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10년특집] 그 때 언론은 무엇을 말했는가?

입력 2007.11.25 (09:59) 수정 2007.11.25 (10:0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0년 전,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정부는 IMF에 지원을 요청했고 IMF는 그 대가로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수십 만 명이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채 거리로 내몰렸다.

언론은 경제 파탄의 책임이 정부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그런 언론은 국가 경제가 부도에 내몰릴 때까지 과연 무얼 했나?

세계적인 투자 금융 회사인 모건 스탠리 증권사가 전 세계 지점에 긴급 전문을 발송한다.

“아시아 투자 자금 회수하라. 손해를 보고 있더라도 즉시 팔아 치우고 빠져라!“ (모건 스탠리 증권, 1997. 10. 27)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도 이런 세계 금융시장의 위험 신호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언론은 짚어내지 못했다.

“위기 넘겼다” “위기 아닌 과도기”

경고보다는 낙관적 전망이 대부분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못 돼, 정부는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녹취>임창열: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 부도가 현실로 드러나자 그제서야 언론은 정부 비판에 나섰다.

경제가 결딴나는데 ‘정부더러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책임 떠넘기는 정부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지금 경제 관료들이 망쳐놓은 경제로 국가 신인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온 국민 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그들은 국민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다.

언론 보도대로라면 외환위기의 원인은 오로지 정부의 무능함 탓이었다.

구제 금융에 대한 협상이 체결 되자 정부에 대한 비난은 강도를 더했다.

<녹취>MBC 뉴스: “금융과 외환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재경원과 한국은행, 그리고 청와대 이 3두마차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녹취>KBS뉴스: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등 정책라인의 중대한 실책과 또 오판이 있었던 것으로...”

한 신문의 사설엔 ‘국치’, ‘경제 신탁통치’란 단어를 써가며 지도자의 무능을 탓했다.

<인터뷰>김서중(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낙관론을 펼쳤던 언론들이, 사실상 IMF관리 체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목도하고 난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이 책임을 져야할 주체가 되어버린 거죠. 따라서, 강력한 공격대상을 찾음으로써 언론 스스로가 자기의 책임을 면하려는 태도도 있었다.”

그 속에서도 언론인의 반성은 있었다.

한 경제부 기자는 조목조목 죄목까지 씌워가며 자신의 지난 보도를 반성했다.

정부의 허황된 선전을 여과 없이 전하고, 정부발표를 검증 없이 단순 중계했다.

하루하루 바닥나고 있는 외환보유고의 진상을 애써 외면했고, 대안 없이 반대와 비판만 일삼았으며, 실물 경제의 위기를 관찰하지 못했다.

반성은 1년 전, OECD 가입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6년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는 만장일치로 한국의 가입을 확정했다.

KBS는 뉴스 시작부터 다섯 개의 리포트로 연달아 OECD 가입 소식을 전했다.

‘선진국 진입’이 성큼 다가왔다는 장밋빛 보도였다.

<녹취>김중수 가입 준비 소장: “우리 경제가 앞으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선진경제에 진입하는 그런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겠구요.”

그러나 OECD 가입으로 우려되는 부작용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의 도약을 위해 OECD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OECD 회원국이 되려면 금융시장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해야 했다.

상품과 자본 거래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당시, 우리 경제가 이런 개방의 충격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을까?

<인터뷰>김태동(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국내시장이 외국의 전문적인 여러나라에서 사업을 한 금융자본에게 시장을 내놓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엔 자본시장 개방하면 경제가 호황을 이룹니다. 그게
우리가 96년에 겪었던 겁니다. 처음엔 좋은 것 같죠. 그러나, 국내에서 어느 정도 초과 이윤을 얻었다고 하면, 국제자본은 그 다음엔 한발 먼저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대규모 유출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OECD 가입이 가져올 위험성을 지적하지 못했다.

다만, OECD 가입이 선진국 진입의 길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기에 바빴다.

시장 개방이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외국계은행 증권회사의 선진국형 서비스를 받게 된다.

상품 서비스시장 할 것 없이 소비자 중심의 환경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본시장의 개방으로 기업이 값싼 해외 자금을 얻기가 쉬워져 ‘실’보다는 ‘득’이 많다고 조기 개방을 부추기기도 했다.

물론 금융시장 개방의 위험성을 지적한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OECD 가입을 환영하는 기사의 봇물 앞에서 소수 의견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 KBS와 MBC의 9시 뉴스에서 시장 개방의 위험성을 지적한 보도는 KBS의 경우 2건, MBC는 4건이 전부였다.

주요 일간지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96년 한 해 동안 5개 주요 일간지에 실린 OECD 관련기사 1300여 건 가운데 금융시장의 위험을 일부나마 경고한 기사는 46건에 불과했다.

