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 프로젝트] “테러로는 언론의 입을 막을 순 없다.”

입력 2007.06.24 (15:40) 수정 2007.06.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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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의 한 호텔의 주차장. 한 낮의 정적을 깨는 폭발음이 울렸다.

승용차 바닥을 날려버린 6개의 다이너마이트. 탐사보도 전문기자, 돈 볼스를 노린 테러였다.

<인터뷰>조지 와이즈(前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그는 애리조나의 부패와 조직범죄를 밝히기 위해 파헤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돈 볼스가 폭탄테러에 희생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전역의 기자들이 피닉스로 모여들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반년동안 휴가를 내고 자기 돈을 들여서 취재를 한 겁니다.”

테러로 희생된 동료 기자의 못 다한 취재를 마무리하기 위해, 언론사상 전무후무한 실험이 시작됐다. 그 후 30년, 돈 볼스가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던 미국 탐사보도 협회 IRE가 다시 돈 볼스의 고장 피닉스를 찾았다.

9백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세이무어 허쉬(뉴욕커 기자):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고 전미 탐사보도회 IRE를 지금의 영향력 있는 단체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돈 볼스의 치열한 삶과,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려, 현재 저널리즘이 처한 위기를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였다.

탐사 저널리스트들의 제전, 미국탐사보도협회 IRE의 연례 총회가 지난 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개최됐다.

행사 하이라이트인 IRE상 시상식에 이어 기조연설이 시작됐다. 연사는 최근 미국 월트리드 육군병원의 비리를 폭로해 육군장관을 해임시킨, 워싱턴 포스트 기자 다나 프리스트!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좋은 기사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기사도 스트립쇼 클럽에서 시작됐습니다.”

잠입 취재 경험담과 함께 농담으로 시작된 연설은 기자에게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사실은 내가 워싱턴포스트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제기랄’이라는 소리가 수화기로 들려왔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법정안이나 정부 브리핑, 문서기록에도 흥미로운 것이 있긴 하지만 현장에 나가서 직접 부딪히는 것이 최고라는 사실입니다.”

‘정부 브리핑보다는 현장으로 나가라’는 그녀의 충고는 탐사 언론인이 지녀야 할 자세로 이어졌다.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여러분이 미디어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미디어가 여러분의 미래를 좌우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론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소속된 언론기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고 정부를 감시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다나 프리스트는 지난해 CIA 비밀감옥 실태를 폭로한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부시 정권은 그녀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올해 또 다시 군 비리를 폭로했다.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우리가 이라크 전쟁 전에 WMD(대량살상무기)에 대해 강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이 분야에서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들의 책무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들의 책임감에 호소하고자 합니다.”

연설이 끝나고, 한 노 기자가 정부의 정보통제와 언론탄압에 맞선 제 2의 ‘애리조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녹취>데이비드 번햄(IRE 창립준비위원/전 뉴욕타임즈 기자):“정부가 용감한 기자들을 탄압하고 시민들을 불법구금, 조사, 고문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애리조나 프로젝트 같은 대응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30년 전의 ‘애리조나 프로젝트’가 여전히, 언론을 위협하는 모든 압력에 맞서고자 하는 언론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이자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진실을 향한 열정과 부패에 대한 증오로 일관했던, 그래서 지금은 전설이 된 한 탐사기자의 희생이 있었다.

<녹취>CBS뉴스(1976.6.2):“(앵커)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보도 기자로, 마피아에 관한 연속 기사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오늘 그가 자가용차의 시동을 걸던 중 폭탄이 폭발했습니다. 생명이 위중한 상태입니다.”

1976년 6월 2일 정오 무렵, 돈 볼스는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한 호텔로 자신이 취재하고 있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주겠다는 제보자를 만나러 갔다.

그날은 결혼 8주년 기념일로, 저녁에 아내와 모처럼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만나기로 한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약속을 취소한다는 전화가 왔다.

볼스는 자신의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인터뷰>알리시아(호텔 홍보담당):"당시 로비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고 뒤쪽에 있었습니다. 저쪽에 있었고, 저쪽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 소위 정보원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차로 돌아갔는데...“

주차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흰색 승용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 순간, 차 밑에 설치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승용차 바닥은 완전히 뚫렸고, 돈 볼스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인터뷰>워드 부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편집국장):“그가 타자마자 폭발하도록 계획했는데 잘 안 돼 기폭장치를 다시 눌러 폭발했고 차의 바닥을 뚫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 위주로 크게 다쳤고 가슴 부분과 몸 전체로 올라가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체에 심한 부상을 입은 그는 바로 병원에 옮겨졌고, 양 다리와 한쪽 팔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으며 죽음에 맞섰으나, 열하루 째를 넘기진 못했다.

돈 볼스는 이곳 피닉스의 한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던 제보자가 나타나지 않자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승용차로 돌아온 뒤 시동을 걸자 원격 조정된 6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서 치명상을 입고 입원한지 열하루 만에 숨졌습니다.

