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맞은 경술국치, 10년된 남북정상회담

입력 2010.01.0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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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십진법에 의한 주기를 맞는 역사적 사건이 유난히 많은 해다. 한국 근현대 흐름을 바꾼 각종 굵직굵직한 사건들 중 경술국치가 100주년을 맞이하는가 하면, 민족상잔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발발 60주년이 된다.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양대사건인 4.19 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각각 만 50세와 30세에 도달한다. 또, 분단 이후 남북한 정상이 만난 지도 엊그제 같지만 벌써 10년이 흘렀다.

이 외에도 새벽종을 울리며 초가집도 없애기 시작한 새마을운동과 국토의 동맥 경부고속도로 개통도 40주년을 맞이한다.

관련 기관이나 학술단체 등은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하는 각종 특별전시나 학술대회, 기념행사 등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이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도 적지 않아 이를 둘러싼 논쟁이 새해에 재발할 여지도 많은 것으로 관측된다.

◇경술국치 100년
1910년 8월29일에 일어난 사건, 즉, 일본에 대한제국이 '병합'된 일을 지칭하는 용어부터가 논란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란 글자 그대로는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을 의미하지만, 이 용어가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한일합방'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일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며, '한일병합' 또한 대한제국이 원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은 용어이다.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흔히 '시정'(施政)이라 표현했다. 미개한 조선 땅에 선진적인 일본의 정치 제도를 베풀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5년 단위로 조선의 식민지배를 기념했다.

흔히 경술국치로 조선왕조는 완전히 망했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왕과 조선왕실은 존재했다. 그것은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에서 대한제국 황제를 '조선왕'으로 격하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 치하 조선왕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기는 했지만, 그 존재가 갖는 위상이 어떠했는지는 대한제국시대 황제였던 고종의 죽음이 불러온 1919년 3.1만세운동이 여실히 보여준다.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지구상에서 영영 종적을 감춘 그 해 3월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한청년 안중근이 순국했으며,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고향 전라도에서 들은 매천 황현은 5년 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격분한 민영환이 그랬던 것처럼 "길짐승 날짐승 슬피 우니 강과 산도 찡그리네"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과거 학교 교정에서 6월25일이면 어김없이 부르던 이 '6.25노래'는 이제 사라졌다. 그만큼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6.25의 참상을 직접 겪은 세대에게 이 노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것이 사건을 몸소 겪은 사람들은 거의 다 망자가 된 경술국치와 6.25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대목이다.

그런 까닭에 6.25를 향한 세대간 인식 차이는 극심하다.

더불어 3년 동안이나 한반도를 포화에 휘말리게 한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학문적 시각 차이도 적지 않다. 한국전쟁이 또 하나의 세계대전이었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외 기원론이라든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는 만만치 않은 대립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미국의 한국 근대사 연구가 브루스 커밍스가 제시한 수정주의 관점의 한국전쟁론, 즉, 한국전쟁은 미국이 유도했다는 주장이 득세했지만, 구소련 문서들과 미군에서 노획한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 문서들이 대거 공개되면서 이런 주장이 힘을 잃은 것도 부인할 수 없다.

6.25 노래는 사라졌지만, 6.25가 남긴 상흔은 여전하다. 한반도는 전쟁이 종결된 상태가 아니라, 휴전된 상태라는 사실이 곧잘 망각되곤 하지만, 작금 북핵 사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배경에는 이 휴전이라는 상황이 자리잡고 있다.

◇4.19혁명 50주년

반공주의를 깃발로 북진통일을 외치며 철권통치를 구가한 이승만은 1960년 4월26일 권좌에서 내려와 미국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그의 축출을 끌어낸 '국민'은 학생들이었다. 이 학생에는 전통적 반정부 시위 주축인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ㆍ고교생도 포함됐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일을 도화선으로, 4월18일 고려대를 필두로 한 반정부 시위는 대학을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말 그대로 4.19는 독재자를 침몰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혁명이었지만, '미완'이란 결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지금도 달고 다닌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혁명으로 완전한 민주화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독재정권을 출범시키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19로 탄생한 장면 정권은 무능과 부패로 자멸했으며, 그 빈 자리에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들 자신은 이를 5.16 군사혁명이라 했지만, 그것을 단순히 '군사 쿠데타'로 부정하는 시각 또한 엄존한다.

