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도서’ 심의제도, 제 기능 하고 있나?

입력 2009.09.2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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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과 건전한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심의기구로부터 '유해간행물' 결정을 받은 책이 심의 이후 1년간 규정과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유통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해외에서 화제가 됐던 소설이 심의에서 새로 '유해간행물'로 결정돼 심의제도를 둘러싼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유해' 판정 도서 버젓이 유통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위)에 따르면 최영진씨의 소설 '잘린 머리의 속삭임'(동아북스)은 지난해 9월 11일 열린 제1심의위원회에서 "청소년 유해 수준을 넘어 모방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소위원회에 넘겨졌으며, 같은 달 19일 제6차 소위원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건전한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며 '유해간행물'로 결정됐다.
'유해간행물'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간윤위가 전문 심의위원회와 소위원회를 열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거나 음란한 내용의 노골적 묘사로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해친 것으로 판단한 간행물이다.
'유해간행물'로 인정되면 문화체육관광부나 자치단체가 출판사에 책을 수거하거나 폐기하도록 명령할 수 있으며 즉각 이행되지 않으면 관계 공무원이 직접 수거하거나 폐기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 '유해간행물' 결정이 난 '잘린 머리의 속삭임'의 경우, 위원회가 바로 출판사에 서면으로 결정 사실을 통보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수거나 폐기가 되지 않았다.
18일 오전까지 일부 인터넷서점에서 정상적으로 이 책을 검색과 주문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난달에는 이 소설의 후속편인 2권까지 출간돼 1권과 함께 유통됐다.
간윤위는 18일에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출판사에 수거ㆍ폐기를 요구했으며 이번주 중에 이 책의 2권에 대한 심의도 하기로 했다.
간윤위 관계자는 "출판사 측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유해간행물'이 아니라 판매대에서 다른 책들과 격리해 성인에게만 판매하는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착각해 수거하지 않았다고 한다"며 "당장 판매를 중단하고 전량 수거, 폐기하라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화제작 '유해간행물' 분류 = 간윤위 제1심의위원회는 지난달 번역 출간된 미국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브렛 이스턴 엘리스, 황금가지 펴냄)를 심의해 소위원회에 부쳤으며, 소위원회는 18일 오후 회의를 열어 이 책을 '유해간행물'로 결정했다.
간윤위 관계자는 "소위원회에서 이 책이 폭력적인 내용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세밀하고 음란성의 정도도 지나치다고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1991년 출간된 이 소설은 물질주의가 만연한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피폐한 인간상을 그리면서 끔찍한 살인장면과 섹스 등에 대한 강렬한 묘사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크리스천 베일 주연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는 2000년 국내에서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됐다.
국내에서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의 하나로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청소년에 대한 악영향을 고려해 '19세 미만 구독 불가'로 비닐 포장해 판매해 왔는데도 수거ㆍ폐기 대상인 '유해간행물'로 결정되자 재심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황금가지의 김준혁 편집장은 "애초에 책을 많이 팔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출간한 게 아니었으므로 '19세 미만 구독 불가'로 판매해 왔다"며 "해외에서도 화제가 됐던 책이고 판매금지 당한 나라는 없는데 어째서 성인들까지 보지 못하게 하는 이런 결정이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소위원회의 심의 결정에 대해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간윤위는 규정에 따라 특별소위원회를 열어 재심의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해 일본 소설 '고스'(학산문화사)가 소위원회에서 유해간행물로 결정됐으나 출판사의 재심 신청으로 열린 특별소위원회에서는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심의 결과가 바뀌어 청소년에게만 판매 금지되고 있다.
◇심의제도 자체에 대한 검토 필요 = 심의와 관련한 문제가 잇따라 제기되자 도서 심의제도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먼저 규정에 따라 심의를 마쳤더라도 유해간행물 결정이 난 책의 경우 출판사가 자체적으로 수거, 폐기하지 않으면 책이 그대로 방치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문제가 있다. 기왕 마련해 놓은 심의제도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부로부터 현장 감시ㆍ지도 업무를 위임받은 간윤위는 올해만 4차례 유해간행물이 유통되고 있는지 현장에 나섰으나 인터넷서점을 통한 유통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잘린 머리의 속삭임'에 대한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았다.
또 심의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도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책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데는 대다수가 공감하지만, '수거하거나 폐기 처리해야 할 정도로 유해한 책'이란 어떤 책인지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
황금가지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에 관심 있는 네티즌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는 '아메리칸 사이코'의 유해간행물 결정 소식을 전하는 글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댓글이 수십 건 달렸다.
한 네티즌은 "공포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작가지망생으로서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 판매 금지되는 게 정말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심의제도는 사후 심의라고는 해도 사실상 검열이며 읽을 권리를 박탈할 뿐 아니라 쓰는 사람에게도 자기검열을 하게 하므로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잠금장치"라며 "지나치게 반사회적인 충동질을 하는 책에 대해서는 형법 등 규제할 수 있는 장치가 얼마든지 있으니 심의제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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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해도서’ 심의제도, 제 기능 하고 있나?