돈 볼스 기자의 폭탄테러 소식에 애리조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인터뷰>워드 부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편집국장):“이 곳 언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기자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돈 볼스 14년 간 일해 온 신문사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는 폭탄테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오랜 기간 탐사기자로 활약했던 돈 볼스 기자가 갱 조직의 폭탄 테러에 당했으며, 조직범죄와 정치인들의 부패를 취재하던 중 거짓 제보자의 함정에 빠졌다고 전했다.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발행인은 돈 볼스의 대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며 불의에 당당히 맞서겠다고 결의했다.

76. 6.14. 애리조나 리퍼블릭지.

<녹취>“우리는 이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공포에 빠지게 하는 모든 범죄 요소를 싹쓸이하기 위해 돈 볼스가 평생에 걸쳐 벌인 싸움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참 할 것을 호소합니다.” -발행인 니나 풀리엄-

돈 볼스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자신을 불러 낸 사건의 용의자를 확인해 내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였다.

<인터뷰>데니스 와그너(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그는 몇 마디 말을 내뱉어서 수사관들이 책임자를 찾아내는데 실마리를 제공 했다. 병원에서 그는 자신을 그 호텔로 유인한 사람의 사진을 판명해 냈습니다.”

돈 볼스는 끝내 숨을 거뒀지만, 그가 용의자 사진 파일에서 확인해 낸 거짓 제보자 존 하비 아담슨은 사건 발생 10여일 뒤 체포됐다.

아담슨에게 테러를 사주한 건설업자 맥스 던랩도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애리조나 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그러나, 이들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주류도매업자 캠퍼 말리는 증거 부족으로 처벌되지 않았고, 지난 90년 사망했다.

캠퍼 말리가 테러 배후로 지목된 것은 돈 볼스가 사건 발생 두 달 전부터 말리의 비리를 집중 폭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캠퍼 말리는 부유한 목장주이자 주류 도매상으로 돈 볼스는 분명 그에게 부정적인 기사들을 썼습니다. 당시 말리는 분명 화가 났습니다.

살인의 배경은 주로 말리가 화가 났고 그의 가까운 친구이자 도움을 받던 맥스 던랩이 볼스를 죽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볼스는 이전에도 범죄조직의 살해 위협을 받아왔지만, 거대 마피아를 고발하는 기사를 멈추지 않았다.

1970년 10월엔 정치세력화한 마피아 조직을 대해부하는 시리즈물을 열 차례나 집중 보도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70년 10월 11일 애리조나 리퍼블릭지.

<녹취>“애리조나 외곽 어느 지역구 민주당의장은 시카고 범죄 조직에서 활동한 사위를 두고 있다. 피닉스의 한 판사의 어머니는 마피아의 우두머리 리카볼리에게 명의를 빌려주어 경마 경주와 라스베가스 사업을 하고 있다.”

마피아와 정치권, 사법부의 유착을 가차 없이 폭로한 기사 때문에 살해 위협은 계속됐고, 볼스는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그의 전화는 도청돼 있었고 고소도 당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자가용이 폭파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는 차 후드에 테이프를 붙여서 누군가 건드리면 표가 나도록 했습니다. 위협을 받은 적도 있어서 그는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인터뷰>조지 와이즈(前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돈 볼스는 수많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애리조나의 가장 흉악한 사람들인 조직 범죄자들, 마약 밀매 범들, 토지 사기꾼들, 또는 부패한 관리들 등을 추적하는 탐사보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돈 볼스가 남긴 취재수첩들, 한 수첩에는 애리조나 지역의 마피아 조직원 2백여 명의 리스트와, 업자, 정치권과의 관계가 정자로 빼곡히 적혀 있다.

그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탐사 기자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 무엇보다 가정을 중시했다.

그런 돈 볼스의 죽음은 모든 기자, 특히 그가 창립회원으로 가입한 미국 탐사보도협회 IRE 소속 기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돈 볼스가 숨지고, 닷새 뒤 열린 IRE 첫 연례총회. IRE 회원들은 언론인에 대한 테러에 침묵할 수 없다며 전국의 기자들이 연대해 공동대응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는 달랐지만 볼스와 함께 토지 사기 문제를 취재했던 돈 데베루 기자도 뜻을 같이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언론인이 그냥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모여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라는 말에 나는 강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의 일을 계속하고 우리가 이런 일에 협박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미국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이 실험에는, 애리조나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뉴스데이 지의 전설적인 범죄전문 기자로 퓰리처상을 2번이나 받은 밥 그린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미국 전역에서 28개 신문, 방송사 기자 38명이 합류했다.일부는 회사의 지원을 받았지만, 대부분 자비로 휴가를 내 왔고, 사표까지 내고 온 기자도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조직범죄를 연구하던 조지 와이즈도 프로젝트에 리서처로 참여했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전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난 뒤 내 논문으로부터 정보를 얻고자하는 많은 기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에게 새롭게 만들어질 팀의 일원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팀원들은 피닉스 시내 중심가의 한 호텔에 취재본부를 설치했다.