4.19로 시작되고 5.16을 거쳐,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겪으면서 기반을 다진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은 지금도 뜨겁다.

4.19혁명이 '미완'이라는 시각은 5.18 광주가 그 미완 혁명의 '계승' 혹은 '완성'이라는 시각과도 어쩌면 맞물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30년

"금난로에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이 섬뜩한 구절이 들어간 노래는 1980년 이후 한동안 대학시위나 노동운동 현장을 장식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도래한 '서울의 봄'은 또 다른 군부정권의 출범을 위한 무대였다. 이 시해사건으로 인한 계엄령 선포와 그 조사 과정에서 등장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중핵을 형성한 세력은 신군부로 일컬어졌다.

신군부 세력은 사회 안정을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또 다른 철권통치를 꾀했다. 이 와중에 광주 시민이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신군부에서는 5월18일 시위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를 투입해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진압했다. 사망자 155명, 부상자 5천189명에 달한 '붉은 5월'이었다.

철저한 언론통제 속에 그 참상은 당시에는 외부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를 포함한 당시 시위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기도 한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정부 공식 기록에서는 '광주사태'로 표현됐다가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되었으며,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법의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남북정상회담 10년

분단 이후 남북한 정상회담은 1994년 7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에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직전인 그 해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함으로써 무산됐다. 그러나 이는 무산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연기'라고 할 수 있
다.

