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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간첩이 노린 황장엽…체제 비판에 ‘눈엣가시’
입력 2010.04.21 (13:00) 연합뉴스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으로, 황장엽(87) 전 노동당 비서를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북자를 가장해 국내에 입국한 2명의 남파간첩이 구속돼 이들이 살해하려 한 황씨가 어떤 인물인지 다시 관심을 끈다.

1923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황씨는 북한의 전후 복구기인 1952년에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입학한 대표적인 러시아 유학파다.

귀국해 불과 29세의 나이로 김일성대 철학과 교수가 된 그는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거쳐 1962년 김일성대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김일성 사상을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함으로써 `주체사상의 대부'로도 불리는 그는 당시 후계자 신분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설을 퍼뜨리는 등 후계구도 정립 과정에도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 생존시 김일성 대학에 다니던 김 위원장을 `제자'로 삼아 주체사상을 가르친 가정교사 역할을 할 정도로 최고위층의 신뢰가 두터웠다고 한다.

황씨는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 노동당 사상 담당 비서,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며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로 있던 1997년 2월 12일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을 신청해 북한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당황한 북한은 망명 다음날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반응했으나 황씨의 망명 의사가 확실히 알려지자 "비겁한 자여 갈라면 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황씨는 남한에 귀순하면서부터 줄곧 북한에 직설적인 쓴소리를 던지며 체제문제를 건드려 북한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1997년 4월 20일 남한에 첫발을 내디딘 황씨는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했고 경제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들어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놓았다고 호언장담하는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했다"고 자신이 몸담았던 북한 체제를 정면 비판했다.

황씨는 이후 13년의 한국 생활 내내 북한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공개 활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고령의 황씨는 최근 대외 활동을 다소 줄이긴 했지만 최근에도 여전히 대학생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안보강연을 부정기적으로 하고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에서 `황장엽 민주주의 강좌'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과 일본을 잇달아 방문해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공개 강연을 하고 정부, 민간 인사들을 두루 만나기도 했다.

황씨는 망명 이후 숱한 신변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데 2006년 12월에는 빨간 물감이 뿌려진 자신의 사진, 손도끼와 협박편지가 든 우편물이 그의 앞으로 배달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공안 당국은 황씨를 24시간 근접경호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경호팀은 특별한 선발 절차를 거쳐 뽑힌 20여 명으로 꾸려져 있으며 예닐곱 명이 한 조로 24시간 3교대로 황씨를 밀착 경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北 간첩이 노린 황장엽…체제 비판에 ‘눈엣가시’
    • 입력 2010-04-21 13:00:56
    연합뉴스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으로, 황장엽(87) 전 노동당 비서를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북자를 가장해 국내에 입국한 2명의 남파간첩이 구속돼 이들이 살해하려 한 황씨가 어떤 인물인지 다시 관심을 끈다.

1923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황씨는 북한의 전후 복구기인 1952년에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입학한 대표적인 러시아 유학파다.

귀국해 불과 29세의 나이로 김일성대 철학과 교수가 된 그는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거쳐 1962년 김일성대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김일성 사상을 주체사상으로 집대성함으로써 `주체사상의 대부'로도 불리는 그는 당시 후계자 신분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설을 퍼뜨리는 등 후계구도 정립 과정에도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 생존시 김일성 대학에 다니던 김 위원장을 `제자'로 삼아 주체사상을 가르친 가정교사 역할을 할 정도로 최고위층의 신뢰가 두터웠다고 한다.

황씨는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 노동당 사상 담당 비서,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며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로 있던 1997년 2월 12일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을 신청해 북한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당황한 북한은 망명 다음날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반응했으나 황씨의 망명 의사가 확실히 알려지자 "비겁한 자여 갈라면 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황씨는 남한에 귀순하면서부터 줄곧 북한에 직설적인 쓴소리를 던지며 체제문제를 건드려 북한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1997년 4월 20일 남한에 첫발을 내디딘 황씨는 "북조선은 사회주의와 현대판 봉건주의, 군국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체제로 변질했고 경제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들어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놓았다고 호언장담하는 나라가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했다"고 자신이 몸담았던 북한 체제를 정면 비판했다.

황씨는 이후 13년의 한국 생활 내내 북한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공개 활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고령의 황씨는 최근 대외 활동을 다소 줄이긴 했지만 최근에도 여전히 대학생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안보강연을 부정기적으로 하고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에서 `황장엽 민주주의 강좌'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과 일본을 잇달아 방문해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공개 강연을 하고 정부, 민간 인사들을 두루 만나기도 했다.

황씨는 망명 이후 숱한 신변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데 2006년 12월에는 빨간 물감이 뿌려진 자신의 사진, 손도끼와 협박편지가 든 우편물이 그의 앞으로 배달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공안 당국은 황씨를 24시간 근접경호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경호팀은 특별한 선발 절차를 거쳐 뽑힌 20여 명으로 꾸려져 있으며 예닐곱 명이 한 조로 24시간 3교대로 황씨를 밀착 경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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