<인터뷰>김성해(박사/한국언론재단): “정부에서 이걸 선진화라고 그랬으니까. 선진국에 들어가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거라고 그랬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반대를 하면, 그럼 후진국이 되자는 말이냐! 이렇게 되니까 그런 정부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따라 갔다는 문제도 있죠.”

우리에 앞서 지난 94년 OECD에 가입했던 멕시코도 1년 뒤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 시민단체는 멕시코의 외환위기를 소개해 우리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멕시코가 겪었던 외환위기의 경험을 외면했다.

<인터뷰>김태동(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대통령의 뜻이 OECD가입에 있다, OECD가입을 하면은 우리가 선진국클럽에 가입하는 것이고 마치 우리가 선진국이 된 것처럼 그런 그 입력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그러면 언론이 제 기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론의 무지 속에 위험은 문민정부 출범 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녹취>김영삼: “(국민여러분) 신경제 5개년 개혁은 우리 경제에 선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문민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자본시장의 규제완화와 개방을 추진했다.

<인터뷰>김진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이전까지 개방속도라는 것이 점차적으로 추진되고 있었고, 굉장히 신중하게 개방이 돼 오고 있었는데 93년 이후를 보면 한꺼번에 급격히 특히 종금 같은 부분을 보면 필요한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이걸 확 개방해버렸거든요.”

해외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93년 439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채가 97년 3배로 증가했다.

쉽게 외채를 빌려올 수 있게 되자, 호황을 누린 곳은 바로 종금사였다.

<녹취>김모씨(당시 A종금사): “종금사들이 95년,96년 해서 실적이 아주 좋았었어요. 최대이익을 내고 있었고... 더군다나 국내시장에선 외화를 차입하고자 하는 수요가 더 늘어난 부분이죠.”

그러나 치명적인 위험이 있었다.

해외에서 빌려온 돈의 70%가 단기채무였다.

빌려 온 돈은 단기 외채 인데, 빌려 줄 때는 90% 이상이 장기 대출이었다.

<인터뷰>김진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3개월짜리 자금을 빌려서 1년 대출을 해줬을 경우에, 빌려준 사람이 사실상 이걸 3개월 뒤에도 계속해서 더 빌려줄게 라고 하면 문제가 없는데 3개월 뒤에 갚으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디서 돈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우려는 현실이 됐다.

97년 7월, 태국 바트화의 폭락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경제 위기가 시작됐다.

위기를 느낀 외국 자본들은 국내 종금사들에게 앞다퉈 자금 상환을 요구했다.

순조롭던 외화 차입이 어려워지고 오히려 조기에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종금사들은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인터뷰>김진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하고 난 뒤에 한 달반 뒤부터, 종금사들이 거의 자기 자신으로서는 대출금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은행에 가서 매일 4시에 그러니까 특별자금을 줬었는데, 특별자금을 계속 의존해서 몇 개월을 버티는, 그러니까 한국은행 같은 경우도 거의 굉장히 곤란한 지경이었죠. 그래서 계속해서 자금을 마련해줬어야 하니까, 그래서 외환보유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그런 모습을 보였죠.”

힘겹게 버티던 종금사들은 결국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충격은 컸다.

금융기관이 문을 닫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종금사의 위험한 영업이 외환 시장의 위기를 가져올 때까지 종금사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은 없었다.

업계 관계자 말만 인용해 ‘자금 사정이 안정적’이라 보도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언론에 비친 종금사는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금융기관이었다.

신문마다 종금사 상품을 비교 분석하는 재테크 기사가 잇따랐다.

종금업계 소식을 전하는 홍보성 기사에 지면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몇 달 전까지도 ‘고금리’를 강조하며 투자정보를 제공했다.

<인터뷰>김서중(성공회대 언론학과 교수): “IMF당시에 우리나라 실물경제들의 흐름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 성격을 바꾸어놓았던 세계화문제가 전체 세계 경제 속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떤 위치에 가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장밋빛 전망만 제시했
지, 실제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이 있어요.”

다가오는 국가적 재난을 몰랐던 언론은 현실화되고 있는 기업들의 위기 역시 예측하지 못했다.

충남 당진에 위치한 세계 5위 규모의 제철소, 현대제철이 자리잡고 있다.

쉼 없이 쇳물을 뿜어내는 이곳, 그러나 10년 전에는 한국 재벌 기업의 비리와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줬던 곳이다.

주택 건설 사업에서 시작한 한보는 제철소까지 확장 경영을 펼치며 재계 14위로 급성장했다.

겉은 화려했지만 자본구조는 부실 그 자체였다.

자기 자본금 의 15배가 넘는 4조 9천 억 원을 금융권에서 끌어와 제철소 건설에 쏟아 부은 것이다.

97년 1월, 결국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보 그룹은 부도를 냈다.

