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득점왕’ - 차상해②

입력 2009.05.2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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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무적 생활로 인해 그동안 대우에서 뚜렷한 할약을 보이지 못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던 그였지만 그를 눈여겨 보던 이회택 감독의 제의로 그는 포항으로 이적을 결심하게 됐다.

“두려움도 있었고 기대감도 있었어요. 일단 대우에는 좋은 공격진이 있었고 선수 멤버도 굉장했죠. 그래서 그보다 전력이 좀 약했던 포항으로 가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포항으로 이적을 하면 교체멤버 보다는 선발 출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선발 출장해 좋은 활약을 많이 펼치던 저에게는 좋은 상황이었죠. 그 부분에 있어서 기대감이 많이 컸어요.”

잠재력 일깨워준 이회택 감독, 그리고 라데와의 만남

“아무래도 이회택 감독님이 우리나라 최고의 공격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격 선수로서 모든 부분에서 저에게 많은 가르침이 있었죠. 세세한 부분까지 공격수로써 갖춰야할 부분을 많이 지도해 주셔서 많은 발전이 가능했어요.”

이런 이회택 감독의 조언은 잠재되어 있던 그의 재능을 한단계 성장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적 첫 해, 역대 K-리그 최고의 용병이라 손꼽히는 라데와의 첫 만남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6월쯤에 라데 선수가 테스트를 통해서 들어왔어요. 그 때 당시는 굉장히 어린 선수였어요. 하지만 굉장히 힘이 좋고 스피드가 뛰어났죠. 한마디로 풋풋하고 익지 않은 열매 같았어요. 근데 그 선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세가 엄청나더라고요. 특히 그 선수는 골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강했어요. 골에 대한 집착은 어리지만 제가 정말 배우려고 노력했지요.”

라데와의 호흡이 잘 맞아서 였는지 그는 대우에서 모습과는 달리 한층 성숙된 플레이로 포항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특별히 대우와 다른 포항만의 장점이 있었는지 물었다.

“포항이라는 팀 칼라가 굉장히 미들필드 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강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격수들이 다른 팀보다 쉽게 공격을 할 수 있었죠. 역대 포항 팀에서 득점왕이 많이 배출된 이유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생각해요. 미드필더 진에서 공격을 쉽게 풀어 주니까 공격수들이 자기 혼자 힘으로 득점을 하려고 하는 일들이 적었죠. 그런 부분이 제가 오랜만에 경기에 뛰었어도 쉽게 적응 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포항이라는 팀에 서서히 녹아가던 그는 점차 출전 시간을 늘려갔고 거의 2년만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완벽하게 적응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골을 터뜨리며 그동안의 아픔과 역경을 털어내 버렸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졌어요. 하지만 몇 경기를 치르는 동안 골을 넣지 못했어요. 그래도 이회택 감독님이 끝까지 믿고 계속해서 경기에 투입을 시켜줬죠. 결국 4번째 경기에 가서야 골을 터뜨릴 수 있었는데 그게 마침 LG와의 경기였어요. 제가 LG로 인해서 16개월 동안 공백기를 가졌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울분을 많이 가질 수 있었죠. 그리고 이회택 감독님께도 믿음에 보답 할 수 있었죠.”

다시 찾아온 위기, 홍명보 선수와 일궈낸 우승

그렇게 순조롭게 이어오던 복귀 첫 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숱한 어려움을 깨치고 나온 그였기에 같은 어려움에 처해있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선수와 함께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한 보답은 팀의 우승이었다.