취재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진실에 대한 열정만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갔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전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우리는 보안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우리는 경비견과 경비원이 있다는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실제로는 없었지만. 하지만 방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직 범죄자들과 부패한 사람들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어 할 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어느 누구도 그 기간 동안 내 월급을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축해 둔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밥도 사먹고요.”

<녹취>조지 와이즈(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원래는 한 달짜리 프로젝트였는데 6개월이 되었습니다. 기자들은 방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기자들은 휴가도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도 모두 포기했습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과거에 같이 일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일하는 게 시험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으니까 싸움도 많이 일어나고요. 작업스타일도 많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잘 되었습니다. 많이 싸웠지만 총책임을 맡은 뉴스데이의 밥 그린이 모든 일을 잘 이끌었습니다.”

당초 한 달로 예정된 프로젝트 기간은 6개월로 늘었고, 1977년 3월 13일, 마침내 애리조나의 부패 구조를 대해부한 시리즈 기사가 첫 선을 보였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라는 큰 제목 하에 모두 40건의 기사가 23일 간 보도할 분량으로 정리됐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2월쯤에 작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변호사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제기될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걱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3월 중순이었습니다."

시리즈 기사 대부분은 애리조나의 거물 정치인과 범죄조직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폭로하는데 할애됐다.

당시 돈 데베루가 직접 취재했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 관련 기사는 큰 논란을 불렀다.

골드워터 일가 소유의 거대 농장에서 수많은 불법 이민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8-DAY 기사.

<녹취>“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가운데 하루 일당은 5달러, 거기에다 가짜 사회복지 공제. 그리고 감독자들에게 지불한 식품비용 명목으로 더 뜯어낸다. 가축처럼 트럭에 실려 멀리는 아이다호까지 운반되기도 한다.

거기서 농장 일에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이민국에 신고 되어 멕시코로 추방당한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그것은 마피아 패밀리와 골드워터 가족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불법 멕시코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가 있었습니다.

수확을 하고 목장을 가꾸는 사람들로 최저임금, 주거, 보건이 모두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또 고위 정치인과 마피아 조직의 유착 실태를 가차 없이 드러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1-DAY 기사.

<녹취>“이 같은 관계는 결국 법 집행기관에 대한 빈약한 예산을 낳았으며 경찰은 할 수없이 잘 알려진 거리범죄 단속에만 매달리며 오늘날 지하세계의 주요 소득원인 도박과 매춘 같은 범죄에는 사실상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법과 정의를 세워야할 사법부마저 범죄 조직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이 때문에 애리조나는 범죄의 천국처럼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1-DAY 기사.

<녹취>“범죄자들이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부패관리들이 처벌 받지 않는 상황은 법을 수호하기보다는 사회적인 친목클럽으로 기능하고 있는 일부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봐주기 식 태도 때문에 가능했다.

그 같은 결과는 뻔뻔함과 무소불위를 낳았고 결국 신문기자의 살인으로 이어졌다.”

또 정치권의 비호 아래 마약밀매와 불법 도박이 성행하고, 애리조나 주법이 보장한 이른바 ‘백지 신탁’ 제도를 노려 미국 전역의 검은 자금이 몰려오는 실태도 고발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현재 지금 살고 있는 피닉스는 30년 전의 피닉스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1976년 당시 피닉스에 사는 것은 군부독재하의 서울에서 사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시리즈 기사는 1977년 3월 13일부터 매일 각 언론사에서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언론사가 대열에서 이탈했다. 바로 돈 볼스의 소속 신문사인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였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법적 우려가 분명히 있었고, 리퍼블릭은 돈이 많은 반면 IRE는 그렇지 못해 만일 소송이 걸린다면 리퍼블릭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검토한 변호사가 있었고 리퍼블릭에서 나와서 작업을 함께한 기자들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퍼블릭 지가 게재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의 발행인이 포함된, 피닉스 시를 실제 움직이는 모임인 이른바 ‘피닉스 40’이 보도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도시에 있는 소수의 부자들 그룹에 속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피닉스 40’이라고 불리는 그룹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선거에 나설지를 결정했고 선거도 통제했습니다. 그들은 지역사회를 지배했습니다.”

리퍼블릭 지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독자투고 등을 통해 피닉스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가 이어졌고, 시위 사태도 일어났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지역 사회가 분노했습니다. 리퍼블릭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다른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관련 기사를 들었고 다른 지역신문이 들어왔습니다. 덴버 같은데서 피닉스가 검열을 당하는 것을 보는 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는 닷새 만에 독자들의 항의에 굴복해, AP통신이 편집한 기사를 받아 게재하기 시작했다.

숱한 논란 속에 나온 애리조나 프로젝트 기사는 애리조나에 의미 있는 변화를 불러왔다.

주정부가 독점 운영하던 경주 위원회를 없앴고, 마약밀매 단속을 위한 예산이 증액됐다.

또 고질적인 토지사기를 가능케 했던 신탁 제도가 개정됐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토지 사기가 만연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백지신탁’이라는 제도 때문으로 사기범들이 서류의 벽 속에 숨어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애리조나에 스며든 여러 마피아 조직의 존재를 생생하게 드러냈고, 이들을 축출하기 위한 가시적 조처가 뒤따랐다.

