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항쟁 특집]② 하늘이 내리신 대통령

입력 2007.06.17 (10:24) 수정 2007.06.1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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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한국의 방송사들이 남긴 ‘위대한의 영도자’에 관한 기록.

<녹취> “부대 열중 쉬어...”

텔레비전 속에서 각하는 늘 전지전능했다.

<녹취> “대통령께서는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습니다.”

오직 각하만을 위해 만들어진 ‘전두환 찬가’

<녹취> “위대한 영도자 밑에서 위대한 국민이 된 긍지와 기쁨을 갖게 해주신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을 내려주신 하늘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1980년 9월1일,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됐다.

체육관 선거에서 신군부의 실세에 바쳐진 100%의 찬성표. 그는 국민정신 개조를 다짐했다.

<녹취> : “본인은 11대 취임하면서 교육혁신과 문화 창달로 국민정신 개조.”

새 권력을 향한 충성 다짐. 당시 방송은 충성경쟁의 맨 앞에 섰다.

취임식 하루 전, 방송의 영웅 만들기는 시작됐다.

<녹취> “안녕하십니까. 우리 새 대통령 전두환 당선 진심으로 축하. 우리나라는 지척에 악랄한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북괴와 대치하고 있다. 바로 이런 우리 나라에 전두환 대통령을 내려주신 하늘에 다 시 한 번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대통령, 전두환은 6개월 후, 5공화국 새 헌법을 통해 7년 임기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초호화 판 경축 퍼레이드를 펼친다.

군사반란의 수괴라는 전과가 따라붙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통성 확보였다.

그리고 방송은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5공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5공 당시의 많은 방송 기록물들이 사라졌다.

충성의 표시로 청와대에 상납됐다가, 돌아온 이 영상자료들은, 역설적으로 그 멸실된 기록의 빈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던, 2007년 6월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눈에 이 영상들은 과연 어떻게 비쳐질까?

때론 어이가 없고 때론 심각해진다.

불과 20년 전 우리네 안방에 버젓이 방송된 화면, 그러나 생경하기만 하다.

<인터뷰> 유민지(대학 4학년): “대통령 한 사람 신격화돼서 비를 막 뿌리기도 하고 날씨가 개이게 하고 이런 식 표현... 언론이 이렇게 했다는 게 충격적.”

<인터뷰> 이은경(대학 1학년) : “그거에 대해서 저희가 배운 건 한 줄짜리 역사거든요 고등 학교에서 배운 역사 근현대사 저런 사람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애기 해 주지 않고 …”

<인터뷰> 사현영(대학 1학년): “이게 재밌자고 본 건지 그 때 사람들이 재밌게 본 건지 지금 우리가 느낀 건 저 사람들이 왜 저러나 미쳤나 그런생각 들기도 하고 했었는데 재밌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인터뷰> 소대범(대학 1학년): “저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인가 전두환 왕국인가…”

전두환 왕국의 주인을 섬기는 방송에는 어김없이 적용되는 공식이 있다.

암흑과 악천후... 그리고 차차 서광이 비치고, 꽃이 핀다. 개화와 해맑은 어린이는 새 시대의 상징.

이 모든 상징과 영상기호들은 곧 화면에 등장할 한 사람을 위해 꾸며진다.

동해의 일출, 세찬바람에도 꿋꿋한 해송, 전두환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뒤따르는 기호들.

그렇게 방송은 독재 권력의 영원함을 빌었다.

<인터뷰> 이명원(교수): “전근대 중세 중세까지는 이런 수사 은유법이라고 하는 것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왕권이 강력하고 아래 신권이나 민중들의 개인적 권리라고 하는 게 보장받지 못하던 전제왕권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지금에 와서 이런 표현을 독재자를 찬양한다. 이건 아주 당혹스러운 일이죠.”

처음 별을 달았을 때의 이 기괴한 의식, 전두환은 최고 권력을 장악하자, 끊임없는 퍼레이드와 각종 의식을 통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인터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회장): “퍼레이드 멋있게 한다고 해가지고 거기에 정통성 이 부여됩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정말 너무 우리 가 소위 군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징 조작 하는데…”

방송은, 그리고 방송 사회자는 각하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면, 화면 한 모퉁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각하가 중요한 일을 할 때면 더욱 그랬다.

<인터뷰> 김평호(교수): “단순히 말로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시 각적 장치를 동원해서 국민 여러분 설득하고 그러한 분위기 만들어낸 아주 적절한 동원장치들인 거죠.”
전두환의 집권 햇수가 쌓이면서 방송의 상징조작 수준도 거듭 향상된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헝클어진 사회를 조율하는 이미지로 차용된 석공과 제금사.

<녹취> “그는 부식돼 가는 돌더미를 정확하고 거침없이 도려냈으며”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는 그는 미륵불과 겹쳐지면서 바로 각하였음이 드러난다.

<녹취> “우리는 케냐에서 라스팔마스 어느 신작로위에서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를 염려하는 대통령을 뒷날 뉴스에서 보았다.”

교묘한 은유와 유려한 수사를 통해 독재자는 친근하면서도 지도력을 갖춘 민족의 영도자로 승화됐다.