“시즌 중반에 또 발목 부상을 당했어요. 그래서 한 달반 동안 전력에서 이탈 됐었죠. 심적으로 굉장히 부담되는 상황이었어요. 그 때 당시 제가 포항으로 이적해 올 때 이적료가 최순호 선수 다음으로 큰 금액이었거든요. 팀이 중요한 시기에 그렇게 부상을 당하니까 많이 힘들었죠. 또 기억이 많이 남는 것이 홍명보 선수와 제가 20년이 넘도록 친한 사이거든요. 홍명보 선수와도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는데 홍명보 선수 경우는 드레프트를 통해서 입단 한 것이 아니고 5:1트레이드를 통해서 들어오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둘 다 심적으로 엄청나게 부담이 많이 됐었죠. 한명은 억대 이적료를 기록하면서 최순호 선수 이후 최다 이적료로 들어왔고 또 한명은 5:1트레이드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좋은 활약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말로 할 수 없었죠. 그 때 서로 격려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시즌 막판 현대 전에서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어서 우리가 2위로 올라 갈 수 있었고 LG전 마지막 게임에서는 제가 결승골을 넣어서 팀이 이기고 우승을 차지 할 수 있었죠. 정말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골이었죠. 솔직히 프로 데뷔 골보다 더 기억에 남아요.”

그동안 많은 심리적 부담감을 받으며 게임에 임했던 그였지만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그 부담감을 안벽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2년 연속 팀을 옮겨가며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포항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우승 이후 이회택 감독 대신 부임한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그는 주전 경쟁에서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경기에 출전 할 수 있었다.

프로 첫 동계훈련 완수

“93년도는 제가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동계훈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했던 시즌이었어요. 그래서 시즌을 처음부터 잘 준비 할 수 있었죠. 그리고 허정무 감독님께서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체력적으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야 경기에 출전 할 수 있었죠. 그래서 동계훈련부터 체력적으로 잘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한해 팀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고 결국 득점왕까지 올라설 수 있었죠.”

다른 팀들 보다 유난히 많은 유명 공격수를 배출하던 포항. 93년도는 한국 대표팀의 공격수 계보를 잇는 특급 공격수 황선홍 선수의 영입이 있었던 해다. 이미 입단 전 대학 시절 부터 대표팀에 차출 되어 활약하던 황선홍. 당시 어린 선수였지만 황선홍 선수의 영입으로 인한 영향은 없었는지 궁금하였다.

“황선홍 선수가 들어왔긴 하지만 크게 어려움이나 영향은 없었어요. 시즌 전부터 준비를 잘해왔고 체력적이나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때보다 좋았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황선홍 선수가 아닌 누가 오더라도 밀리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만큼 차상해로써는 완벽한 준비를 한 해였다. 그 누가 오더라도 상관 없었다는 그는 그만큼 자신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력으로도 많은 향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활약과는 반대로 팀의 성적은 지난 시즌 우승 팀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허정무 감독님 부임 첫 해이다 보니 팀의 체질 개선을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선수가 많다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 이겨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항상 우승권에 근접한 팀들은 경험이 많고 배테랑들이 있는 팀들이거든요. 그런데 어린 선수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런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팀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 데뷔 후 첫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득점왕 경쟁에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 소속팀 대우를 상대로 기록했기에 그 의미는 더욱 컸다.

“당시에 계약서에는 항상 전 소속팀과의 경기는 1년 동안 출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참 컨디션을 끌어올려도 전 소속팀과 경기가 있으면 출전을 못하게 때문에 출전을 못하니 어려움이 많았죠. LG에서 이적 했을 때도 그랬고 대우에서 와서도 그랬어요. 그래서 92년도 대우전에서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죠. 그리다 93년도에 와서야 대우전에 나갈 수 있게 됐는데 그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게 됐죠."

득점왕 등극. BUT 국가대표 탈락


[국가대표 시절 친 형인 차상광[오른쪽]과 함께 찍은 차상해[왼쪽]의 모습.]


이후 그는 팀이 리그 우승에는 실패 했지만 아디다스 컵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리그 최종 전에서 골을 뽑아내 윤상철과 팀동료 라데를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이뤄낸 결과였기에 누구보다 기뻤을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기쁨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아픔을 감당했어야만 했다.
바로 선수라면 어느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은 국가대표 탈락. 더욱이 결과적으로 리그 득점왕과 맞바꾼 국가대표 자리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로 올라섰지만 결국 그는 94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명단에서 제외되며 국가대표와 인연을 그렇게 끝내버리고 만다.

