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란치 ‘영욕의 올림픽 역사 뒤로’

입력 2010.04.21 (21:42) 수정 2010.04.2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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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89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올림픽을 세계 최대의 스포츠 행사로 끌어올린 공적과 지나친 상업화와 독선적인 운영으로 `IOC 마피아'를 양성했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스페인의 초대 러시아 대사 출신인 그는 1980년 제7대 IOC 위원장으로 선출된 뒤 2001년 현재 자크 로게 위원장에게 대권을 넘겨 줄 때 까지 21년간 국제 스포츠계를 쥐락펴락했다.



사마란치가 처음 IOC 수장에 오를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적자 투성이 대회였고, IOC는 파산 직전이었다.



더욱이 그가 취임 직후 열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 간 동서 진영의 냉전으로 인해 차례로 반쪽짜리 대회가 되면서 올림픽의 존립 기반마저 위협받았다.



그러나 사마란치는 동서 진영 모두가 참가한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세계적인 화합을 이끌어내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프로 선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올림픽을 명실공히 세계 최대 스포츠 행사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1985년 처음 스폰서십 프로그램을 도입해 수백만달러의 협찬금을 걷어들이는데 성공화면서 올림픽을 단숨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모시켰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거치면서 절묘한 협상술을 발휘한 사마란치는 올림픽 중계권료도 천문학적으로 키우면서 현재의 IOC를 만들었다.



사마란치가 IOC를 이끌면서 각국은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국가 원수까지 동원하는 등 국력을 기울이게 됐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마란치는 1999년 IOC의 100년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사건으로 기록된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에 휘말려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가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IOC 위원을 포함한 수뇌부에 막대한 뇌물을 뿌렸다는 마르크 호들러 위원의 폭로로 불거진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인해 IOC 위원 6명이 축출되고 4명이 사임했으며 사마란치도 도덕성에도 치명상을 입었다.



종신 IOC 위원장으로 여겨졌던 사마란치는 결국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인해 IOC 위원들의 임기를 70세 등으로 제한했으며 그 역시 2001년 권좌를 떠났다.



사마란치에 이어 IOC 수장에 오른 자크 로게 위원장은 '부패한 권력자'라는 이미지가 덧칠된 사마란치와 차별화하려고 아예 자신을 '미스터 클린'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IOC 역사상 가장 활발한 정책을 펼쳤던 위원장으로 평가되는 사마란치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는 사마란치의 공이 컸다.



'바덴바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서 초반 열세를 딛고 한국이 개최권을 따올 수 있었던 것은 사마란치의 적극적인 지원 덕이었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사마란치 당시 위원장이 '쎄울, 꼬레아'라며 서울이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장면은 아직도 한국민의 기억에 생생하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데도 힘을 보탠 사마란치 위원장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남북한이 분단 이후 처음 개회식 공동입장을 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사마란치가 대표적인 친한(親韓)인사가 됐던 것은 김운용 IOC 전 부위원장과 각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IOC 중계권료 협상과 스폰서십 유치 등 IOC 재정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김운용 전 부위원장은 2001년까지 막역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사마란치는 2001년 후임 위원장을 뽑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로게위원장의 손을 들어줬고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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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란치 ‘영욕의 올림픽 역사 뒤로’
    • 입력 2010-04-21 21:42:06
    • 수정2010-04-21 21:50:06
    연합뉴스
 21일 89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올림픽을 세계 최대의 스포츠 행사로 끌어올린 공적과 지나친 상업화와 독선적인 운영으로 `IOC 마피아'를 양성했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스페인의 초대 러시아 대사 출신인 그는 1980년 제7대 IOC 위원장으로 선출된 뒤 2001년 현재 자크 로게 위원장에게 대권을 넘겨 줄 때 까지 21년간 국제 스포츠계를 쥐락펴락했다.

사마란치가 처음 IOC 수장에 오를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적자 투성이 대회였고, IOC는 파산 직전이었다.

더욱이 그가 취임 직후 열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 간 동서 진영의 냉전으로 인해 차례로 반쪽짜리 대회가 되면서 올림픽의 존립 기반마저 위협받았다.

그러나 사마란치는 동서 진영 모두가 참가한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세계적인 화합을 이끌어내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프로 선수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올림픽을 명실공히 세계 최대 스포츠 행사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1985년 처음 스폰서십 프로그램을 도입해 수백만달러의 협찬금을 걷어들이는데 성공화면서 올림픽을 단숨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변모시켰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거치면서 절묘한 협상술을 발휘한 사마란치는 올림픽 중계권료도 천문학적으로 키우면서 현재의 IOC를 만들었다.

사마란치가 IOC를 이끌면서 각국은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국가 원수까지 동원하는 등 국력을 기울이게 됐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마란치는 1999년 IOC의 100년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사건으로 기록된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에 휘말려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가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IOC 위원을 포함한 수뇌부에 막대한 뇌물을 뿌렸다는 마르크 호들러 위원의 폭로로 불거진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인해 IOC 위원 6명이 축출되고 4명이 사임했으며 사마란치도 도덕성에도 치명상을 입었다.

종신 IOC 위원장으로 여겨졌던 사마란치는 결국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인해 IOC 위원들의 임기를 70세 등으로 제한했으며 그 역시 2001년 권좌를 떠났다.

사마란치에 이어 IOC 수장에 오른 자크 로게 위원장은 '부패한 권력자'라는 이미지가 덧칠된 사마란치와 차별화하려고 아예 자신을 '미스터 클린'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IOC 역사상 가장 활발한 정책을 펼쳤던 위원장으로 평가되는 사마란치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는 사마란치의 공이 컸다.

'바덴바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서 초반 열세를 딛고 한국이 개최권을 따올 수 있었던 것은 사마란치의 적극적인 지원 덕이었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사마란치 당시 위원장이 '쎄울, 꼬레아'라며 서울이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장면은 아직도 한국민의 기억에 생생하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데도 힘을 보탠 사마란치 위원장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남북한이 분단 이후 처음 개회식 공동입장을 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사마란치가 대표적인 친한(親韓)인사가 됐던 것은 김운용 IOC 전 부위원장과 각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IOC 중계권료 협상과 스폰서십 유치 등 IOC 재정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김운용 전 부위원장은 2001년까지 막역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사마란치는 2001년 후임 위원장을 뽑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로게위원장의 손을 들어줬고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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