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2년 전쟁’

입력 2009.10.2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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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멘트 >
대한 사람 안중근이 한반도 침탈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 내일로 꼭 100년이 됩니다.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하기 2년 전부터 연해주로 들어가 항일 의병 투쟁을 벌이며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를 해 왔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 망명에서 하얼빈 의거까지 2년여 동안에 걸친 안 의사의 의병 활동 행적과 그의 시대정신을 생각해 봤습니다.

<리포트>

구한말 국권 침탈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인장이 찍힌 대형 걸개그림이 만들어졌습니다.

가로 30미터, 세로 50미터.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 의사를 생각하며 손도장을 찍었고 미국, 중국, 일본, 레바논 등에 나가 있는 해외 동포들까지 참여했습니다.

지난 넉 달 동안 한 대학 연합동아리 회원들이 준비한 이벤트입니다.

<인터뷰> 서경덕('생존경쟁' 대학연합동아리 자문교수) : “미국 하면 링컨, 남아공 하면
만델라, 인도 하면 간디, 이런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굉장히 훌륭한 영웅들이 많았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너무 잊고 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해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된 중국의 하얼빈 역.

당시의 상황이 백 년이 흐른 지금, 항일정신이 서린 독립기념관에 재현됐습니다.

결연한 표정의 안중근 의사.

지금이라도 손의 떨림이 느껴질 것 같은 안 의사의 총 끝은 몸의 중심을 잃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조은경(천안 독립기념관 학예사) : “이번 전시를 통해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재조명하고 그 속에 담긴 나라사랑 정신을 우리 국민들과 함께 느껴 보기 위해서 마련하게 됐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러시아 의장대 열병이 끝나갈 무렵.

안중근 의사가 쏜 7발의 총성이 울리고 신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소식을 알립니다.

의거 직후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러시아 측에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에 재빨리 재판권을 넘기고 맙니다.

의거 다섯 달 후 안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자신의 의연함은 잃지 않았습니다.

안 의사 자신은 의병이며 폭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토 히로부미와 그가 이끄는 일본군이 폭도란 생각을 경시 심문이나 공판에서 전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동국(예술의전당 학예사) :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게 아니다.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서 전시 상황에서 적군의 수장을 처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법이 아니라 만국공법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법정 자체가 무효다, 위법이다라고 정당하게 당당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어느덧 한 세기가 지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새로운 역사적 사실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1907년 10월 연해주로 망명할 때부터 1909년 10월 하얼빈 역 의거까지, 2년간의 안 의사 의병투쟁 기록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1908년 여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연해주 의병 2백 명을 이끌고 참가한 국내진공작전은 안 의사의 의병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입니다.

두만강을 건넌 의병군은 일본 헌병대를 기습해 함경북도 경흥 지방의 홍의동 전투와 신아산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하고 회령 지방의 영산까지 진격합니다.

하지만 의병군의 국내진공작전은 병력과 무기 등의 열세로 한 달여 만에 영산 전투에서 패배했고 의병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인터뷰> 박민영(독립기념관 연구원) : “안중근은 연해주 의병, 도영장(의병군 최고 지휘관) 밑에 좌익장 우익장 양익 체제인데 거기에서 우익장을 맡았으니까 상당히 비중 있는 의병 지휘관이죠. 어떻게 보면 야전 최고사령관 중 한 사람이죠.”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군에 대한 흔적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고한 일본군 일지에서
여럿 발견됩니다.

약 2백 명의 폭도가 신아산을 습격하였는데 일본군 한 명이 전사하고 다섯 명이 행방불명이다.

이 내용은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쓴 안응칠 전기라는 자서전에서도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군을 사로잡았으나 전쟁포로로 대우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풀어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터뷰> 박민영(연구원) : "포로를 석방하니까 그 동료 의병들이 거기에 아주 심하게 반발하는 그 내용이 안응칠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죠. 안중근 의사가 석방한 포로가 바로 신아산 전투에서 해방불명 됐다고 기록된 일본 군인이라고 판단이 되는 거죠."