<인터뷰>워드 부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편집국장):“물론 애리조나 주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보기에 주의 입법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애리조나에서 마피아를 축출하려 힘썼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테러와 같은 물리력으로는 결코 언론을 침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는 것이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다시는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게 만든, 언론인을 위한 상징적 보호 장치가 됐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이 프로젝트는 돈 볼스의 살해를 규명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모든 기자들을 위한 보험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한명의 기자를 해친다면 40명의 기자들이 그의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요."

<인터뷰>크리스틴(애리조나 주립대 언론학부 교수):“그에 대한 증거는 30년 전에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 이 나라에서 또 다른 돈 볼스가 생겨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애리조나 프로젝트가 기자들에게 있어 일종의 보험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녹취>오세균 기자:"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미국 언론인에 대한 테러로는 결코 침묵 시킬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을 뿐 만 아니라 언론에 자유를 위해 배타적이거나 경쟁적인 언론사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숭고한 행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유력 언론사들의 불참과 재정난 속에서도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것은 당시 설립 1년차이던 신생조직 IRE를 일약 미국 탐사 저널리스트들의 구심점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돈 볼스와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IRE, 그리고 탐사 언론인들에게 영원한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다.

<인터뷰>제임스 그리말디(IRE 회장)“IRE를 대중에 가장 널리 알린 사건은 돈 볼스가 죽은 후에 IRE 회원들이 애리조나로 와서 그가 하던 취재를 마저 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대중의 마음속에 최초로 박힌 IRE의 이미지다.”

지난 1976년, 2백 명에 불과하던 회원은 30년 만에 4천 5백여 명이 됐고, IRE는 이제 탐사보도의 본산이자, 최고 권위의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6월 열리는 IRE 총회에는 탐사보도에 관심이 있는 미국의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기자와 언론학자, 언론지망생 등이 참가한다.

이 자리에서 저명한 탐사기자들은 자신들의 취재기법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다른 기자들과 공유한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때 언론사 간의 벽을 허물고, 신문, 방송의 경계를 넘나든 기자들의 연대의식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인터뷰>마이클 맥카시(USA 투데이 기자):"나는 추적 보도 저널리즘에 대해 더 알기 위해서 왔다. 그것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는 성공적인 방법들을 배우기 위해서다."

<인터뷰>재널린 쉬블리(사우스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흡수해서 학교로 다시 가서 내가 배운 것이나 경험한 것에 대해 발표도 할 겁니다.

새로운 인맥도 만나고 명함도 나누며 가능한 한 많은 걸 배워 학교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IRE는 연례 총회 뿐 아니라 수시로 각종 탐사보도 교육 과정을 개설해 탐사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언론인들을 교육하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기자들이 정부의 각종 전자문서와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해 보도할 수 있도록 컴퓨터 프로그램과 사회과학분석 기법을 활용한 취재기법을 개발하고, 전파하고 있다.

<인터뷰>제프 포터(데이터베이스 도서관장):“IRE 강의들은 매우 기본적이면서 현장감이 있는 내용이다. 강의실에 여러 컴퓨터를 갖고 있고 교사들은 헌신적이고 경험이 풍부하다.

능력이 출중해서 학생들이 기술을 배우고 기술을 늘리도록 한다. 각 클래스는 한 가지씩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전자정보(CAR)를 이용해서 보도능력을 키워준다.”

이번 피닉스 총회에도 세계 25개국에서 950여명의 기자들이 참가해 새로운 탐사보도 기법을 공유했다.

실체적 진실보다는 혼란스러운 정보가 난무하고, 상업주의가 판치는 요즘, 언론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가 갈수록 떨어지는 저널리즘의 위기를, 탐사보도가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인터뷰>브랜트(IRE 사무총장):"IRE의 언론인들은 다른 집단보다 훨씬 더 모호성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가능한 한 진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능한 한이요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아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좀 더 완전한 그림을 그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면서도 결코 진실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돈 볼스. 그리고 동료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았던 애리조나 프로젝트.

진실을 가로막는 세력이 거대한 범죄조직이던, 정치권력 혹은 자본권력이던, 이에 맞서는 저널리즘 정신은 돈 볼스와 애리조나 프로젝트, 그리고 IRE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세이무어 허쉬(뉴욕커 기자):“IRE가 중요한 단체인 이유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 말이다.

IRE는 젊은 언론인들을 자극시켜 정치인이나 권력이 있는 모든 이들을 곤경에 처하게끔 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대변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냉철한 탐사 기자였지만 그에 앞서 가정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고, 노년에는 유머칼럼 쓰기를 희망했던 돈 볼스.