"월드컵 2차 예선을 통과하고 리그를 치루던 중이었어요. 한 언론과 인터뷰 중 현재는 대표팀보다 리그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죠. 대표팀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리그가 진행 중인 상태니까요. 하지만 기사가 나간 후 김호 감독님께 좋게 보일리가 없죠. 결국 대통령배 축구대회와 월드컵 최종예선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죠. 정말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상황이었죠. 솔직히 그 인터뷰로 인해 이런 상황이 오고 말았으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독기를 품고 열심히 했죠. 결국에 득점왕을 차지해서 기뻤지만 마음의 절반은 서운한 마음이었죠. 결과적으로 득점왕 타이틀과 대표팀 명단과 맞바꾼 셈이니까."

득점왕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로서 평생 후회로 남을 만큼 아픈 기억까지 남긴 그는 처음에는 득점왕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득점왕이 확정되고 난 뒤에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각종 인터뷰와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고 나니까 그때서야 내가 득점왕이 된 것이 맞나보구나 했죠."



득점왕 후 이어진 부진, 이적

그렇게 '다사다난'한 해를 보내고 난 다음 시즌 그는 후유증 때문인지 들쭉날쭉한 컨디션으로 출전시간도 많이 줄었고 골도 부쩍 줄어들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어요. 첫 째로 그 해에도 동계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죠. 훈련 도중 손목 뼈가 부서지는 바람에 깁스를 했거든요. 뼈가 붙는데 3개월이 넘게 걸리더라구요. 그래서 시즌 시작 뒤에도 경기에 나서게 되면 경기에 나갈 때 깁스를 빼고 나갔다가 끝나고 나면 다시 끼고... 그런식으로 경기를 하다보니 컨디션 유지가 잘 안됐어요. 그리고 두번 째로는 주전 경쟁에서 밀린거죠. 저하고 항선홍, 라데 세 명이서 두자리를 가지고 경쟁하는데 제가 밀렸어요. 부상으로 준비도 잘 안됐을 뿐만 아니라 공격수는 공격 포인트로 결정이 되는데 아무래도 제가 좀 모자랐죠."

결국 그 해 팀도 일화에 밀려 우승에 실패하고 본인도 뚜렷한 활약을 남기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대우로 이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적에는 또 다른 시련이 있었다.

"94시즌이 끝난 뒤 J-리그 두개 팀에서 이적 제의가 왔어요. 처음에는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오퍼가 온 상태였구요. 그리고 포항이 가시마 앤틀러스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상태였는데 친선경기를 가졌어요. 1:1로 비기고 있던 도중 제가 교체 투입되 들어간 뒤 두 골을 넣으며 이길 수 있었죠. 전부터 제가 93시즌 득점왕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시마에서 그경기 이후 정식으로 제의를 해왔어요. 솔직히 저는 나가고 싶었어요. 외국에서 프로 생활을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구단에서 해외 팀 이적은 절대 불가 방침을 내렸죠. 그때는 에이전트 제도도 없었고 선수가 해외로 이적하고 싶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죠. 그러다 대우가 재창단을 하면서 감독으로 부임하신 김희태 감독님이 이적 제의를 해왔고 당시 수비수가 부족했던 포항이 수비수 3명과 3:1 트레이드를 합의하면서 대우로 이적하게 된거죠."

그렇게 대우로 이적한 그였지만 이적 후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다 김희태 감독이 구단과의 마찰로 사임을 하면서 그의 마음도 대우를 떠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서울이나 수도권 팀으로 이적을 원해 그해 여름 이적 시장에서 니폼니쉬 감독이 이끄는 유공의 유님폼을 입게 된다.

니폼니쉬 감독에게 배운 해외 축구와 시작

"니폼니쉬 감독님 밑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 때 니폼니쉬 감독님에게 처음으로 포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어요. 말은 통역을 통해서 들었지만 저도 은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죠. 한국 축구에서 배울 수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죠"

그렇게 유공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섰지만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결국 96시즌 아디다스 컵 우승을 끝으로 그 해 여름 유공에서 LG로 다시 이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적에 뒷막에는 구단의 일방적인 결정이 있었다.

