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
최근 강력 범죄가 잇따르면서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야 된다, 안 된다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사회에 충격을 준 중범죄자인만큼 신원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요. 이효용 기자와 함께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질문 1>
이효용 기자, 이런 논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얼마 전 있었던 서울 논현동 고시원 방화사건이 또 한 번 계기가 됐죠?
<답변 1>
그렇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무 죄 없는 6명이 무참히 희생됐었죠.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였는데요, 범행 방법도 너무나 끔찍해서 충격을 줬던 사건이었습니다. 피의자인 정모씨는 현장에서 체포됐는데요.
정 씨는 이후 조사과정 내내 초상권 등을 보호받았고, 희생자 유족들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얼굴을 왜 공개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고시원 방화 흉기난동 사건의 현장검증이 실시된 지난달 22일.
피의자 정 모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유족들은 정씨의 얼굴을 공개하라며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녹취> 유족들 절규소리 (2008.10.23): “왜 마스크를? 영웅 돼서, 대한민국 영웅 되라고, 얼굴 가려준다고?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안 가…”
한 피해자의 유족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 여론에 직접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였고, 네티즌들의 지지도 잇따랐습니다.
일부 언론도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녹취> 아나운서: "경찰이 피해자 인권보다 피의자 인권보호에 더 신경을 쓴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녹취> 아나운서: "이런 희대의 살인범에게 얼굴을 가리도록 모자와 마스크까지 제공하는 것은 지나친 배려다"
지난 3월, 혜진.예슬양 납치 살해 피의자 정모씨가 검거됐을 때도 역시 논란이 일었습니다.
<녹취> 이혜진양 어머니: “모자 벗기라고 하고 마스크 벗기라고 해 줘… 얼굴 좀 보게…”
그 뒤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사건, 또 지난 7월, 강화도 모녀 살해사건 때 역시 경찰은 피의자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렸고, 대부분 언론 역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주장이 일부 제기됐고, 논란도 매번 계속됐습니다.
<질문 2>
이처럼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원을 보호해 주는 것, 모든 사건에 있어 동일한 원칙으로 적용되는 거죠?
<답변 2>
그렇습니다. 범행의 종류나 죄의 경중을 떠나 수사기관은 원칙적으로 피의자의 이름 등 신원 정보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언론 역시 익명으로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초상권을 비롯한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는 차원에서인데요. 사실 이 같은 원칙이 제대로 자리잡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패륜적인 부모 살해사건, 같은 해, 부유층 납치 살해를 일삼은 이른바 ‘지존파’ 사건. 96년,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 사건.
당시에는 이런 중대 범죄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건 피의자들의 얼굴과 이름이 여과 없이 보도됐습니다.
언론에선 지난 2000년을 전후해 피의자의 얼굴과 신원을 비공개로 보도하는 관행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4년, 연쇄 살인범 유영철이 검거됐을 때 인권침해 논란을 의식한 경찰은 피의자 얼굴에 아예 마스크를 씌운 채 언론에 공개합니다.
이후 2005년에는 경찰 '직무규칙'으로 피의자의 초상권 보호를 명시했습니다.
현행법에 비춰본다면 이 같은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들이었습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고,
형법 역시 공판 청구 전에는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공표해선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성규 변호사: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와 같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마치 범인인 양 보도한다면, 그 사람한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고, 그 피해라고 하는 것은 회복이 불가능한 거죠. 사실상…”
<질문 3>
일반적인 범죄 보도에서 피의자의 얼굴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문제는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흉악 범죄 피의자의 경우 아니겠습니까?
<답변 3>
그렇습니다. 아동 성범죄라든지 이른바 ‘묻지마 범죄’, 연쇄 살인과 같은 경우는 좀 다르게 다뤄야 하지 않느냐는 건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국민의 알권리가 먼저냐, 피의자의 인격권 존중이냐, 이렇게 찬반이 팽팽하게 나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0대 남자가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7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습니다.