<녹취>KBS 뉴스: “세계 제 5위의 제철소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한보 철강이 이렇게 맥없이 쓰러짐에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불황에 시달리는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실경영으로 부도가 날 때까지 언론에 비친 한보는 눈부시게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한보는 철강사업확장과 유원건설인수를 계기로 재계순위 14위로 부상하면서 그룹개혁에 착수, 가시적인 성과를 보고 있다.

한보의 확장 경영 뒤에는 권력형 비리와 편법대출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한 채 오히려 성장 신화를 찬양했다.

정태수 총회장의 경영철학이 장황하게 소개되기도 했다.

정보근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자, 후계자를 띄워주기도 했다.

한보 경영진이 내세운 ‘정도경영’ ‘투명경영’에 대한 소개도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룹 총수의 생일을 거론하는 가십성 기사가 지면을 차지하기도 했다.

무리한 확장으로 부도 위험도 높았지만 한보 그룹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사는 없었다.

<인터뷰>제정임(세계경영연구원연구위원): “한보가 워낙 철저하게 속여서, 언론도 속아 넘어갔다는 측면이 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분식회계가 더 심각했죠. 그래서, 금융사라든지 내부자가 아닌 한, 제보가 없는 한, 언론이 그런 부실경영의 실상을 속속들이 알고 보도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분명 있었죠. 또 다른 하나는, 언론이 부실경영의 실상을 알고도 매수당해서 제대로 말하지 않은 부분, 진실을 말하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당시 외형적으로 확장하던 한보는 홍보를 통한 기업 이미지 선전에도 열을 올렸다.

<인터뷰>강순근(전 한보철강 직원): “그때 저도 신문광고 보고 입사했거든요. 대단위 공장규모를 가진 회사여서 모집을 하다보니까, 일단은 그 당시에 상당히 대기업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쪽에서 매력을 느껴서...”

평생 사원 보장을 광고로 내세우기도 했다.

“꿈의 제철소” “단추 하나로 지역 관리”

한보를 소개하는 홍보성 기사도 언론에 잇따라 실렸다.

언론보도만 보자면 한보는 첨단을 달리는 젊고 건강한 기업이었다.

<인터뷰>제정임(세계경영연구원연구위원): “막판에 자금난이 심각해질때는 이제는 금융권 내부의 쉬쉬하는 얘기가 아니고 언론사에서도 한보 이제 큰일났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 때 한보가 광고주로서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 여러 가지 금전적인 혜택, 한보와의 어떤 네트워크. 이런것들을 고려해서 언론이 부실경영의 실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한보가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어하는 포장된 이미지, 잘 나가는 기업이다.”

한보의 부도를 시작으로 두 달 뒤엔 삼미그룹이 부도를 냈다.

7월, 기아 자동차도 쓰러졌다.

협력업체만 5천 여 개, 재계 8위였던 기아의 부도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었다.

<인터뷰>제정임(세계경영연구원연구위원): “그때 당시 국제 기준이라고 볼 수 있는 선진국 언론, 아, 선진국의 기업들이 거래은행으로부터 부채비리 이건 너무 높으니까 경고를 받는 수준은 150% 정도 수준이고 한보같은 경우는 지금 부채비율 1000%, 쓰러지기 직전에 부채비율 1000%를 넘어섰는데, 당시에 우리나라 현대나 기아나 다른 대재벌들이 부채비율이 너무 높다, 줄여라, 라고 지도받고 있는 상황이 400~500%였었어요.”

재벌기업의 연쇄부도는, 금융권의 부실로 이어졌다.

기아가 금융권에서 빌린 돈은 9조4천 여 억 원,

돈을 빌려준 은행 역시 위기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녹취>김모씨(당시 A종금사): “기아차 사태가 워낙 국내기관들이 기아차에 여신(빌린돈)들이 워낙 많이 나간 상태에서 국제적인 신임도가 국내 금융기관들이 떨어지고 있었죠.”

주거래 은행들은 부실의 늪에 빠졌고, 한국경제의 대외 신인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97년10월, 홍콩 증시가 폭락했다.

<인터뷰>김용호(당시 한일은행외환딜러): “9~10월정도 되는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느 정도 물론100% 기간연장이 다 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기간연장도 되고 안 되는 것도 있었는데, 10월경서부터는
기관물 차입이 거의 안 되는 수준이었던 거 같습니다.”

아시아의 경제 위기를 우려한 해외자본이 아시아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홍콩 증시 폭락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주요 뉴스는 여전히, 임박한 대선 관련 소식이었다.

주요 일간지 역시 대선 후보들의 행보를 쫓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인터뷰>김서중(성공회대신문방송학과):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지면, 대통령 선거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찾아볼 수 없는게 언론의 보도 행태들이긴 해요. 그러다 보니까, 경제 문제가 경제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해도, 사회 전체 문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그래서 소위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을 받을만한 1면이나, 방송에서 말하는 헤드라인 뉴스로 등장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죠.”

