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를란, 페널티 공간서 ‘가장 위협적’(21)
입력 2010.01.21 (08:03)
수정 2010.01.2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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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포를란(31.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은 페널티박스 안에 있을 때 가장 위협적인 선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두 발을 모두 완벽에 가깝게 이용하고 페널티 지역에서 때리는 대포알 슈팅은 골문을 향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위협적이다.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잡아두지 않고 정확하게 강타하는 감각이 탁월하며 골키퍼와 일대일에서 특별히 강한 면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헤딩에는 소질이 없고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독단적 플레이로 난사를 일삼으며 페널티 지역을 벗어나면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포를란은 대포알 슈팅을 무기로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2008-2009시즌 경기마다 거의 한 골씩(0.96골)을 넣는 괴력을 선보였다.
32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유럽 리그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선수에게 주는 `골든부트 상(Golden Boot Award)’도 받았다.
프리메라리가에 입문한 시즌인 2004-2005시즌에도 비야레알에서 25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등극한 바 있다.
10대일 때도 골 감각은 마찬가지라서 10대에 입단한 아르헨티나의 클럽 인디펜디엔테에서 두 시즌 반 동안 37골을 몰아쳤다. 2000-2001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에도 올랐다.
그 뒤에 2001-2002시즌부터 2003-2004시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는데 때때로 중요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벤치를 지키는 때가 많아 개인적으로는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2004년 비야레알에 발탁돼 스페인으로 건너가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문전에서 신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포를란은 3대를 이어 축구를 하는 가문의 일원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 파블로 포르난은 인디펜디엔테에서 뛴 프로 선수이자 국가대표였고 할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코라소는 1962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감독을 지냈다.
포를란은 청소년 시절에 축구보다는 테니스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는데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테니스를 포기하고 축구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누나가 축구 선수가 되기를 바랐고 누나의 치료비 탓에 가계가 쪼들리자 테니스보다 축구로 대성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
포를란은 첫 월드컵 본선 경험이던 2002년에 진가를 보여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8년간 갈고 닦은 기량이 나올지 기대가 크다.
당시 포를란은 벤치에서 조별리그 덴마크전(1-2 패)과 프랑스전(0-0 무)을 지켜보면서 오금을 저렸다.
하지만 세네갈과 3차전에서는 후반에 교체출전 기회를 얻어 1-3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3-3 무승부의 발판을 놓는 만회골을 터뜨렸다.
두 발을 모두 완벽에 가깝게 이용하고 페널티 지역에서 때리는 대포알 슈팅은 골문을 향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위협적이다.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잡아두지 않고 정확하게 강타하는 감각이 탁월하며 골키퍼와 일대일에서 특별히 강한 면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헤딩에는 소질이 없고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독단적 플레이로 난사를 일삼으며 페널티 지역을 벗어나면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포를란은 대포알 슈팅을 무기로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2008-2009시즌 경기마다 거의 한 골씩(0.96골)을 넣는 괴력을 선보였다.
32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유럽 리그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선수에게 주는 `골든부트 상(Golden Boot Award)’도 받았다.
프리메라리가에 입문한 시즌인 2004-2005시즌에도 비야레알에서 25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등극한 바 있다.
10대일 때도 골 감각은 마찬가지라서 10대에 입단한 아르헨티나의 클럽 인디펜디엔테에서 두 시즌 반 동안 37골을 몰아쳤다. 2000-2001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에도 올랐다.
그 뒤에 2001-2002시즌부터 2003-2004시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는데 때때로 중요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벤치를 지키는 때가 많아 개인적으로는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2004년 비야레알에 발탁돼 스페인으로 건너가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문전에서 신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포를란은 3대를 이어 축구를 하는 가문의 일원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 파블로 포르난은 인디펜디엔테에서 뛴 프로 선수이자 국가대표였고 할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코라소는 1962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감독을 지냈다.
포를란은 청소년 시절에 축구보다는 테니스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는데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테니스를 포기하고 축구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누나가 축구 선수가 되기를 바랐고 누나의 치료비 탓에 가계가 쪼들리자 테니스보다 축구로 대성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
포를란은 첫 월드컵 본선 경험이던 2002년에 진가를 보여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8년간 갈고 닦은 기량이 나올지 기대가 크다.
당시 포를란은 벤치에서 조별리그 덴마크전(1-2 패)과 프랑스전(0-0 무)을 지켜보면서 오금을 저렸다.
