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련 타계 ‘한국수영 큰 별 지다’

입력 2009.08.04 (14:49) 수정 2009.08.0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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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영의 큰 별이 떨어졌다. `아시아의 물개'로 통하던 조오련씨가 4일 고향인 전남 해남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57세.
고(故) 조오련씨는 한국 수영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해남 시골뜨기 조씨가 수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여름방학 때 집안 심부름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수영 경기를 본 것이 그를 수영 선수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경기에서 1등을 차지한 선수들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다는 느낌이 들 만큼 물속을 헤집는 데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고인이었다.
조씨는 해남고 1학년 때인 1968년 말 자퇴서를 내고 무작정 상경했다. 오직 수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구두닦이, 간판집 점원 일 등을 하며 YMCA수영장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경력도 없고 억센 전라도 사투리의 시골 소년은 서울 선수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오산고에 특기자로 진학하려다 퇴짜를 맞는 등 온갖 고생을 했다.
그러다 1969년 6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를 석권하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양정고에 스카우트돼 본격적인 수영 선수로서 수업을 받았다. 국내무대를 주름잡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고려대 경영학과 입학추천장까지 거머쥐었다.
조씨의 주 종목은 자유형 장거리였지만 개인혼영과 접영에 배영까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생전 고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드리지 않은' 종목이 없었다.
배영 100m와 평영 100m, 200m 등 세 종목을 제외한 모든 종목에서 무려 50차례나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조씨는 양정고 2학년 때인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우승하며 `아시아의 물개'란 애칭을 얻었다. 당시 귀국 때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하며 금의환향했다.
4년 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은 종목 2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는 수영선수로서는 환갑을 넘은 나이에 출전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선 접영 200m 동메달을 따낸 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었다.
고인은 1970년 대한민국 체육상, 1980년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정부광 대한수영연맹 부회장은 "1970년대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수영의 선진화를 이끈 개척자다"라고 고인을 평가했다.
현역에서 물러난 고인은 1980년 8월11일 사상 최초로 대한해협을 13시간16분 만에 횡단하고, 2년 뒤엔 현지 가이드가 체재비를 몽땅 갖고 달아난 와중에서도 32㎞의 도버해협을 건너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은퇴 후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수영장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가 하는 봉제업을 키우려다가 가산만 축냈고, 1985년 교통사고로 얼굴과 오른팔이 찢어지는 중상을 당했다.
사고와 사업 실패로 낙담하던 조씨는 1989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조오련수영교실'을 열어 제2의 수영인생을 시작했다. 수영인으로서 재도약하기 위해 다시 물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고인은 광복 60주년인 2005년, 두 아들 성웅.성모 씨와 함께 울릉도-독도를 횡단했다. 차남 성모씨는 고인의 대(代)를 이어 수영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고인은 지난해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에 성공하는 등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수영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내년에 다시 대한해협을 건널 작정이었다. 최근까지 제주도에 캠프를 차리고 준비해 왔다. 하지만 훈련비 마련 등을 놓고 고민도 적지 않았다.
결국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아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겠다. 한국인의 저력과 함께 6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보여주겠다. 내 수영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지겠다"던 고인의 생전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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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오련 타계 ‘한국수영 큰 별 지다’
    • 입력 2009-08-04 14:48:28
    • 수정2009-08-04 17:11:15
    연합뉴스
한국 수영의 큰 별이 떨어졌다. `아시아의 물개'로 통하던 조오련씨가 4일 고향인 전남 해남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57세. 고(故) 조오련씨는 한국 수영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해남 시골뜨기 조씨가 수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여름방학 때 집안 심부름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수영 경기를 본 것이 그를 수영 선수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경기에서 1등을 차지한 선수들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다는 느낌이 들 만큼 물속을 헤집는 데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고인이었다. 조씨는 해남고 1학년 때인 1968년 말 자퇴서를 내고 무작정 상경했다. 오직 수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구두닦이, 간판집 점원 일 등을 하며 YMCA수영장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경력도 없고 억센 전라도 사투리의 시골 소년은 서울 선수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오산고에 특기자로 진학하려다 퇴짜를 맞는 등 온갖 고생을 했다. 그러다 1969년 6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를 석권하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양정고에 스카우트돼 본격적인 수영 선수로서 수업을 받았다. 국내무대를 주름잡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고려대 경영학과 입학추천장까지 거머쥐었다. 조씨의 주 종목은 자유형 장거리였지만 개인혼영과 접영에 배영까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생전 고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드리지 않은' 종목이 없었다. 배영 100m와 평영 100m, 200m 등 세 종목을 제외한 모든 종목에서 무려 50차례나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조씨는 양정고 2학년 때인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우승하며 `아시아의 물개'란 애칭을 얻었다. 당시 귀국 때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하며 금의환향했다. 4년 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은 종목 2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는 수영선수로서는 환갑을 넘은 나이에 출전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선 접영 200m 동메달을 따낸 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접었다. 고인은 1970년 대한민국 체육상, 1980년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정부광 대한수영연맹 부회장은 "1970년대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수영의 선진화를 이끈 개척자다"라고 고인을 평가했다. 현역에서 물러난 고인은 1980년 8월11일 사상 최초로 대한해협을 13시간16분 만에 횡단하고, 2년 뒤엔 현지 가이드가 체재비를 몽땅 갖고 달아난 와중에서도 32㎞의 도버해협을 건너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은퇴 후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수영장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가 하는 봉제업을 키우려다가 가산만 축냈고, 1985년 교통사고로 얼굴과 오른팔이 찢어지는 중상을 당했다. 사고와 사업 실패로 낙담하던 조씨는 1989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조오련수영교실'을 열어 제2의 수영인생을 시작했다. 수영인으로서 재도약하기 위해 다시 물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고인은 광복 60주년인 2005년, 두 아들 성웅.성모 씨와 함께 울릉도-독도를 횡단했다. 차남 성모씨는 고인의 대(代)를 이어 수영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고인은 지난해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에 성공하는 등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수영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내년에 다시 대한해협을 건널 작정이었다. 최근까지 제주도에 캠프를 차리고 준비해 왔다. 하지만 훈련비 마련 등을 놓고 고민도 적지 않았다. 결국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아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겠다. 한국인의 저력과 함께 6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보여주겠다. 내 수영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지겠다"던 고인의 생전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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