<녹취> NHK뉴스 (2008.6.20):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사건 소식입니다”
일본 경찰은 검거와 수사 과정에서 이 남성의 얼굴을 특별히 가리지 않았고 신문과 방송들 역시 피의자의 이름과 얼굴 등을 그대로 내보냈습니다.
앞서 지난 2005년에도 10대 소녀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붙잡힌 20대 남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터뷰> 이데이시 타다시(NHK 서울지국장):“(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실명 보도가 원칙입니다. 그리고 (얼굴 사진이나) 영상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합니다. ‘이런 경우는 이러고 이런 경우는 이렇다’ 하는 식으로 돼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사례에 의해 그 사건의 배경이나 내용, 사회성, 공공성을 개별적으로 판단해 보도하게 됩니다.”
영국의 BBC도 지난 2002년 초등학교 여학생 두 명을 유괴 살해한 피의자의 얼굴과 신원을 공개했습니다.
AP통신과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때에 따라 사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표창원(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미국의 경우 특히 흉악사건, 강력사건의 경우에는 그 범죄와 범죄 관련자 자체를 공적인 영역에 들어와 있는 공인 내지는 (그 사건 전체를) 공적인 자산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는 당연히 그 신원과 사진들이 그대로 공개되는 것이 언론의 관행이고…”
사건의 심각성에 비춰 피의자의 신원도 국민의 알 권리에 속하며, 범죄예방 효과도 있다는 것이 공개를 주장하는 측의 논리입니다.
<인터뷰> 표창원(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이런 사건을 저지르면 반드시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고, 사생활과 인격이 공개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런 어떤 사회적 경종을 강하게 울릴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유사 범죄를 막는 범죄예방 효과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피의자 공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피의자의 신원공개는 매우 위험하다는 겁니다.
2년여 전, 21명의 사상자를 낸 서울 잠실 고시원 화재사건,
당시 방화범으로 지목됐던 정모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지난 9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만약 당시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공개됐었더라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뻔 했습니다.
또 설사 피의자가 진범이라 해도 신원을 공개해 인격권을 침해할 만큼의 공익적 필요성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터뷰> 김성규 변호사: “구체적으로 그 사람이 공인이 아닌 한, 누가 범인이냐 하는 것까지 중점을 두고 봐야 될 그런 어떤 공적인 관심사는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개인’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이창현(국민대 언론정보학 교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 또는 여러 경제적 문제 이런 것들이 결합돼 있는 복합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피해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하고 개인적인 일들을 부각시키게 되면 사건의 어떤 사회적 본질, 이런 것들은 묻혀버릴 소지가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인권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인터뷰> 하태훈(고려대 법대 교수): “군부독재 시절 암울한 시대라 얘기를 하고 그 당시에 피의자, 피고인의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죠.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가 침해된 사건들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에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질문 4>
강력사건이 터질 때마다 논란이 되고 있다면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답변 4>
네, 그렇습니다. 언론사 저마다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보도를 하고 있지만 차제에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지난 3월 경기도 일산 초등생 납치 미수사건을 보도하면서 SBS는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전격 공개했습니다.
<녹취> SBS 8시뉴스 (2008.3.30): “저희 8시 뉴스는 진지한 고민 끝에 문제의 폭행 장면과 범인의 얼굴이 나오는 이 화면을 시청자 여러분께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반인륜적 범죄의 범인은 반드시 잡아야 하고…”
KBS와 MBC, 다른 신문들도 짧게나마 용의자의 얼굴을 비췄지만 경향신문은 관련 사진을 아예 싣지 않았고, 동아와 한겨레는 모자를 눌러쓴 모습만 냈습니다.
앞서 지난 2004년, 유영철 사건 때에는 거의 모든 언론들이 실명을 밝혔지만, 한겨레는 ‘유아무개’로 표기했습니다.
지난해 이른바 ‘석궁테러’가 발생한 당일엔 MBC와 YTN은 피의자 실명을 썼고, KBS와 SBS는‘김모씨’로 처리했습니다.
