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일씨 납북서 탈북까지

입력 2007.01.04 (14:40) 수정 2007.01.0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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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탈출해 중국 모처에서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는 납북어부 최욱일(67)씨는 31년 만의 귀환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4일 최씨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밝힌 탈북경로에 따르면 최씨가 함경북도 김책시에 있는 집을 나선 것은 구랍 22일 아침. 가족들에게는 "시내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중국에서 들어온 조선족 안내원이 마련해온 화물차 짐칸에 몸을 실었다. 이후 꼬박 3일만에 혜산까지 이동한 뒤 25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최씨는 중국 은신처까지 10여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지만 "조선족 안내원이 여행증명서 등 합법적인 관련서류를 모두 준비해 왔기 때문에 북한을 탈출하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순간 차량이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그는 오른쪽 이마를 8바늘 꿰매는 수술을 받았으며 아직까지 가슴부위에 통증을 느끼고 있다.
최씨는 1975년 8월8일 오징어잡이배 '천왕호' 사무장으로 동해에서 어로 작업 중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당시 최씨를 포함해 33명의 선원이 납북됐지만 1999년까지 정부의 납북자 명단에는 선장 김두익씨만 올라 있었다.
천왕호 선원들의 납북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납북어부 최일씨와 고명섭씨의 편지가 중국을 통해 남한에 전해지면서부터. 2000년 이들의 편지가 통일부에 전해지면서 천왕호 선원 32명의 이름이 납북자 명단에 올랐다.
당시 최씨는 남한에 있던 형님 앞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북에서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 후 최씨의 동료 고명섭씨가 2005년 탈북 후 입국, 천왕호의 납북 전모가 드러났다.
최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1975년 피랍 직후 천왕호를 압수했으며 선원들은 1년 간 원산 62연락소에서 '사회적응 교육'과 정치 학습을 받아야 했다.
북한 관계자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려가면 모두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고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귀환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이나 자살 소동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원들은 적응교육 후 북한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김책시 풍년리에 있는 남새(채소) 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일하게 된 최씨는 당국의 감시 속에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납북자가족모임 측은 2001년부터 8차례에 걸쳐 '협력자'를 보내 그의 탈북을 도우려했지만 최씨는 '자신을 떠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4차례나 보위부에 신고했다.
그러던 최씨는 지난해 9월 아홉번째 자신을 찾아와 탈북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탈북의사를 타진하는 이들에게 "남녘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써오면 믿겠다"고 말했고, 부인 양정자(66)씨가 써보낸 1남3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받아본 뒤 "나올(탈북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25일 중국으로 나와 이튿날 오후 서울에 있던 부인 양씨와 31년 만에 통화했으며 같은 달 31일에는 옌지의 은신처에서 상봉, 3일을 같이 지냈다.
최씨는 현지에서 주 선양(瀋陽) 한국총영사관에 전화해 신변안전과 한국으로 송환을 요청, "연락을 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상태다.
한편 정부는 지난 12월26일께 납북자단체로부터 최씨의 탈북 사실을 통보 받고 중국 정부에 송환을 위한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대홍수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던 95-96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토끼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뜯어 먹었다"는 최씨는 172㎝의 키에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48㎏ 밖에 안될 정도로 몹시 여위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북한의 실정을 알리는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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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욱일씨 납북서 탈북까지
    • 입력 2007-01-04 14:40:31
    • 수정2007-01-04 15:58:42
    연합뉴스
북한을 탈출해 중국 모처에서 한국행을 기다리고 있는 납북어부 최욱일(67)씨는 31년 만의 귀환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4일 최씨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밝힌 탈북경로에 따르면 최씨가 함경북도 김책시에 있는 집을 나선 것은 구랍 22일 아침. 가족들에게는 "시내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중국에서 들어온 조선족 안내원이 마련해온 화물차 짐칸에 몸을 실었다. 이후 꼬박 3일만에 혜산까지 이동한 뒤 25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최씨는 중국 은신처까지 10여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지만 "조선족 안내원이 여행증명서 등 합법적인 관련서류를 모두 준비해 왔기 때문에 북한을 탈출하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순간 차량이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그는 오른쪽 이마를 8바늘 꿰매는 수술을 받았으며 아직까지 가슴부위에 통증을 느끼고 있다. 최씨는 1975년 8월8일 오징어잡이배 '천왕호' 사무장으로 동해에서 어로 작업 중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당시 최씨를 포함해 33명의 선원이 납북됐지만 1999년까지 정부의 납북자 명단에는 선장 김두익씨만 올라 있었다. 천왕호 선원들의 납북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납북어부 최일씨와 고명섭씨의 편지가 중국을 통해 남한에 전해지면서부터. 2000년 이들의 편지가 통일부에 전해지면서 천왕호 선원 32명의 이름이 납북자 명단에 올랐다. 당시 최씨는 남한에 있던 형님 앞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북에서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 후 최씨의 동료 고명섭씨가 2005년 탈북 후 입국, 천왕호의 납북 전모가 드러났다. 최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1975년 피랍 직후 천왕호를 압수했으며 선원들은 1년 간 원산 62연락소에서 '사회적응 교육'과 정치 학습을 받아야 했다. 북한 관계자들은 "지금 당신들이 내려가면 모두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고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귀환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이나 자살 소동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원들은 적응교육 후 북한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김책시 풍년리에 있는 남새(채소) 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일하게 된 최씨는 당국의 감시 속에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납북자가족모임 측은 2001년부터 8차례에 걸쳐 '협력자'를 보내 그의 탈북을 도우려했지만 최씨는 '자신을 떠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4차례나 보위부에 신고했다. 그러던 최씨는 지난해 9월 아홉번째 자신을 찾아와 탈북을 권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탈북의사를 타진하는 이들에게 "남녘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써오면 믿겠다"고 말했고, 부인 양정자(66)씨가 써보낸 1남3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받아본 뒤 "나올(탈북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25일 중국으로 나와 이튿날 오후 서울에 있던 부인 양씨와 31년 만에 통화했으며 같은 달 31일에는 옌지의 은신처에서 상봉, 3일을 같이 지냈다. 최씨는 현지에서 주 선양(瀋陽) 한국총영사관에 전화해 신변안전과 한국으로 송환을 요청, "연락을 주겠다"는 대답을 들은 상태다. 한편 정부는 지난 12월26일께 납북자단체로부터 최씨의 탈북 사실을 통보 받고 중국 정부에 송환을 위한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대홍수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던 95-96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토끼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뜯어 먹었다"는 최씨는 172㎝의 키에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48㎏ 밖에 안될 정도로 몹시 여위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북한의 실정을 알리는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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