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샛별이 뛴다] 성남 김성환·고재성①

입력 2009.04.06 (20:34) 수정 2009.04.0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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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성남에 우울한 소식만이 연이어 전달되었다. 11월 23일 전북과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아쉬운 1대2의 역전패를 당하며 쓸쓸히 시즌을 마감했다. 이어 27일 성남의 7번째 우승을 이끈 김학범 감독이 사임을 선언하며, 팀의 기둥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K-리그 최다 우승팀”인 성남의 흔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성남은 팀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12월 1일 “성남의 레전드”인 신태용 감독을 선임하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신태용 감독은 “대폭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고 말하며, 개혁을 예고했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 신태용 감독은 그 약속을 지켰다. 상당수 주전급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보냈고, 그 공백을 새얼굴로 채웠다. 이동국, 김동현, 두두, 이동국 등이 빠져나간 공격진은 라돈치치, 김진용 등 K-리그 팬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선수로 채워, 공격진의 무게감을 그대로 유지했다. 기존 선수층을 그대로 유지한 미드필더 진영은 이호가 더해져 그 전력이 더욱 탄탄해졌다.

수비진의 변화는 공격진과 미드필더진의 보강과는 달랐다. 호주에서 데려온 샤샤와 신인 선수들이 전부였다. 더욱이 주전급 선수들의 이탈이 가장 컸던 포지션이 수비였다. 그래서 성남 수비진에는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가 찍혀졌다.



우려 속에 2009년을 시작한 성남의 수비. 막상 뚜껑을 열자, 희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신인 선수인 김성환과 고재성은 알토란같은 활약으로 신태용 감독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김성환은 롱 드로잉으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고, 테스트를 통해 입단한 고재성은 “제2의 장학영”을 준비하고 있다. 3월 19일 오후 1시 탄천 종합 운동장에서 김성환과 고재성은 “이제 출발이다. 발전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 모습에서 밝은 성남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1> 축구는 내 운명! 성남 비밀병기 - 김성환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이 김성환에게 “축구 선수”라는 꿈은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그 숙명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라는 꿈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릴 적, 형들이 축구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재미있어 보였고요. 멋과 재미에 이끌려,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축구를 하기 위해 축구부가 있는 부산 장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축구부에 들어간 이후, 축구 선수를 꿈꾸었어요. 사실 다른 꿈을 꿀 수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축구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축구는 숙명처럼 다가왔죠.”

부산 광안 중학교 재학 시절, 김성환은 평범한 선수였다. 공격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친 적이 없었다. 골 소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팀 역시 부진했다. 우승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였다.

“중학교 때 성적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팀의 전력도 좋지 않았고, 저 역시 좋은 선수가 아니었어요. 성적이 저조하니, 짜증도 많이 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학창 시절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운이 좋았어요. 저를 믿어주는 감독님 밑에서 볼을 찰 수 있었고, 꾸준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의 저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후 동래 고등학교에 진학한 김성환은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왜소했던 그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를 흔들며, 골을 터트렸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2004년 제42회 전국고교선수권대회에서 놀라운 득점 감각을 뽐내며, 득점왕을 거머쥐는 쾌거를 누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점차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운동을 정말 많이 했고, 동래 고등학교 전력 자체도 탄탄했죠. 또한 학교에도 빠르게 적응해서, 편하게 생활했어요. 전국고교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을 한 것도 운이 좋았어요. 동료 선수들의 도움이 컸죠.

다만, 단 한 번도 우승의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쉬워요. 준우승과 3위는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제가 결승전에 이상하리만큼 부진했어요. 긴장한 적은 없었는데, 중요한 경기에서 항상 아쉬움이 남는 활약을 펼쳤어요.”

특별한 슬럼프를 경험하지 않고.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며 성장한 김성환. 그러나 그는 동아대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며, 고비를 맞게 되었다. 슬럼프에 흔들리던 김성환을 잡아준 것은 바로 동아대학교 최영일 감독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경기를 뛰다 팔목 부상을 당했어요. 처음 당해본 부상이었어요. 이후 3개월 정도 뛰지 못 했고, 슬럼프는 그렇게 찾아왔어요. 팔목 부상에서 벗어난 이후 꾸준히 경기는 뛰었지만, 좀처럼 골을 터트리지 못 했어요. 쉬운 찬스도 놓치기 일쑤였죠. 정말 답답했고, 너무 힘들었어요.

아무리 부진해도 최영일 감독님은 저를 계속해서 출전시켜주셨어요. 항상 ‘평소대로만 하면 돼’라고 말해주시며, 저를 일으켜 세워주셨어요. 그 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거기서 쓰러졌을 거예요. 성남의 유니폼을 입은 지금의 제 모습도 없었겠죠.”