<녹취> “오늘 세계인들은 확신의 지도자가 없음 에 궁핍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확신의 지도자 가짐으로 해서 소망의 새해 기다릴 수가 있다.”

천박한 선전물도 이쯤 되면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불과 20여 년 전, 우리 방송의 자화상이다.

방송의 전두환 숭배는 이 같은 영상 기호와 상징 조작에다 방송 언어가 결합되면서 더욱 진화해 갔다.

낯 뜨거운 중계 멘트가 경쟁하듯 쏟아져 나왔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날씨와 전두환이다.

방송에서 이제 각하는 천기까지 조절하는 존재가 됐다.

<녹취> “대통령께서는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돌아오신 오늘은 지루한 장마 끝에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다. 아마 하느님도 우리를 도우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녹취> “백악관 직원들이 사실은 이것이 상당히 단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는 곳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의 단비도 몰고 왔다.

<녹취> “아주 단비를 몰고 왔다. 이런 그 신문에도 평이 나고 그랬는데... 워싱턴도 마찬가지군요.”

각하가 나타나면 이상하게 가뭄이 해소되고, 겨울 추위까지 녹아내렸다.

<녹취> “단비를 몰고 온 전두환 대통령을 취재하기 위해+미국의 보도진 80여명과 국내 보도진 70여 명의 취재 경쟁이 2월 워싱턴 초겨울 비 추위를 녹였다.”

<녹취> “서울보다 더 추운 겨울 어느 날 오후 찾아온 우리 대통령의 풍성한 웃음에 팔을 휘저으며 태극기를 흔드는 꼬마들은 그만 추위를 잊고 말았다.”

방송이 묘사하는 대통령. 각하는 날씨까지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지도자였다.

신문도 전두환 신화 만들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독재 정권이 가장 목말라하는 이미지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풍모였다.

방송은 전두환을 한껏 신격화하면서도, 한편으론 독재자의 인간적 면모를 극대화하는데도 전파를 아끼지 않았다.

<녹취> “뒷이야기지만 그때가지 엄하고 딱딱한 군인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뜻밖에도 유머가 넘치고 자상한 면이 많은 것을…”

<녹취> “가는 곳마다 뿌린 전두환 대통령의 거짓 없는 웃음과 성품... 그가 피곤할 것이다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 터무니없음을 말해주는 듯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건강한 모습”

<녹취>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

<녹취> “시종일관 밝은 미소와 끊임없는 위트.”
<녹취> “밝고 환한 미소…”

위대한 지도자를 미화하면서, 영부인에 대한 이미지 포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녹취>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틈틈이 막힘없는 외국어를 구사하면서…”

퍼스트레이디의 이미지를 위해 늘 강조된 것은 외국어 실력과 세련된 패션감각이었다.

부끄럼 없는 방송 언어는 마침내 전두환을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녹취> “13년만에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는 날은 오늘 이 프로그램의 제목을 위대한 여정이라 붙여본다. 열하루 대통령의 여정을 위대함으로 표기하려 하는 것이다.”

해외 순방 한 번에 아시아의~, 그 다음엔 순식간에 세계적 지도자로 등극했다.

<녹취> “아시아의 강력한 새 지도자로 부각되셨습니다.”

<녹취> “이제 세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넉넉하게 느끼게 된다.”

<녹취> “서민 속의 지도자에서 이제 세계 속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녹취> “그래서 오늘 온 가슴 열어 그의 위대한 여정을 소중히 받아들이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인터뷰> 박용규(교수): “정권이 방송을 강력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러한 것에 적극적으로 호응 하는 방송사 경영진들이 있었다는 점을 종합해 판단해 본다면 당시 방송의 내용들이 뭐 지극히 뭐 정권을 단순히 홍보하는 것을 넘어선 낯부끄 러울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 아닌가…”

오로지 지배 권력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고안된 각종 영상장치와 방송언어들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공간은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였다.

방송은 가능한 한 모든 물량과 방송 시간을 동원 해 독재정권의 권위를 안방에 전달했다.

<녹취> “부대 열중 쉬어~”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독재자의 행차에 동원됐지만, 방송에게는 좋은 배경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경배의 대상이었다.

<녹취> “전용기 이륙을 막 시작했습니다. 부디부디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오시길…”

<녹취> “실황을 전국에 직접 중계방송”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는 날.

방송사 카메라는 일찌감치, 먼하늘을 비추고, 수많은 시민, 학생들은 하염없이 각하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다.

<녹취> “아직 탑승 비행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각하가 탄 비행기의 모습은 스포츠 중계처럼 전해졌다.

<녹취> “이제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탑승 특별기 동남방향 기수 아래로 착륙할 순간, 터치다운 직전, 이제 착륙한 순간. - 착륙했습니다.”

대통령 각하의 모습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방송은 서둘러 건강한 모습을 전했다.

<녹취> “건강한 모습입니다.”

<녹취> “거행하겠다.”

중계가 시작된 지 40여분, 대통령 차는 공항을 빠져 나가지만 방송은 끝날 기미가 없다.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퍼레이드. 방송차량도 그 뒤를 잇는다.

<녹취> “그럼 양화교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계 2호차 로 넘기겠습니다.”

<녹취> “여기는 중계2호차입니다.”