"어느 팀에 있을 때나 제가 선수들 권익에 대해 주장을 해왔어요. 그 때 당시는 에이전트도 없고 일방적으로 구단의 결정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죠. 선수들의 의사는 거의 반영이 안되거든요. 그러다 팀이 아디다스컵 우승을 했는데 그 뒤로 리그에서 팀이 무너져 버렸어요. 그래서 니폼니쉬 감독님과 면담을 했는데 감독님께서도 선수들의 권익 상태가 이렇게 나쁜 줄 모르셨죠. 그리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구단에 직접 얘기를 하던 중에 이 얘기가 저에게서 나온 것이란 것을 구단에서 알게 된거죠. 그래서 구단에서 저를 자유선수로 방출했고 그래서 LG로 이적하게 된거에요."

그렇게 다시 LG로 이적한 그는 그 해가 자신의 마지막 K-리그 시즌일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유공에서 1996년 4월 4일 터뜨린 대우전 골이 K-리그 마지막 골이 되었고 10월 13일 일화와의 경기가 마지막 K-리그 경기가 되었다.

"시즌 후에 LG에서는 재계약 제의를 해왔어요. 하지만 제가 거절했죠. 선수 생활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해외에 나가고 싶었고 지도자 공부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일본 팀들을 알아보던 중에 JFL 팀 중 J-리그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팀에 들어가게 되었죠. 거기서 1년 6개월 뛰고 지도자 공부를 하게 되었죠."

일본에서 시작된 첫 지도자 생활

"오사카에서 대학 팀 코치를 하다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지도자 생할을 했죠. 오사카 지역 1부리그 준우승도 하고 성적은 좋았는데 일본 심판진들의 보이지 않는 편파 판정이 너무 많았어요. 한국인 감독이라는 이유에서 였죠. 한번은 정도가 너무 심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에요. 저는 그렇다 쳐도 우리 팀 선수들은 아무 잘못 없이 감독이 한국인이란 이유로 피해를 입는 거잖아요. 그래서 심판에게 물을 뿌렸는데 정지 1년을 받았어요. 그러다가 조총련 중학교에서 같은 민족 애들인데 감독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죠. 그래서 그 팀도 지도를 하다가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우정을 쌓고 있는 홍명보에게서 홍명보 축구교실을 맡아서 해줄 수없냐는 부탁을 받았죠. 그래서 일본 생할 8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게 됐어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덕분에 6세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대를 지도해 보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모든 연령의 선수들을 지도한 경험을 하게 됐더라구요. 감독 생화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지도자로써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죠. 어린 선수들은 배우면서 연계과정이 중요하거든요. 명보와 아이들을 가르치며 같은 생각을 하는데 축구에 있어서 머리는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패스를 한 번 하더래도 누구에게 어떤식으로 패스를 할건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자신의 축구 철학과 지도자로써의 목표



이렇게 지도자로써 오랜 경험은 아니지만 그동안 자신이 지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꼭 가져야 할 두가지가 있다고 당부했다.

"열정과 성실이에요. 이 두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정말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로써 대표 선수가 목표든지 지도자로써 좋은 지도자가 목표든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지도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자신이 맡고 있는 팀이 우승하고 또 궁극적으로는 대표팀 감독을 맡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허락해주신 분들이 할 수 있겠죠. 현실적으로 내가 지도했던 선수들이 저하고 함께 있던 시간을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기고 또 저에게서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남들에게도 저의 지도로 선수들에게 발전이 있었다는 그런 소리를 듣는게 목표에요."

생각하는 축구, 영리한 축구가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라는 그.

꿈은 이루어진다지만 자신이 훗날 대표팀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단지 꿈일 뿐이라며 손사래 치는 그를 보며 20년 지기 친구인 홍명보 선수가 지금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90년대 중반 무수히 많은 숱한 엮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열정'과 '성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K-리그의 한 획을 그으며 이겨냈던 그이기에 그가 언제가는 더욱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 대한민국의 대표팀을 이끌 그날을 기약해본다.

