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본문 영역

상세페이지

[6·25 특집] 병원선 ‘유틀란디아’의 기억
입력 2010.06.27 (00:36) 수정 2010.07.09 (17:48)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6.25 전쟁 때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한 나라가 16개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전투병력은 아니지만 의료진을 보내 국군과 유엔군을 도운 나라들도 있다구요?



네. 인도와 유럽 4개 나라인데요..덴마크도 그 중 하나입니다. 덴마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병원선을 보내 부상병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치료해주며 인도주의를 실현했다고 합니다.



덴마크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얘기를 임종빈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북유럽으로 가는 관문 구실을 하는 나라 덴마크는 우리에겐 성공한 낙농업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틀란드 반도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목에는 덴마크 제 2의 도시이자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 마을인 오덴세가 있습니다. 안데르센의 생가를 고쳐 만든 박물관은 소풍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늘 가득합니다.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노래를 하나만 불러 달라고 부탁해봤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녹취>노래:“그 때 한국에 전쟁이 있었지. ’유틀란디아’라는 이름의 배가 전쟁에 참여했어. 병원으로 쓰기 위해 항구를 나섰지.”



<녹취>오버랩(킴 라르센 뮤비):“헤이! 유틀란디아를 위해! 전쟁이 부르자 배는 떠났어. 그곳에는 사냥꾼들이 우글거렸지만 선원들은 바다에서 돌아왔지.”



1986년, 덴마크 가수 킴 라르센이 발표한 노래 유틀란디아.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인도주의 정신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킴 라르센은 이 곡으로 단번에 덴마크 국민가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덴마크에서는 거의 모든 학교에서 이 노래와 함께, 유틀란디아호의 역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인터뷰>아네메테 요은슨(교사):"일단 멜로디가 좋아서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때로 우리는 특별한 노래에 대해 가사에 얽힌 이야기를 배우기도 해요. 많은 학생들이 유틀란디아호의 역사를 알아요."



덴마크인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흔적을 찾아 덴마크 국영 방송사 DR을 찾았습니다. 취재진은 방송사의 옛 자료를 뒤져 당시 유틀란디아호에 탑승한 덴마크 종군 기자가 촬영한 필름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영하의 날씨 속에서 벌거벗은 승무원들이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칩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세례식입니다. 덴마크 적십자 단장이었던 카이 해머릭 함장과 187명의 민간인 승무원들이 병원선에 탑승합니다. 승무원과 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항구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손을 흔듭니다.



유엔 사령부가 있던 일본을 경유한 유틀란디아호는 45일 만에 부산에 도착해 곧바로 의료 지원 활동에 들어갑니다. 의약품 조달과 연합군 부상자의 본국 귀환을 위해 덴마크를 왕복하며 3차에 걸쳐 파견 임무를 무사히 완수합니다.



3차 파견 기간 동안에는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컬러 필름에 담았습니다. 나지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산 시가지. 군용 트럭과 갖가지 승용차, 달구지까지 한데 섞여 신작로를 분주히 오갑니다. 피난민들은 개울가에 움막을 지었고, 동네 빨래터는 아낙들로 넘쳐납니다. 부산 앞바다에 자맥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도 보이고 영도다리 앞에 펼쳐진 자갈치 시장의 옛 모습도 담겼습니다. 유틀란디아호의 승무원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였던 스벤 약트씨의 집. 현재 스벤씨를 비롯해 100여 명의 생존 승무원들이 전우회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는 유틀란디아호의 간호사였습니다.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이 때는 아직 아내가 아니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뒤에 1955년 결혼했죠."



<녹취>"다들 한꺼번에 오는구먼."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유틀란디아호 승무원들의 정기 모임이 있는 날. 혈기왕성했던 젊은 승무원들은 모두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보자 60년 전, 부산항에서 처음 본 한국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감상에 젖어드는 승무원들.



<인터뷰>벤트 보이센(유틀란디아호회계 감사원):"참 공손했어요. 실상 피난민이었고 혼란 속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친절하게 잘 대해줬어요."