하얼빈 의거의 전모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의거가 있기 10여 일 전 하얼빈 의거를 결행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등이 참석한 회합이 있었고 이를 탐지한 일본 밀정의 보고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사 사무실에서 안중근 등 3명이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과 때를 맞춰 저격 실행을 약속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쓸 총 3정이 건네진 날짜도 정확하게 적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회합에는 한때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을 지냈던 정재관이란 인물이 함께 있었고 하얼빈 의거의 배후로 이 사람을 지목한 점입니다.

<인터뷰>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 "일본 측의 안중근 하얼빈 저격 사건이라는 기록은 크게 보면 재판 관련 기록이 있고요. 또 하나는 배후조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후자는 일본 외무성 자료로 외교 사료관에 수장되어 있는데 무려 7천 페이지 정도 됩니다. 그것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그게 아주 안중근 혼자가 아니라 굉장히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고 그 중심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과거 안중근 의사의 구명을 위해 변호사 비용을 모금하고 댄 사람들이 고종 황제의 측근이라는 점 등 그간 제기된 고종의 안 의사 의거 배후 가능성을 한층 뒷받침하는 자료로 처음 공개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연해주 망명에서부터 하얼빈 의거에 이르는 2년여는 안 의사에게 조국 독립을 위한 의병전쟁의 연장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입니다.

<인터뷰>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 “만주와 연해주에 고종 황제는 항일 독립 세력이
크는 것을 보고 거기에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조직을 활용해서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해야 되겠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가는 건 만주를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두겠다는 거고 그게 성공하면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설 자리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되겠다. 이런 판단한 걸로 봐야죠.“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진학 대표.

자연스럽게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 2억 원 가까이 자비를 들여 지난 2006년 하얼빈에 안 의사 동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동상을 바깥에 둘 수 없다는 중국정부의 방침으로 세운지 11일 만에 철거한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진학(하얼빈 현지 개인 사업가) : “안중근 이름 석 자만 대도 우리 국민들은 마음이 설렙니다. 이 분은 오직 나라사랑 그리고 동포사랑, 그리고 평화였습니다. 그거 때문에 이 분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국민은 없지요.”

봉선사 혜문 스님도 안 의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깊은 관심이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분노로 쌓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백 주년은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사망 백 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토가 태어난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 시에서는 지난달 초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토는 일본 근대 헌법의 기초를 세웠고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내며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한반도 침략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입니다.

<인터뷰> 혜문 스님 : “조선 통감 시절에 입었던 모자하고 견장이 되게 인상적이죠. (어떤 점이?) 그 아래 조선 사람이 다 무릎을 굻은 거잖아요. 이토 히로부미가 다 모자 쓰고 나가 거든요. 실물을 보니까 울컥하더라고요.”


30대 초반의 나이로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 생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안 의사.

이런 안 의사의 영웅다운 면모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내일 뮤지컬로 제작해 무대에 올려집니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를 뮤지컬 작품으로 재조명해 흥행에도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인터뷰> 윤호진(뮤지컬 영웅 연출가) : “나라를 위해서 31살 나이에 저렇게 엄청난 거사를 치루고 32살에 감옥에서 동양평화라는 훌륭한 사상, 자기의 사상을 지필해가면서 마지막에 생을 마감하는 걸 봤을 때 우리 후세 젊은 사람들한테 나라가 무엇인지 우리의 정체성이 뭔지 많이 느끼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년, 처음 공개되는 안 의사 관련 사진과 유묵 작품이 처음으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일본 여기저기 소장돼 있던 것과 국내에서 개인들이 갖고 있는 작품들을 모은 전시회입니다.

<인터뷰> 이소연(예술의전당 큐레이터) : “공판장에 직접 참가해서 뒤에 앉아서 보고 그렸기 때문에 조도선, 안중근 의사의 옆모습이 틀어져서 보이기도 하는데 저 정도까지밖에 안 보였다는 거죠. 원본이 이런 식으로 공개된 건 처음이에요.”

이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유묵 한 점.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50여 점의 유묵을 썼고 송곳같이 삼엄하고 날카로운 글귀들을 많이 남겼지만 이 작품만큼은 아주 푸근한 상태에서 마음이 정리된 도인적인 면모가 느껴집니다.