사안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설사 몇몇 언론이 익명처리를 한다 해도 실효성이 떨어져 그 취지를 살릴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재 신문윤리강령에도 범죄보도에 대한 기준은 있지만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입니다.
<녹취> 아나운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형사사건의 피의자를 촬영하거나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 다만 현행범과 공인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각 언론사의 보도. 윤리강령이나 제작가이드라인도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영국의 BBC는 자체 가이드라인 ‘범죄보도’ 부분에서 피의자 신원 공개를 원칙으로 하면서 신원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NHK 가이드라인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영상 처리의 기준을 명시해 놓고 수시로 업데이트 합니다.
<인터뷰> 이화여대(이건호 교수): “언론의 현재까지의 보도 행태를 보면, 보도 이후에 소송을 당할까 두려워 방어적 태도에서 보도의 행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해 왔던 태도를 한번 짚어보고, 그 동안 발현됐던 문제점들이 뭔가 확인해 본 다음에 이후에 후배 언론인들이 어떤 모습을 갖춰야 될까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에서부터, 만약 공개를 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어디까지, 할 것이냐를 논의하는 것. 공익과 인권에 관련된 사안인 만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논란이 되는 사안이라면 언론계와 학계, 법조계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거치는 것, 우리 언론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효용 기자, 수고했습니다.
최근 강력 범죄가 잇따르면서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야 된다, 안 된다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사회에 충격을 준 중범죄자인만큼 신원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요. 이효용 기자와 함께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질문 1>
이효용 기자, 이런 논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얼마 전 있었던 서울 논현동 고시원 방화사건이 또 한 번 계기가 됐죠?
<답변 1>
그렇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무 죄 없는 6명이 무참히 희생됐었죠.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였는데요, 범행 방법도 너무나 끔찍해서 충격을 줬던 사건이었습니다. 피의자인 정모씨는 현장에서 체포됐는데요.
정 씨는 이후 조사과정 내내 초상권 등을 보호받았고, 희생자 유족들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얼굴을 왜 공개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고시원 방화 흉기난동 사건의 현장검증이 실시된 지난달 22일.
피의자 정 모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유족들은 정씨의 얼굴을 공개하라며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녹취> 유족들 절규소리 (2008.10.23): “왜 마스크를? 영웅 돼서, 대한민국 영웅 되라고, 얼굴 가려준다고?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안 가…”
한 피해자의 유족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 여론에 직접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였고, 네티즌들의 지지도 잇따랐습니다.
일부 언론도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녹취> 아나운서: "경찰이 피해자 인권보다 피의자 인권보호에 더 신경을 쓴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녹취> 아나운서: "이런 희대의 살인범에게 얼굴을 가리도록 모자와 마스크까지 제공하는 것은 지나친 배려다"
지난 3월, 혜진.예슬양 납치 살해 피의자 정모씨가 검거됐을 때도 역시 논란이 일었습니다.
<녹취> 이혜진양 어머니: “모자 벗기라고 하고 마스크 벗기라고 해 줘… 얼굴 좀 보게…”
그 뒤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사건, 또 지난 7월, 강화도 모녀 살해사건 때 역시 경찰은 피의자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렸고, 대부분 언론 역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주장이 일부 제기됐고, 논란도 매번 계속됐습니다.
<질문 2>
이처럼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원을 보호해 주는 것, 모든 사건에 있어 동일한 원칙으로 적용되는 거죠?
<답변 2>
그렇습니다. 범행의 종류나 죄의 경중을 떠나 수사기관은 원칙적으로 피의자의 이름 등 신원 정보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언론 역시 익명으로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초상권을 비롯한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는 차원에서인데요. 사실 이 같은 원칙이 제대로 자리잡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패륜적인 부모 살해사건, 같은 해, 부유층 납치 살해를 일삼은 이른바 ‘지존파’ 사건. 96년,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 사건.
당시에는 이런 중대 범죄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건 피의자들의 얼굴과 이름이 여과 없이 보도됐습니다.