홍콩 증시가 폭락한 뒤 정부가 구제 금융 신청을 발표까지 한 달 간, 언론은 여전히 경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소모적인 정치 논쟁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다.

<녹취>광주 TV토론회: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애국하는 ~ 양심수라 생각합니다.”

TV 토론에 나선 한 대선 후보의 발언을 정파적으로 해석해 해묵은 색깔론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홍콩 주가폭락 이후 한달 동안 방송과 신문의 보도를 분석한 결과 KBS, MBC 머리기사 60건 가운데 대선이 37%, 경제위기가 35%로 나타났다.

조사대상 신문의 전체 머릿기사 가운데 대선기사는 46%로 경제위기 기사는 33%였다.

사설 역시 대선이 21%로 경제위기 관련 사설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총리 공관에서는 이례적인 긴급 간담회가 열렸다.

총리와 경제 부총리가 주요 언론사 보도국장과 편집국장을 초청한 자리였다.

정부는 언론사 간부들에게 국내 외환시장의 동향을 설명했다.

주된 내용은 경제가 건전하다는 것,

비관적인 내용의 보도는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터뷰>김인규(당시 KBS 보도국장): “총리 주제로 해서 경제부총리는 물론이고 경제 장관들이 쭉 나온 가운데서 주된 의제는 외환위기가 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펀드멘탈이 워낙 좋기 때문에 외환위기의 가능성은 드문데 언론에서 마치 외환위기가 올 것 같이 자꾸만 보도를 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이 있을 것이니까 보도를 자제해 달라...”

위기는 없다는 정부의 자신감, 언론 보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김인규(당시 KBS 보도국장): “11월 초에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2~3주 뒤에 급하게 상황이 바뀌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되돌이켜 보더라도 그 당시에 총리 공간에서의 회동이 정부에서 악의적
인 게 아니었겠지만, 정부로서도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보지만, 그것이 상당히 언론보도에 미친 영향이 있었다.”

언론에는 위기가 아니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나 그 즈음에 외국의 유력한 신문들은 한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전했다.

외환보유고가 소진되고 있고 한국 경제가 악화될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여전히 정부관리의 말에 의존하는 보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멕시코와 다르다” “구제금융 필요 없다”

위기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낙관적인 인용 보도는 계속됐다.

<인터뷰>이봉수(세명대 언론학 교수): “외신과 한국 언론 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취재원, 뉴스 소스와 언론의 유착관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언론은 재정경제부의 애국주의적 호소에 우비판적으로 동조를 했습니다.”

한국 경제가 낙관적이라는 IMF 총재의 발언 역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깡드쉬 IMF 총재가 “한국경제는 위기에 놓여 있지 않으며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그 기초가 매우 튼튼하다”는 평가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터뷰>김성해(박사/한국언론재단): “지나치게 국제기구라든가, IMF, 미국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백 프로 진리인양 받아 들여서 그대로 안 되면 우리가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 한다든가, 정부에서 하는 말을 거의 다른 나라와 비교도 안 해 보고, 그리고 국내에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거든요. 좀 더 시간만 들이고, 좀 더 파고 들 면은 얼마든지 종합된 그림을 그리는데 그 노력을 게을리 했단 말이에요.”

해방 이후, 한국 경제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는 그 순간, 언론은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 댄 셈이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방희 씨, 10년 전에는 시사주간지의 경제전문 기자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후회가 밀려온다.

<인터뷰>김방희: “외환위기가 벌어진 지 올해로 꼭 10여년이 다 돼갑니다만, 이 무렵만 되면 제 마음도 무거워집니다. 과거의 오판과 실책이 떠올라서 그러기도 하지만 과거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움과 공포가 앞서기 때문이죠.”

김씨는 당시 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기자 일을 그만뒀다.

<인터뷰>김방희: “IMF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까지 우리 경제에 아무 문제가 없다, 곧 좋아진다는 아주 절망적인 보도를 했죠. 그런 언론보도를 판단의 근거로 해서 경제적 활동을 벌여서 큰 손해를 본 분이, 작심하고 내가 소송을 벌이겠다 그랬으면 문 닫는 언론사가 많이 나왔을 거란 말이죠.”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달라졌다.

기업과 금융권의 체질은 개선됐고 무역 흑자와 외환보유고도 늘었다.

하지만 구조 조정의 열풍 속에 고용은 불안해졌고 빈부 격차도 커졌다.

세계화 속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또 다른 위기감과 사회적 갈등이 노출되고 있다.