당시 승무원들은 모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최정예 요원들이었습니다. 42명이 정원인 간호사 선발에, 몰려든 지원자는 4천여 명. 최고의 실력에 혈액형까지 고려해 선발했습니다.



<인터뷰>엘세 브래쉬(유틀란디아호 간호사):"우리는 다양한 혈액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언제든 수혈을 해줄 수 있었어요."



전쟁을 실감하게 해준 끔찍한 상황도 여러 차례 찾아왔습니다.



<인터뷰>클라우스 예슨(유틀란디아호 의사):“(환자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서 혈액을 18병 수혈했는데 수술대 위에서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북한 비행기가 창문을 열고 수류탄을 던져 미군 석유저장시설에 떨어뜨렸을 때는 다들 죽는 줄 알았어.”



전투가 치열해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간 부상자가 속출하자 해머릭 함장은 수공예업자였던 카이 씨에게 의수와 의족을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인터뷰>카이 윌렌도프(유틀란디아호수공예업자):“한꺼번에 무릎 아래가 없는 두 명에게 의족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걸 착용한걸 보니까 무척 보람을 느꼈지.”



모임이 시작된 지 벌써 55년째, 빛바랜 사진만큼이나 우정의 깊이도 점점 깊어갑니다. 전우들이 돌아간 뒤 스벤씨는 집안 곳곳에 전시해놓은 선물을 보여줍니다. 승무원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이 준 선물들입니다.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

“이건 김주완씨가 준 선물이에요. 배에서 치료를 받던 4명의 아이 중 한 명이었죠.”



한국인 김주완. 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병원선에서 치료를 받은 김주완씨는 아직도 인천에 살고 있었습니다. 1953년, 당시 15살이었던 김 씨는 열차에 치어 왼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인천의 한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치료비가 없었고, 병원 측도 수혈을 위한 혈액이 없다며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인터뷰>김주완(유틀란디아호 민간인 환자):"수술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라고 했는데 가면 죽으니까 응급실 밖에 누워있었던 거죠."



응급실 밖에 누워 다리에 피를 흘리며 점점 죽어가는 김 씨를 의료 지원을 나왔던 유틀란디아호 승무원 요한 프리스크씨가 발견합니다. 마침 둘은 혈액형이 같았습니다. 요한 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응급 수술을 받아 김 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뒤 병원선에서 김 씨는 두 차례나 수술을 더 받은 뒤 여섯 달 동안 치료받고 퇴원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김 씨는, 정확히 40년이 지난 1994년 덴마크를 찾아갔습니다. 병원선 환자 가운데 덴마크를 찾아온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김주완씨는 덴마크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요한 씨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김주완(유틀란디아호 민간인 환자):"당신을 다시 보기 위해서 40년 동안을 이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다, 내가 찾아올 때까지 살아있어줘서 고맙다 그런 얘길 했어요."



하지만 이듬해 요한 씨는 세상을 떠났고, 김 씨는 덴마크로 다시 건너가 그의 장례식에서 마지막 감사 인사를 올렸습니다.



북유럽의 전통적 중립국 덴마크. 그들은 왜 한국전쟁에 병원선을 파견했을까. 냉전 당시 구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유럽 국가들은 전쟁을 외면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는 달랐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이 군사 원조를 결의 했을 때, 덴마크는 가장 먼저 지원을 통보합니다.



제2 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국경을 넘었을 때. 덴마크는 저항할 힘이 없었고 독일군은 손쉽게 코펜하겐에 입성해 노르웨이를 침공할 길목을 열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자신들의 아픈 역사가 그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변방의 약소국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희생되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가까운 과거를 떠올렸다는 겁니다.



<인터뷰>크리스티네 밑고 (교수/’유틀란디아호의 탐험’ 저자):“남한은 덴마크처럼 매우 작은 나라였다는 사실이 외무부의 정책 결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부가 병원선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덴마크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동아시아 선박 회사가 선뜻 나섭니다. 유틀란디아호는 회사가 소유한 가장 큰 배였습니다. 동아시아 선박회사 산하 아시아 하우스 재단 건물에 있는 ’유틀란디아호의 방’ 당시 이 방은 유틀란디아호를 국가에 대여하기로 결정했던 이사 회장이었습니다.