언론에선 지난 2000년을 전후해 피의자의 얼굴과 신원을 비공개로 보도하는 관행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4년, 연쇄 살인범 유영철이 검거됐을 때 인권침해 논란을 의식한 경찰은 피의자 얼굴에 아예 마스크를 씌운 채 언론에 공개합니다.
이후 2005년에는 경찰 '직무규칙'으로 피의자의 초상권 보호를 명시했습니다.
현행법에 비춰본다면 이 같은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들이었습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고,
형법 역시 공판 청구 전에는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공표해선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성규 변호사: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와 같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마치 범인인 양 보도한다면, 그 사람한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고, 그 피해라고 하는 것은 회복이 불가능한 거죠. 사실상…”
<질문 3>
일반적인 범죄 보도에서 피의자의 얼굴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문제는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흉악 범죄 피의자의 경우 아니겠습니까?
<답변 3>
그렇습니다. 아동 성범죄라든지 이른바 ‘묻지마 범죄’, 연쇄 살인과 같은 경우는 좀 다르게 다뤄야 하지 않느냐는 건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국민의 알권리가 먼저냐, 피의자의 인격권 존중이냐, 이렇게 찬반이 팽팽하게 나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0대 남자가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7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습니다.
<녹취> NHK뉴스 (2008.6.20):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사건 소식입니다”
일본 경찰은 검거와 수사 과정에서 이 남성의 얼굴을 특별히 가리지 않았고 신문과 방송들 역시 피의자의 이름과 얼굴 등을 그대로 내보냈습니다.
앞서 지난 2005년에도 10대 소녀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붙잡힌 20대 남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터뷰> 이데이시 타다시(NHK 서울지국장):“(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실명 보도가 원칙입니다. 그리고 (얼굴 사진이나) 영상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합니다. ‘이런 경우는 이러고 이런 경우는 이렇다’ 하는 식으로 돼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사례에 의해 그 사건의 배경이나 내용, 사회성, 공공성을 개별적으로 판단해 보도하게 됩니다.”
영국의 BBC도 지난 2002년 초등학교 여학생 두 명을 유괴 살해한 피의자의 얼굴과 신원을 공개했습니다.
AP통신과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때에 따라 사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표창원(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미국의 경우 특히 흉악사건, 강력사건의 경우에는 그 범죄와 범죄 관련자 자체를 공적인 영역에 들어와 있는 공인 내지는 (그 사건 전체를) 공적인 자산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는 당연히 그 신원과 사진들이 그대로 공개되는 것이 언론의 관행이고…”
사건의 심각성에 비춰 피의자의 신원도 국민의 알 권리에 속하며, 범죄예방 효과도 있다는 것이 공개를 주장하는 측의 논리입니다.
<인터뷰> 표창원(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이런 사건을 저지르면 반드시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고, 사생활과 인격이 공개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런 어떤 사회적 경종을 강하게 울릴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유사 범죄를 막는 범죄예방 효과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피의자 공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피의자의 신원공개는 매우 위험하다는 겁니다.
2년여 전, 21명의 사상자를 낸 서울 잠실 고시원 화재사건,
당시 방화범으로 지목됐던 정모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지난 9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만약 당시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공개됐었더라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뻔 했습니다.
또 설사 피의자가 진범이라 해도 신원을 공개해 인격권을 침해할 만큼의 공익적 필요성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터뷰> 김성규 변호사: “구체적으로 그 사람이 공인이 아닌 한, 누가 범인이냐 하는 것까지 중점을 두고 봐야 될 그런 어떤 공적인 관심사는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개인’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이창현(국민대 언론정보학 교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 또는 여러 경제적 문제 이런 것들이 결합돼 있는 복합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피해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하고 개인적인 일들을 부각시키게 되면 사건의 어떤 사회적 본질, 이런 것들은 묻혀버릴 소지가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인권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인터뷰> 하태훈(고려대 법대 교수): “군부독재 시절 암울한 시대라 얘기를 하고 그 당시에 피의자, 피고인의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죠.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가 침해된 사건들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에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질문 4>
강력사건이 터질 때마다 논란이 되고 있다면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답변 4>
네, 그렇습니다. 언론사 저마다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보도를 하고 있지만 차제에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지난 3월 경기도 일산 초등생 납치 미수사건을 보도하면서 SBS는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전격 공개했습니다.
