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배드민턴은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덴마크 등과 함께 셔틀콕 강국으로 꼽힌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에서도 꼬박꼬박 입상해 메달 효자 종목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1980년초 만 해도 한국 셔틀콕은 세계 정상권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1981년 황선애가 전영오픈선수권대회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게 국제대회 사상 거의 첫 메달이었다. 국제대회는 자주 출전하지도 못했고 나가도 '찬밥' 신세였다.
불모지였던 한국 셔틀콕은 1980년대 중반부터 뜨기 시작한다. 박주봉 김문수 김동문 방수현 정명희 라경민 등 세계적인 스타가 줄줄이 나오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한국 셔틀콕이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 '대부'들이 있다. 김학석(61)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최일현(64) 전 대한배드민턴협회 전무, 한성귀(62) 전 국가대표 감독 등이다.
이 가운데 한 전 감독이 지난 2월 현역에서 물러났다. 1996년부터 맡아왔던 삼성전기 사령탑을 내 놓고 정년 퇴임했다.
한 전 감독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나이 어린 선수들이랑 함께 지내다 보니 나이 먹는 줄도 몰랐다"며 "정작 그만둔다고 하니 이제야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느껴진다"고 퇴임 소감을 밝히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 나이까지 내가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나를 돌봐줬기 때문"이라면서 "후배를 위해서라도 좋은 시기에 그만두는 게 바람직하다. 다만 요청이 들어온다면 단기간 지도에 나설 수는 있겠지만 조직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 전 감독이 배드민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전주동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체육시간에 선생님의 권유로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대학생을 꺾으며 주목받았고 배드민턴 명문 전주농림고등학교를 거쳤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한 전 감독은 1994년 전북도청의 사령탑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82년 국가대표 코치가 됐고 1986년 정식 감독이 된 후 1996년까지 15년 동안 숱한 제자를 길러냈다. 한국 배드민턴의 성장 곡선이 그대로 한 전 감독의 국가대표 사령탑 재임 기간과 중첩되는 셈이다.
"맨 처음 대표팀을 맡고 선수단의 실력을 살펴보니 단식에서는 메달을 따기가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주종목을 복식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했고 1982년 덴마크오픈 남자복식에서 곧바로 우승했어요. 키는 작아도 수비가 좋은 길영아를 복식으로 돌렸고, 왼손잡이라 역습에 능한 김문수를 박주봉과 짝을 지웠지요."
배드민턴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고 1992년 바르셀로나대회부터 정식종목이 됐다. 한창 성장하던 한국 셔틀콕은 1992년 대회 금메달 2개(남자복식 박주봉-김문수, 여자복식 정소영-황혜영)를 비롯해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한 개씩 따며 주목받았다.
한 전 감독은 이어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도 여자단식 방수현, 혼합복식 김동문-길영아를 앞세워 금메달 2개를 땄고 은메달도 2개나 획득했다.
"방수현이 금메달을 땄을 때가 가장 감격적이었습니다. 복식에서는 늘 메달을 기대했지만 단식에서 따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지도자로 무척 보람을 느꼈지요."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대표팀 초청 지도자로 이용대-이효정(이상 삼성전기)의 혼합복식 금메달을 일궈냈다.
삼성전기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용대를 스카우트해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무명이던 정재성의 기량도 꽃 피우게 했다.
한 전 감독은 위압적으로 선수들을 다그치기보다는 포용하며 솔선수범한 지도자로 알려졌다.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일 경우 억지로 붙들어 놓기보다는 일단 쉬게 하고 나서 나중에 집중력을 갖고 훈련하게 했다.
술을 좋아한 한 전 감독은 새벽까지 후배 코치와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다음날 오전 6시에 시작하는 새벽 훈련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한 전 감독 아래에서 코치 생활을 한 김중수 국가대표 감독은 "한 감독님은 술을 아무리 많이 드셔도 다음날 훈련 때 가장 먼저 나와서 선수를 기다리셨다"며 "솔선수범하신 지도자이며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 올리고자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돌아봤다.
한 전 감독은 새로운 훈련 방식도 도입했다. 선수들의 스매싱 힘을 키우려고 대나무, PVC 등을 휘두르게 하기도 했다.
한 전 감독은 "1980년대 초 우리 선수들은 거위털이 없어서 닭털로 만든 셔틀콕을 사용하기도 했다"며 "닭털 셔틀콕은 잘 날아가지 않기 때문에 힘껏 쳐야 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자연스레 힘으로만 밀어붙인 탓에 체력소모가 심했다. 기술적인 요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드민턴이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비인기 종목에 머무는 점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동호인은 많은데 대부분이 직접 경기를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며 "이제는 보는 즐거움도 가지려고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
이어 "어린 선수들을 많이 육성해야 한국 셔틀콕이 꾸준히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선수들의 기량은 한 번 내려앉으면 다시 끌어올리기가 무척 어렵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1980년초 만 해도 한국 셔틀콕은 세계 정상권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1981년 황선애가 전영오픈선수권대회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게 국제대회 사상 거의 첫 메달이었다. 국제대회는 자주 출전하지도 못했고 나가도 '찬밥' 신세였다.
