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집단 벗어버렸다…거리응원의 ‘진화’

입력 2010.06.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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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민족주의 퇴조…자발·개인성 어우러진 축제
뒷풀이 대신 자발적 청소…상업성 개입은 옥의 티

한국 축구대표팀이 첫 원정 16강의 성과를 일궈낸 이번 월드컵 기간에도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했다.

주요 거리응원장에 수만명이 운집해 자유롭고 다이내믹하게 붉은 함성을 토해내는 현장은 외신을 통해 지구촌 곳곳에 전파될 정도로 한국 고유의 문화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장맛비가 쏟아져도, 꼭두새벽에 경기가 열려도 어김없이 거리를 가득 메운 `대~한민국' 외침은 비장함마저 느껴졌던 예전 대회에 비해 한결 여유롭게 들렸다.

경기장에서 게임을 치르는 선수들이 게임 자체를 즐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처럼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도 경기와 응원을 동시에 즐기려는 여유가 돋보였다.

여기엔 이념이나 집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 마디로 모든 걸 `즐기겠다'는 축제의 한 마당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광장과 영동대로, 상암월드컵경기장 등 주요 응원장소에서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며 선수들의 실력 만큼이나 성숙해진 시민의식도 과시했다.

◇자유롭게 즐기는 축제로 변모 =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에 개최국의 의무감과 자존심이 한 몫을 했다면 이제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경기를 즐기는 하나의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시대에 맞게 응원문화도 진화했다는 것이다. 자발성과 개인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응원문화가 이동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로 축구팬들은 북한의 정대세 선수에게 `인민루니'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친근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한국 대표팀이 16강전에서 떨어지자 `영원한 라이벌'로 꼽히는 일본의 선전을 기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념이나 집단에 구애받지 않는 10~20대가 응원문화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경직된 민족주의의 색깔이 옅어지고 애국심마저도 `즐기는 대상'이 됐다는 것이 이번 월드컵 응원문화의 특징이다.

고려대 사회학과 박길성 교수는 "2002년에는 한국이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많이 작용했고 국내 현안과도 관련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직된 분위기 없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확산했다"며 "경험이 쌓이면서 응원문화가 진화한 셈"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2002년 월드컵은 외환위기에서 막 벗어난 시기에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였고 응원문화의 코드는 애국주의였다"며 "거리응원을 주도하는 세대가 바뀌면서 올해는 응원문화가 자발성과 개인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도 "2002년 월드컵은 열등감에 기초한 스포츠민족주의가 한번에 폭발하는 계기였다"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던 8년 전과 달리 거리응원은 이제 익숙해졌고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는 덜 심각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월드컵으로 재미를 보려는 대기업이 너도나도 거리응원의 주도권을 잡겠다고 나서면서 애초의 자율성을 해치고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정희준 교수는 "2002년에는 서로를 광장으로 불러내면서 자발적인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이제는 재벌들이 광장에서 호객행위를 하며 끌어내는 셈"이라며 "태극기 광고를 내보내며 애국하는 기업인척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애국심이자 상업적 민족주의"라고 비판했다.

◇`친환경 응원'…시민의식도 업그레이드 =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열린 23일 새벽 서울광장.

밤샘 응원전을 벌인 시민은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껏 즐길만도 했지만 예상과 달리 뒷풀이는 `청소'로 시작됐다.

약속이나 한 듯 미리 준비해온 비닐봉투를 꺼내 주변의 쓰레기를 주워담았고, 몇몇 시민은 수거차량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량에 옮겨싣기도 했다.

이날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세종로ㆍ태평로 등 도심에 7만여명이 운집했고 쓰레기가 60t이나 나왔지만 평소의 모습을 되찾는 데는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경기가 출근시간 직전에 끝나 교통대란이 예상됐지만 주변 도로는 30여 분만에 차량 통행이 재개됐고 인근 지하철에서도 큰 혼잡은 빚어지지 않았다.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매번 응원 장소를 자발적으로 말끔히 치워 시민의식 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과시했다.