<인터뷰>장 엘룬트(아시아 하우스 재단 이사장):"유틀란디아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뉴욕을 향하고 있던 유틀란디아호는 자신이 태어났던 덴마크 낙스코우 조선소를 향해 급히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평범한 여객선이었던 유틀란디아호는 이 낙스코우 조선소에서 수리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병원선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낙스코우 조선소는 문을 닫았지만, 그 자리에 세워진 해양 박물관에서 유틀란디아호의 옛 모습을 모형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술실 4곳과 356개의 병상, 치과 수술대와 X선 장비까지 갖춘 해상 종합 병원의 모습입니다.



<녹취>헤세 엑스트롬(낙스코우 해양박물관 관리인):"여기가 화물칸이에요. 병실로 사용했죠."



녹색 선을 칠했던 군용 병원선과는 달리, 적십자 소속 민간선이라는 뜻으로, 빨간 선을 칠했습니다. 세 번째 파견 기간에는 전선 깊숙이 들어가 응급 환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전용 헬기장도 설치했습니다.



<인터뷰>헤세 엑스트롬(낙스코우 해양박물관 관리인):“낙스코우 조선소가 유틀란디아호의 고향이라서 설계도 같은 것들이 다 있으니까, 개조가 빨리 됐죠.”



천장이 높은 병실과 덴마크의 높은 의료 수준 때문에 유틀란디아호는 부상병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5천 명 가까운 군인들이 치료를 받았고, 29명만이 선상에서 숨졌습니다.



<인터뷰>피터 프레데릭슨(’유틀란디아호, 한국전쟁에 참여한 덴마크’ 저자):"유틀란디아호에는 덴마크 최고의 의료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때, 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덴마크 적십자 단장이자, 해군소속이었던 해머릭 함장을 제외한 나머지 187명의 승무원들은 전부 군인이 아닌 민간인었습니다.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한에는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고, 그나마 군인들로 가득 차 민간인들은 다쳐도 치료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한국인들, 또 수많은 전쟁고아들은 승무원들이 배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인터뷰>엘세 브래쉬(유틀란디아호간호사):"배에서 내리면 아이들이 이것저것 달라고, 사탕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너무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의료진은 적십자정신에 따라 민간인까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들의 치료에 방해가 된다며 유엔 사령부는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해머릭 함장이 거듭 설득한 끝에 군인들이 타면 병실을 비워주는 조건으로 파견 4개월 만에 민간인 치료가 시작됩니다. 병원선 안에는 전쟁고아들을 위한 어린이 전용 선실도 설치됐고, 정규 학교 교육까지 이뤄졌습니다. 치료받은 민간인은 군인보다 많은 6000여명. 하지만 유엔에 보고하지 않고 승무원들이 몰래 치료한 민간인들이 만 8천명에 이를 것이란 관측도 있습니다.



<인터뷰>피터 프레데릭슨(’유틀란디아호, 한국전쟁에 참여한 덴마크’ 저자):"함장이 강력하게 건의했습니다. 우리는 빈 침대가 있다고. 시민들을 배에 오르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료지원을 계속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부탁을 받고, 유틀란디아호의 의료진 일부는 한국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녹취>키테 예슨 (유틀란디아호간호사):“(한국에서 태어난 아들이)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말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먼저 한국말로 ’엄마, 아버지’라고 하더군요.”



1958년, 이들은 야전병원을 운영했던 노르웨이, 스웨덴 의료진과 함께 한국에 국립의료원을 세웠습니다. 당시 그들 나라에서는 장관급이었던 종합 병원의 주임 교수들이 파견됐고, 병원 규모는 동양 최대였습니다. 의사, 간호사들의 교육은 물론, 의약품 제조 방법까지 전수했습니다. 10년 뒤인 1968년 한국의 의료 수준이 향상되자 국립 의료원을 한국 정부에 기증한 뒤 의료진은 돌아갑니다.