<녹취> SBS 8시뉴스 (2008.3.30): “저희 8시 뉴스는 진지한 고민 끝에 문제의 폭행 장면과 범인의 얼굴이 나오는 이 화면을 시청자 여러분께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반인륜적 범죄의 범인은 반드시 잡아야 하고…”
KBS와 MBC, 다른 신문들도 짧게나마 용의자의 얼굴을 비췄지만 경향신문은 관련 사진을 아예 싣지 않았고, 동아와 한겨레는 모자를 눌러쓴 모습만 냈습니다.
앞서 지난 2004년, 유영철 사건 때에는 거의 모든 언론들이 실명을 밝혔지만, 한겨레는 ‘유아무개’로 표기했습니다.
지난해 이른바 ‘석궁테러’가 발생한 당일엔 MBC와 YTN은 피의자 실명을 썼고, KBS와 SBS는‘김모씨’로 처리했습니다.
사안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설사 몇몇 언론이 익명처리를 한다 해도 실효성이 떨어져 그 취지를 살릴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재 신문윤리강령에도 범죄보도에 대한 기준은 있지만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입니다.
<녹취> 아나운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형사사건의 피의자를 촬영하거나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 다만 현행범과 공인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각 언론사의 보도. 윤리강령이나 제작가이드라인도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영국의 BBC는 자체 가이드라인 ‘범죄보도’ 부분에서 피의자 신원 공개를 원칙으로 하면서 신원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NHK 가이드라인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영상 처리의 기준을 명시해 놓고 수시로 업데이트 합니다.
<인터뷰> 이화여대(이건호 교수): “언론의 현재까지의 보도 행태를 보면, 보도 이후에 소송을 당할까 두려워 방어적 태도에서 보도의 행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해 왔던 태도를 한번 짚어보고, 그 동안 발현됐던 문제점들이 뭔가 확인해 본 다음에 이후에 후배 언론인들이 어떤 모습을 갖춰야 될까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에서부터, 만약 공개를 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어디까지, 할 것이냐를 논의하는 것. 공익과 인권에 관련된 사안인 만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논란이 되는 사안이라면 언론계와 학계, 법조계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거치는 것, 우리 언론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효용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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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비평] ②흉악범죄 피의자 얼굴 공개해야 하나
-
- 입력 2008-11-01 16:40:05
<앵커 멘트>
최근 강력 범죄가 잇따르면서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야 된다, 안 된다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사회에 충격을 준 중범죄자인만큼 신원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요. 이효용 기자와 함께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질문 1>
이효용 기자, 이런 논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얼마 전 있었던 서울 논현동 고시원 방화사건이 또 한 번 계기가 됐죠?
<답변 1>
그렇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무 죄 없는 6명이 무참히 희생됐었죠.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였는데요, 범행 방법도 너무나 끔찍해서 충격을 줬던 사건이었습니다. 피의자인 정모씨는 현장에서 체포됐는데요.
정 씨는 이후 조사과정 내내 초상권 등을 보호받았고, 희생자 유족들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얼굴을 왜 공개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고시원 방화 흉기난동 사건의 현장검증이 실시된 지난달 22일.
피의자 정 모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유족들은 정씨의 얼굴을 공개하라며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녹취> 유족들 절규소리 (2008.10.23): “왜 마스크를? 영웅 돼서, 대한민국 영웅 되라고, 얼굴 가려준다고?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안 가…”
한 피해자의 유족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 여론에 직접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였고, 네티즌들의 지지도 잇따랐습니다.