사진 출처 : 월간축구
[K-리그 명예기자 장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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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운의 득점왕’ - 차상해②
    • 입력 2009-05-29 18:46:22
    축구
오랜 무적 생활로 인해 그동안 대우에서 뚜렷한 할약을 보이지 못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던 그였지만 그를 눈여겨 보던 이회택 감독의 제의로 그는 포항으로 이적을 결심하게 됐다. “두려움도 있었고 기대감도 있었어요. 일단 대우에는 좋은 공격진이 있었고 선수 멤버도 굉장했죠. 그래서 그보다 전력이 좀 약했던 포항으로 가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포항으로 이적을 하면 교체멤버 보다는 선발 출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선발 출장해 좋은 활약을 많이 펼치던 저에게는 좋은 상황이었죠. 그 부분에 있어서 기대감이 많이 컸어요.” 잠재력 일깨워준 이회택 감독, 그리고 라데와의 만남 “아무래도 이회택 감독님이 우리나라 최고의 공격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격 선수로서 모든 부분에서 저에게 많은 가르침이 있었죠. 세세한 부분까지 공격수로써 갖춰야할 부분을 많이 지도해 주셔서 많은 발전이 가능했어요.” 이런 이회택 감독의 조언은 잠재되어 있던 그의 재능을 한단계 성장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적 첫 해, 역대 K-리그 최고의 용병이라 손꼽히는 라데와의 첫 만남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6월쯤에 라데 선수가 테스트를 통해서 들어왔어요. 그 때 당시는 굉장히 어린 선수였어요. 하지만 굉장히 힘이 좋고 스피드가 뛰어났죠. 한마디로 풋풋하고 익지 않은 열매 같았어요. 근데 그 선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세가 엄청나더라고요. 특히 그 선수는 골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강했어요. 골에 대한 집착은 어리지만 제가 정말 배우려고 노력했지요.” 라데와의 호흡이 잘 맞아서 였는지 그는 대우에서 모습과는 달리 한층 성숙된 플레이로 포항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특별히 대우와 다른 포항만의 장점이 있었는지 물었다. “포항이라는 팀 칼라가 굉장히 미들필드 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강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격수들이 다른 팀보다 쉽게 공격을 할 수 있었죠. 역대 포항 팀에서 득점왕이 많이 배출된 이유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생각해요. 미드필더 진에서 공격을 쉽게 풀어 주니까 공격수들이 자기 혼자 힘으로 득점을 하려고 하는 일들이 적었죠. 그런 부분이 제가 오랜만에 경기에 뛰었어도 쉽게 적응 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포항이라는 팀에 서서히 녹아가던 그는 점차 출전 시간을 늘려갔고 거의 2년만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완벽하게 적응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골을 터뜨리며 그동안의 아픔과 역경을 털어내 버렸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졌어요. 하지만 몇 경기를 치르는 동안 골을 넣지 못했어요. 그래도 이회택 감독님이 끝까지 믿고 계속해서 경기에 투입을 시켜줬죠. 결국 4번째 경기에 가서야 골을 터뜨릴 수 있었는데 그게 마침 LG와의 경기였어요. 제가 LG로 인해서 16개월 동안 공백기를 가졌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울분을 많이 가질 수 있었죠. 그리고 이회택 감독님께도 믿음에 보답 할 수 있었죠.” 다시 찾아온 위기, 홍명보 선수와 일궈낸 우승 그렇게 순조롭게 이어오던 복귀 첫 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숱한 어려움을 깨치고 나온 그였기에 같은 어려움에 처해있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선수와 함께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한 보답은 팀의 우승이었다. “시즌 중반에 또 발목 부상을 당했어요. 그래서 한 달반 동안 전력에서 이탈 됐었죠. 심적으로 굉장히 부담되는 상황이었어요. 그 때 당시 제가 포항으로 이적해 올 때 이적료가 최순호 선수 다음으로 큰 금액이었거든요. 팀이 중요한 시기에 그렇게 부상을 당하니까 많이 힘들었죠. 또 기억이 많이 남는 것이 홍명보 선수와 제가 20년이 넘도록 친한 사이거든요. 홍명보 선수와도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는데 홍명보 선수 경우는 드레프트를 통해서 입단 한 것이 아니고 5:1트레이드를 통해서 들어오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둘 다 심적으로 엄청나게 부담이 많이 됐었죠. 한명은 억대 이적료를 기록하면서 최순호 선수 이후 최다 이적료로 들어왔고 또 한명은 5:1트레이드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좋은 활약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말로 할 수 없었죠. 