<인터뷰>이봉수(세명대 언론학부 교수): “IMF 위기를 단순히 경제위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의사소통의 위기, 더 크게 보면 민주주의 위기라 봅니다. 그럴 때 가장 큰 역할을 해야 되는 게 언론입니다. 언론이
공론장을 되살리고, 거기서 우리 사회 중요한 이슈들이 논의되고 결정되고 하는 것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해야 되는데, 우리 언론이 가장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언론은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IMF 10년특집] 그 때 언론은 무엇을 말했는가?
    • 입력 2007-11-25 09:11:41
    • 수정2007-11-25 10:03:55
    미디어 포커스
10년 전,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정부는 IMF에 지원을 요청했고 IMF는 그 대가로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수십 만 명이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채 거리로 내몰렸다. 언론은 경제 파탄의 책임이 정부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그런 언론은 국가 경제가 부도에 내몰릴 때까지 과연 무얼 했나? 세계적인 투자 금융 회사인 모건 스탠리 증권사가 전 세계 지점에 긴급 전문을 발송한다. “아시아 투자 자금 회수하라. 손해를 보고 있더라도 즉시 팔아 치우고 빠져라!“ (모건 스탠리 증권, 1997. 10. 27)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도 이런 세계 금융시장의 위험 신호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언론은 짚어내지 못했다. “위기 넘겼다” “위기 아닌 과도기” 경고보다는 낙관적 전망이 대부분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못 돼, 정부는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녹취>임창열: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 부도가 현실로 드러나자 그제서야 언론은 정부 비판에 나섰다. 경제가 결딴나는데 ‘정부더러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책임 떠넘기는 정부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지금 경제 관료들이 망쳐놓은 경제로 국가 신인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온 국민 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그들은 국민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다. 언론 보도대로라면 외환위기의 원인은 오로지 정부의 무능함 탓이었다. 구제 금융에 대한 협상이 체결 되자 정부에 대한 비난은 강도를 더했다. <녹취>MBC 뉴스: “금융과 외환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재경원과 한국은행, 그리고 청와대 이 3두마차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녹취>KBS뉴스: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등 정책라인의 중대한 실책과 또 오판이 있었던 것으로...” 한 신문의 사설엔 ‘국치’, ‘경제 신탁통치’란 단어를 써가며 지도자의 무능을 탓했다. <인터뷰>김서중(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낙관론을 펼쳤던 언론들이, 사실상 IMF관리 체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목도하고 난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이 책임을 져야할 주체가 되어버린 거죠. 따라서, 강력한 공격대상을 찾음으로써 언론 스스로가 자기의 책임을 면하려는 태도도 있었다.” 그 속에서도 언론인의 반성은 있었다. 한 경제부 기자는 조목조목 죄목까지 씌워가며 자신의 지난 보도를 반성했다. 정부의 허황된 선전을 여과 없이 전하고, 정부발표를 검증 없이 단순 중계했다. 하루하루 바닥나고 있는 외환보유고의 진상을 애써 외면했고, 대안 없이 반대와 비판만 일삼았으며, 실물 경제의 위기를 관찰하지 못했다. 반성은 1년 전, OECD 가입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6년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는 만장일치로 한국의 가입을 확정했다. KBS는 뉴스 시작부터 다섯 개의 리포트로 연달아 OECD 가입 소식을 전했다. ‘선진국 진입’이 성큼 다가왔다는 장밋빛 보도였다. <녹취>김중수 가입 준비 소장: “우리 경제가 앞으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선진경제에 진입하는 그런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겠구요.” 그러나 OECD 가입으로 우려되는 부작용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의 도약을 위해 OECD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OECD 회원국이 되려면 금융시장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해야 했다. 상품과 자본 거래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당시, 우리 경제가 이런 개방의 충격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을까? <인터뷰>김태동(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국내시장이 외국의 전문적인 여러나라에서 사업을 한 금융자본에게 시장을 내놓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엔 자본시장 개방하면 경제가 호황을 이룹니다. 그게 우리가 96년에 겪었던 겁니다. 처음엔 좋은 것 같죠. 그러나, 국내에서 어느 정도 초과 이윤을 얻었다고 하면, 국제자본은 그 다음엔 한발 먼저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대규모 유출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OECD 가입이 가져올 위험성을 지적하지 못했다. 다만, OECD 가입이 선진국 진입의 길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기에 바빴다. 시장 개방이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외국계은행 증권회사의 선진국형 서비스를 받게 된다. 