<인터뷰>이홍순( 립중앙의료원 부원장):"선진 의학을 전파했죠, 의사도 양성하고 간호사도 가르치고, 의약품 제조방법까지 모든 걸 다 가르쳐 줬어요."



1953년 10월 16일. 모든 임무를 마친 유틀란디아호는 코펜하겐 항구로 돌아옵니다. 유틀란디아호가 떠나던 날처럼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머나먼 동아시아 땅에서 돌아온 병원선과 승무원들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유일한 민간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미지의 세계 한국으로 떠났던 200여 명의 승무원들은 3년에 걸친 탐험을 마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유틀란디아호가 긴 여정을 시작했던 코펜하겐 항구. 1964년 12월 19일, 스벤 씨 부부는 유틀란디아호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여객선으로 다시 개조해 덴마크와 태국 방콕 항로에 투입됐던 유틀란디아호는 수명을 다하고 해체되기 위해 스페인 빌 바오로 떠났습니다.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수석 엔지니어):"유틀란디아와 작별인사를 할 때 아내와 나는 울었어요. 유틀란디아는 바로, 바로 여기 닻을 내리고 있었고요."



지금은 그들의 추억을 새겨 넣은 기념비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보내온 화강암에 승무원들이 직접 글씨를 새겨 넣어 만든 것입니다.



참혹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덴마크 인들의 평화와 박애 정신을 전파했던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함께 나눴던 한국인들에게 승무원들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녹취>카이 윌렌도프(수공예업자):“이 많은 환자들의 운명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녹취>스벤 약트(수석 엔지니어):“유틀란디아호는 한국과 덴마크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녹취>아이비 바이스(해머릭 함장 비서):"한국 사람들이 우릴 대하는 태도는 너무 감동적입니다. 우린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말이죠."
  • [6·25 특집] 병원선 ‘유틀란디아’의 기억
    • 입력 2010-06-27 00:36:34
    • 수정2010-07-09 17:48:40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6.25 전쟁 때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한 나라가 16개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전투병력은 아니지만 의료진을 보내 국군과 유엔군을 도운 나라들도 있다구요?



네. 인도와 유럽 4개 나라인데요..덴마크도 그 중 하나입니다. 덴마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병원선을 보내 부상병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치료해주며 인도주의를 실현했다고 합니다.



덴마크의 자존심으로 남아있는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얘기를 임종빈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북유럽으로 가는 관문 구실을 하는 나라 덴마크는 우리에겐 성공한 낙농업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틀란드 반도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목에는 덴마크 제 2의 도시이자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 마을인 오덴세가 있습니다. 안데르센의 생가를 고쳐 만든 박물관은 소풍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늘 가득합니다.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노래를 하나만 불러 달라고 부탁해봤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녹취>노래:“그 때 한국에 전쟁이 있었지. ’유틀란디아’라는 이름의 배가 전쟁에 참여했어. 병원으로 쓰기 위해 항구를 나섰지.”



<녹취>오버랩(킴 라르센 뮤비):“헤이! 유틀란디아를 위해! 전쟁이 부르자 배는 떠났어. 그곳에는 사냥꾼들이 우글거렸지만 선원들은 바다에서 돌아왔지.”



1986년, 덴마크 가수 킴 라르센이 발표한 노래 유틀란디아.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인도주의 정신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킴 라르센은 이 곡으로 단번에 덴마크 국민가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덴마크에서는 거의 모든 학교에서 이 노래와 함께, 유틀란디아호의 역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인터뷰>아네메테 요은슨(교사):"일단 멜로디가 좋아서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때로 우리는 특별한 노래에 대해 가사에 얽힌 이야기를 배우기도 해요. 많은 학생들이 유틀란디아호의 역사를 알아요."