최영일 감독은 김성환에게 믿음만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숨겨진 장기인 드로잉을 발견한 감독이 바로 최영일 감독이었다. 또한 성남 입단 후 수비수로 전환한 그에게 수비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감독 역시 최영일 감독이었다.

“참고로 저는 육상 선수 출신은 아닙니다.(웃음) 공만 찼어요. 그렇다고 따로 드로잉을 훈련한 적은 없어요. 아마도 드로잉은 타고난 것 같아요. 터치라인에서 볼을 던지면, 먼 골대 쪽까지 날아가요. 요즘에 훈련을 시작하고 있어요. 대학교 때보다 못 던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투수들 연습하듯이, 하고 있죠.

동아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드로잉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주로 팀이 지고 있을 때 던졌죠. 대학교 시절, 드로잉을 활용한 전술은 단순했어요. 골대 쪽으로 길게 던지며, 골문 앞에서 동료 선수들이 받아 넣었죠. 처음에는 그 전술이 쉽게 통했는데, 이후 쉽지 않았죠. 그래서 다양한 드로잉 전술로 상대편 골문을 열었죠.

그리고 성남에 와서 수비수 전환을 했는데, 최영일 감독님의 가르침덕분에 빠르게 수비라는 포지션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 최영일 감독님은 명 수비수였잖아요. 공격수라, 수비에 관해 직접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훈련 중 보면서 배운 것이 많죠.”

최영일 감독의 믿음 덕분에 슬럼프에서 벗어난 김성환은 2009년 K-리그 무대를 뛰기 위해, 2009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었고, 당시 성남을 이끌던 김학범 감독은 그를 1순위로 뽑았다. 그러나 성남행에 마냥 행복할 수 없었다. 기쁨이 있는 만큼 두려움이 있었다. 김학범 감독 체제 하의 성남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했고, 주전 선수들의 변화폭이 가장 적었기 때문.

“사실 1순위, 그것도 성남이 저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어요. 뽑혔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랬고, 성남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랬어요.

김학범 감독님이 이끌던 성남은 주전 변화 폭이 적었잖아요. 그래서 ‘주전이 될 수 있다.’는 확신보다 ‘주전이 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어요. ‘한 경기라도 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12월 성남은 사퇴를 선언한 김학범 감독의 후임으로 신태용 감독을 선임했다. 신태용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개혁을 선언했고, 이는 김성환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남 합류와 동시에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로 변화하며, 동계 훈련을 시작했다.

“사실 공격수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어요. 모따, 라돈치치, (조)동건이 형 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잖아요. 미드필더 역시 만만치 않죠. (김)정우 형, (이) 호 형 등이 있잖아요. 그나마,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 수비였어요. (신태용) 감독님도, 일본에서 한 번 뒤에 서보라고 하시며, 기회를 주셨어요.

수비수로 변신한 뒤,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수비는 실수가 용납이 안 된다는 점이죠. 연습 경기에서 집중력 부재로 실점한 적이 많았어요. 감독님도 집중하라고 주문하시는데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노력해야죠.”

수비수로 변신한 김성환. 지금까지 그의 변신은 성공이었다. 개막전 대구 전에서 데뷔전을 가졌고, 이어진 울산 전에서도 출전 기회를 잡았다. 물론 만족스러운 활약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중앙 수비수로 출전한 대구 전에서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울산 전에서는 부정확한 연결로 아쉬움을 남겼다.

“개막전을 출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개막 일주일 전부터 베스트 11 팀에서 뛰었어요.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고, 결국 대구 전에 출전하게 되었죠. 대구와의 경기에서 감독님의 지시에 100% 응하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되지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상대한 선수들과 확실히 달랐어요. 속도, 기량 등 모든 면에서 수준이 높았어요. 그래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 데뷔전을 치른 것 같아요.

울산 전에는 사샤가 뛸 수 있었어요. 그래서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후보 명단이 이름이라도 올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신태용)감독님께서 저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시켜주셨어요. 그 경기도 아쉬워요. 패스 미스가 많았어요. 미드필더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했어요.”

김성환의 목표는 명료했다. 바로 성남의 주전 선수가 성남의 우승을 이끄는 것이 전부였다. 평생 단 한 번 누릴 수 있는 신인왕에는 관심이 없었다. 욕심을 버리고 헌신을 선택한 김성환. 그의 미래가 밝게 비쳐지는 이유고, 팬들의 이목이 그의 손과 발에 집중되는 이유일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해요. 지난 2경기는 잊었어요. 패스, 경기 운영 등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요. 노력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나가야죠. 올 시즌 목표는 성남에서 살아남는 거예요. 더 큰 목표라면 팀의 우승이죠. 성남의 주전 선수가 되어, 성남의 우승을 이끌고 싶어요.”