양화교, 마포, 서소문 등 퍼레이드 주요 지점에는 이미 중계차가 배치돼 각하 일행을 맞을 채비를 갖췄다.

흩날리는 종이 꽃가루... 서소문을 지나면서 갑자기 멈춰서는 차량 행렬...

그러나 중계 카메라는 능숙하게 각하의 차를 포착한다.

<녹취> “탑승한 승용차. 멎었습니다. 서소문 육교 아래 멎었습니다.”

미리 약속된 하차 지점엔 방송사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각하는 여유 있는 표정과 몸짓을 선보인다.

<녹취> “드디어 차에서 내린 대통령 연도에 나와 있는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과 스스럼없이 악수를 나누고 있습니다. 국민과 함께 살고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서민 대통령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 김평호(교수): "전형적으로 비교 할 수 잇는 것이 나치 정권 선전 선동 전 력과 거의 외형적으로 동일한 거고 실제적으로 기본적 동기 라든가 생각한 전략이 동일 한 데서 출발한 것이죠. 많은 국민들이 권력의 힘 이런 것을 주눅이 되고 어떤 민주 사회 시민적 주체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사회 하나의 톱니, 내지 부속품으로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당시 청와대가 작성한 아세안순방 여론 동향보고.

신문은 적극적으로 다양하게, 방송은 아침저녁 온 국민의 안방에 ‘각하의 지도자상’을 실감나게 보도했다는 만족이 담겨있다.

각하가 해외순방에 나서면 KBS와 MBC의 충성경쟁 또한 불붙었다.

단순히 각하 동정 중계만으로는 부족했다. 동원 가능한 모든 네트워크를 가동시켰다.

<녹취> “각 지방 방송국 해외 특파원 통해 알아보 는 대형 보도 특집”

각하가 아프리카에 가면 국내에 아프리카 붐을 일으켜야 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순방 시작되자, 대부분 학교들 특별수업 만들어 학생들 궁금증 풀어주기에 여념없습니다.

아프리카 패션의 유행을 점치고.

<녹취> “순방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지도 않을까”

아프리카 리듬도 빼놓지 않았다.

<녹취> “이 마을 주민들은 대통령 TV 관심있게 지켜보며”

시골 마을도 찾아 각하 순방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연출해 냈다.

<녹취> “200여 통에 이르고 있다.”

어떻게 알았을까?

KBS에는 전 세계로부터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을 찬양하는 편지가 답지하고 있다고 한다.

전두환의 아프리카 순방이 북한의 남침야욕을 꺾었다는, 스페인 청년의 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통령 순방 취재를 위해 KBS가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가를 애써 드러내기도 했다.

<녹취> “지금 보시는 화면은 밤을 새워 수신하 고 있는 방송 장면이다.”

MBC도 뒤지지 않았다.

예를 다한 자막과 그래픽 기법까지 동원해 특별히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오로지 각하 1명만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2시간 동안 셀 수도 없이 반복된다.

<녹취> “대통령은 유독 푸르러 보이는 9월 하늘 아래에 다시 손을 건넨다. 그의 얼굴은 더러 검 어 보였고 그의 손은 더욱 강건했다.”

지난 81년 전두환 미국 방문 보도는 과잉 홍보뿐 아니라, 시청자의 눈과 귀를 철저히 가렸다는 점에서 한국 언론의 대표적 수치로 기억될 것이다.

<녹취> “레이건 미국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다른 국가 원수들을 제끼고 우리 전두환 대통령 각하를 초청하게 됐다는 하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우의와 신뢰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저녁시간 방미 특집을 하는 중간 틈틈이 아침 뉴스의 방미 특집을 홍보를 잊지 않았다.

아침저녁 황금시간대엔 전두환 방미 동정을 알리는 특집 뉴스로 도배됐다.

전두환 미국 방문 동안 총 13편의 특집을 방송했고, 이를 묶어 청와대에 바쳤다.

우리 방송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현지의 열렬한 환영 분위기.

<녹취>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기 트랩을 내리자 세 시간 전부터 기다리던 천여명 동포들은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대형 사진 피켓을 높이 흔들며 환호함으로써 지지하는 뜨거운 환영무드로 넘쳤습니다.”

국내 주요 일간지들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신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사진이 미국 신문에는 더 중요하게 실렸다.

전두환 가는 곳마다 열렸던 방미 규탄 시위를 미국 언론은 생생히 전했다.

“경찰에 의해 한 블록 밖으로 격리된 백여 명의 시위대는 격렬하게 전두환 살인마라는 구호를 외쳤다.”

“LA에서의 한인 시위도 자세히 보도 됐다.”

“전두환 규탄 시위대들은 전두환이 살인자라는 의미로 관과, 독재자라고 쓰여 진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전두환이 지난 해 봄 광주에서 수백 명의 시민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방송과 신문을 가득 메운 미국 현지 환영 인파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환영 대열에 참가했을까?

전두환 방미 기간 당시 우리 국회도서관에 들어 온 미국 주요 신문에는 곳곳이 시커멓게 먹칠돼 있다. 어떤 내용인지 찾아봤다.

“‘뉴욕타임즈’ 지는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 회사에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회사경영진과 한국 정부로부터 전두환 환영행사 에 참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철저한 검열 때문에 가려졌던 기사의 출처는 뉴욕타임즈.