그 때 서로 격려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시즌 막판 현대 전에서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어서 우리가 2위로 올라 갈 수 있었고 LG전 마지막 게임에서는 제가 결승골을 넣어서 팀이 이기고 우승을 차지 할 수 있었죠. 정말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골이었죠. 솔직히 프로 데뷔 골보다 더 기억에 남아요.” 그동안 많은 심리적 부담감을 받으며 게임에 임했던 그였지만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그 부담감을 안벽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2년 연속 팀을 옮겨가며 우승을 차지한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포항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우승 이후 이회택 감독 대신 부임한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그는 주전 경쟁에서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경기에 출전 할 수 있었다. 프로 첫 동계훈련 완수 “93년도는 제가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동계훈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했던 시즌이었어요. 그래서 시즌을 처음부터 잘 준비 할 수 있었죠. 그리고 허정무 감독님께서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체력적으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야 경기에 출전 할 수 있었죠. 그래서 동계훈련부터 체력적으로 잘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한해 팀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고 결국 득점왕까지 올라설 수 있었죠.” 다른 팀들 보다 유난히 많은 유명 공격수를 배출하던 포항. 93년도는 한국 대표팀의 공격수 계보를 잇는 특급 공격수 황선홍 선수의 영입이 있었던 해다. 이미 입단 전 대학 시절 부터 대표팀에 차출 되어 활약하던 황선홍. 당시 어린 선수였지만 황선홍 선수의 영입으로 인한 영향은 없었는지 궁금하였다. “황선홍 선수가 들어왔긴 하지만 크게 어려움이나 영향은 없었어요. 시즌 전부터 준비를 잘해왔고 체력적이나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때보다 좋았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황선홍 선수가 아닌 누가 오더라도 밀리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만큼 차상해로써는 완벽한 준비를 한 해였다. 그 누가 오더라도 상관 없었다는 그는 그만큼 자신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력으로도 많은 향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활약과는 반대로 팀의 성적은 지난 시즌 우승 팀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허정무 감독님 부임 첫 해이다 보니 팀의 체질 개선을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선수가 많다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 이겨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항상 우승권에 근접한 팀들은 경험이 많고 배테랑들이 있는 팀들이거든요. 그런데 어린 선수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런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팀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 데뷔 후 첫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득점왕 경쟁에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 소속팀 대우를 상대로 기록했기에 그 의미는 더욱 컸다. “당시에 계약서에는 항상 전 소속팀과의 경기는 1년 동안 출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참 컨디션을 끌어올려도 전 소속팀과 경기가 있으면 출전을 못하게 때문에 출전을 못하니 어려움이 많았죠. LG에서 이적 했을 때도 그랬고 대우에서 와서도 그랬어요. 그래서 92년도 대우전에서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죠. 그리다 93년도에 와서야 대우전에 나갈 수 있게 됐는데 그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게 됐죠." 득점왕 등극. BUT 국가대표 탈락
[국가대표 시절 친 형인 차상광[오른쪽]과 함께 찍은 차상해[왼쪽]의 모습.]