K-리그 명예기자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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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리그 샛별이 뛴다] 성남 김성환·고재성①
    • 입력 2009-04-06 20:29:11
    • 수정2009-04-06 20:45:49
    축구
지난해 11월 성남에 우울한 소식만이 연이어 전달되었다. 11월 23일 전북과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아쉬운 1대2의 역전패를 당하며 쓸쓸히 시즌을 마감했다. 이어 27일 성남의 7번째 우승을 이끈 김학범 감독이 사임을 선언하며, 팀의 기둥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K-리그 최다 우승팀”인 성남의 흔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성남은 팀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12월 1일 “성남의 레전드”인 신태용 감독을 선임하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신태용 감독은 “대폭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고 말하며, 개혁을 예고했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 신태용 감독은 그 약속을 지켰다. 상당수 주전급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보냈고, 그 공백을 새얼굴로 채웠다. 이동국, 김동현, 두두, 이동국 등이 빠져나간 공격진은 라돈치치, 김진용 등 K-리그 팬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선수로 채워, 공격진의 무게감을 그대로 유지했다. 기존 선수층을 그대로 유지한 미드필더 진영은 이호가 더해져 그 전력이 더욱 탄탄해졌다. 수비진의 변화는 공격진과 미드필더진의 보강과는 달랐다. 호주에서 데려온 샤샤와 신인 선수들이 전부였다. 더욱이 주전급 선수들의 이탈이 가장 컸던 포지션이 수비였다. 그래서 성남 수비진에는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가 찍혀졌다.
우려 속에 2009년을 시작한 성남의 수비. 막상 뚜껑을 열자, 희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신인 선수인 김성환과 고재성은 알토란같은 활약으로 신태용 감독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김성환은 롱 드로잉으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고, 테스트를 통해 입단한 고재성은 “제2의 장학영”을 준비하고 있다. 3월 19일 오후 1시 탄천 종합 운동장에서 김성환과 고재성은 “이제 출발이다. 발전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 모습에서 밝은 성남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1> 축구는 내 운명! 성남 비밀병기 - 김성환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이 김성환에게 “축구 선수”라는 꿈은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그 숙명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라는 꿈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릴 적, 형들이 축구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재미있어 보였고요. 멋과 재미에 이끌려,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축구를 하기 위해 축구부가 있는 부산 장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축구부에 들어간 이후, 축구 선수를 꿈꾸었어요. 사실 다른 꿈을 꿀 수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축구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축구는 숙명처럼 다가왔죠.” 부산 광안 중학교 재학 시절, 김성환은 평범한 선수였다. 공격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친 적이 없었다. 골 소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팀 역시 부진했다. 우승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였다. “중학교 때 성적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팀의 전력도 좋지 않았고, 저 역시 좋은 선수가 아니었어요. 성적이 저조하니, 짜증도 많이 났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학창 시절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운이 좋았어요. 저를 믿어주는 감독님 밑에서 볼을 찰 수 있었고, 꾸준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의 저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후 동래 고등학교에 진학한 김성환은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왜소했던 그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를 흔들며, 골을 터트렸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2004년 제42회 전국고교선수권대회에서 놀라운 득점 감각을 뽐내며, 득점왕을 거머쥐는 쾌거를 누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점차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운동을 정말 많이 했고, 동래 고등학교 전력 자체도 탄탄했죠. 또한 학교에도 빠르게 적응해서, 편하게 생활했어요. 전국고교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을 한 것도 운이 좋았어요. 동료 선수들의 도움이 컸죠. 다만, 단 한 번도 우승의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쉬워요. 준우승과 3위는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제가 결승전에 이상하리만큼 부진했어요. 긴장한 적은 없었는데, 중요한 경기에서 항상 아쉬움이 남는 활약을 펼쳤어요.” 특별한 슬럼프를 경험하지 않고. 지속적인 상승세를 그리며 성장한 김성환. 그러나 그는 동아대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며, 고비를 맞게 되었다. 슬럼프에 흔들리던 김성환을 잡아준 것은 바로 동아대학교 최영일 감독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경기를 뛰다 팔목 부상을 당했어요. 처음 당해본 부상이었어요. 이후 3개월 정도 뛰지 못 했고, 슬럼프는 그렇게 찾아왔어요. 팔목 부상에서 벗어난 이후 꾸준히 경기는 뛰었지만, 좀처럼 골을 터트리지 못 했어요. 