“일부는 친지들과 함께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미국 인을 동반하여 환영행사에 참가하도록 지시받았으며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회사에서의 지 위는 물론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협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방송과 신문은 열렬한 환영 인파와 미국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 각하의 위대함만을 강조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이 승용차 뒷문으로 내리자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이 문 앞까지 나와서 영접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은 역사적인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에 안보와 외교 ...

그러나 당시 미국의 비밀외교문서를 보면 백악관은 전두환을 그리 반기지만은 않았다.

전두환의 앤드류 공항 도착은 의전 행사도 없는 비공식 도착으로 정해졌다.

백악관 도착 때도 군악대 연주는 없다고 못 박고 있고, 미 대통령 집무실, 이른바 오발 오피스의 회담 시간은 10분 이내로 제한한다고 내부적으로 정해 놨다.

<녹취> “이제 우리나라 미국, 새 차원의 동맹관계 성숙한 동반자 시대 막 열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전두환을 초청하긴 했지만, 자신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국 군부정권의 취약점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인터뷰> 박태균(교수): “일반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독재정권들이 내부적으로 정통성을 얻지 못하는 국가들이 대체로 미국의 정상과의 회담을 통해서 국내에 자기나라의 과시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상과 대통령과 만나서 정상회담을 수용 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한국에서의 최고 지도자로 서의 위치를 확인받는다.”

하나의 정권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한국이 치른 대가는 적지 않았다.

<녹취> “헤이그 미 국무장관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미 국무장관이 기록한 한국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

“국무장관은 전 대통령에게 한국의 핵 발전 계획을 위한 연료공급과 기술 문제는 미국에 의존해 도 된다는 것을 보장하고, 한국이 핵 비확산 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사실상 주권국가로서 평화적 핵개발 권리까지 포기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산 쌀을 대량 구매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한국은 기록적인 양의 미국 쌀을 구매했다. (백만톤 이상) 한국은 캐나다와 호주의 한국 곡물 시장 진입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밀과 옥수수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

한국 정부는 레이건의 전두환 초청에 고무돼 81년 3월 3일로 예정된 12대 대통령 취임식에 미국 측에서 최고위급 축하 사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청은 간단하게 거절됐다.

결국 12대 전두환의 취임식에는 주한 미 대사가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녹취>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엄숙히 선서한다.”

1983년 11월 레이건의 짧은 한국 방문은 독재정권 시절 한미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레이건의 방한은 집권 중반에 접어들던 전두환에게는 자신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어김없이 가두 퍼레이드가 마련됐고, 방송에 중계됐다.

전두환의 의도대로라면 레이건의 행렬은 여의도 광장에 멈춰 섰어야 했다.

그러나 행렬은 광장을 지나쳤다.

<녹취> “이동중계차 나와 달라.”

레이건이 방한 계획을 결정한 7월, 한국 정부는 레이건을 위해 여의도에 200만 명의 군중을 동원해 환영 집회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이를 묵살했다.

방문 첫날 레이건 대통령은 국회 연설을 국회로 향했다.

전두환은 외교채널을 통해 여의도 환영행사 외에도 레이건에게 방한 일정을 하루 더 늘려 자신과 사적인 만찬을 갖자고 요청했다.

83년 7월부터 무려 넉 달에 걸쳐 이런 요구가 되풀이됐다.

급기야 레이건 방한 직전엔 전두환이 직접 주한 미 대사 워커를 불러 자신의 뜻을 직접 전했다.

“전 대통령은 두 가지 ‘가장 애절한 요구’를 전달 해달라고 말했다. 먼저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개적인 환영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에 하루 더 머물면서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저녁파티에 참석해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백악관 측은 청와대의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국 정상회담에 집중된 화려한 플래시 세례의 이면에는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이 외교 상례에 한참 벗어난 이런 일들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방송은 5공 내내 위대한 지도자를 칭송해 댔다.

<녹취> “지금까지 각하께서는 아프리카 4개국 순방국 기록…보시겠다.”

20여 년 전, 청와대에 상납된 방송 자막에 ‘저희 국민’이란 글이 선명하다.

그 때 방송은 위대한 영도자를 높이기 위해 감히 국민을 저희라고 낮춰 불렀다.

20년 전 6.10 항쟁, 그 위대한 영도자는 군사반란의 수괴라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국 언론이 모시던 그 지배 권력의 빈자리를 이제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방송과 신문은 누구를 새로운 권력으로 모시는가?

<인터뷰> 이효성(교수): “저널리즘을 통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한다, 이제 이런 원 래 언론의 기본 목표보다는 어떻게 하면 생존하느냐, 수익을 극대화하느냐 이게 최대의 관심사가 되면서 한국의 언론들이 대단히 경제 권력에 특히 대광고주에 취약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인터뷰> 전규찬(교수): "자본 이해 관계 위해서 언론 역할 포기하고 이름 갖다 바치거나 한 현재 적 형태가 어떻게 보면 무지 하고 기회주의적 속성 현저했던 과거에 비해 보면 더 사악하다."

20년 전, 방송이 전두환에 상납한 170여 개의 치욕스런 영상 기록은 묻고 있다.

