다한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사랑한다, 보고 싶다며 써놓은 짧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애절한데요. 시커먼 재로 뒤덮인 물품 보관함과 녹아 내린 공중전화 부스도 그 때 처참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인터뷰> 송춘녀(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 "(아들이)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 해 경영대학을 다니고, 일본에도 일 년 동안 유학을 갔다 오는 등 혼자 벌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어요. 그 날 출장 가다가 (이런 변을 당했어요.) 장가도 못 갔어요." 사고 이후 매일 이 곳을 찾아 아들의 명복을 빈다는 어머니.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까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다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인터뷰> 송춘녀(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 "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말로 표현 못하죠. 매일 잠도 못 자요. 잠이 들어도 아들이 소리치는 것 같아, 현아 언제 오냐고..." 딸같이 여겼던 며느리를 잃고, 시어머니도 한없는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인터뷰> 박한숙(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 " 말도 못하지. 아들네 집만 가면 눈물 나고 아무리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해도 안정이 안 돼요." 아비규환의 참사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도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2003년 2월 18일, 절에 간다며 대구지하철 1호선 1080호에 올랐던 신영순 씨. 신 씨는 사고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 착란 증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정신이 오락가락 온전치 못하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신영순(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 " 우리 집은 텔레비전도 안 보는 집이야. 텔레비전도 고장 났고..." 지하철역 안에 갇혀 있었던 당시의 공포 때문인지 신 씨는 잠시도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고만 한다는데요. <인터뷰> 김남준(남편) : " (아내는) 계속 불 꺼달라고 고함 지르죠. 불 꺼달라고 (이웃들한테) 고함 질러요. (돌아다니면서요?) 그렇죠. 차 전조등도 불붙은 걸로 착각하고 그것도 끄라며 계속 불 끄라고 고함 질렀어요." 게다가 신씨는 사고 이후 빨간색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내다 버리곤 한다는데요. 남편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아내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인터뷰> 김남준(남편) : "지하철 사고 이후 (아내가) 갖다 버린 물건을 돈으로 따지면 몇 백만 원은 됩니다. 옷과 가정에 필요한 가전제품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아내가 사고 이후, 이상 증세를 보이자 남편 김 씨는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가족을 돌보며 살림을 도맡았습니다. 게다가 아들 마저 어린 시절 사고로 정신 지체 장애자가 된 상태여서 김 씨 역시 아내와 아들을 돌보느라 지쳐 보였습니다. 사고 후 받은 4,000여만 원의 보상금은 이미 병원 치료비와 세 식구 생활비로 쪼개 쓰다 보니 신 씨 가족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는데요. 남편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씨는 벌써 몇 시간째 골목 구석 구석을 맴돌고만 있는데요. <인터뷰> 김남준 (남편) : "(힘들다고) 내가 죽을 수도 없고, 죽는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참 사는 게 말이 아닙니다." 사고 전동차 1079호에 올랐던 43살 김수남씨 역시 극심한 사고 후유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몸도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보상금 때문에 남편과 이혼까지 하고, 현재는 부상자대책위원회에서 얻어준 월세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요. 정신질환에 하반신 통증으로 움직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수남(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 " 감기도 잘 걸리고 그래요. 고통이 심하죠. (어떤 고통이 심하세요?) 그냥 마음이 불안하고 말이 좀 잘 안돼요." 지하철 참사로 가정이 풍비박산난데 이어, 김 씨는 보상금 5,000만 원마저 평소 알고 지내온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모조리 잃었었다고 하는데요. 이 때문에 김씨는 한때 노숙자 생활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황영택(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대책위원회) : "(김씨는) 사고 이후, 보상금을 받고 난 뒤에 사기를 한 번 당했어요. 우리도 잘 몰랐는데 대구역 대합실에서 먹고 자면서 노숙자처럼 생활하더라고요." 기초 생활 수급자인 김씨는 현재 폐품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요. 이혼 후 함께 살던 딸도 현재는 전 남편에게 맡겨놓은 상태입니다. 자신이 정신질환으로 병원을 다녀야 해 어쩔 수 없었다는데요. 하지만 늘 딸 걱정입니다. <인터뷰> 김수남(대구지하철참사 부상자) : " (딸이 가장 보고 싶으세요?) 네. 아직 학교 다니니까 내가 지금 전화는 못하고 애가 사춘기라 (염려스러워) 잘 못 보죠." 김 씨는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해 딸을 데려오고 싶지만 최근엔 음성 언어 장애까지 나타나는 등 상태가 더 나빠져만 가고 있다는데요. 이처럼 부상자 대부분은 김 씨처럼 뒤늦게 찾아온 음성 언어 장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터뷰> 최홍식(음성언어의학연구소 소장) : "생존자 대부분은 유독가스가 있는 환경에서 적어도 10분 정도 기침하는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탁하게 변하거나 기침을 많이 하게 됩니다. 가래가 생기다 보니까 뱉어내고, 복합작용을 해서 성대가 많이 붓고 여러 가지 합병증을 낳게 되거든요." 부상자들은 사고 후 바로 나타난 신경, 정신 관련 질환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았지만, 이처럼 뒤늦게 여러 가지 후유증이 나타날 줄은 알지도 못했고, 또 시에서도 추가 보상은 어렵다는 입장이어서, 부상자들의 마음고생은 더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동우(대구 지하철사고 부상자대책위원회 위원장) : "지금 당연히 이비인후과 음성언어장애가 지하철 사고로 인해 발생된 후유증이라고 (시에서도)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추가 보상을) 줄 수 있는 법규가 없다면서 재판으로 몰아가니까 거기서 우리 부상자들은 더 고통스러워하죠." 대구 시청에서는 뒤늦게 나타난 후유증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는데요. <인터뷰> 전청수(대구시청 부상자지원반 지원반장) : "향후에 더 이상 보상금에 대해서 민형사상 책임을 논하지 않겠다 하는 합의를 했었고, 딱한 사정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저희들 입장에서는 임의대로 인정해서 지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통해 후유증이) 인정이 되어야 지급이 가능합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후 3년, 그러나 유족들과 부상자들은 하루도 그날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을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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