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서 택시 모는 ‘대통령의 외손자’

입력 2006.07.06 (09:17) 수정 2006.07.0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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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전 대통령의 외손자 신중수씨.. 조부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

"집안 얘기를 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집안 내력에 상관 없이 남에게 손 안벌리고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베를린에서 26년째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는 신중수(61)씨는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후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숨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와서 큰 의미는 없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집안 내력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짐이 되었으며 그는 그 짐을 독일 땅에서 벗을 수 있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1879~1922) 선생의 장손이다. 동시에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의 외손자다. 말하자면 신규식 선생의 장남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둘째 딸이 결혼해 낳은 맏아들이다. 그는 이 양대 명문가를 친가와 외가로 두고 있다.
그런 그가 1971년 파독(派獨) 광부의 명단에 끼여 있었다. 석탄 캐는 일과 전혀 무관한 삶이었지만 그는 집안 몰래 파독 광부를 지원해 한국 땅을 훌쩍 떠나와 버린 것이다.
"당시 한국에 남아서 제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어디로든지 떠나야 했지요. 소위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집안은 이미 몰락했고 이 땅을 떠날 수 있다면 광부든 뭐든 상관 없었어요. 마침 사귀던 여인(지금의 부인)이 `파독 간호사로 3년간 떠나게 됐다'고 알려왔어요. 공항에서 전송하는 순간, 그럴 게 아니라 나도 가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의 집안 몰락은 6.25 전후의 좌우익 대결로 인한 것이다.
"서울이 공산 치하에 놓였을 때 일본에서 함께 유학했던 부친의 친구가 인민군 고급간부가 되어 내려왔어요. 그 연(緣)으로 부친이 자리를 맡게 됐어요. 제가 어릴 때였으니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다만 어느 날 부친이 `너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구나'라며 껴안던 기억만 납니다."
부친은 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뒤 무기로 감형됐다. 부친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10년 가까운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뒤였다. 모든 친척과 지인들도 멀어졌다. 특히 윤보선과 박정희 간의 대통령 선거전 당시, 윤보선 측이 박정희의 좌파 전력(前歷)을 제기하자 박정희 측이 "그쪽 사위는 어떤가"라고 되받았다고 한다.
신중수씨는 나중에 부친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한 지인을 통해 부친이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스칸디나비아식 사회주의를 추구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친이 전향서 작성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고 형기를 다 마친 사실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독일 중서부에 있는 아헨 지역에서 탄광 일을 했다. 1973년 베를린으로 건너와 용역회사 경비 일을 거쳐 BMW 공장에 취직했다. 거기서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1980년부터 `베를린의 택시운전사'가 된 것이다.
"택시 운전은 자유롭고, 혼자서 하는 일이라서 이 일을 5, 6년 하고 나니 다른 일은 하지 못하겠더군요. 처음에는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은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택시 영업 중간 중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독일 택시는 손님을 찾아다니지 않고 기다립니다. 책 읽을 시간이 있는 것이지요."
그는 책을 읽으면서 살 수 있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아직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경험과 식견을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을 돕고 작은 일에 보람과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이 더 뜻 있는 인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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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7-06 09:17:30
    • 수정2006-07-06 09:18:11
    연합뉴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외손자 신중수씨.. 조부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 "집안 얘기를 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집안 내력에 상관 없이 남에게 손 안벌리고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베를린에서 26년째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는 신중수(61)씨는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후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숨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와서 큰 의미는 없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집안 내력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짐이 되었으며 그는 그 짐을 독일 땅에서 벗을 수 있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1879~1922) 선생의 장손이다. 동시에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의 외손자다. 말하자면 신규식 선생의 장남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둘째 딸이 결혼해 낳은 맏아들이다. 그는 이 양대 명문가를 친가와 외가로 두고 있다. 그런 그가 1971년 파독(派獨) 광부의 명단에 끼여 있었다. 석탄 캐는 일과 전혀 무관한 삶이었지만 그는 집안 몰래 파독 광부를 지원해 한국 땅을 훌쩍 떠나와 버린 것이다. "당시 한국에 남아서 제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어디로든지 떠나야 했지요. 소위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집안은 이미 몰락했고 이 땅을 떠날 수 있다면 광부든 뭐든 상관 없었어요. 마침 사귀던 여인(지금의 부인)이 `파독 간호사로 3년간 떠나게 됐다'고 알려왔어요. 공항에서 전송하는 순간, 그럴 게 아니라 나도 가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의 집안 몰락은 6.25 전후의 좌우익 대결로 인한 것이다. "서울이 공산 치하에 놓였을 때 일본에서 함께 유학했던 부친의 친구가 인민군 고급간부가 되어 내려왔어요. 그 연(緣)으로 부친이 자리를 맡게 됐어요. 제가 어릴 때였으니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다만 어느 날 부친이 `너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구나'라며 껴안던 기억만 납니다." 부친은 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뒤 무기로 감형됐다. 부친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10년 가까운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뒤였다. 모든 친척과 지인들도 멀어졌다. 특히 윤보선과 박정희 간의 대통령 선거전 당시, 윤보선 측이 박정희의 좌파 전력(前歷)을 제기하자 박정희 측이 "그쪽 사위는 어떤가"라고 되받았다고 한다. 신중수씨는 나중에 부친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한 지인을 통해 부친이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스칸디나비아식 사회주의를 추구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친이 전향서 작성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고 형기를 다 마친 사실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독일 중서부에 있는 아헨 지역에서 탄광 일을 했다. 1973년 베를린으로 건너와 용역회사 경비 일을 거쳐 BMW 공장에 취직했다. 거기서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1980년부터 `베를린의 택시운전사'가 된 것이다. "택시 운전은 자유롭고, 혼자서 하는 일이라서 이 일을 5, 6년 하고 나니 다른 일은 하지 못하겠더군요. 처음에는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은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택시 영업 중간 중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독일 택시는 손님을 찾아다니지 않고 기다립니다. 책 읽을 시간이 있는 것이지요." 그는 책을 읽으면서 살 수 있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아직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경험과 식견을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을 돕고 작은 일에 보람과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이 더 뜻 있는 인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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