20년이 지난 후, 2007년의 현재의 방송은 과연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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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6-17 10:05:09
    • 수정2007-06-18 10: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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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한국의 방송사들이 남긴 ‘위대한의 영도자’에 관한 기록. <녹취> “부대 열중 쉬어...” 텔레비전 속에서 각하는 늘 전지전능했다. <녹취> “대통령께서는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습니다.” 오직 각하만을 위해 만들어진 ‘전두환 찬가’ <녹취> “위대한 영도자 밑에서 위대한 국민이 된 긍지와 기쁨을 갖게 해주신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을 내려주신 하늘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1980년 9월1일,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됐다. 체육관 선거에서 신군부의 실세에 바쳐진 100%의 찬성표. 그는 국민정신 개조를 다짐했다. <녹취> : “본인은 11대 취임하면서 교육혁신과 문화 창달로 국민정신 개조.” 새 권력을 향한 충성 다짐. 당시 방송은 충성경쟁의 맨 앞에 섰다. 취임식 하루 전, 방송의 영웅 만들기는 시작됐다. <녹취> “안녕하십니까. 우리 새 대통령 전두환 당선 진심으로 축하. 우리나라는 지척에 악랄한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북괴와 대치하고 있다. 바로 이런 우리 나라에 전두환 대통령을 내려주신 하늘에 다 시 한 번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대통령, 전두환은 6개월 후, 5공화국 새 헌법을 통해 7년 임기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초호화 판 경축 퍼레이드를 펼친다. 군사반란의 수괴라는 전과가 따라붙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통성 확보였다. 그리고 방송은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5공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5공 당시의 많은 방송 기록물들이 사라졌다. 충성의 표시로 청와대에 상납됐다가, 돌아온 이 영상자료들은, 역설적으로 그 멸실된 기록의 빈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던, 2007년 6월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눈에 이 영상들은 과연 어떻게 비쳐질까? 때론 어이가 없고 때론 심각해진다. 불과 20년 전 우리네 안방에 버젓이 방송된 화면, 그러나 생경하기만 하다. <인터뷰> 유민지(대학 4학년): “대통령 한 사람 신격화돼서 비를 막 뿌리기도 하고 날씨가 개이게 하고 이런 식 표현... 언론이 이렇게 했다는 게 충격적.” <인터뷰> 이은경(대학 1학년) : “그거에 대해서 저희가 배운 건 한 줄짜리 역사거든요 고등 학교에서 배운 역사 근현대사 저런 사람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애기 해 주지 않고 …” <인터뷰> 사현영(대학 1학년): “이게 재밌자고 본 건지 그 때 사람들이 재밌게 본 건지 지금 우리가 느낀 건 저 사람들이 왜 저러나 미쳤나 그런생각 들기도 하고 했었는데 재밌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인터뷰> 소대범(대학 1학년): “저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인가 전두환 왕국인가…” 전두환 왕국의 주인을 섬기는 방송에는 어김없이 적용되는 공식이 있다. 암흑과 악천후... 그리고 차차 서광이 비치고, 꽃이 핀다. 개화와 해맑은 어린이는 새 시대의 상징. 이 모든 상징과 영상기호들은 곧 화면에 등장할 한 사람을 위해 꾸며진다. 동해의 일출, 세찬바람에도 꿋꿋한 해송, 전두환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뒤따르는 기호들. 그렇게 방송은 독재 권력의 영원함을 빌었다. <인터뷰> 이명원(교수): “전근대 중세 중세까지는 이런 수사 은유법이라고 하는 것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고 왕권이 강력하고 아래 신권이나 민중들의 개인적 권리라고 하는 게 보장받지 못하던 전제왕권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지금에 와서 이런 표현을 독재자를 찬양한다. 이건 아주 당혹스러운 일이죠.” 처음 별을 달았을 때의 이 기괴한 의식, 전두환은 최고 권력을 장악하자, 끊임없는 퍼레이드와 각종 의식을 통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인터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회장): “퍼레이드 멋있게 한다고 해가지고 거기에 정통성 이 부여됩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정말 너무 우리 가 소위 군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징 조작 하는데…” 방송은, 그리고 방송 사회자는 각하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면, 화면 한 모퉁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각하가 중요한 일을 할 때면 더욱 그랬다. <인터뷰> 김평호(교수): “단순히 말로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시 각적 장치를 동원해서 국민 여러분 설득하고 그러한 분위기 만들어낸 아주 적절한 동원장치들인 거죠.” 전두환의 집권 햇수가 쌓이면서 방송의 상징조작 수준도 거듭 향상된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헝클어진 사회를 조율하는 이미지로 차용된 석공과 제금사. <녹취> “그는 부식돼 가는 돌더미를 정확하고 거침없이 도려냈으며”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는 그는 미륵불과 겹쳐지면서 바로 각하였음이 드러난다. <녹취> “우리는 케냐에서 라스팔마스 어느 신작로위에서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를 염려하는 대통령을 뒷날 뉴스에서 보았다.” 교묘한 은유와 유려한 수사를 통해 독재자는 친근하면서도 지도력을 갖춘 민족의 영도자로 승화됐다. <녹취> “오늘 세계인들은 확신의 지도자가 없음 에 궁핍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확신의 지도자 가짐으로 해서 소망의 새해 기다릴 수가 있다.” 