이후 그는 팀이 리그 우승에는 실패 했지만 아디다스 컵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리그 최종 전에서 골을 뽑아내 윤상철과 팀동료 라데를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이뤄낸 결과였기에 누구보다 기뻤을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기쁨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아픔을 감당했어야만 했다. 바로 선수라면 어느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은 국가대표 탈락. 더욱이 결과적으로 리그 득점왕과 맞바꾼 국가대표 자리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공격수로 올라섰지만 결국 그는 94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명단에서 제외되며 국가대표와 인연을 그렇게 끝내버리고 만다. "월드컵 2차 예선을 통과하고 리그를 치루던 중이었어요. 한 언론과 인터뷰 중 현재는 대표팀보다 리그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죠. 대표팀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리그가 진행 중인 상태니까요. 하지만 기사가 나간 후 김호 감독님께 좋게 보일리가 없죠. 결국 대통령배 축구대회와 월드컵 최종예선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죠. 정말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상황이었죠. 솔직히 그 인터뷰로 인해 이런 상황이 오고 말았으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독기를 품고 열심히 했죠. 결국에 득점왕을 차지해서 기뻤지만 마음의 절반은 서운한 마음이었죠. 결과적으로 득점왕 타이틀과 대표팀 명단과 맞바꾼 셈이니까." 득점왕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로서 평생 후회로 남을 만큼 아픈 기억까지 남긴 그는 처음에는 득점왕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득점왕이 확정되고 난 뒤에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각종 인터뷰와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고 나니까 그때서야 내가 득점왕이 된 것이 맞나보구나 했죠."
득점왕 후 이어진 부진, 이적 그렇게 '다사다난'한 해를 보내고 난 다음 시즌 그는 후유증 때문인지 들쭉날쭉한 컨디션으로 출전시간도 많이 줄었고 골도 부쩍 줄어들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어요. 첫 째로 그 해에도 동계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죠. 훈련 도중 손목 뼈가 부서지는 바람에 깁스를 했거든요. 뼈가 붙는데 3개월이 넘게 걸리더라구요. 그래서 시즌 시작 뒤에도 경기에 나서게 되면 경기에 나갈 때 깁스를 빼고 나갔다가 끝나고 나면 다시 끼고... 그런식으로 경기를 하다보니 컨디션 유지가 잘 안됐어요. 그리고 두번 째로는 주전 경쟁에서 밀린거죠. 저하고 항선홍, 라데 세 명이서 두자리를 가지고 경쟁하는데 제가 밀렸어요. 부상으로 준비도 잘 안됐을 뿐만 아니라 공격수는 공격 포인트로 결정이 되는데 아무래도 제가 좀 모자랐죠." 결국 그 해 팀도 일화에 밀려 우승에 실패하고 본인도 뚜렷한 활약을 남기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대우로 이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적에는 또 다른 시련이 있었다. "94시즌이 끝난 뒤 J-리그 두개 팀에서 이적 제의가 왔어요. 처음에는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오퍼가 온 상태였구요. 그리고 포항이 가시마 앤틀러스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상태였는데 친선경기를 가졌어요. 1:1로 비기고 있던 도중 제가 교체 투입되 들어간 뒤 두 골을 넣으며 이길 수 있었죠. 전부터 제가 93시즌 득점왕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시마에서 그경기 이후 정식으로 제의를 해왔어요. 솔직히 저는 나가고 싶었어요. 외국에서 프로 생활을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구단에서 해외 팀 이적은 절대 불가 방침을 내렸죠. 그때는 에이전트 제도도 없었고 선수가 해외로 이적하고 싶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죠. 그러다 대우가 재창단을 하면서 감독으로 부임하신 김희태 감독님이 이적 제의를 해왔고 당시 수비수가 부족했던 포항이 수비수 3명과 3:1 트레이드를 합의하면서 대우로 이적하게 된거죠." 그렇게 대우로 이적한 그였지만 이적 후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다 김희태 감독이 구단과의 마찰로 사임을 하면서 그의 마음도 대우를 떠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서울이나 수도권 팀으로 이적을 원해 그해 여름 이적 시장에서 니폼니쉬 감독이 이끄는 유공의 유님폼을 입게 된다. 니폼니쉬 감독에게 배운 해외 축구와 시작 "니폼니쉬 감독님 밑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 때 니폼니쉬 감독님에게 처음으로 포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어요. 말은 통역을 통해서 들었지만 저도 은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죠. 한국 축구에서 배울 수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죠" 그렇게 유공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섰지만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결국 96시즌 아디다스 컵 우승을 끝으로 그 해 여름 유공에서 LG로 다시 이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적에 뒷막에는 구단의 일방적인 결정이 있었다. "어느 팀에 있을 때나 제가 선수들 권익에 대해 주장을 해왔어요. 그 때 당시는 에이전트도 없고 일방적으로 구단의 결정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죠. 