쉬운 찬스도 놓치기 일쑤였죠. 정말 답답했고, 너무 힘들었어요. 아무리 부진해도 최영일 감독님은 저를 계속해서 출전시켜주셨어요. 항상 ‘평소대로만 하면 돼’라고 말해주시며, 저를 일으켜 세워주셨어요. 그 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거기서 쓰러졌을 거예요. 성남의 유니폼을 입은 지금의 제 모습도 없었겠죠.” 최영일 감독은 김성환에게 믿음만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숨겨진 장기인 드로잉을 발견한 감독이 바로 최영일 감독이었다. 또한 성남 입단 후 수비수로 전환한 그에게 수비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감독 역시 최영일 감독이었다. “참고로 저는 육상 선수 출신은 아닙니다.(웃음) 공만 찼어요. 그렇다고 따로 드로잉을 훈련한 적은 없어요. 아마도 드로잉은 타고난 것 같아요. 터치라인에서 볼을 던지면, 먼 골대 쪽까지 날아가요. 요즘에 훈련을 시작하고 있어요. 대학교 때보다 못 던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투수들 연습하듯이, 하고 있죠. 동아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드로잉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주로 팀이 지고 있을 때 던졌죠. 대학교 시절, 드로잉을 활용한 전술은 단순했어요. 골대 쪽으로 길게 던지며, 골문 앞에서 동료 선수들이 받아 넣었죠. 처음에는 그 전술이 쉽게 통했는데, 이후 쉽지 않았죠. 그래서 다양한 드로잉 전술로 상대편 골문을 열었죠. 그리고 성남에 와서 수비수 전환을 했는데, 최영일 감독님의 가르침덕분에 빠르게 수비라는 포지션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 최영일 감독님은 명 수비수였잖아요. 공격수라, 수비에 관해 직접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훈련 중 보면서 배운 것이 많죠.” 최영일 감독의 믿음 덕분에 슬럼프에서 벗어난 김성환은 2009년 K-리그 무대를 뛰기 위해, 2009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었고, 당시 성남을 이끌던 김학범 감독은 그를 1순위로 뽑았다. 그러나 성남행에 마냥 행복할 수 없었다. 기쁨이 있는 만큼 두려움이 있었다. 김학범 감독 체제 하의 성남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했고, 주전 선수들의 변화폭이 가장 적었기 때문. “사실 1순위, 그것도 성남이 저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어요. 뽑혔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랬고, 성남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랬어요. 김학범 감독님이 이끌던 성남은 주전 변화 폭이 적었잖아요. 그래서 ‘주전이 될 수 있다.’는 확신보다 ‘주전이 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어요. ‘한 경기라도 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12월 성남은 사퇴를 선언한 김학범 감독의 후임으로 신태용 감독을 선임했다. 신태용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개혁을 선언했고, 이는 김성환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남 합류와 동시에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로 변화하며, 동계 훈련을 시작했다. “사실 공격수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어요. 모따, 라돈치치, (조)동건이 형 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잖아요. 미드필더 역시 만만치 않죠. (김)정우 형, (이) 호 형 등이 있잖아요. 그나마,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 수비였어요. (신태용) 감독님도, 일본에서 한 번 뒤에 서보라고 하시며, 기회를 주셨어요. 수비수로 변신한 뒤,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수비는 실수가 용납이 안 된다는 점이죠. 연습 경기에서 집중력 부재로 실점한 적이 많았어요. 감독님도 집중하라고 주문하시는데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노력해야죠.” 수비수로 변신한 김성환. 지금까지 그의 변신은 성공이었다. 개막전 대구 전에서 데뷔전을 가졌고, 이어진 울산 전에서도 출전 기회를 잡았다. 물론 만족스러운 활약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중앙 수비수로 출전한 대구 전에서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울산 전에서는 부정확한 연결로 아쉬움을 남겼다. “개막전을 출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개막 일주일 전부터 베스트 11 팀에서 뛰었어요.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고, 결국 대구 전에 출전하게 되었죠. 대구와의 경기에서 감독님의 지시에 100% 응하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되지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상대한 선수들과 확실히 달랐어요. 속도, 기량 등 모든 면에서 수준이 높았어요. 그래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 데뷔전을 치른 것 같아요. 울산 전에는 사샤가 뛸 수 있었어요. 그래서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후보 명단이 이름이라도 올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신태용)감독님께서 저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시켜주셨어요. 그 경기도 아쉬워요. 패스 미스가 많았어요. 미드필더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했어요.” 김성환의 목표는 명료했다. 바로 성남의 주전 선수가 성남의 우승을 이끄는 것이 전부였다. 평생 단 한 번 누릴 수 있는 신인왕에는 관심이 없었다. 욕심을 버리고 헌신을 선택한 김성환. 그의 미래가 밝게 비쳐지는 이유고, 팬들의 이목이 그의 손과 발에 집중되는 이유일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해요. 지난 2경기는 잊었어요. 패스, 경기 운영 등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요. 노력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나가야죠. 올 시즌 목표는 성남에서 살아남는 거예요. 더 큰 목표라면 팀의 우승이죠. 성남의 주전 선수가 되어, 성남의 우승을 이끌고 싶어요.” K-리그 명예기자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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