남북한 모두 주연은 바뀌었지만 이로부터 6년 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났기 때문이다.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그를 맞이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은 한반도 분단과 대립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말해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만남을 통해 남북한은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는가 하면,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의 남북교류 사업도 추진했다.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금 북한으로 가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조성된 활발한 남북간 교류는 한편에서는 일방적인 대북 퍼주기라느니, 북한의 독재체제를 용인하는 셈이라는 등의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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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맞은 경술국치, 10년된 남북정상회담
    • 입력 2010-01-01 13:35:05
    연합뉴스
2010년은 십진법에 의한 주기를 맞는 역사적 사건이 유난히 많은 해다. 한국 근현대 흐름을 바꾼 각종 굵직굵직한 사건들 중 경술국치가 100주년을 맞이하는가 하면, 민족상잔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발발 60주년이 된다.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양대사건인 4.19 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각각 만 50세와 30세에 도달한다. 또, 분단 이후 남북한 정상이 만난 지도 엊그제 같지만 벌써 10년이 흘렀다. 이 외에도 새벽종을 울리며 초가집도 없애기 시작한 새마을운동과 국토의 동맥 경부고속도로 개통도 40주년을 맞이한다. 관련 기관이나 학술단체 등은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하는 각종 특별전시나 학술대회, 기념행사 등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이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도 적지 않아 이를 둘러싼 논쟁이 새해에 재발할 여지도 많은 것으로 관측된다. ◇경술국치 100년 1910년 8월29일에 일어난 사건, 즉, 일본에 대한제국이 '병합'된 일을 지칭하는 용어부터가 논란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란 글자 그대로는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을 의미하지만, 이 용어가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한일합방'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일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며, '한일병합' 또한 대한제국이 원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은 용어이다.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흔히 '시정'(施政)이라 표현했다. 미개한 조선 땅에 선진적인 일본의 정치 제도를 베풀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5년 단위로 조선의 식민지배를 기념했다. 흔히 경술국치로 조선왕조는 완전히 망했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왕과 조선왕실은 존재했다. 그것은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에서 대한제국 황제를 '조선왕'으로 격하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 치하 조선왕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기는 했지만, 그 존재가 갖는 위상이 어떠했는지는 대한제국시대 황제였던 고종의 죽음이 불러온 1919년 3.1만세운동이 여실히 보여준다.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지구상에서 영영 종적을 감춘 그 해 3월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한청년 안중근이 순국했으며,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고향 전라도에서 들은 매천 황현은 5년 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격분한 민영환이 그랬던 것처럼 "길짐승 날짐승 슬피 우니 강과 산도 찡그리네"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과거 학교 교정에서 6월25일이면 어김없이 부르던 이 '6.25노래'는 이제 사라졌다. 그만큼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6.25의 참상을 직접 겪은 세대에게 이 노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것이 사건을 몸소 겪은 사람들은 거의 다 망자가 된 경술국치와 6.25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대목이다. 그런 까닭에 6.25를 향한 세대간 인식 차이는 극심하다. 더불어 3년 동안이나 한반도를 포화에 휘말리게 한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학문적 시각 차이도 적지 않다. 한국전쟁이 또 하나의 세계대전이었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외 기원론이라든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는 만만치 않은 대립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미국의 한국 근대사 연구가 브루스 커밍스가 제시한 수정주의 관점의 한국전쟁론, 즉, 한국전쟁은 미국이 유도했다는 주장이 득세했지만, 구소련 문서들과 미군에서 노획한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 문서들이 대거 공개되면서 이런 주장이 힘을 잃은 것도 부인할 수 없다. 6.25 노래는 사라졌지만, 6.25가 남긴 상흔은 여전하다. 한반도는 전쟁이 종결된 상태가 아니라, 휴전된 상태라는 사실이 곧잘 망각되곤 하지만, 작금 북핵 사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배경에는 이 휴전이라는 상황이 자리잡고 있다. ◇4.19혁명 50주년 반공주의를 깃발로 북진통일을 외치며 철권통치를 구가한 이승만은 1960년 4월26일 권좌에서 내려와 미국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그의 축출을 끌어낸 '국민'은 학생들이었다. 이 학생에는 전통적 반정부 시위 주축인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ㆍ고교생도 포함됐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일을 도화선으로, 4월18일 고려대를 필두로 한 반정부 시위는 대학을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말 그대로 4.19는 독재자를 침몰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혁명이었지만, '미완'이란 결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지금도 달고 다닌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혁명으로 완전한 민주화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독재정권을 출범시키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19로 탄생한 장면 정권은 무능과 부패로 자멸했으며, 그 빈 자리에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들 자신은 이를 5.16 군사혁명이라 했지만, 그것을 단순히 '군사 쿠데타'로 부정하는 시각 또한 엄존한다. 4.19로 시작되고 5.16을 거쳐,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겪으면서 기반을 다진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은 지금도 뜨겁다. 4.19혁명이 '미완'이라는 시각은 5.18 광주가 그 미완 혁명의 '계승' 혹은 '완성'이라는 시각과도 어쩌면 맞물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30년 "금난로에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이 섬뜩한 구절이 들어간 노래는 1980년 이후 한동안 대학시위나 노동운동 현장을 장식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도래한 '서울의 봄'은 또 다른 군부정권의 출범을 위한 무대였다. 이 시해사건으로 인한 계엄령 선포와 그 조사 과정에서 등장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중핵을 형성한 세력은 신군부로 일컬어졌다. 신군부 세력은 사회 안정을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또 다른 철권통치를 꾀했다. 이 와중에 광주 시민이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신군부에서는 5월18일 시위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를 투입해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진압했다. 사망자 155명, 부상자 5천189명에 달한 '붉은 5월'이었다. 철저한 언론통제 속에 그 참상은 당시에는 외부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를 포함한 당시 시위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기도 한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정부 공식 기록에서는 '광주사태'로 표현됐다가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되었으며,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법의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남북정상회담 10년 분단 이후 남북한 정상회담은 1994년 7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에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직전인 그 해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함으로써 무산됐다. 그러나 이는 무산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연기'라고 할 수 있 다. 남북한 모두 주연은 바뀌었지만 이로부터 6년 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났기 때문이다.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그를 맞이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은 한반도 분단과 대립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말해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만남을 통해 남북한은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는가 하면,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의 남북교류 사업도 추진했다.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금 북한으로 가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조성된 활발한 남북간 교류는 한편에서는 일방적인 대북 퍼주기라느니, 북한의 독재체제를 용인하는 셈이라는 등의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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