그의 치열한 기자 정신은, 소시민적 삶에 안주하거나,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현재 우리 한국의 언론인들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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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리조나 프로젝트] “테러로는 언론의 입을 막을 순 없다.”
    • 입력 2007-06-24 09:31:17
    • 수정2007-06-24 20:19:54
    미디어 포커스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의 한 호텔의 주차장. 한 낮의 정적을 깨는 폭발음이 울렸다. 승용차 바닥을 날려버린 6개의 다이너마이트. 탐사보도 전문기자, 돈 볼스를 노린 테러였다. <인터뷰>조지 와이즈(前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그는 애리조나의 부패와 조직범죄를 밝히기 위해 파헤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돈 볼스가 폭탄테러에 희생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전역의 기자들이 피닉스로 모여들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반년동안 휴가를 내고 자기 돈을 들여서 취재를 한 겁니다.” 테러로 희생된 동료 기자의 못 다한 취재를 마무리하기 위해, 언론사상 전무후무한 실험이 시작됐다. 그 후 30년, 돈 볼스가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던 미국 탐사보도 협회 IRE가 다시 돈 볼스의 고장 피닉스를 찾았다. 9백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세이무어 허쉬(뉴욕커 기자):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고 전미 탐사보도회 IRE를 지금의 영향력 있는 단체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돈 볼스의 치열한 삶과,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려, 현재 저널리즘이 처한 위기를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였다. 탐사 저널리스트들의 제전, 미국탐사보도협회 IRE의 연례 총회가 지난 주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개최됐다. 행사 하이라이트인 IRE상 시상식에 이어 기조연설이 시작됐다. 연사는 최근 미국 월트리드 육군병원의 비리를 폭로해 육군장관을 해임시킨, 워싱턴 포스트 기자 다나 프리스트!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좋은 기사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기사도 스트립쇼 클럽에서 시작됐습니다.” 잠입 취재 경험담과 함께 농담으로 시작된 연설은 기자에게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사실은 내가 워싱턴포스트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제기랄’이라는 소리가 수화기로 들려왔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법정안이나 정부 브리핑, 문서기록에도 흥미로운 것이 있긴 하지만 현장에 나가서 직접 부딪히는 것이 최고라는 사실입니다.” ‘정부 브리핑보다는 현장으로 나가라’는 그녀의 충고는 탐사 언론인이 지녀야 할 자세로 이어졌다.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여러분이 미디어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미디어가 여러분의 미래를 좌우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론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소속된 언론기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고 정부를 감시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다나 프리스트는 지난해 CIA 비밀감옥 실태를 폭로한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부시 정권은 그녀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올해 또 다시 군 비리를 폭로했다. <녹취>다나 프리스트(워싱턴 포스트 기자):“우리가 이라크 전쟁 전에 WMD(대량살상무기)에 대해 강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이 분야에서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들의 책무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들의 책임감에 호소하고자 합니다.” 연설이 끝나고, 한 노 기자가 정부의 정보통제와 언론탄압에 맞선 제 2의 ‘애리조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녹취>데이비드 번햄(IRE 창립준비위원/전 뉴욕타임즈 기자):“정부가 용감한 기자들을 탄압하고 시민들을 불법구금, 조사, 고문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애리조나 프로젝트 같은 대응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30년 전의 ‘애리조나 프로젝트’가 여전히, 언론을 위협하는 모든 압력에 맞서고자 하는 언론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이자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진실을 향한 열정과 부패에 대한 증오로 일관했던, 그래서 지금은 전설이 된 한 탐사기자의 희생이 있었다. <녹취>CBS뉴스(1976.6.2):“(앵커)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보도 기자로, 마피아에 관한 연속 기사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오늘 그가 자가용차의 시동을 걸던 중 폭탄이 폭발했습니다. 생명이 위중한 상태입니다.” 1976년 6월 2일 정오 무렵, 돈 볼스는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한 호텔로 자신이 취재하고 있던 사건에 관한 정보를 주겠다는 제보자를 만나러 갔다. 그날은 결혼 8주년 기념일로, 저녁에 아내와 모처럼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만나기로 한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약속을 취소한다는 전화가 왔다. 볼스는 자신의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인터뷰>알리시아(호텔 홍보담당):"당시 로비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고 뒤쪽에 있었습니다. 저쪽에 있었고, 저쪽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 소위 정보원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차로 돌아갔는데...“ 주차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흰색 승용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 순간, 차 밑에 설치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승용차 바닥은 완전히 뚫렸고, 돈 볼스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인터뷰>워드 부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편집국장):“그가 타자마자 폭발하도록 계획했는데 잘 안 돼 기폭장치를 다시 눌러 폭발했고 차의 바닥을 뚫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 위주로 크게 다쳤고 가슴 부분과 몸 전체로 올라가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체에 심한 부상을 입은 그는 바로 병원에 옮겨졌고, 양 다리와 한쪽 팔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으며 죽음에 맞섰으나, 열하루 째를 넘기진 못했다. 