한말 의병전쟁 20년 역사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쾌거이자 안 의사 자신에게는 생애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었을 하얼빈 의거.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어쩌면 더 크고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결행한 새로운 시작이었을지 모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런 정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하고 단호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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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의 ‘2년 전쟁’
    • 입력 2009-10-25 21:50:21
    취재파일K
< 앵커 멘트 > 대한 사람 안중근이 한반도 침탈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 내일로 꼭 100년이 됩니다.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하기 2년 전부터 연해주로 들어가 항일 의병 투쟁을 벌이며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를 해 왔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 망명에서 하얼빈 의거까지 2년여 동안에 걸친 안 의사의 의병 활동 행적과 그의 시대정신을 생각해 봤습니다. <리포트> 구한말 국권 침탈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인장이 찍힌 대형 걸개그림이 만들어졌습니다. 가로 30미터, 세로 50미터.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 의사를 생각하며 손도장을 찍었고 미국, 중국, 일본, 레바논 등에 나가 있는 해외 동포들까지 참여했습니다. 지난 넉 달 동안 한 대학 연합동아리 회원들이 준비한 이벤트입니다. <인터뷰> 서경덕('생존경쟁' 대학연합동아리 자문교수) : “미국 하면 링컨, 남아공 하면 만델라, 인도 하면 간디, 이런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굉장히 훌륭한 영웅들이 많았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너무 잊고 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해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된 중국의 하얼빈 역. 당시의 상황이 백 년이 흐른 지금, 항일정신이 서린 독립기념관에 재현됐습니다. 결연한 표정의 안중근 의사. 지금이라도 손의 떨림이 느껴질 것 같은 안 의사의 총 끝은 몸의 중심을 잃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조은경(천안 독립기념관 학예사) : “이번 전시를 통해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재조명하고 그 속에 담긴 나라사랑 정신을 우리 국민들과 함께 느껴 보기 위해서 마련하게 됐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러시아 의장대 열병이 끝나갈 무렵. 안중근 의사가 쏜 7발의 총성이 울리고 신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소식을 알립니다. 의거 직후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러시아 측에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에 재빨리 재판권을 넘기고 맙니다. 의거 다섯 달 후 안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자신의 의연함은 잃지 않았습니다. 안 의사 자신은 의병이며 폭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토 히로부미와 그가 이끄는 일본군이 폭도란 생각을 경시 심문이나 공판에서 전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동국(예술의전당 학예사) :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게 아니다.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서 전시 상황에서 적군의 수장을 처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법이 아니라 만국공법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법정 자체가 무효다, 위법이다라고 정당하게 당당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어느덧 한 세기가 지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새로운 역사적 사실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1907년 10월 연해주로 망명할 때부터 1909년 10월 하얼빈 역 의거까지, 2년간의 안 의사 의병투쟁 기록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1908년 여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연해주 의병 2백 명을 이끌고 참가한 국내진공작전은 안 의사의 의병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입니다. 두만강을 건넌 의병군은 일본 헌병대를 기습해 함경북도 경흥 지방의 홍의동 전투와 신아산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하고 회령 지방의 영산까지 진격합니다. 하지만 의병군의 국내진공작전은 병력과 무기 등의 열세로 한 달여 만에 영산 전투에서 패배했고 의병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인터뷰> 박민영(독립기념관 연구원) : “안중근은 연해주 의병, 도영장(의병군 최고 지휘관) 밑에 좌익장 우익장 양익 체제인데 거기에서 우익장을 맡았으니까 상당히 비중 있는 의병 지휘관이죠. 어떻게 보면 야전 최고사령관 중 한 사람이죠.”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군에 대한 흔적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고한 일본군 일지에서 여럿 발견됩니다. 약 2백 명의 폭도가 신아산을 습격하였는데 일본군 한 명이 전사하고 다섯 명이 행방불명이다. 이 내용은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쓴 안응칠 전기라는 자서전에서도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군을 사로잡았으나 전쟁포로로 대우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풀어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터뷰> 박민영(연구원) : "포로를 석방하니까 그 동료 의병들이 거기에 아주 심하게 반발하는 그 내용이 안응칠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죠. 안중근 의사가 석방한 포로가 바로 신아산 전투에서 해방불명 됐다고 기록된 일본 군인이라고 판단이 되는 거죠." 