불모지였던 한국 셔틀콕은 1980년대 중반부터 뜨기 시작한다. 박주봉 김문수 김동문 방수현 정명희 라경민 등 세계적인 스타가 줄줄이 나오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한국 셔틀콕이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 '대부'들이 있다. 김학석(61)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최일현(64) 전 대한배드민턴협회 전무, 한성귀(62) 전 국가대표 감독 등이다.
이 가운데 한 전 감독이 지난 2월 현역에서 물러났다. 1996년부터 맡아왔던 삼성전기 사령탑을 내 놓고 정년 퇴임했다.
한 전 감독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나이 어린 선수들이랑 함께 지내다 보니 나이 먹는 줄도 몰랐다"며 "정작 그만둔다고 하니 이제야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느껴진다"고 퇴임 소감을 밝히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 나이까지 내가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나를 돌봐줬기 때문"이라면서 "후배를 위해서라도 좋은 시기에 그만두는 게 바람직하다. 다만 요청이 들어온다면 단기간 지도에 나설 수는 있겠지만 조직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 전 감독이 배드민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전주동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체육시간에 선생님의 권유로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대학생을 꺾으며 주목받았고 배드민턴 명문 전주농림고등학교를 거쳤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한 전 감독은 1994년 전북도청의 사령탑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82년 국가대표 코치가 됐고 1986년 정식 감독이 된 후 1996년까지 15년 동안 숱한 제자를 길러냈다. 한국 배드민턴의 성장 곡선이 그대로 한 전 감독의 국가대표 사령탑 재임 기간과 중첩되는 셈이다.
"맨 처음 대표팀을 맡고 선수단의 실력을 살펴보니 단식에서는 메달을 따기가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주종목을 복식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했고 1982년 덴마크오픈 남자복식에서 곧바로 우승했어요. 키는 작아도 수비가 좋은 길영아를 복식으로 돌렸고, 왼손잡이라 역습에 능한 김문수를 박주봉과 짝을 지웠지요."
배드민턴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고 1992년 바르셀로나대회부터 정식종목이 됐다. 한창 성장하던 한국 셔틀콕은 1992년 대회 금메달 2개(남자복식 박주봉-김문수, 여자복식 정소영-황혜영)를 비롯해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한 개씩 따며 주목받았다.
한 전 감독은 이어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도 여자단식 방수현, 혼합복식 김동문-길영아를 앞세워 금메달 2개를 땄고 은메달도 2개나 획득했다.
"방수현이 금메달을 땄을 때가 가장 감격적이었습니다. 복식에서는 늘 메달을 기대했지만 단식에서 따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지도자로 무척 보람을 느꼈지요."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대표팀 초청 지도자로 이용대-이효정(이상 삼성전기)의 혼합복식 금메달을 일궈냈다.
삼성전기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용대를 스카우트해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무명이던 정재성의 기량도 꽃 피우게 했다.
한 전 감독은 위압적으로 선수들을 다그치기보다는 포용하며 솔선수범한 지도자로 알려졌다.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일 경우 억지로 붙들어 놓기보다는 일단 쉬게 하고 나서 나중에 집중력을 갖고 훈련하게 했다.
술을 좋아한 한 전 감독은 새벽까지 후배 코치와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다음날 오전 6시에 시작하는 새벽 훈련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한 전 감독 아래에서 코치 생활을 한 김중수 국가대표 감독은 "한 감독님은 술을 아무리 많이 드셔도 다음날 훈련 때 가장 먼저 나와서 선수를 기다리셨다"며 "솔선수범하신 지도자이며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 올리고자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돌아봤다.
한 전 감독은 새로운 훈련 방식도 도입했다. 선수들의 스매싱 힘을 키우려고 대나무, PVC 등을 휘두르게 하기도 했다.
한 전 감독은 "1980년대 초 우리 선수들은 거위털이 없어서 닭털로 만든 셔틀콕을 사용하기도 했다"며 "닭털 셔틀콕은 잘 날아가지 않기 때문에 힘껏 쳐야 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자연스레 힘으로만 밀어붙인 탓에 체력소모가 심했다. 기술적인 요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드민턴이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비인기 종목에 머무는 점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동호인은 많은데 대부분이 직접 경기를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며 "이제는 보는 즐거움도 가지려고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
이어 "어린 선수들을 많이 육성해야 한국 셔틀콕이 꾸준히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선수들의 기량은 한 번 내려앉으면 다시 끌어올리기가 무척 어렵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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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드민턴계 대들보’ 한성귀 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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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0-04-11 07:45:01

한국 배드민턴은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덴마크 등과 함께 셔틀콕 강국으로 꼽힌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에서도 꼬박꼬박 입상해 메달 효자 종목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1980년초 만 해도 한국 셔틀콕은 세계 정상권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1981년 황선애가 전영오픈선수권대회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게 국제대회 사상 거의 첫 메달이었다. 국제대회는 자주 출전하지도 못했고 나가도 '찬밥' 신세였다.