일부 언론도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녹취> 아나운서: "경찰이 피해자 인권보다 피의자 인권보호에 더 신경을 쓴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녹취> 아나운서: "이런 희대의 살인범에게 얼굴을 가리도록 모자와 마스크까지 제공하는 것은 지나친 배려다"
지난 3월, 혜진.예슬양 납치 살해 피의자 정모씨가 검거됐을 때도 역시 논란이 일었습니다.
<녹취> 이혜진양 어머니: “모자 벗기라고 하고 마스크 벗기라고 해 줘… 얼굴 좀 보게…”
그 뒤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사건, 또 지난 7월, 강화도 모녀 살해사건 때 역시 경찰은 피의자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렸고, 대부분 언론 역시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주장이 일부 제기됐고, 논란도 매번 계속됐습니다.
<질문 2>
이처럼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원을 보호해 주는 것, 모든 사건에 있어 동일한 원칙으로 적용되는 거죠?
<답변 2>
그렇습니다. 범행의 종류나 죄의 경중을 떠나 수사기관은 원칙적으로 피의자의 이름 등 신원 정보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언론 역시 익명으로 처리하고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초상권을 비롯한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는 차원에서인데요. 사실 이 같은 원칙이 제대로 자리잡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패륜적인 부모 살해사건, 같은 해, 부유층 납치 살해를 일삼은 이른바 ‘지존파’ 사건. 96년,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 사건.
당시에는 이런 중대 범죄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건 피의자들의 얼굴과 이름이 여과 없이 보도됐습니다.
언론에선 지난 2000년을 전후해 피의자의 얼굴과 신원을 비공개로 보도하는 관행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4년, 연쇄 살인범 유영철이 검거됐을 때 인권침해 논란을 의식한 경찰은 피의자 얼굴에 아예 마스크를 씌운 채 언론에 공개합니다.
이후 2005년에는 경찰 '직무규칙'으로 피의자의 초상권 보호를 명시했습니다.
현행법에 비춰본다면 이 같은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들이었습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고,
형법 역시 공판 청구 전에는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공표해선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성규 변호사: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와 같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마치 범인인 양 보도한다면, 그 사람한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고, 그 피해라고 하는 것은 회복이 불가능한 거죠. 사실상…”
<질문 3>
일반적인 범죄 보도에서 피의자의 얼굴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문제는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흉악 범죄 피의자의 경우 아니겠습니까?
<답변 3>
그렇습니다. 아동 성범죄라든지 이른바 ‘묻지마 범죄’, 연쇄 살인과 같은 경우는 좀 다르게 다뤄야 하지 않느냐는 건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국민의 알권리가 먼저냐, 피의자의 인격권 존중이냐, 이렇게 찬반이 팽팽하게 나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0대 남자가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7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습니다.
<녹취> NHK뉴스 (2008.6.20):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사건 소식입니다”
일본 경찰은 검거와 수사 과정에서 이 남성의 얼굴을 특별히 가리지 않았고 신문과 방송들 역시 피의자의 이름과 얼굴 등을 그대로 내보냈습니다.
앞서 지난 2005년에도 10대 소녀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붙잡힌 20대 남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터뷰> 이데이시 타다시(NHK 서울지국장):“(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실명 보도가 원칙입니다. 그리고 (얼굴 사진이나) 영상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합니다. ‘이런 경우는 이러고 이런 경우는 이렇다’ 하는 식으로 돼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사례에 의해 그 사건의 배경이나 내용, 사회성, 공공성을 개별적으로 판단해 보도하게 됩니다.”
영국의 BBC도 지난 2002년 초등학교 여학생 두 명을 유괴 살해한 피의자의 얼굴과 신원을 공개했습니다.
AP통신과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도 때에 따라 사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표창원(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미국의 경우 특히 흉악사건, 강력사건의 경우에는 그 범죄와 범죄 관련자 자체를 공적인 영역에 들어와 있는 공인 내지는 (그 사건 전체를) 공적인 자산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는 당연히 그 신원과 사진들이 그대로 공개되는 것이 언론의 관행이고…”
사건의 심각성에 비춰 피의자의 신원도 국민의 알 권리에 속하며, 범죄예방 효과도 있다는 것이 공개를 주장하는 측의 논리입니다.