덴마크인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흔적을 찾아 덴마크 국영 방송사 DR을 찾았습니다. 취재진은 방송사의 옛 자료를 뒤져 당시 유틀란디아호에 탑승한 덴마크 종군 기자가 촬영한 필름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영하의 날씨 속에서 벌거벗은 승무원들이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칩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세례식입니다. 덴마크 적십자 단장이었던 카이 해머릭 함장과 187명의 민간인 승무원들이 병원선에 탑승합니다. 승무원과 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항구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손을 흔듭니다.



유엔 사령부가 있던 일본을 경유한 유틀란디아호는 45일 만에 부산에 도착해 곧바로 의료 지원 활동에 들어갑니다. 의약품 조달과 연합군 부상자의 본국 귀환을 위해 덴마크를 왕복하며 3차에 걸쳐 파견 임무를 무사히 완수합니다.



3차 파견 기간 동안에는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컬러 필름에 담았습니다. 나지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산 시가지. 군용 트럭과 갖가지 승용차, 달구지까지 한데 섞여 신작로를 분주히 오갑니다. 피난민들은 개울가에 움막을 지었고, 동네 빨래터는 아낙들로 넘쳐납니다. 부산 앞바다에 자맥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도 보이고 영도다리 앞에 펼쳐진 자갈치 시장의 옛 모습도 담겼습니다. 유틀란디아호의 승무원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였던 스벤 약트씨의 집. 현재 스벤씨를 비롯해 100여 명의 생존 승무원들이 전우회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는 유틀란디아호의 간호사였습니다.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이 때는 아직 아내가 아니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뒤에 1955년 결혼했죠."



<녹취>"다들 한꺼번에 오는구먼."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유틀란디아호 승무원들의 정기 모임이 있는 날. 혈기왕성했던 젊은 승무원들은 모두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보자 60년 전, 부산항에서 처음 본 한국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감상에 젖어드는 승무원들.



<인터뷰>벤트 보이센(유틀란디아호회계 감사원):"참 공손했어요. 실상 피난민이었고 혼란 속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친절하게 잘 대해줬어요."



당시 승무원들은 모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최정예 요원들이었습니다. 42명이 정원인 간호사 선발에, 몰려든 지원자는 4천여 명. 최고의 실력에 혈액형까지 고려해 선발했습니다.



<인터뷰>엘세 브래쉬(유틀란디아호 간호사):"우리는 다양한 혈액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언제든 수혈을 해줄 수 있었어요."



전쟁을 실감하게 해준 끔찍한 상황도 여러 차례 찾아왔습니다.



<인터뷰>클라우스 예슨(유틀란디아호 의사):“(환자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서 혈액을 18병 수혈했는데 수술대 위에서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북한 비행기가 창문을 열고 수류탄을 던져 미군 석유저장시설에 떨어뜨렸을 때는 다들 죽는 줄 알았어.”



전투가 치열해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간 부상자가 속출하자 해머릭 함장은 수공예업자였던 카이 씨에게 의수와 의족을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인터뷰>카이 윌렌도프(유틀란디아호수공예업자):“한꺼번에 무릎 아래가 없는 두 명에게 의족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걸 착용한걸 보니까 무척 보람을 느꼈지.”



모임이 시작된 지 벌써 55년째, 빛바랜 사진만큼이나 우정의 깊이도 점점 깊어갑니다. 전우들이 돌아간 뒤 스벤씨는 집안 곳곳에 전시해놓은 선물을 보여줍니다. 승무원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이 준 선물들입니다.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 수석 엔지니어

“이건 김주완씨가 준 선물이에요. 배에서 치료를 받던 4명의 아이 중 한 명이었죠.”



한국인 김주완. 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병원선에서 치료를 받은 김주완씨는 아직도 인천에 살고 있었습니다. 1953년, 당시 15살이었던 김 씨는 열차에 치어 왼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인천의 한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치료비가 없었고, 병원 측도 수혈을 위한 혈액이 없다며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인터뷰>김주완(유틀란디아호 민간인 환자):"수술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라고 했는데 가면 죽으니까 응급실 밖에 누워있었던 거죠."