천박한 선전물도 이쯤 되면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불과 20여 년 전, 우리 방송의 자화상이다. 방송의 전두환 숭배는 이 같은 영상 기호와 상징 조작에다 방송 언어가 결합되면서 더욱 진화해 갔다. 낯 뜨거운 중계 멘트가 경쟁하듯 쏟아져 나왔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날씨와 전두환이다. 방송에서 이제 각하는 천기까지 조절하는 존재가 됐다. <녹취> “대통령께서는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돌아오신 오늘은 지루한 장마 끝에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다. 아마 하느님도 우리를 도우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녹취> “백악관 직원들이 사실은 이것이 상당히 단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는 곳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의 단비도 몰고 왔다. <녹취> “아주 단비를 몰고 왔다. 이런 그 신문에도 평이 나고 그랬는데... 워싱턴도 마찬가지군요.” 각하가 나타나면 이상하게 가뭄이 해소되고, 겨울 추위까지 녹아내렸다. <녹취> “단비를 몰고 온 전두환 대통령을 취재하기 위해+미국의 보도진 80여명과 국내 보도진 70여 명의 취재 경쟁이 2월 워싱턴 초겨울 비 추위를 녹였다.” <녹취> “서울보다 더 추운 겨울 어느 날 오후 찾아온 우리 대통령의 풍성한 웃음에 팔을 휘저으며 태극기를 흔드는 꼬마들은 그만 추위를 잊고 말았다.” 방송이 묘사하는 대통령. 각하는 날씨까지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지도자였다. 신문도 전두환 신화 만들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독재 정권이 가장 목말라하는 이미지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풍모였다. 방송은 전두환을 한껏 신격화하면서도, 한편으론 독재자의 인간적 면모를 극대화하는데도 전파를 아끼지 않았다. <녹취> “뒷이야기지만 그때가지 엄하고 딱딱한 군인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뜻밖에도 유머가 넘치고 자상한 면이 많은 것을…” <녹취> “가는 곳마다 뿌린 전두환 대통령의 거짓 없는 웃음과 성품... 그가 피곤할 것이다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 터무니없음을 말해주는 듯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건강한 모습” <녹취>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 <녹취> “시종일관 밝은 미소와 끊임없는 위트.” <녹취> “밝고 환한 미소…” 위대한 지도자를 미화하면서, 영부인에 대한 이미지 포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녹취>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틈틈이 막힘없는 외국어를 구사하면서…” 퍼스트레이디의 이미지를 위해 늘 강조된 것은 외국어 실력과 세련된 패션감각이었다. 부끄럼 없는 방송 언어는 마침내 전두환을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녹취> “13년만에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는 날은 오늘 이 프로그램의 제목을 위대한 여정이라 붙여본다. 열하루 대통령의 여정을 위대함으로 표기하려 하는 것이다.” 해외 순방 한 번에 아시아의~, 그 다음엔 순식간에 세계적 지도자로 등극했다. <녹취> “아시아의 강력한 새 지도자로 부각되셨습니다.” <녹취> “이제 세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넉넉하게 느끼게 된다.” <녹취> “서민 속의 지도자에서 이제 세계 속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녹취> “그래서 오늘 온 가슴 열어 그의 위대한 여정을 소중히 받아들이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인터뷰> 박용규(교수): “정권이 방송을 강력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러한 것에 적극적으로 호응 하는 방송사 경영진들이 있었다는 점을 종합해 판단해 본다면 당시 방송의 내용들이 뭐 지극히 뭐 정권을 단순히 홍보하는 것을 넘어선 낯부끄 러울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 아닌가…” 오로지 지배 권력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고안된 각종 영상장치와 방송언어들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공간은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였다. 방송은 가능한 한 모든 물량과 방송 시간을 동원 해 독재정권의 권위를 안방에 전달했다. <녹취> “부대 열중 쉬어~”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독재자의 행차에 동원됐지만, 방송에게는 좋은 배경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경배의 대상이었다. <녹취> “전용기 이륙을 막 시작했습니다. 부디부디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오시길…” <녹취> “실황을 전국에 직접 중계방송”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는 날. 방송사 카메라는 일찌감치, 먼하늘을 비추고, 수많은 시민, 학생들은 하염없이 각하의 도착을 기다려야 했다. <녹취> “아직 탑승 비행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각하가 탄 비행기의 모습은 스포츠 중계처럼 전해졌다. <녹취> “이제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탑승 특별기 동남방향 기수 아래로 착륙할 순간, 터치다운 직전, 이제 착륙한 순간. - 착륙했습니다.” 대통령 각하의 모습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방송은 서둘러 건강한 모습을 전했다. <녹취> “건강한 모습입니다.” <녹취> “거행하겠다.” 중계가 시작된 지 40여분, 대통령 차는 공항을 빠져 나가지만 방송은 끝날 기미가 없다.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퍼레이드. 방송차량도 그 뒤를 잇는다. <녹취> “그럼 양화교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계 2호차 로 넘기겠습니다.” <녹취> “여기는 중계2호차입니다.” 