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먹고 죽은 2100년 전 미라

입력 2007.10.29 (15:29) 수정 2007.10.30 (07:3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참외 먹고 죽은 2100년 전 미라 수천 점에 이르는 마왕퇴 출토 유물이 고스란히 후난성박물원 차지가 된 것은 1971년 이 유적 발견 직후 조사를 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왕퇴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시실 배치가 '마왕퇴 한묘 진열'과 '후난 역사문물 진열' 두 곳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난성박물원은 '마왕퇴 진열관과 기타 등등'의 전시관인 셈이다. 전시공간 역시 절반 이상이 마왕퇴 유물 차지다. 마왕퇴 진열관은 전시품별로 특화해 놓았다. 입구에는 발굴 과정이나 유적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도판이나 일반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을 지나면 악기류 코너를 만나고 다시 그곳을 통과하면 각종 칠기류 그득한 공간이 맞이한다. 사람을 본뜬 나무 인형, 가야금 비슷하지만 현이 25개인 악기, 바둑이나 장기 비슷한 놀이기구 일종인 박국이 특히 볼 만하다. 이어 관람객은 직물 코너로 들어선다. 무덤에서 무슨 비단이 그리도 많이 출토됐는지 놀랍다 .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빛에 민감한 직물 보호를 위해 조명을 어둡게 한 직물 코너를 지나면 각종 죽백서(竹帛書)가 열을 지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노자도덕경 두 가지 판본은 물론이고 '합음양(合陰陽)'이라 해서 정기를 소모하지 않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한 성 교과서도 있다. 군사지도와 괴물들을 잔뜩 원색으로 그려넣은 그림도 보인다. 이런 마왕퇴 한묘 진열관에서 시신은 가장 후미진 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서 거대한 목곽(木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왕퇴 1호 한묘에 있던 목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2천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곽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거대한 목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2층으로 올가가야 하는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박물관 측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거대 목곽 뒤 한 켠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관 3점이 전시돼 있다. 이들 관은 모두가 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을 원색으로 수놓았다. 그래서 이들 관을 채회관(彩繪棺)이라 부른다. '시체'는 그 맞은편에 안치돼 있다. 지하에 마련한 관에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운 시신. 발견 당시에는 피부가 살아있는 듯 윤이 났다고 하지만, 보존을 위해 방부처리를 한 까닭에 지금은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회반죽으로 만든 마네킹같을 뿐이다. 미라가 된 시신을 이렇게 만천하에 꼭 전시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마침 기자가 이 미라를 찾았을 때, 영국식 영어 발음이 완연한 서양인 일가족이 미라를 관람하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시신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교할 때 이 '미라실'은 확연히 달라진 데가 있었다. 그 때는 미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 미라를 해부하면서 떼낸 각종 장기, 심지어 자궁까지 용액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는
마왕퇴 여자 미라 1972년 중국 후난성 창사시 마왕퇴(馬王堆) 1호 한묘(漢墓) 주인공인 신추(辛追) 미라. 전한시대 초대 장사국왕(長沙國) 승상을 지낸 이창(利倉)의 아내다. 내관(內棺)에서 발견될 당시 이 미라는 신장 154㎝에 체중은 34.3㎏이었다. 2천100년이 더 지났지만 발견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전신에 윤택이 났고 피하 조직 또한 유연했으며 탄력이 있어 관절이 살아 숨쉬는 듯 했다고 한다. 현재는 후난성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수천 점에 이르는 마왕퇴 출토 유물이 고스란히 후난성박물원 차지가 된 것은 1971년 이 유적 발견 직후 조사를 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왕퇴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시실 배치가 '마왕퇴 한묘 진열'과 '후난 역사문물 진열' 두 곳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난성박물원은 '마왕퇴 진열관과 기타 등등'의 전시관인 셈이다. 전시공간 역시 절반 이상이 마왕퇴 유물 차지다.
마왕퇴 진열관은 전시품별로 특화해 놓았다. 입구에는 발굴 과정이나 유적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도판이나 일반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을 지나면 악기류 코너를 만나고 다시 그곳을 통과하면 각종 칠기류 그득한 공간이 맞이한다. 사람을 본뜬 나무 인형, 가야금 비슷하지만 현이 25개인 악기, 바둑이나 장기 비슷한 놀이기구 일종인 박국이 특히 볼 만하다.