불모지였던 한국 셔틀콕은 1980년대 중반부터 뜨기 시작한다. 박주봉 김문수 김동문 방수현 정명희 라경민 등 세계적인 스타가 줄줄이 나오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한국 셔틀콕이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한 '대부'들이 있다. 김학석(61)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 최일현(64) 전 대한배드민턴협회 전무, 한성귀(62) 전 국가대표 감독 등이다.
이 가운데 한 전 감독이 지난 2월 현역에서 물러났다. 1996년부터 맡아왔던 삼성전기 사령탑을 내 놓고 정년 퇴임했다.
한 전 감독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나이 어린 선수들이랑 함께 지내다 보니 나이 먹는 줄도 몰랐다"며 "정작 그만둔다고 하니 이제야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느껴진다"고 퇴임 소감을 밝히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 나이까지 내가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나를 돌봐줬기 때문"이라면서 "후배를 위해서라도 좋은 시기에 그만두는 게 바람직하다. 다만 요청이 들어온다면 단기간 지도에 나설 수는 있겠지만 조직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 전 감독이 배드민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전주동중학교 2학년 때였다. 체육시간에 선생님의 권유로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대학생을 꺾으며 주목받았고 배드민턴 명문 전주농림고등학교를 거쳤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한 전 감독은 1994년 전북도청의 사령탑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1982년 국가대표 코치가 됐고 1986년 정식 감독이 된 후 1996년까지 15년 동안 숱한 제자를 길러냈다. 한국 배드민턴의 성장 곡선이 그대로 한 전 감독의 국가대표 사령탑 재임 기간과 중첩되는 셈이다.
"맨 처음 대표팀을 맡고 선수단의 실력을 살펴보니 단식에서는 메달을 따기가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주종목을 복식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했고 1982년 덴마크오픈 남자복식에서 곧바로 우승했어요. 키는 작아도 수비가 좋은 길영아를 복식으로 돌렸고, 왼손잡이라 역습에 능한 김문수를 박주봉과 짝을 지웠지요."
배드민턴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고 1992년 바르셀로나대회부터 정식종목이 됐다. 한창 성장하던 한국 셔틀콕은 1992년 대회 금메달 2개(남자복식 박주봉-김문수, 여자복식 정소영-황혜영)를 비롯해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한 개씩 따며 주목받았다.
한 전 감독은 이어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도 여자단식 방수현, 혼합복식 김동문-길영아를 앞세워 금메달 2개를 땄고 은메달도 2개나 획득했다.
"방수현이 금메달을 땄을 때가 가장 감격적이었습니다. 복식에서는 늘 메달을 기대했지만 단식에서 따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지도자로 무척 보람을 느꼈지요."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대표팀 초청 지도자로 이용대-이효정(이상 삼성전기)의 혼합복식 금메달을 일궈냈다.
삼성전기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용대를 스카우트해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무명이던 정재성의 기량도 꽃 피우게 했다.
한 전 감독은 위압적으로 선수들을 다그치기보다는 포용하며 솔선수범한 지도자로 알려졌다.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일 경우 억지로 붙들어 놓기보다는 일단 쉬게 하고 나서 나중에 집중력을 갖고 훈련하게 했다.
술을 좋아한 한 전 감독은 새벽까지 후배 코치와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다음날 오전 6시에 시작하는 새벽 훈련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한 전 감독 아래에서 코치 생활을 한 김중수 국가대표 감독은 "한 감독님은 술을 아무리 많이 드셔도 다음날 훈련 때 가장 먼저 나와서 선수를 기다리셨다"며 "솔선수범하신 지도자이며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 올리고자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돌아봤다.
한 전 감독은 새로운 훈련 방식도 도입했다. 선수들의 스매싱 힘을 키우려고 대나무, PVC 등을 휘두르게 하기도 했다.
한 전 감독은 "1980년대 초 우리 선수들은 거위털이 없어서 닭털로 만든 셔틀콕을 사용하기도 했다"며 "닭털 셔틀콕은 잘 날아가지 않기 때문에 힘껏 쳐야 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자연스레 힘으로만 밀어붙인 탓에 체력소모가 심했다. 기술적인 요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드민턴이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비인기 종목에 머무는 점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동호인은 많은데 대부분이 직접 경기를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며 "이제는 보는 즐거움도 가지려고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
이어 "어린 선수들을 많이 육성해야 한국 셔틀콕이 꾸준히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선수들의 기량은 한 번 내려앉으면 다시 끌어올리기가 무척 어렵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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