하지만 세네갈과 3차전에서는 후반에 교체출전 기회를 얻어 1-3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3-3 무승부의 발판을 놓는 만회골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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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0-01-21 08:03:16
- 수정2010-01-21 09:55:58

디에고 포를란(31.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은 페널티박스 안에 있을 때 가장 위협적인 선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두 발을 모두 완벽에 가깝게 이용하고 페널티 지역에서 때리는 대포알 슈팅은 골문을 향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위협적이다.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잡아두지 않고 정확하게 강타하는 감각이 탁월하며 골키퍼와 일대일에서 특별히 강한 면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헤딩에는 소질이 없고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독단적 플레이로 난사를 일삼으며 페널티 지역을 벗어나면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포를란은 대포알 슈팅을 무기로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2008-2009시즌 경기마다 거의 한 골씩(0.96골)을 넣는 괴력을 선보였다.
32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유럽 리그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선수에게 주는 `골든부트 상(Golden Boot Award)’도 받았다.
프리메라리가에 입문한 시즌인 2004-2005시즌에도 비야레알에서 25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등극한 바 있다.
10대일 때도 골 감각은 마찬가지라서 10대에 입단한 아르헨티나의 클럽 인디펜디엔테에서 두 시즌 반 동안 37골을 몰아쳤다. 2000-2001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에도 올랐다.
그 뒤에 2001-2002시즌부터 2003-2004시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는데 때때로 중요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벤치를 지키는 때가 많아 개인적으로는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2004년 비야레알에 발탁돼 스페인으로 건너가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문전에서 신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포를란은 3대를 이어 축구를 하는 가문의 일원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 파블로 포르난은 인디펜디엔테에서 뛴 프로 선수이자 국가대표였고 할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코라소는 1962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감독을 지냈다.
포를란은 청소년 시절에 축구보다는 테니스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는데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테니스를 포기하고 축구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누나가 축구 선수가 되기를 바랐고 누나의 치료비 탓에 가계가 쪼들리자 테니스보다 축구로 대성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
포를란은 첫 월드컵 본선 경험이던 2002년에 진가를 보여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8년간 갈고 닦은 기량이 나올지 기대가 크다.
당시 포를란은 벤치에서 조별리그 덴마크전(1-2 패)과 프랑스전(0-0 무)을 지켜보면서 오금을 저렸다.
하지만 세네갈과 3차전에서는 후반에 교체출전 기회를 얻어 1-3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3-3 무승부의 발판을 놓는 만회골을 터뜨렸다.
두 발을 모두 완벽에 가깝게 이용하고 페널티 지역에서 때리는 대포알 슈팅은 골문을 향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위협적이다.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잡아두지 않고 정확하게 강타하는 감각이 탁월하며 골키퍼와 일대일에서 특별히 강한 면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헤딩에는 소질이 없고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독단적 플레이로 난사를 일삼으며 페널티 지역을 벗어나면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포를란은 대포알 슈팅을 무기로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2008-2009시즌 경기마다 거의 한 골씩(0.96골)을 넣는 괴력을 선보였다.
32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유럽 리그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선수에게 주는 `골든부트 상(Golden Boot Award)’도 받았다.
프리메라리가에 입문한 시즌인 2004-2005시즌에도 비야레알에서 25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등극한 바 있다.
10대일 때도 골 감각은 마찬가지라서 10대에 입단한 아르헨티나의 클럽 인디펜디엔테에서 두 시즌 반 동안 37골을 몰아쳤다. 2000-2001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에도 올랐다.
그 뒤에 2001-2002시즌부터 2003-2004시즌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는데 때때로 중요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벤치를 지키는 때가 많아 개인적으로는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2004년 비야레알에 발탁돼 스페인으로 건너가자마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문전에서 신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포를란은 3대를 이어 축구를 하는 가문의 일원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 파블로 포르난은 인디펜디엔테에서 뛴 프로 선수이자 국가대표였고 할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코라소는 1962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감독을 지냈다.
포를란은 청소년 시절에 축구보다는 테니스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는데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테니스를 포기하고 축구에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누나가 축구 선수가 되기를 바랐고 누나의 치료비 탓에 가계가 쪼들리자 테니스보다 축구로 대성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
포를란은 첫 월드컵 본선 경험이던 2002년에 진가를 보여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8년간 갈고 닦은 기량이 나올지 기대가 크다.
당시 포를란은 벤치에서 조별리그 덴마크전(1-2 패)과 프랑스전(0-0 무)을 지켜보면서 오금을 저렸다.
하지만 세네갈과 3차전에서는 후반에 교체출전 기회를 얻어 1-3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3-3 무승부의 발판을 놓는 만회골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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