이어 관람객은 직물 코너로 들어선다. 무덤에서 무슨 비단이 그리도 많이 출토됐는지 놀랍다 .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빛에 민감한 직물 보호를 위해 조명을 어둡게 한 직물 코너를 지나면 각종 죽백서(竹帛書)가 열을 지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노자도덕경 두 가지 판본은 물론이고 '합음양(合陰陽)'이라 해서 정기를 소모하지 않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한 성 교과서도 있다. 군사지도와 괴물들을 잔뜩 원색으로 그려넣은 그림도 보인다.
이런 마왕퇴 한묘 진열관에서 시신은 가장 후미진 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서 거대한 목곽(木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왕퇴 1호 한묘에 있던 목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2천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곽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거대한 목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2층으로 올가가야 하는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박물관 측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거대 목곽 뒤 한 켠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관 3점이 전시돼 있다. 이들 관은 모두가 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을 원색으로 수놓았다. 그래서 이들 관을 채회관(彩繪棺)이라 부른다.
'시체'는 그 맞은편에 안치돼 있다. 지하에 마련한 관에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운 시신. 발견 당시에는 피부가 살아있는 듯 윤이 났다고 하지만, 보존을 위해 방부처리를 한 까닭에 지금은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회반죽으로 만든 마네킹같을 뿐이다.
미라가 된 시신을 이렇게 만천하에 꼭 전시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마침 기자가 이 미라를 찾았을 때, 영국식 영어 발음이 완연한 서양인 일가족이 미라를 관람하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시신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교할 때 이 '미라실'은 확연히 달라진 데가 있었다. 그 때는 미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 미라를 해부하면서 떼낸 각종 장기, 심지어 자궁까지 용액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미라 주인공은 1호묘에 묻힌 신추, 즉, 초대 장사국왕의 승상을 지낸 이창의 아내다. 내관(內棺)에서 발견될 당시 신추 미라는 신장 154㎝에 체중은 34.3㎏이었다. 관 속에 있은 지 무려 2천100년이 더 지났건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전신에 윤택이 났고 피하 조직 또한 유연했으며 탄력이 있어 관절이 살아 숨쉬는 듯 했다고 한다.
눈썹과 코털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왼쪽 귀 속에는 고막이 완전했다. 나아가 손가락 발가락도 완연했다. 해부를 해 보니 장기 또한 보존 상태가 좋았고 폐부 신경 조직 또한 몇 가닥이 남아있었다. 혈관에는 응고한 상태의 핏덩이가 남아있어 검사했더니 혈액형은 A형이었다.
병리검사를 해 보니 신추는 생전에 관심증(冠心病)이나 동맥경화 같은 각종 질병에 시달렸으며 직장과 간장에서는 편충란과 요충란, 혈흡충란이 발견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식도와 위에서 참외씨 138개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이로써 신추가 죽은 계절이 참외가 익는 여름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인은 관심증 발작, 죽을 때 나이는 50세 안팎으로 추정됐다.
이 미라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가 내장을 발라내고 방부처리를 거친 것인데 비해 시신에 손상을 전혀 내지 않은 상태에서 보존된 결과라는 점이 세계 의학계에서도 하나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1년 만에 재회한 미라 신추. 그래서 반갑긴 했지만, 다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만나지 못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참외 먹고 죽은 2100년 전 미라
    • 입력 2007-10-29 15:09:29
    • 수정2007-10-30 07:31:32
    포토뉴스

수천 점에 이르는 마왕퇴 출토 유물이 고스란히 후난성박물원 차지가 된 것은 1971년 이 유적 발견 직후 조사를 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왕퇴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시실 배치가 '마왕퇴 한묘 진열'과 '후난 역사문물 진열' 두 곳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난성박물원은 '마왕퇴 진열관과 기타 등등'의 전시관인 셈이다. 전시공간 역시 절반 이상이 마왕퇴 유물 차지다. 마왕퇴 진열관은 전시품별로 특화해 놓았다. 입구에는 발굴 과정이나 유적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도판이나 일반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을 지나면 악기류 코너를 만나고 다시 그곳을 통과하면 각종 칠기류 그득한 공간이 맞이한다. 사람을 본뜬 나무 인형, 가야금 비슷하지만 현이 25개인 악기, 바둑이나 장기 비슷한 놀이기구 일종인 박국이 특히 볼 만하다. 이어 관람객은 직물 코너로 들어선다. 무덤에서 무슨 비단이 그리도 많이 출토됐는지 놀랍다 .