돈 볼스는 이곳 피닉스의 한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던 제보자가 나타나지 않자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승용차로 돌아온 뒤 시동을 걸자 원격 조정된 6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서 치명상을 입고 입원한지 열하루 만에 숨졌습니다. 돈 볼스 기자의 폭탄테러 소식에 애리조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인터뷰>워드 부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편집국장):“이 곳 언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기자들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돈 볼스 14년 간 일해 온 신문사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는 폭탄테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오랜 기간 탐사기자로 활약했던 돈 볼스 기자가 갱 조직의 폭탄 테러에 당했으며, 조직범죄와 정치인들의 부패를 취재하던 중 거짓 제보자의 함정에 빠졌다고 전했다. 애리조나 리퍼블릭의 발행인은 돈 볼스의 대의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며 불의에 당당히 맞서겠다고 결의했다. 76. 6.14. 애리조나 리퍼블릭지. <녹취>“우리는 이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공포에 빠지게 하는 모든 범죄 요소를 싹쓸이하기 위해 돈 볼스가 평생에 걸쳐 벌인 싸움에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참 할 것을 호소합니다.” -발행인 니나 풀리엄- 돈 볼스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자신을 불러 낸 사건의 용의자를 확인해 내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였다. <인터뷰>데니스 와그너(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그는 몇 마디 말을 내뱉어서 수사관들이 책임자를 찾아내는데 실마리를 제공 했다. 병원에서 그는 자신을 그 호텔로 유인한 사람의 사진을 판명해 냈습니다.” 돈 볼스는 끝내 숨을 거뒀지만, 그가 용의자 사진 파일에서 확인해 낸 거짓 제보자 존 하비 아담슨은 사건 발생 10여일 뒤 체포됐다. 아담슨에게 테러를 사주한 건설업자 맥스 던랩도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애리조나 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그러나, 이들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주류도매업자 캠퍼 말리는 증거 부족으로 처벌되지 않았고, 지난 90년 사망했다. 캠퍼 말리가 테러 배후로 지목된 것은 돈 볼스가 사건 발생 두 달 전부터 말리의 비리를 집중 폭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캠퍼 말리는 부유한 목장주이자 주류 도매상으로 돈 볼스는 분명 그에게 부정적인 기사들을 썼습니다. 당시 말리는 분명 화가 났습니다. 살인의 배경은 주로 말리가 화가 났고 그의 가까운 친구이자 도움을 받던 맥스 던랩이 볼스를 죽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볼스는 이전에도 범죄조직의 살해 위협을 받아왔지만, 거대 마피아를 고발하는 기사를 멈추지 않았다. 1970년 10월엔 정치세력화한 마피아 조직을 대해부하는 시리즈물을 열 차례나 집중 보도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70년 10월 11일 애리조나 리퍼블릭지. <녹취>“애리조나 외곽 어느 지역구 민주당의장은 시카고 범죄 조직에서 활동한 사위를 두고 있다. 피닉스의 한 판사의 어머니는 마피아의 우두머리 리카볼리에게 명의를 빌려주어 경마 경주와 라스베가스 사업을 하고 있다.” 마피아와 정치권, 사법부의 유착을 가차 없이 폭로한 기사 때문에 살해 위협은 계속됐고, 볼스는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그의 전화는 도청돼 있었고 고소도 당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자가용이 폭파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는 차 후드에 테이프를 붙여서 누군가 건드리면 표가 나도록 했습니다. 위협을 받은 적도 있어서 그는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인터뷰>조지 와이즈(前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돈 볼스는 수많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애리조나의 가장 흉악한 사람들인 조직 범죄자들, 마약 밀매 범들, 토지 사기꾼들, 또는 부패한 관리들 등을 추적하는 탐사보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돈 볼스가 남긴 취재수첩들, 한 수첩에는 애리조나 지역의 마피아 조직원 2백여 명의 리스트와, 업자, 정치권과의 관계가 정자로 빼곡히 적혀 있다. 그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탐사 기자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 무엇보다 가정을 중시했다. 그런 돈 볼스의 죽음은 모든 기자, 특히 그가 창립회원으로 가입한 미국 탐사보도협회 IRE 소속 기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돈 볼스가 숨지고, 닷새 뒤 열린 IRE 첫 연례총회. IRE 회원들은 언론인에 대한 테러에 침묵할 수 없다며 전국의 기자들이 연대해 공동대응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는 달랐지만 볼스와 함께 토지 사기 문제를 취재했던 돈 데베루 기자도 뜻을 같이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언론인이 그냥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모여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라는 말에 나는 강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의 일을 계속하고 우리가 이런 일에 협박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미국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이 실험에는, 애리조나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뉴스데이 지의 전설적인 범죄전문 기자로 퓰리처상을 2번이나 받은 밥 그린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미국 전역에서 28개 신문, 방송사 기자 38명이 합류했다.일부는 회사의 지원을 받았지만, 대부분 자비로 휴가를 내 왔고, 사표까지 내고 온 기자도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조직범죄를 연구하던 조지 와이즈도 프로젝트에 리서처로 참여했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전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난 뒤 내 논문으로부터 정보를 얻고자하는 많은 기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에게 새롭게 만들어질 팀의 일원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팀원들은 피닉스 시내 중심가의 한 호텔에 취재본부를 설치했다. 취재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진실에 대한 열정만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갔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전 애리조나 검찰 수사관):“우리는 보안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우리는 경비견과 경비원이 있다는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실제로는 없었지만. 