양화교, 마포, 서소문 등 퍼레이드 주요 지점에는 이미 중계차가 배치돼 각하 일행을 맞을 채비를 갖췄다. 흩날리는 종이 꽃가루... 서소문을 지나면서 갑자기 멈춰서는 차량 행렬... 그러나 중계 카메라는 능숙하게 각하의 차를 포착한다. <녹취> “탑승한 승용차. 멎었습니다. 서소문 육교 아래 멎었습니다.” 미리 약속된 하차 지점엔 방송사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각하는 여유 있는 표정과 몸짓을 선보인다. <녹취> “드디어 차에서 내린 대통령 연도에 나와 있는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과 스스럼없이 악수를 나누고 있습니다. 국민과 함께 살고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서민 대통령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 김평호(교수): "전형적으로 비교 할 수 잇는 것이 나치 정권 선전 선동 전 력과 거의 외형적으로 동일한 거고 실제적으로 기본적 동기 라든가 생각한 전략이 동일 한 데서 출발한 것이죠. 많은 국민들이 권력의 힘 이런 것을 주눅이 되고 어떤 민주 사회 시민적 주체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사회 하나의 톱니, 내지 부속품으로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당시 청와대가 작성한 아세안순방 여론 동향보고. 신문은 적극적으로 다양하게, 방송은 아침저녁 온 국민의 안방에 ‘각하의 지도자상’을 실감나게 보도했다는 만족이 담겨있다. 각하가 해외순방에 나서면 KBS와 MBC의 충성경쟁 또한 불붙었다. 단순히 각하 동정 중계만으로는 부족했다. 동원 가능한 모든 네트워크를 가동시켰다. <녹취> “각 지방 방송국 해외 특파원 통해 알아보 는 대형 보도 특집” 각하가 아프리카에 가면 국내에 아프리카 붐을 일으켜야 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순방 시작되자, 대부분 학교들 특별수업 만들어 학생들 궁금증 풀어주기에 여념없습니다. 아프리카 패션의 유행을 점치고. <녹취> “순방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지도 않을까” 아프리카 리듬도 빼놓지 않았다. <녹취> “이 마을 주민들은 대통령 TV 관심있게 지켜보며” 시골 마을도 찾아 각하 순방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연출해 냈다. <녹취> “200여 통에 이르고 있다.” 어떻게 알았을까? KBS에는 전 세계로부터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을 찬양하는 편지가 답지하고 있다고 한다. 전두환의 아프리카 순방이 북한의 남침야욕을 꺾었다는, 스페인 청년의 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통령 순방 취재를 위해 KBS가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가를 애써 드러내기도 했다. <녹취> “지금 보시는 화면은 밤을 새워 수신하 고 있는 방송 장면이다.” MBC도 뒤지지 않았다. 예를 다한 자막과 그래픽 기법까지 동원해 특별히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오로지 각하 1명만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2시간 동안 셀 수도 없이 반복된다. <녹취> “대통령은 유독 푸르러 보이는 9월 하늘 아래에 다시 손을 건넨다. 그의 얼굴은 더러 검 어 보였고 그의 손은 더욱 강건했다.” 지난 81년 전두환 미국 방문 보도는 과잉 홍보뿐 아니라, 시청자의 눈과 귀를 철저히 가렸다는 점에서 한국 언론의 대표적 수치로 기억될 것이다. <녹취> “레이건 미국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다른 국가 원수들을 제끼고 우리 전두환 대통령 각하를 초청하게 됐다는 하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우의와 신뢰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저녁시간 방미 특집을 하는 중간 틈틈이 아침 뉴스의 방미 특집을 홍보를 잊지 않았다. 아침저녁 황금시간대엔 전두환 방미 동정을 알리는 특집 뉴스로 도배됐다. 전두환 미국 방문 동안 총 13편의 특집을 방송했고, 이를 묶어 청와대에 바쳤다. 우리 방송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현지의 열렬한 환영 분위기. <녹취>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기 트랩을 내리자 세 시간 전부터 기다리던 천여명 동포들은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대형 사진 피켓을 높이 흔들며 환호함으로써 지지하는 뜨거운 환영무드로 넘쳤습니다.” 국내 주요 일간지들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신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사진이 미국 신문에는 더 중요하게 실렸다. 전두환 가는 곳마다 열렸던 방미 규탄 시위를 미국 언론은 생생히 전했다. “경찰에 의해 한 블록 밖으로 격리된 백여 명의 시위대는 격렬하게 전두환 살인마라는 구호를 외쳤다.” “LA에서의 한인 시위도 자세히 보도 됐다.” “전두환 규탄 시위대들은 전두환이 살인자라는 의미로 관과, 독재자라고 쓰여 진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전두환이 지난 해 봄 광주에서 수백 명의 시민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방송과 신문을 가득 메운 미국 현지 환영 인파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환영 대열에 참가했을까? 전두환 방미 기간 당시 우리 국회도서관에 들어 온 미국 주요 신문에는 곳곳이 시커멓게 먹칠돼 있다. 어떤 내용인지 찾아봤다. “‘뉴욕타임즈’ 지는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 회사에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회사경영진과 한국 정부로부터 전두환 환영행사 에 참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철저한 검열 때문에 가려졌던 기사의 출처는 뉴욕타임즈. “일부는 친지들과 함께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미국 인을 동반하여 환영행사에 참가하도록 지시받았으며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회사에서의 지 위는 물론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협박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방송과 신문은 열렬한 환영 인파와 미국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 각하의 위대함만을 강조했다. <녹취> “전두환 대통령이 승용차 뒷문으로 내리자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이 문 앞까지 나와서 영접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은 역사적인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에 안보와 외교 ... 