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빛에 민감한 직물 보호를 위해 조명을 어둡게 한 직물 코너를 지나면 각종 죽백서(竹帛書)가 열을 지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노자도덕경 두 가지 판본은 물론이고 '합음양(合陰陽)'이라 해서 정기를 소모하지 않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한 성 교과서도 있다. 군사지도와 괴물들을 잔뜩 원색으로 그려넣은 그림도 보인다. 이런 마왕퇴 한묘 진열관에서 시신은 가장 후미진 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서 거대한 목곽(木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왕퇴 1호 한묘에 있던 목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2천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곽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거대한 목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2층으로 올가가야 하는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박물관 측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거대 목곽 뒤 한 켠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관 3점이 전시돼 있다. 이들 관은 모두가 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을 원색으로 수놓았다. 그래서 이들 관을 채회관(彩繪棺)이라 부른다. '시체'는 그 맞은편에 안치돼 있다. 지하에 마련한 관에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운 시신. 발견 당시에는 피부가 살아있는 듯 윤이 났다고 하지만, 보존을 위해 방부처리를 한 까닭에 지금은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회반죽으로 만든 마네킹같을 뿐이다. 미라가 된 시신을 이렇게 만천하에 꼭 전시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마침 기자가 이 미라를 찾았을 때, 영국식 영어 발음이 완연한 서양인 일가족이 미라를 관람하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시신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교할 때 이 '미라실'은 확연히 달라진 데가 있었다. 그 때는 미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 미라를 해부하면서 떼낸 각종 장기, 심지어 자궁까지 용액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는

수천 점에 이르는 마왕퇴 출토 유물이 고스란히 후난성박물원 차지가 된 것은 1971년 이 유적 발견 직후 조사를 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왕퇴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시실 배치가 '마왕퇴 한묘 진열'과 '후난 역사문물 진열' 두 곳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난성박물원은 '마왕퇴 진열관과 기타 등등'의 전시관인 셈이다. 전시공간 역시 절반 이상이 마왕퇴 유물 차지다. 마왕퇴 진열관은 전시품별로 특화해 놓았다. 입구에는 발굴 과정이나 유적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도판이나 일반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을 지나면 악기류 코너를 만나고 다시 그곳을 통과하면 각종 칠기류 그득한 공간이 맞이한다. 사람을 본뜬 나무 인형, 가야금 비슷하지만 현이 25개인 악기, 바둑이나 장기 비슷한 놀이기구 일종인 박국이 특히 볼 만하다. 이어 관람객은 직물 코너로 들어선다. 무덤에서 무슨 비단이 그리도 많이 출토됐는지 놀랍다 .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빛에 민감한 직물 보호를 위해 조명을 어둡게 한 직물 코너를 지나면 각종 죽백서(竹帛書)가 열을 지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노자도덕경 두 가지 판본은 물론이고 '합음양(合陰陽)'이라 해서 정기를 소모하지 않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한 성 교과서도 있다. 군사지도와 괴물들을 잔뜩 원색으로 그려넣은 그림도 보인다. 이런 마왕퇴 한묘 진열관에서 시신은 가장 후미진 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서 거대한 목곽(木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왕퇴 1호 한묘에 있던 목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2천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곽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거대한 목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2층으로 올가가야 하는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박물관 측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거대 목곽 뒤 한 켠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관 3점이 전시돼 있다. 이들 관은 모두가 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을 원색으로 수놓았다. 그래서 이들 관을 채회관(彩繪棺)이라 부른다. '시체'는 그 맞은편에 안치돼 있다. 지하에 마련한 관에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운 시신. 발견 당시에는 피부가 살아있는 듯 윤이 났다고 하지만, 보존을 위해 방부처리를 한 까닭에 지금은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회반죽으로 만든 마네킹같을 뿐이다. 미라가 된 시신을 이렇게 만천하에 꼭 전시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마침 기자가 이 미라를 찾았을 때, 영국식 영어 발음이 완연한 서양인 일가족이 미라를 관람하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시신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교할 때 이 '미라실'은 확연히 달라진 데가 있었다. 그 때는 미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 미라를 해부하면서 떼낸 각종 장기, 심지어 자궁까지 용액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는