하지만 방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직 범죄자들과 부패한 사람들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어 할 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어느 누구도 그 기간 동안 내 월급을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축해 둔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밥도 사먹고요.” <녹취>조지 와이즈(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원래는 한 달짜리 프로젝트였는데 6개월이 되었습니다. 기자들은 방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잤습니다. 기자들은 휴가도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도 모두 포기했습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과거에 같이 일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일하는 게 시험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으니까 싸움도 많이 일어나고요. 작업스타일도 많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잘 되었습니다. 많이 싸웠지만 총책임을 맡은 뉴스데이의 밥 그린이 모든 일을 잘 이끌었습니다.” 당초 한 달로 예정된 프로젝트 기간은 6개월로 늘었고, 1977년 3월 13일, 마침내 애리조나의 부패 구조를 대해부한 시리즈 기사가 첫 선을 보였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라는 큰 제목 하에 모두 40건의 기사가 23일 간 보도할 분량으로 정리됐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2월쯤에 작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변호사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제기될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걱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3월 중순이었습니다." 시리즈 기사 대부분은 애리조나의 거물 정치인과 범죄조직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폭로하는데 할애됐다. 당시 돈 데베루가 직접 취재했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 관련 기사는 큰 논란을 불렀다. 골드워터 일가 소유의 거대 농장에서 수많은 불법 이민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8-DAY 기사. <녹취>“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가운데 하루 일당은 5달러, 거기에다 가짜 사회복지 공제. 그리고 감독자들에게 지불한 식품비용 명목으로 더 뜯어낸다. 가축처럼 트럭에 실려 멀리는 아이다호까지 운반되기도 한다. 거기서 농장 일에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이민국에 신고 되어 멕시코로 추방당한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그것은 마피아 패밀리와 골드워터 가족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불법 멕시코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가 있었습니다. 수확을 하고 목장을 가꾸는 사람들로 최저임금, 주거, 보건이 모두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또 고위 정치인과 마피아 조직의 유착 실태를 가차 없이 드러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1-DAY 기사. <녹취>“이 같은 관계는 결국 법 집행기관에 대한 빈약한 예산을 낳았으며 경찰은 할 수없이 잘 알려진 거리범죄 단속에만 매달리며 오늘날 지하세계의 주요 소득원인 도박과 매춘 같은 범죄에는 사실상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법과 정의를 세워야할 사법부마저 범죄 조직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이 때문에 애리조나는 범죄의 천국처럼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1-DAY 기사. <녹취>“범죄자들이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부패관리들이 처벌 받지 않는 상황은 법을 수호하기보다는 사회적인 친목클럽으로 기능하고 있는 일부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봐주기 식 태도 때문에 가능했다. 그 같은 결과는 뻔뻔함과 무소불위를 낳았고 결국 신문기자의 살인으로 이어졌다.” 또 정치권의 비호 아래 마약밀매와 불법 도박이 성행하고, 애리조나 주법이 보장한 이른바 ‘백지 신탁’ 제도를 노려 미국 전역의 검은 자금이 몰려오는 실태도 고발했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현재 지금 살고 있는 피닉스는 30년 전의 피닉스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1976년 당시 피닉스에 사는 것은 군부독재하의 서울에서 사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애리조나 프로젝트의 시리즈 기사는 1977년 3월 13일부터 매일 각 언론사에서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언론사가 대열에서 이탈했다. 바로 돈 볼스의 소속 신문사인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였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기자):"법적 우려가 분명히 있었고, 리퍼블릭은 돈이 많은 반면 IRE는 그렇지 못해 만일 소송이 걸린다면 리퍼블릭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검토한 변호사가 있었고 리퍼블릭에서 나와서 작업을 함께한 기자들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퍼블릭 지가 게재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의 발행인이 포함된, 피닉스 시를 실제 움직이는 모임인 이른바 ‘피닉스 40’이 보도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도시에 있는 소수의 부자들 그룹에 속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피닉스 40’이라고 불리는 그룹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선거에 나설지를 결정했고 선거도 통제했습니다. 그들은 지역사회를 지배했습니다.” 리퍼블릭 지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독자투고 등을 통해 피닉스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가 이어졌고, 시위 사태도 일어났다. <인터뷰>돈 데베루(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지역 사회가 분노했습니다. 리퍼블릭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다른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관련 기사를 들었고 다른 지역신문이 들어왔습니다. 덴버 같은데서 피닉스가 검열을 당하는 것을 보는 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애리조나 리퍼블릭 지는 닷새 만에 독자들의 항의에 굴복해, AP통신이 편집한 기사를 받아 게재하기 시작했다. 숱한 논란 속에 나온 애리조나 프로젝트 기사는 애리조나에 의미 있는 변화를 불러왔다. 주정부가 독점 운영하던 경주 위원회를 없앴고, 마약밀매 단속을 위한 예산이 증액됐다. 