선수들의 의사는 거의 반영이 안되거든요. 그러다 팀이 아디다스컵 우승을 했는데 그 뒤로 리그에서 팀이 무너져 버렸어요. 그래서 니폼니쉬 감독님과 면담을 했는데 감독님께서도 선수들의 권익 상태가 이렇게 나쁜 줄 모르셨죠. 그리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구단에 직접 얘기를 하던 중에 이 얘기가 저에게서 나온 것이란 것을 구단에서 알게 된거죠. 그래서 구단에서 저를 자유선수로 방출했고 그래서 LG로 이적하게 된거에요." 그렇게 다시 LG로 이적한 그는 그 해가 자신의 마지막 K-리그 시즌일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유공에서 1996년 4월 4일 터뜨린 대우전 골이 K-리그 마지막 골이 되었고 10월 13일 일화와의 경기가 마지막 K-리그 경기가 되었다. "시즌 후에 LG에서는 재계약 제의를 해왔어요. 하지만 제가 거절했죠. 선수 생활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해외에 나가고 싶었고 지도자 공부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일본 팀들을 알아보던 중에 JFL 팀 중 J-리그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팀에 들어가게 되었죠. 거기서 1년 6개월 뛰고 지도자 공부를 하게 되었죠." 일본에서 시작된 첫 지도자 생활 "오사카에서 대학 팀 코치를 하다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지도자 생할을 했죠. 오사카 지역 1부리그 준우승도 하고 성적은 좋았는데 일본 심판진들의 보이지 않는 편파 판정이 너무 많았어요. 한국인 감독이라는 이유에서 였죠. 한번은 정도가 너무 심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에요. 저는 그렇다 쳐도 우리 팀 선수들은 아무 잘못 없이 감독이 한국인이란 이유로 피해를 입는 거잖아요. 그래서 심판에게 물을 뿌렸는데 정지 1년을 받았어요. 그러다가 조총련 중학교에서 같은 민족 애들인데 감독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죠. 그래서 그 팀도 지도를 하다가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우정을 쌓고 있는 홍명보에게서 홍명보 축구교실을 맡아서 해줄 수없냐는 부탁을 받았죠. 그래서 일본 생할 8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게 됐어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덕분에 6세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대를 지도해 보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모든 연령의 선수들을 지도한 경험을 하게 됐더라구요. 감독 생화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지도자로써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죠. 어린 선수들은 배우면서 연계과정이 중요하거든요. 명보와 아이들을 가르치며 같은 생각을 하는데 축구에 있어서 머리는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패스를 한 번 하더래도 누구에게 어떤식으로 패스를 할건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자신의 축구 철학과 지도자로써의 목표
이렇게 지도자로써 오랜 경험은 아니지만 그동안 자신이 지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꼭 가져야 할 두가지가 있다고 당부했다. "열정과 성실이에요. 이 두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정말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로써 대표 선수가 목표든지 지도자로써 좋은 지도자가 목표든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지도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자신이 맡고 있는 팀이 우승하고 또 궁극적으로는 대표팀 감독을 맡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허락해주신 분들이 할 수 있겠죠. 현실적으로 내가 지도했던 선수들이 저하고 함께 있던 시간을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기고 또 저에게서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남들에게도 저의 지도로 선수들에게 발전이 있었다는 그런 소리를 듣는게 목표에요." 생각하는 축구, 영리한 축구가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라는 그. 꿈은 이루어진다지만 자신이 훗날 대표팀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단지 꿈일 뿐이라며 손사래 치는 그를 보며 20년 지기 친구인 홍명보 선수가 지금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90년대 중반 무수히 많은 숱한 엮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열정'과 '성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K-리그의 한 획을 그으며 이겨냈던 그이기에 그가 언제가는 더욱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 대한민국의 대표팀을 이끌 그날을 기약해본다. 사진 출처 : 월간축구 [K-리그 명예기자 장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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