하얼빈 의거의 전모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의거가 있기 10여 일 전 하얼빈 의거를 결행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등이 참석한 회합이 있었고 이를 탐지한 일본 밀정의 보고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사 사무실에서 안중근 등 3명이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과 때를 맞춰 저격 실행을 약속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쓸 총 3정이 건네진 날짜도 정확하게 적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회합에는 한때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을 지냈던 정재관이란 인물이 함께 있었고 하얼빈 의거의 배후로 이 사람을 지목한 점입니다. <인터뷰>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 "일본 측의 안중근 하얼빈 저격 사건이라는 기록은 크게 보면 재판 관련 기록이 있고요. 또 하나는 배후조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후자는 일본 외무성 자료로 외교 사료관에 수장되어 있는데 무려 7천 페이지 정도 됩니다. 그것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그게 아주 안중근 혼자가 아니라 굉장히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고 그 중심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과거 안중근 의사의 구명을 위해 변호사 비용을 모금하고 댄 사람들이 고종 황제의 측근이라는 점 등 그간 제기된 고종의 안 의사 의거 배후 가능성을 한층 뒷받침하는 자료로 처음 공개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연해주 망명에서부터 하얼빈 의거에 이르는 2년여는 안 의사에게 조국 독립을 위한 의병전쟁의 연장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입니다. <인터뷰>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 “만주와 연해주에 고종 황제는 항일 독립 세력이 크는 것을 보고 거기에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조직을 활용해서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해야 되겠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가는 건 만주를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두겠다는 거고 그게 성공하면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설 자리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되겠다. 이런 판단한 걸로 봐야죠.“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진학 대표. 자연스럽게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 2억 원 가까이 자비를 들여 지난 2006년 하얼빈에 안 의사 동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동상을 바깥에 둘 수 없다는 중국정부의 방침으로 세운지 11일 만에 철거한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진학(하얼빈 현지 개인 사업가) : “안중근 이름 석 자만 대도 우리 국민들은 마음이 설렙니다. 이 분은 오직 나라사랑 그리고 동포사랑, 그리고 평화였습니다. 그거 때문에 이 분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국민은 없지요.” 봉선사 혜문 스님도 안 의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깊은 관심이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분노로 쌓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백 주년은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사망 백 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토가 태어난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 시에서는 지난달 초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토는 일본 근대 헌법의 기초를 세웠고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내며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하면서 한반도 침략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입니다. <인터뷰> 혜문 스님 : “조선 통감 시절에 입었던 모자하고 견장이 되게 인상적이죠. (어떤 점이?) 그 아래 조선 사람이 다 무릎을 굻은 거잖아요. 이토 히로부미가 다 모자 쓰고 나가 거든요. 실물을 보니까 울컥하더라고요.” 30대 초반의 나이로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 생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안 의사. 이런 안 의사의 영웅다운 면모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내일 뮤지컬로 제작해 무대에 올려집니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를 뮤지컬 작품으로 재조명해 흥행에도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인터뷰> 윤호진(뮤지컬 영웅 연출가) : “나라를 위해서 31살 나이에 저렇게 엄청난 거사를 치루고 32살에 감옥에서 동양평화라는 훌륭한 사상, 자기의 사상을 지필해가면서 마지막에 생을 마감하는 걸 봤을 때 우리 후세 젊은 사람들한테 나라가 무엇인지 우리의 정체성이 뭔지 많이 느끼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년, 처음 공개되는 안 의사 관련 사진과 유묵 작품이 처음으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일본 여기저기 소장돼 있던 것과 국내에서 개인들이 갖고 있는 작품들을 모은 전시회입니다. <인터뷰> 이소연(예술의전당 큐레이터) : “공판장에 직접 참가해서 뒤에 앉아서 보고 그렸기 때문에 조도선, 안중근 의사의 옆모습이 틀어져서 보이기도 하는데 저 정도까지밖에 안 보였다는 거죠. 원본이 이런 식으로 공개된 건 처음이에요.” 이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유묵 한 점.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50여 점의 유묵을 썼고 송곳같이 삼엄하고 날카로운 글귀들을 많이 남겼지만 이 작품만큼은 아주 푸근한 상태에서 마음이 정리된 도인적인 면모가 느껴집니다. 한말 의병전쟁 20년 역사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쾌거이자 안 의사 자신에게는 생애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었을 하얼빈 의거.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어쩌면 더 크고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결행한 새로운 시작이었을지 모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런 정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하고 단호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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