상품 서비스시장 할 것 없이 소비자 중심의 환경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본시장의 개방으로 기업이 값싼 해외 자금을 얻기가 쉬워져 ‘실’보다는 ‘득’이 많다고 조기 개방을 부추기기도 했다. 물론 금융시장 개방의 위험성을 지적한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OECD 가입을 환영하는 기사의 봇물 앞에서 소수 의견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 KBS와 MBC의 9시 뉴스에서 시장 개방의 위험성을 지적한 보도는 KBS의 경우 2건, MBC는 4건이 전부였다. 주요 일간지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96년 한 해 동안 5개 주요 일간지에 실린 OECD 관련기사 1300여 건 가운데 금융시장의 위험을 일부나마 경고한 기사는 46건에 불과했다. <인터뷰>김성해(박사/한국언론재단): “정부에서 이걸 선진화라고 그랬으니까. 선진국에 들어가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거라고 그랬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반대를 하면, 그럼 후진국이 되자는 말이냐! 이렇게 되니까 그런 정부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따라 갔다는 문제도 있죠.” 우리에 앞서 지난 94년 OECD에 가입했던 멕시코도 1년 뒤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 시민단체는 멕시코의 외환위기를 소개해 우리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멕시코가 겪었던 외환위기의 경험을 외면했다. <인터뷰>김태동(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대통령의 뜻이 OECD가입에 있다, OECD가입을 하면은 우리가 선진국클럽에 가입하는 것이고 마치 우리가 선진국이 된 것처럼 그런 그 입력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그러면 언론이 제 기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론의 무지 속에 위험은 문민정부 출범 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녹취>김영삼: “(국민여러분) 신경제 5개년 개혁은 우리 경제에 선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문민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자본시장의 규제완화와 개방을 추진했다. <인터뷰>김진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이전까지 개방속도라는 것이 점차적으로 추진되고 있었고, 굉장히 신중하게 개방이 돼 오고 있었는데 93년 이후를 보면 한꺼번에 급격히 특히 종금 같은 부분을 보면 필요한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이걸 확 개방해버렸거든요.” 해외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93년 439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채가 97년 3배로 증가했다. 쉽게 외채를 빌려올 수 있게 되자, 호황을 누린 곳은 바로 종금사였다. <녹취>김모씨(당시 A종금사): “종금사들이 95년,96년 해서 실적이 아주 좋았었어요. 최대이익을 내고 있었고... 더군다나 국내시장에선 외화를 차입하고자 하는 수요가 더 늘어난 부분이죠.” 그러나 치명적인 위험이 있었다. 해외에서 빌려온 돈의 70%가 단기채무였다. 빌려 온 돈은 단기 외채 인데, 빌려 줄 때는 90% 이상이 장기 대출이었다. <인터뷰>김진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3개월짜리 자금을 빌려서 1년 대출을 해줬을 경우에, 빌려준 사람이 사실상 이걸 3개월 뒤에도 계속해서 더 빌려줄게 라고 하면 문제가 없는데 3개월 뒤에 갚으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디서 돈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우려는 현실이 됐다. 97년 7월, 태국 바트화의 폭락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경제 위기가 시작됐다. 위기를 느낀 외국 자본들은 국내 종금사들에게 앞다퉈 자금 상환을 요구했다. 순조롭던 외화 차입이 어려워지고 오히려 조기에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종금사들은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인터뷰>김진일(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발하고 난 뒤에 한 달반 뒤부터, 종금사들이 거의 자기 자신으로서는 대출금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은행에 가서 매일 4시에 그러니까 특별자금을 줬었는데, 특별자금을 계속 의존해서 몇 개월을 버티는, 그러니까 한국은행 같은 경우도 거의 굉장히 곤란한 지경이었죠. 그래서 계속해서 자금을 마련해줬어야 하니까, 그래서 외환보유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그런 모습을 보였죠.” 힘겹게 버티던 종금사들은 결국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충격은 컸다. 금융기관이 문을 닫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종금사의 위험한 영업이 외환 시장의 위기를 가져올 때까지 종금사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은 없었다. 업계 관계자 말만 인용해 ‘자금 사정이 안정적’이라 보도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언론에 비친 종금사는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금융기관이었다. 신문마다 종금사 상품을 비교 분석하는 재테크 기사가 잇따랐다. 종금업계 소식을 전하는 홍보성 기사에 지면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기도 했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몇 달 전까지도 ‘고금리’를 강조하며 투자정보를 제공했다. <인터뷰>김서중(성공회대 언론학과 교수): “IMF당시에 우리나라 실물경제들의 흐름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 성격을 바꾸어놓았던 세계화문제가 전체 세계 경제 속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떤 위치에 가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장밋빛 전망만 제시했 지, 실제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이 있어요.” 다가오는 국가적 재난을 몰랐던 언론은 현실화되고 있는 기업들의 위기 역시 예측하지 못했다. 