응급실 밖에 누워 다리에 피를 흘리며 점점 죽어가는 김 씨를 의료 지원을 나왔던 유틀란디아호 승무원 요한 프리스크씨가 발견합니다. 마침 둘은 혈액형이 같았습니다. 요한 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응급 수술을 받아 김 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뒤 병원선에서 김 씨는 두 차례나 수술을 더 받은 뒤 여섯 달 동안 치료받고 퇴원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김 씨는, 정확히 40년이 지난 1994년 덴마크를 찾아갔습니다. 병원선 환자 가운데 덴마크를 찾아온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김주완씨는 덴마크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요한 씨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김주완(유틀란디아호 민간인 환자):"당신을 다시 보기 위해서 40년 동안을 이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다, 내가 찾아올 때까지 살아있어줘서 고맙다 그런 얘길 했어요."



하지만 이듬해 요한 씨는 세상을 떠났고, 김 씨는 덴마크로 다시 건너가 그의 장례식에서 마지막 감사 인사를 올렸습니다.



북유럽의 전통적 중립국 덴마크. 그들은 왜 한국전쟁에 병원선을 파견했을까. 냉전 당시 구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유럽 국가들은 전쟁을 외면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는 달랐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이 군사 원조를 결의 했을 때, 덴마크는 가장 먼저 지원을 통보합니다.



제2 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국경을 넘었을 때. 덴마크는 저항할 힘이 없었고 독일군은 손쉽게 코펜하겐에 입성해 노르웨이를 침공할 길목을 열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자신들의 아픈 역사가 그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변방의 약소국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희생되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가까운 과거를 떠올렸다는 겁니다.



<인터뷰>크리스티네 밑고 (교수/’유틀란디아호의 탐험’ 저자):“남한은 덴마크처럼 매우 작은 나라였다는 사실이 외무부의 정책 결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부가 병원선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덴마크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동아시아 선박 회사가 선뜻 나섭니다. 유틀란디아호는 회사가 소유한 가장 큰 배였습니다. 동아시아 선박회사 산하 아시아 하우스 재단 건물에 있는 ’유틀란디아호의 방’ 당시 이 방은 유틀란디아호를 국가에 대여하기로 결정했던 이사 회장이었습니다.



<인터뷰>장 엘룬트(아시아 하우스 재단 이사장):"유틀란디아호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뉴욕을 향하고 있던 유틀란디아호는 자신이 태어났던 덴마크 낙스코우 조선소를 향해 급히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평범한 여객선이었던 유틀란디아호는 이 낙스코우 조선소에서 수리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병원선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낙스코우 조선소는 문을 닫았지만, 그 자리에 세워진 해양 박물관에서 유틀란디아호의 옛 모습을 모형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술실 4곳과 356개의 병상, 치과 수술대와 X선 장비까지 갖춘 해상 종합 병원의 모습입니다.



<녹취>헤세 엑스트롬(낙스코우 해양박물관 관리인):"여기가 화물칸이에요. 병실로 사용했죠."



녹색 선을 칠했던 군용 병원선과는 달리, 적십자 소속 민간선이라는 뜻으로, 빨간 선을 칠했습니다. 세 번째 파견 기간에는 전선 깊숙이 들어가 응급 환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전용 헬기장도 설치했습니다.



<인터뷰>헤세 엑스트롬(낙스코우 해양박물관 관리인):“낙스코우 조선소가 유틀란디아호의 고향이라서 설계도 같은 것들이 다 있으니까, 개조가 빨리 됐죠.”



천장이 높은 병실과 덴마크의 높은 의료 수준 때문에 유틀란디아호는 부상병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5천 명 가까운 군인들이 치료를 받았고, 29명만이 선상에서 숨졌습니다.



