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차기, ‘영웅’ 혹은 ‘역적’ 드라마

입력 2010.05.2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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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7억명의 시선 속에 11m 거리를 두고 마주선 두 사람. 압박감에 목이 조여온다. 실패하면 온 나라가 절망에 빠지겠지. 그리고 평생 따라다닐 그 말, "그때 골이 들어갔다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운명의 순간'이 있다면 바로 월드컵 축구 본선의 승부차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복권 추첨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지만 축구 정규경기 전후반 90분과 연장전 30분에서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으면 승부차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세계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인 월드컵에 출전하는 팀이 승부차기라는 `궁극의 담력 테스트'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내달 11일 시작되는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출전팀이 결승에 오르기까지 승부차기를 거쳐야 할 확률이 50%를 넘는다고 추산했다.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수많은 강팀의 운명도 승부차기에서 엇갈렸다. 팀 연승을 견인하며 영웅 대접을 받던 스타 선수도 승부차기 실축 한번으로 흠집 하나 없던 경력에 결정적인 상처를 남겼다.

◇`영웅에서 역적으로'..승부차기 실축의 역사

월드컵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부차기 실축 장면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 이탈리아-브라질경기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팀 연승을 이끌었던 로베르토 바조는 승부차기 실축으로 `역적'으로 몰렸던 당시를 `축구 인생 최악의 순간'으로 회상했다.

바조는 "그 후유증이 몇년이나 계속됐는데 아직도 가끔 그때 꿈을 꿀 정도"라며 "내 인생에서 단 한순간을 지울 수 있다면 1994년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를 꼽고 싶다"라고 진저리를 쳤다.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피어스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는 독일(당시 서독)과 맞붙었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에서 승부차기에 실패해 분루를 삼켰다.

피어스는 "승부차기에 실패하고 센터서클로 걸어오는 짧은 순간이 악몽처럼 느껴지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당시 심정을 밝힌 바 있다.

축구 팬들의 기억에 남은 실축 사례는 손에 꼽지만, 생각보다 월드컵 승부차기의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처음 도입된 이후 7차례 대회의 본선 토너먼트에서 모두 20경기에 적용, 총 186번의 승부차기 킥이 시도됐으나 30%인 56개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 `승부차기 최우등', 영국 `낙제생'

월드컵 승부차기 성공률은 국가별로 편차가 크다.

독일은 4차례의 월드컵 토너먼트 승부차기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승부차기 최강팀'이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때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 수비수 울리 슈틸리케의 킥이 막힌 이후로는 실축한 사례가 없어 성공률도 94%에 이른다.

아르헨티나도 승부차기에 강하다. 1990년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8강전과 이탈리아와의 준결승, 1998년 잉글랜드와의 16강전을 모두 승부차기로 이겼다.

아르헨티나가 승부차기에서 패한 것은 2006년 독일과 맞붙은 8강전 뿐이다.

반면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는 최약체로 꼽힌다.

1990년 서독과의 준결승과 1998년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2006년 포르투갈과의 8강전 등 모두 3차례의 승부차기에서 모두 실패했다. 성공률도 14차례 가운데 7번이 실패로 50%에 머물러 있다.

이탈리아는 1990년 이후 세 차례 승부차기에서 연달아 패했지만 2006년 월드컵 결승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부차기승을 거둬 그간의 설움을 씻었다.

스페인은 3번 승부차기에서 1번 이겼고 멕시코와 루마니아는 2패,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1패를 기록중이다.

◇승부차기 열쇠 `심리적 압박을 견뎌라'

많은 전문가는 승부차기를 고도의 심리전으로 보고 있다.

승부차기 승리팀 중 60%가 먼저 시도한 팀이라는 사실 등에서 볼 수 있듯 운이나 확률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선수들이 압박감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성공이 달렸다는 것이다.

영국 롱버로대에서 축구심리를 연구하는 매트 패인 연구원은 "승부차기가 팀이나 경기 수준과 직결되지는 않지만 고도의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느냐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운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승부차기를 연구하는 가이르 요르대(Geir Jordet) 노르웨이 오슬로대 스포츠과학과 교수도 "승부차기는 테크닉이나 기술보다는 숨막히는 긴장감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린 심리전"이라며 "특히 처음 시도하는 1~3명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스타 선수일수록 이러한 심리적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며 "프로팀에서 성공을 거둔 인기 높은 선수일수록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비운의 스트라이커' 바조 역시 승부차기에 임하는 기본자세는 `용기'라고 강조한다.