충남 당진에 위치한 세계 5위 규모의 제철소, 현대제철이 자리잡고 있다. 쉼 없이 쇳물을 뿜어내는 이곳, 그러나 10년 전에는 한국 재벌 기업의 비리와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줬던 곳이다. 주택 건설 사업에서 시작한 한보는 제철소까지 확장 경영을 펼치며 재계 14위로 급성장했다. 겉은 화려했지만 자본구조는 부실 그 자체였다. 자기 자본금 의 15배가 넘는 4조 9천 억 원을 금융권에서 끌어와 제철소 건설에 쏟아 부은 것이다. 97년 1월, 결국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보 그룹은 부도를 냈다. <녹취>KBS 뉴스: “세계 제 5위의 제철소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한보 철강이 이렇게 맥없이 쓰러짐에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불황에 시달리는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실경영으로 부도가 날 때까지 언론에 비친 한보는 눈부시게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한보는 철강사업확장과 유원건설인수를 계기로 재계순위 14위로 부상하면서 그룹개혁에 착수, 가시적인 성과를 보고 있다. 한보의 확장 경영 뒤에는 권력형 비리와 편법대출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한 채 오히려 성장 신화를 찬양했다. 정태수 총회장의 경영철학이 장황하게 소개되기도 했다. 정보근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자, 후계자를 띄워주기도 했다. 한보 경영진이 내세운 ‘정도경영’ ‘투명경영’에 대한 소개도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룹 총수의 생일을 거론하는 가십성 기사가 지면을 차지하기도 했다. 무리한 확장으로 부도 위험도 높았지만 한보 그룹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사는 없었다. <인터뷰>제정임(세계경영연구원연구위원): “한보가 워낙 철저하게 속여서, 언론도 속아 넘어갔다는 측면이 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분식회계가 더 심각했죠. 그래서, 금융사라든지 내부자가 아닌 한, 제보가 없는 한, 언론이 그런 부실경영의 실상을 속속들이 알고 보도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분명 있었죠. 또 다른 하나는, 언론이 부실경영의 실상을 알고도 매수당해서 제대로 말하지 않은 부분, 진실을 말하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당시 외형적으로 확장하던 한보는 홍보를 통한 기업 이미지 선전에도 열을 올렸다. <인터뷰>강순근(전 한보철강 직원): “그때 저도 신문광고 보고 입사했거든요. 대단위 공장규모를 가진 회사여서 모집을 하다보니까, 일단은 그 당시에 상당히 대기업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쪽에서 매력을 느껴서...” 평생 사원 보장을 광고로 내세우기도 했다. “꿈의 제철소” “단추 하나로 지역 관리” 한보를 소개하는 홍보성 기사도 언론에 잇따라 실렸다. 언론보도만 보자면 한보는 첨단을 달리는 젊고 건강한 기업이었다. <인터뷰>제정임(세계경영연구원연구위원): “막판에 자금난이 심각해질때는 이제는 금융권 내부의 쉬쉬하는 얘기가 아니고 언론사에서도 한보 이제 큰일났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 때 한보가 광고주로서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 여러 가지 금전적인 혜택, 한보와의 어떤 네트워크. 이런것들을 고려해서 언론이 부실경영의 실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한보가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어하는 포장된 이미지, 잘 나가는 기업이다.” 한보의 부도를 시작으로 두 달 뒤엔 삼미그룹이 부도를 냈다. 7월, 기아 자동차도 쓰러졌다. 협력업체만 5천 여 개, 재계 8위였던 기아의 부도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었다. <인터뷰>제정임(세계경영연구원연구위원): “그때 당시 국제 기준이라고 볼 수 있는 선진국 언론, 아, 선진국의 기업들이 거래은행으로부터 부채비리 이건 너무 높으니까 경고를 받는 수준은 150% 정도 수준이고 한보같은 경우는 지금 부채비율 1000%, 쓰러지기 직전에 부채비율 1000%를 넘어섰는데, 당시에 우리나라 현대나 기아나 다른 대재벌들이 부채비율이 너무 높다, 줄여라, 라고 지도받고 있는 상황이 400~500%였었어요.” 재벌기업의 연쇄부도는, 금융권의 부실로 이어졌다. 기아가 금융권에서 빌린 돈은 9조4천 여 억 원, 돈을 빌려준 은행 역시 위기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녹취>김모씨(당시 A종금사): “기아차 사태가 워낙 국내기관들이 기아차에 여신(빌린돈)들이 워낙 많이 나간 상태에서 국제적인 신임도가 국내 금융기관들이 떨어지고 있었죠.” 주거래 은행들은 부실의 늪에 빠졌고, 한국경제의 대외 신인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97년10월, 홍콩 증시가 폭락했다. <인터뷰>김용호(당시 한일은행외환딜러): “9~10월정도 되는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느 정도 물론100% 기간연장이 다 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기간연장도 되고 안 되는 것도 있었는데, 10월경서부터는 기관물 차입이 거의 안 되는 수준이었던 거 같습니다.” 아시아의 경제 위기를 우려한 해외자본이 아시아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홍콩 증시 폭락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주요 뉴스는 여전히, 임박한 대선 관련 소식이었다. 주요 일간지 역시 대선 후보들의 행보를 쫓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인터뷰>김서중(성공회대신문방송학과):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지면, 대통령 선거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찾아볼 수 없는게 언론의 보도 행태들이긴 해요. 그러다 보니까, 경제 문제가 경제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해도, 사회 전체 문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그래서 소위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을 받을만한 1면이나, 방송에서 말하는 헤드라인 뉴스로 등장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죠.” 