수천 점에 이르는 마왕퇴 출토 유물이 고스란히 후난성박물원 차지가 된 것은 1971년 이 유적 발견 직후 조사를 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왕퇴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시실 배치가 '마왕퇴 한묘 진열'과 '후난 역사문물 진열' 두 곳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난성박물원은 '마왕퇴 진열관과 기타 등등'의 전시관인 셈이다. 전시공간 역시 절반 이상이 마왕퇴 유물 차지다. 마왕퇴 진열관은 전시품별로 특화해 놓았다. 입구에는 발굴 과정이나 유적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도판이나 일반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을 지나면 악기류 코너를 만나고 다시 그곳을 통과하면 각종 칠기류 그득한 공간이 맞이한다. 사람을 본뜬 나무 인형, 가야금 비슷하지만 현이 25개인 악기, 바둑이나 장기 비슷한 놀이기구 일종인 박국이 특히 볼 만하다. 이어 관람객은 직물 코너로 들어선다. 무덤에서 무슨 비단이 그리도 많이 출토됐는지 놀랍다 .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빛에 민감한 직물 보호를 위해 조명을 어둡게 한 직물 코너를 지나면 각종 죽백서(竹帛書)가 열을 지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노자도덕경 두 가지 판본은 물론이고 '합음양(合陰陽)'이라 해서 정기를 소모하지 않고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한 성 교과서도 있다. 군사지도와 괴물들을 잔뜩 원색으로 그려넣은 그림도 보인다. 이런 마왕퇴 한묘 진열관에서 시신은 가장 후미진 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서 거대한 목곽(木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왕퇴 1호 한묘에 있던 목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2천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곽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거대한 목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2층으로 올가가야 하는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박물관 측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거대 목곽 뒤 한 켠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관 3점이 전시돼 있다. 이들 관은 모두가 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을 원색으로 수놓았다. 그래서 이들 관을 채회관(彩繪棺)이라 부른다. '시체'는 그 맞은편에 안치돼 있다. 지하에 마련한 관에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운 시신. 발견 당시에는 피부가 살아있는 듯 윤이 났다고 하지만, 보존을 위해 방부처리를 한 까닭에 지금은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회반죽으로 만든 마네킹같을 뿐이다. 미라가 된 시신을 이렇게 만천하에 꼭 전시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마침 기자가 이 미라를 찾았을 때, 영국식 영어 발음이 완연한 서양인 일가족이 미라를 관람하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시신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교할 때 이 '미라실'은 확연히 달라진 데가 있었다. 그 때는 미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 미라를 해부하면서 떼낸 각종 장기, 심지어 자궁까지 용액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미라 주인공은 1호묘에 묻힌 신추, 즉, 초대 장사국왕의 승상을 지낸 이창의 아내다. 내관(內棺)에서 발견될 당시 신추 미라는 신장 154㎝에 체중은 34.3㎏이었다. 관 속에 있은 지 무려 2천100년이 더 지났건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전신에 윤택이 났고 피하 조직 또한 유연했으며 탄력이 있어 관절이 살아 숨쉬는 듯 했다고 한다. 눈썹과 코털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왼쪽 귀 속에는 고막이 완전했다. 나아가 손가락 발가락도 완연했다. 해부를 해 보니 장기 또한 보존 상태가 좋았고 폐부 신경 조직 또한 몇 가닥이 남아있었다. 혈관에는 응고한 상태의 핏덩이가 남아있어 검사했더니 혈액형은 A형이었다. 병리검사를 해 보니 신추는 생전에 관심증(冠心病)이나 동맥경화 같은 각종 질병에 시달렸으며 직장과 간장에서는 편충란과 요충란, 혈흡충란이 발견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식도와 위에서 참외씨 138개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이로써 신추가 죽은 계절이 참외가 익는 여름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인은 관심증 발작, 죽을 때 나이는 50세 안팎으로 추정됐다. 이 미라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가 내장을 발라내고 방부처리를 거친 것인데 비해 시신에 손상을 전혀 내지 않은 상태에서 보존된 결과라는 점이 세계 의학계에서도 하나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1년 만에 재회한 미라 신추. 그래서 반갑긴 했지만, 다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만나지 못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