또 고질적인 토지사기를 가능케 했던 신탁 제도가 개정됐다. <인터뷰>찰스 켈리(애리조나 프로젝트 참여 기자):“토지 사기가 만연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백지신탁’이라는 제도 때문으로 사기범들이 서류의 벽 속에 숨어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애리조나에 스며든 여러 마피아 조직의 존재를 생생하게 드러냈고, 이들을 축출하기 위한 가시적 조처가 뒤따랐다. <인터뷰>워드 부쉬(애리조나 리퍼블릭지 편집국장):“물론 애리조나 주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보기에 주의 입법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애리조나에서 마피아를 축출하려 힘썼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테러와 같은 물리력으로는 결코 언론을 침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는 것이다.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다시는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게 만든, 언론인을 위한 상징적 보호 장치가 됐다. <인터뷰>조지 와이즈(애리조나 프로젝트 멤버):"이 프로젝트는 돈 볼스의 살해를 규명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모든 기자들을 위한 보험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한명의 기자를 해친다면 40명의 기자들이 그의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요." <인터뷰>크리스틴(애리조나 주립대 언론학부 교수):“그에 대한 증거는 30년 전에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 이 나라에서 또 다른 돈 볼스가 생겨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애리조나 프로젝트가 기자들에게 있어 일종의 보험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녹취>오세균 기자:"애리조나 프로젝트는 미국 언론인에 대한 테러로는 결코 침묵 시킬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을 뿐 만 아니라 언론에 자유를 위해 배타적이거나 경쟁적인 언론사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숭고한 행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유력 언론사들의 불참과 재정난 속에서도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것은 당시 설립 1년차이던 신생조직 IRE를 일약 미국 탐사 저널리스트들의 구심점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돈 볼스와 애리조나 프로젝트는 IRE, 그리고 탐사 언론인들에게 영원한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다. <인터뷰>제임스 그리말디(IRE 회장)“IRE를 대중에 가장 널리 알린 사건은 돈 볼스가 죽은 후에 IRE 회원들이 애리조나로 와서 그가 하던 취재를 마저 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대중의 마음속에 최초로 박힌 IRE의 이미지다.” 지난 1976년, 2백 명에 불과하던 회원은 30년 만에 4천 5백여 명이 됐고, IRE는 이제 탐사보도의 본산이자, 최고 권위의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6월 열리는 IRE 총회에는 탐사보도에 관심이 있는 미국의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기자와 언론학자, 언론지망생 등이 참가한다. 이 자리에서 저명한 탐사기자들은 자신들의 취재기법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다른 기자들과 공유한다. 애리조나 프로젝트 때 언론사 간의 벽을 허물고, 신문, 방송의 경계를 넘나든 기자들의 연대의식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인터뷰>마이클 맥카시(USA 투데이 기자):"나는 추적 보도 저널리즘에 대해 더 알기 위해서 왔다. 그것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는 성공적인 방법들을 배우기 위해서다." <인터뷰>재널린 쉬블리(사우스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흡수해서 학교로 다시 가서 내가 배운 것이나 경험한 것에 대해 발표도 할 겁니다. 새로운 인맥도 만나고 명함도 나누며 가능한 한 많은 걸 배워 학교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IRE는 연례 총회 뿐 아니라 수시로 각종 탐사보도 교육 과정을 개설해 탐사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언론인들을 교육하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기자들이 정부의 각종 전자문서와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해 보도할 수 있도록 컴퓨터 프로그램과 사회과학분석 기법을 활용한 취재기법을 개발하고, 전파하고 있다. <인터뷰>제프 포터(데이터베이스 도서관장):“IRE 강의들은 매우 기본적이면서 현장감이 있는 내용이다. 강의실에 여러 컴퓨터를 갖고 있고 교사들은 헌신적이고 경험이 풍부하다. 능력이 출중해서 학생들이 기술을 배우고 기술을 늘리도록 한다. 각 클래스는 한 가지씩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전자정보(CAR)를 이용해서 보도능력을 키워준다.” 이번 피닉스 총회에도 세계 25개국에서 950여명의 기자들이 참가해 새로운 탐사보도 기법을 공유했다. 실체적 진실보다는 혼란스러운 정보가 난무하고, 상업주의가 판치는 요즘, 언론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가 갈수록 떨어지는 저널리즘의 위기를, 탐사보도가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인터뷰>브랜트(IRE 사무총장):"IRE의 언론인들은 다른 집단보다 훨씬 더 모호성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가능한 한 진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능한 한이요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아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좀 더 완전한 그림을 그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면서도 결코 진실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돈 볼스. 그리고 동료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았던 애리조나 프로젝트. 진실을 가로막는 세력이 거대한 범죄조직이던, 정치권력 혹은 자본권력이던, 이에 맞서는 저널리즘 정신은 돈 볼스와 애리조나 프로젝트, 그리고 IRE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세이무어 허쉬(뉴욕커 기자):“IRE가 중요한 단체인 이유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 말이다. IRE는 젊은 언론인들을 자극시켜 정치인이나 권력이 있는 모든 이들을 곤경에 처하게끔 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대변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냉철한 탐사 기자였지만 그에 앞서 가정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고, 노년에는 유머칼럼 쓰기를 희망했던 돈 볼스. 그의 치열한 기자 정신은, 소시민적 삶에 안주하거나,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현재 우리 한국의 언론인들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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