응원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난 붉은악마도 경기 시작 전 붉은색 쓰레기봉투를 나눠주며 `친환경 응원'에 힘을 보탰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토고를 꺾고 원정 첫 승리를 거둘 당시 도로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흥분한 일부 시민이 지나가는 차량에 올라타거나 폭죽을 쏘아 올려 상가 건물에 불이 나는 등 서울시내가 아수라장이 됐던 것에 비하면 시민의식이 한층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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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념·집단 벗어버렸다…거리응원의 ‘진화’
    • 입력 2010-06-28 16:43:18
    연합뉴스
애국·민족주의 퇴조…자발·개인성 어우러진 축제 뒷풀이 대신 자발적 청소…상업성 개입은 옥의 티 한국 축구대표팀이 첫 원정 16강의 성과를 일궈낸 이번 월드컵 기간에도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했다. 주요 거리응원장에 수만명이 운집해 자유롭고 다이내믹하게 붉은 함성을 토해내는 현장은 외신을 통해 지구촌 곳곳에 전파될 정도로 한국 고유의 문화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장맛비가 쏟아져도, 꼭두새벽에 경기가 열려도 어김없이 거리를 가득 메운 `대~한민국' 외침은 비장함마저 느껴졌던 예전 대회에 비해 한결 여유롭게 들렸다. 경기장에서 게임을 치르는 선수들이 게임 자체를 즐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처럼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도 경기와 응원을 동시에 즐기려는 여유가 돋보였다. 여기엔 이념이나 집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 마디로 모든 걸 `즐기겠다'는 축제의 한 마당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광장과 영동대로, 상암월드컵경기장 등 주요 응원장소에서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며 선수들의 실력 만큼이나 성숙해진 시민의식도 과시했다. ◇자유롭게 즐기는 축제로 변모 =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에 개최국의 의무감과 자존심이 한 몫을 했다면 이제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경기를 즐기는 하나의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시대에 맞게 응원문화도 진화했다는 것이다. 자발성과 개인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응원문화가 이동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로 축구팬들은 북한의 정대세 선수에게 `인민루니'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친근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한국 대표팀이 16강전에서 떨어지자 `영원한 라이벌'로 꼽히는 일본의 선전을 기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념이나 집단에 구애받지 않는 10~20대가 응원문화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경직된 민족주의의 색깔이 옅어지고 애국심마저도 `즐기는 대상'이 됐다는 것이 이번 월드컵 응원문화의 특징이다. 고려대 사회학과 박길성 교수는 "2002년에는 한국이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많이 작용했고 국내 현안과도 관련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직된 분위기 없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 확산했다"며 "경험이 쌓이면서 응원문화가 진화한 셈"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2002년 월드컵은 외환위기에서 막 벗어난 시기에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였고 응원문화의 코드는 애국주의였다"며 "거리응원을 주도하는 세대가 바뀌면서 올해는 응원문화가 자발성과 개인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도 "2002년 월드컵은 열등감에 기초한 스포츠민족주의가 한번에 폭발하는 계기였다"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던 8년 전과 달리 거리응원은 이제 익숙해졌고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는 덜 심각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월드컵으로 재미를 보려는 대기업이 너도나도 거리응원의 주도권을 잡겠다고 나서면서 애초의 자율성을 해치고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정희준 교수는 "2002년에는 서로를 광장으로 불러내면서 자발적인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이제는 재벌들이 광장에서 호객행위를 하며 끌어내는 셈"이라며 "태극기 광고를 내보내며 애국하는 기업인척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애국심이자 상업적 민족주의"라고 비판했다. ◇`친환경 응원'…시민의식도 업그레이드 =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열린 23일 새벽 서울광장. 밤샘 응원전을 벌인 시민은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껏 즐길만도 했지만 예상과 달리 뒷풀이는 `청소'로 시작됐다. 약속이나 한 듯 미리 준비해온 비닐봉투를 꺼내 주변의 쓰레기를 주워담았고, 몇몇 시민은 수거차량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량에 옮겨싣기도 했다. 이날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세종로ㆍ태평로 등 도심에 7만여명이 운집했고 쓰레기가 60t이나 나왔지만 평소의 모습을 되찾는 데는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경기가 출근시간 직전에 끝나 교통대란이 예상됐지만 주변 도로는 30여 분만에 차량 통행이 재개됐고 인근 지하철에서도 큰 혼잡은 빚어지지 않았다.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매번 응원 장소를 자발적으로 말끔히 치워 시민의식 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과시했다. 응원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난 붉은악마도 경기 시작 전 붉은색 쓰레기봉투를 나눠주며 `친환경 응원'에 힘을 보탰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토고를 꺾고 원정 첫 승리를 거둘 당시 도로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흥분한 일부 시민이 지나가는 차량에 올라타거나 폭죽을 쏘아 올려 상가 건물에 불이 나는 등 서울시내가 아수라장이 됐던 것에 비하면 시민의식이 한층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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