    • 입력 2009-09-21 07:10:34
    연합뉴스
인간의 존엄성과 건전한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심의기구로부터 '유해간행물' 결정을 받은 책이 심의 이후 1년간 규정과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유통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해외에서 화제가 됐던 소설이 심의에서 새로 '유해간행물'로 결정돼 심의제도를 둘러싼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유해' 판정 도서 버젓이 유통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위)에 따르면 최영진씨의 소설 '잘린 머리의 속삭임'(동아북스)은 지난해 9월 11일 열린 제1심의위원회에서 "청소년 유해 수준을 넘어 모방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소위원회에 넘겨졌으며, 같은 달 19일 제6차 소위원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건전한 사회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며 '유해간행물'로 결정됐다. '유해간행물'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간윤위가 전문 심의위원회와 소위원회를 열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거나 음란한 내용의 노골적 묘사로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해친 것으로 판단한 간행물이다. '유해간행물'로 인정되면 문화체육관광부나 자치단체가 출판사에 책을 수거하거나 폐기하도록 명령할 수 있으며 즉각 이행되지 않으면 관계 공무원이 직접 수거하거나 폐기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 '유해간행물' 결정이 난 '잘린 머리의 속삭임'의 경우, 위원회가 바로 출판사에 서면으로 결정 사실을 통보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수거나 폐기가 되지 않았다. 18일 오전까지 일부 인터넷서점에서 정상적으로 이 책을 검색과 주문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난달에는 이 소설의 후속편인 2권까지 출간돼 1권과 함께 유통됐다. 간윤위는 18일에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출판사에 수거ㆍ폐기를 요구했으며 이번주 중에 이 책의 2권에 대한 심의도 하기로 했다. 간윤위 관계자는 "출판사 측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유해간행물'이 아니라 판매대에서 다른 책들과 격리해 성인에게만 판매하는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착각해 수거하지 않았다고 한다"며 "당장 판매를 중단하고 전량 수거, 폐기하라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화제작 '유해간행물' 분류 = 간윤위 제1심의위원회는 지난달 번역 출간된 미국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브렛 이스턴 엘리스, 황금가지 펴냄)를 심의해 소위원회에 부쳤으며, 소위원회는 18일 오후 회의를 열어 이 책을 '유해간행물'로 결정했다. 간윤위 관계자는 "소위원회에서 이 책이 폭력적인 내용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세밀하고 음란성의 정도도 지나치다고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1991년 출간된 이 소설은 물질주의가 만연한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피폐한 인간상을 그리면서 끔찍한 살인장면과 섹스 등에 대한 강렬한 묘사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크리스천 베일 주연의 동명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는 2000년 국내에서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됐다. 국내에서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의 하나로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청소년에 대한 악영향을 고려해 '19세 미만 구독 불가'로 비닐 포장해 판매해 왔는데도 수거ㆍ폐기 대상인 '유해간행물'로 결정되자 재심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황금가지의 김준혁 편집장은 "애초에 책을 많이 팔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출간한 게 아니었으므로 '19세 미만 구독 불가'로 판매해 왔다"며 "해외에서도 화제가 됐던 책이고 판매금지 당한 나라는 없는데 어째서 성인들까지 보지 못하게 하는 이런 결정이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소위원회의 심의 결정에 대해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간윤위는 규정에 따라 특별소위원회를 열어 재심의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해 일본 소설 '고스'(학산문화사)가 소위원회에서 유해간행물로 결정됐으나 출판사의 재심 신청으로 열린 특별소위원회에서는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심의 결과가 바뀌어 청소년에게만 판매 금지되고 있다. ◇심의제도 자체에 대한 검토 필요 = 심의와 관련한 문제가 잇따라 제기되자 도서 심의제도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먼저 규정에 따라 심의를 마쳤더라도 유해간행물 결정이 난 책의 경우 출판사가 자체적으로 수거, 폐기하지 않으면 책이 그대로 방치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문제가 있다. 기왕 마련해 놓은 심의제도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부로부터 현장 감시ㆍ지도 업무를 위임받은 간윤위는 올해만 4차례 유해간행물이 유통되고 있는지 현장에 나섰으나 인터넷서점을 통한 유통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잘린 머리의 속삭임'에 대한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았다. 또 심의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도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책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데는 대다수가 공감하지만, '수거하거나 폐기 처리해야 할 정도로 유해한 책'이란 어떤 책인지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 황금가지 '밀리언셀러 클럽' 시리즈에 관심 있는 네티즌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는 '아메리칸 사이코'의 유해간행물 결정 소식을 전하는 글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댓글이 수십 건 달렸다. 한 네티즌은 "공포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작가지망생으로서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 판매 금지되는 게 정말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심의제도는 사후 심의라고는 해도 사실상 검열이며 읽을 권리를 박탈할 뿐 아니라 쓰는 사람에게도 자기검열을 하게 하므로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잠금장치"라며 "지나치게 반사회적인 충동질을 하는 책에 대해서는 형법 등 규제할 수 있는 장치가 얼마든지 있으니 심의제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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