그는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승부차기라는) 막중한 책임 앞에서 도망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실축도 그 책임을 견뎌낼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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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부차기, ‘영웅’ 혹은 ‘역적’ 드라마
    • 입력 2010-05-27 16:05:08
    연합뉴스
전세계 7억명의 시선 속에 11m 거리를 두고 마주선 두 사람. 압박감에 목이 조여온다. 실패하면 온 나라가 절망에 빠지겠지. 그리고 평생 따라다닐 그 말, "그때 골이 들어갔다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운명의 순간'이 있다면 바로 월드컵 축구 본선의 승부차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복권 추첨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지만 축구 정규경기 전후반 90분과 연장전 30분에서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으면 승부차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세계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인 월드컵에 출전하는 팀이 승부차기라는 `궁극의 담력 테스트'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내달 11일 시작되는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출전팀이 결승에 오르기까지 승부차기를 거쳐야 할 확률이 50%를 넘는다고 추산했다.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수많은 강팀의 운명도 승부차기에서 엇갈렸다. 팀 연승을 견인하며 영웅 대접을 받던 스타 선수도 승부차기 실축 한번으로 흠집 하나 없던 경력에 결정적인 상처를 남겼다. ◇`영웅에서 역적으로'..승부차기 실축의 역사 월드컵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부차기 실축 장면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 이탈리아-브라질경기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팀 연승을 이끌었던 로베르토 바조는 승부차기 실축으로 `역적'으로 몰렸던 당시를 `축구 인생 최악의 순간'으로 회상했다. 바조는 "그 후유증이 몇년이나 계속됐는데 아직도 가끔 그때 꿈을 꿀 정도"라며 "내 인생에서 단 한순간을 지울 수 있다면 1994년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를 꼽고 싶다"라고 진저리를 쳤다.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피어스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는 독일(당시 서독)과 맞붙었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에서 승부차기에 실패해 분루를 삼켰다. 피어스는 "승부차기에 실패하고 센터서클로 걸어오는 짧은 순간이 악몽처럼 느껴지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당시 심정을 밝힌 바 있다. 축구 팬들의 기억에 남은 실축 사례는 손에 꼽지만, 생각보다 월드컵 승부차기의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처음 도입된 이후 7차례 대회의 본선 토너먼트에서 모두 20경기에 적용, 총 186번의 승부차기 킥이 시도됐으나 30%인 56개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 `승부차기 최우등', 영국 `낙제생' 월드컵 승부차기 성공률은 국가별로 편차가 크다. 독일은 4차례의 월드컵 토너먼트 승부차기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승부차기 최강팀'이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때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 수비수 울리 슈틸리케의 킥이 막힌 이후로는 실축한 사례가 없어 성공률도 94%에 이른다. 아르헨티나도 승부차기에 강하다. 1990년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8강전과 이탈리아와의 준결승, 1998년 잉글랜드와의 16강전을 모두 승부차기로 이겼다. 아르헨티나가 승부차기에서 패한 것은 2006년 독일과 맞붙은 8강전 뿐이다. 반면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는 최약체로 꼽힌다. 1990년 서독과의 준결승과 1998년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2006년 포르투갈과의 8강전 등 모두 3차례의 승부차기에서 모두 실패했다. 성공률도 14차례 가운데 7번이 실패로 50%에 머물러 있다. 이탈리아는 1990년 이후 세 차례 승부차기에서 연달아 패했지만 2006년 월드컵 결승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부차기승을 거둬 그간의 설움을 씻었다. 스페인은 3번 승부차기에서 1번 이겼고 멕시코와 루마니아는 2패,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1패를 기록중이다. ◇승부차기 열쇠 `심리적 압박을 견뎌라' 많은 전문가는 승부차기를 고도의 심리전으로 보고 있다. 승부차기 승리팀 중 60%가 먼저 시도한 팀이라는 사실 등에서 볼 수 있듯 운이나 확률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선수들이 압박감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성공이 달렸다는 것이다. 영국 롱버로대에서 축구심리를 연구하는 매트 패인 연구원은 "승부차기가 팀이나 경기 수준과 직결되지는 않지만 고도의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느냐를 시험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운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승부차기를 연구하는 가이르 요르대(Geir Jordet) 노르웨이 오슬로대 스포츠과학과 교수도 "승부차기는 테크닉이나 기술보다는 숨막히는 긴장감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린 심리전"이라며 "특히 처음 시도하는 1~3명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스타 선수일수록 이러한 심리적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다"며 "프로팀에서 성공을 거둔 인기 높은 선수일수록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비운의 스트라이커' 바조 역시 승부차기에 임하는 기본자세는 `용기'라고 강조한다. 그는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승부차기라는) 막중한 책임 앞에서 도망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실축도 그 책임을 견뎌낼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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