<인터뷰>피터 프레데릭슨(’유틀란디아호, 한국전쟁에 참여한 덴마크’ 저자):"유틀란디아호에는 덴마크 최고의 의료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때, 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덴마크 적십자 단장이자, 해군소속이었던 해머릭 함장을 제외한 나머지 187명의 승무원들은 전부 군인이 아닌 민간인었습니다.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한에는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고, 그나마 군인들로 가득 차 민간인들은 다쳐도 치료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한국인들, 또 수많은 전쟁고아들은 승무원들이 배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인터뷰>엘세 브래쉬(유틀란디아호간호사):"배에서 내리면 아이들이 이것저것 달라고, 사탕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너무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의료진은 적십자정신에 따라 민간인까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들의 치료에 방해가 된다며 유엔 사령부는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해머릭 함장이 거듭 설득한 끝에 군인들이 타면 병실을 비워주는 조건으로 파견 4개월 만에 민간인 치료가 시작됩니다. 병원선 안에는 전쟁고아들을 위한 어린이 전용 선실도 설치됐고, 정규 학교 교육까지 이뤄졌습니다. 치료받은 민간인은 군인보다 많은 6000여명. 하지만 유엔에 보고하지 않고 승무원들이 몰래 치료한 민간인들이 만 8천명에 이를 것이란 관측도 있습니다.



<인터뷰>피터 프레데릭슨(’유틀란디아호, 한국전쟁에 참여한 덴마크’ 저자):"함장이 강력하게 건의했습니다. 우리는 빈 침대가 있다고. 시민들을 배에 오르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료지원을 계속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부탁을 받고, 유틀란디아호의 의료진 일부는 한국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녹취>키테 예슨 (유틀란디아호간호사):“(한국에서 태어난 아들이)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말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먼저 한국말로 ’엄마, 아버지’라고 하더군요.”



1958년, 이들은 야전병원을 운영했던 노르웨이, 스웨덴 의료진과 함께 한국에 국립의료원을 세웠습니다. 당시 그들 나라에서는 장관급이었던 종합 병원의 주임 교수들이 파견됐고, 병원 규모는 동양 최대였습니다. 의사, 간호사들의 교육은 물론, 의약품 제조 방법까지 전수했습니다. 10년 뒤인 1968년 한국의 의료 수준이 향상되자 국립 의료원을 한국 정부에 기증한 뒤 의료진은 돌아갑니다.



<인터뷰>이홍순( 립중앙의료원 부원장):"선진 의학을 전파했죠, 의사도 양성하고 간호사도 가르치고, 의약품 제조방법까지 모든 걸 다 가르쳐 줬어요."



1953년 10월 16일. 모든 임무를 마친 유틀란디아호는 코펜하겐 항구로 돌아옵니다. 유틀란디아호가 떠나던 날처럼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머나먼 동아시아 땅에서 돌아온 병원선과 승무원들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유일한 민간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미지의 세계 한국으로 떠났던 200여 명의 승무원들은 3년에 걸친 탐험을 마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유틀란디아호가 긴 여정을 시작했던 코펜하겐 항구. 1964년 12월 19일, 스벤 씨 부부는 유틀란디아호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여객선으로 다시 개조해 덴마크와 태국 방콕 항로에 투입됐던 유틀란디아호는 수명을 다하고 해체되기 위해 스페인 빌 바오로 떠났습니다.



<인터뷰>스벤 약트(유틀란디아호수석 엔지니어):"유틀란디아와 작별인사를 할 때 아내와 나는 울었어요. 유틀란디아는 바로, 바로 여기 닻을 내리고 있었고요."



지금은 그들의 추억을 새겨 넣은 기념비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보내온 화강암에 승무원들이 직접 글씨를 새겨 넣어 만든 것입니다.



참혹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덴마크 인들의 평화와 박애 정신을 전파했던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함께 나눴던 한국인들에게 승무원들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녹취>카이 윌렌도프(수공예업자):“이 많은 환자들의 운명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녹취>스벤 약트(수석 엔지니어):“유틀란디아호는 한국과 덴마크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녹취>아이비 바이스(해머릭 함장 비서):"한국 사람들이 우릴 대하는 태도는 너무 감동적입니다. 우린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말이죠."
kbs가 손수 골랐습니다. 네이버에서도 보세요.
특파원 현장보고 전체보기
기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