홍콩 증시가 폭락한 뒤 정부가 구제 금융 신청을 발표까지 한 달 간, 언론은 여전히 경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소모적인 정치 논쟁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다. <녹취>광주 TV토론회: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애국하는 ~ 양심수라 생각합니다.” TV 토론에 나선 한 대선 후보의 발언을 정파적으로 해석해 해묵은 색깔론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홍콩 주가폭락 이후 한달 동안 방송과 신문의 보도를 분석한 결과 KBS, MBC 머리기사 60건 가운데 대선이 37%, 경제위기가 35%로 나타났다. 조사대상 신문의 전체 머릿기사 가운데 대선기사는 46%로 경제위기 기사는 33%였다. 사설 역시 대선이 21%로 경제위기 관련 사설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총리 공관에서는 이례적인 긴급 간담회가 열렸다. 총리와 경제 부총리가 주요 언론사 보도국장과 편집국장을 초청한 자리였다. 정부는 언론사 간부들에게 국내 외환시장의 동향을 설명했다. 주된 내용은 경제가 건전하다는 것, 비관적인 내용의 보도는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터뷰>김인규(당시 KBS 보도국장): “총리 주제로 해서 경제부총리는 물론이고 경제 장관들이 쭉 나온 가운데서 주된 의제는 외환위기가 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펀드멘탈이 워낙 좋기 때문에 외환위기의 가능성은 드문데 언론에서 마치 외환위기가 올 것 같이 자꾸만 보도를 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이 있을 것이니까 보도를 자제해 달라...” 위기는 없다는 정부의 자신감, 언론 보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김인규(당시 KBS 보도국장): “11월 초에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2~3주 뒤에 급하게 상황이 바뀌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되돌이켜 보더라도 그 당시에 총리 공간에서의 회동이 정부에서 악의적 인 게 아니었겠지만, 정부로서도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보지만, 그것이 상당히 언론보도에 미친 영향이 있었다.” 언론에는 위기가 아니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나 그 즈음에 외국의 유력한 신문들은 한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전했다. 외환보유고가 소진되고 있고 한국 경제가 악화될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여전히 정부관리의 말에 의존하는 보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멕시코와 다르다” “구제금융 필요 없다” 위기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낙관적인 인용 보도는 계속됐다. <인터뷰>이봉수(세명대 언론학 교수): “외신과 한국 언론 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취재원, 뉴스 소스와 언론의 유착관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언론은 재정경제부의 애국주의적 호소에 우비판적으로 동조를 했습니다.” 한국 경제가 낙관적이라는 IMF 총재의 발언 역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깡드쉬 IMF 총재가 “한국경제는 위기에 놓여 있지 않으며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그 기초가 매우 튼튼하다”는 평가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터뷰>김성해(박사/한국언론재단): “지나치게 국제기구라든가, IMF, 미국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백 프로 진리인양 받아 들여서 그대로 안 되면 우리가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 한다든가, 정부에서 하는 말을 거의 다른 나라와 비교도 안 해 보고, 그리고 국내에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거든요. 좀 더 시간만 들이고, 좀 더 파고 들 면은 얼마든지 종합된 그림을 그리는데 그 노력을 게을리 했단 말이에요.” 해방 이후, 한국 경제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는 그 순간, 언론은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 댄 셈이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방희 씨, 10년 전에는 시사주간지의 경제전문 기자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후회가 밀려온다. <인터뷰>김방희: “외환위기가 벌어진 지 올해로 꼭 10여년이 다 돼갑니다만, 이 무렵만 되면 제 마음도 무거워집니다. 과거의 오판과 실책이 떠올라서 그러기도 하지만 과거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움과 공포가 앞서기 때문이죠.” 김씨는 당시 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기자 일을 그만뒀다. <인터뷰>김방희: “IMF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까지 우리 경제에 아무 문제가 없다, 곧 좋아진다는 아주 절망적인 보도를 했죠. 그런 언론보도를 판단의 근거로 해서 경제적 활동을 벌여서 큰 손해를 본 분이, 작심하고 내가 소송을 벌이겠다 그랬으면 문 닫는 언론사가 많이 나왔을 거란 말이죠.”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달라졌다. 기업과 금융권의 체질은 개선됐고 무역 흑자와 외환보유고도 늘었다. 하지만 구조 조정의 열풍 속에 고용은 불안해졌고 빈부 격차도 커졌다. 세계화 속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또 다른 위기감과 사회적 갈등이 노출되고 있다. <인터뷰>이봉수(세명대 언론학부 교수): “IMF 위기를 단순히 경제위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의사소통의 위기, 더 크게 보면 민주주의 위기라 봅니다. 그럴 때 가장 큰 역할을 해야 되는 게 언론입니다. 언론이 공론장을 되살리고, 거기서 우리 사회 중요한 이슈들이 논의되고 결정되고 하는 것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해야 되는데, 우리 언론이 가장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언론은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