<인터뷰> 표창원(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이런 사건을 저지르면 반드시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고, 사생활과 인격이 공개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런 어떤 사회적 경종을 강하게 울릴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유사 범죄를 막는 범죄예방 효과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피의자 공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피의자의 신원공개는 매우 위험하다는 겁니다.
2년여 전, 21명의 사상자를 낸 서울 잠실 고시원 화재사건,
당시 방화범으로 지목됐던 정모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지난 9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만약 당시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공개됐었더라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뻔 했습니다.
또 설사 피의자가 진범이라 해도 신원을 공개해 인격권을 침해할 만큼의 공익적 필요성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터뷰> 김성규 변호사: “구체적으로 그 사람이 공인이 아닌 한, 누가 범인이냐 하는 것까지 중점을 두고 봐야 될 그런 어떤 공적인 관심사는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개인’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이창현(국민대 언론정보학 교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 또는 여러 경제적 문제 이런 것들이 결합돼 있는 복합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피해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하고 개인적인 일들을 부각시키게 되면 사건의 어떤 사회적 본질, 이런 것들은 묻혀버릴 소지가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가 아직은 인권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인터뷰> 하태훈(고려대 법대 교수): “군부독재 시절 암울한 시대라 얘기를 하고 그 당시에 피의자, 피고인의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죠.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가 침해된 사건들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에 피의자, 피고인의 권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질문 4>
강력사건이 터질 때마다 논란이 되고 있다면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답변 4>
네, 그렇습니다. 언론사 저마다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보도를 하고 있지만 차제에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지난 3월 경기도 일산 초등생 납치 미수사건을 보도하면서 SBS는 CCTV에 찍힌 용의자의 얼굴을 전격 공개했습니다.
<녹취> SBS 8시뉴스 (2008.3.30): “저희 8시 뉴스는 진지한 고민 끝에 문제의 폭행 장면과 범인의 얼굴이 나오는 이 화면을 시청자 여러분께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반인륜적 범죄의 범인은 반드시 잡아야 하고…”
KBS와 MBC, 다른 신문들도 짧게나마 용의자의 얼굴을 비췄지만 경향신문은 관련 사진을 아예 싣지 않았고, 동아와 한겨레는 모자를 눌러쓴 모습만 냈습니다.
앞서 지난 2004년, 유영철 사건 때에는 거의 모든 언론들이 실명을 밝혔지만, 한겨레는 ‘유아무개’로 표기했습니다.
지난해 이른바 ‘석궁테러’가 발생한 당일엔 MBC와 YTN은 피의자 실명을 썼고, KBS와 SBS는‘김모씨’로 처리했습니다.
사안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설사 몇몇 언론이 익명처리를 한다 해도 실효성이 떨어져 그 취지를 살릴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재 신문윤리강령에도 범죄보도에 대한 기준은 있지만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입니다.
<녹취> 아나운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형사사건의 피의자를 촬영하거나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 다만 현행범과 공인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각 언론사의 보도. 윤리강령이나 제작가이드라인도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영국의 BBC는 자체 가이드라인 ‘범죄보도’ 부분에서 피의자 신원 공개를 원칙으로 하면서 신원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NHK 가이드라인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영상 처리의 기준을 명시해 놓고 수시로 업데이트 합니다.
<인터뷰> 이화여대(이건호 교수): “언론의 현재까지의 보도 행태를 보면, 보도 이후에 소송을 당할까 두려워 방어적 태도에서 보도의 행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해 왔던 태도를 한번 짚어보고, 그 동안 발현됐던 문제점들이 뭔가 확인해 본 다음에 이후에 후배 언론인들이 어떤 모습을 갖춰야 될까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에서부터, 만약 공개를 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어디까지, 할 것이냐를 논의하는 것. 공익과 인권에 관련된 사안인 만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논란이 되는 사안이라면 언론계와 학계, 법조계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거치는 것, 우리 언론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효용 기자,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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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용 기자 utilit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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