그러나 당시 미국의 비밀외교문서를 보면 백악관은 전두환을 그리 반기지만은 않았다. 전두환의 앤드류 공항 도착은 의전 행사도 없는 비공식 도착으로 정해졌다. 백악관 도착 때도 군악대 연주는 없다고 못 박고 있고, 미 대통령 집무실, 이른바 오발 오피스의 회담 시간은 10분 이내로 제한한다고 내부적으로 정해 놨다. <녹취> “이제 우리나라 미국, 새 차원의 동맹관계 성숙한 동반자 시대 막 열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전두환을 초청하긴 했지만, 자신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국 군부정권의 취약점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인터뷰> 박태균(교수): “일반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독재정권들이 내부적으로 정통성을 얻지 못하는 국가들이 대체로 미국의 정상과의 회담을 통해서 국내에 자기나라의 과시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상과 대통령과 만나서 정상회담을 수용 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한국에서의 최고 지도자로 서의 위치를 확인받는다.” 하나의 정권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한국이 치른 대가는 적지 않았다. <녹취> “헤이그 미 국무장관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미 국무장관이 기록한 한국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 “국무장관은 전 대통령에게 한국의 핵 발전 계획을 위한 연료공급과 기술 문제는 미국에 의존해 도 된다는 것을 보장하고, 한국이 핵 비확산 정책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사실상 주권국가로서 평화적 핵개발 권리까지 포기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산 쌀을 대량 구매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한국은 기록적인 양의 미국 쌀을 구매했다. (백만톤 이상) 한국은 캐나다와 호주의 한국 곡물 시장 진입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밀과 옥수수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 한국 정부는 레이건의 전두환 초청에 고무돼 81년 3월 3일로 예정된 12대 대통령 취임식에 미국 측에서 최고위급 축하 사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청은 간단하게 거절됐다. 결국 12대 전두환의 취임식에는 주한 미 대사가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녹취>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엄숙히 선서한다.” 1983년 11월 레이건의 짧은 한국 방문은 독재정권 시절 한미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레이건의 방한은 집권 중반에 접어들던 전두환에게는 자신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어김없이 가두 퍼레이드가 마련됐고, 방송에 중계됐다. 전두환의 의도대로라면 레이건의 행렬은 여의도 광장에 멈춰 섰어야 했다. 그러나 행렬은 광장을 지나쳤다. <녹취> “이동중계차 나와 달라.” 레이건이 방한 계획을 결정한 7월, 한국 정부는 레이건을 위해 여의도에 200만 명의 군중을 동원해 환영 집회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이를 묵살했다. 방문 첫날 레이건 대통령은 국회 연설을 국회로 향했다. 전두환은 외교채널을 통해 여의도 환영행사 외에도 레이건에게 방한 일정을 하루 더 늘려 자신과 사적인 만찬을 갖자고 요청했다. 83년 7월부터 무려 넉 달에 걸쳐 이런 요구가 되풀이됐다. 급기야 레이건 방한 직전엔 전두환이 직접 주한 미 대사 워커를 불러 자신의 뜻을 직접 전했다. “전 대통령은 두 가지 ‘가장 애절한 요구’를 전달 해달라고 말했다. 먼저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개적인 환영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에 하루 더 머물면서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저녁파티에 참석해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백악관 측은 청와대의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국 정상회담에 집중된 화려한 플래시 세례의 이면에는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이 외교 상례에 한참 벗어난 이런 일들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방송은 5공 내내 위대한 지도자를 칭송해 댔다. <녹취> “지금까지 각하께서는 아프리카 4개국 순방국 기록…보시겠다.” 20여 년 전, 청와대에 상납된 방송 자막에 ‘저희 국민’이란 글이 선명하다. 그 때 방송은 위대한 영도자를 높이기 위해 감히 국민을 저희라고 낮춰 불렀다. 20년 전 6.10 항쟁, 그 위대한 영도자는 군사반란의 수괴라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국 언론이 모시던 그 지배 권력의 빈자리를 이제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방송과 신문은 누구를 새로운 권력으로 모시는가? <인터뷰> 이효성(교수): “저널리즘을 통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한다, 이제 이런 원 래 언론의 기본 목표보다는 어떻게 하면 생존하느냐, 수익을 극대화하느냐 이게 최대의 관심사가 되면서 한국의 언론들이 대단히 경제 권력에 특히 대광고주에 취약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인터뷰> 전규찬(교수): "자본 이해 관계 위해서 언론 역할 포기하고 이름 갖다 바치거나 한 현재 적 형태가 어떻게 보면 무지 하고 기회주의적 속성 현저했던 과거에 비해 보면 더 사악하다." 20년 전, 방송이 전두환에 상납한 170여 개의 치욕스런 영상 기록은 묻고 있다. 20년이 지난 후, 2007년의 현재의 방송은 과연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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