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에게 따뜻한 웃음 주고 떠난 백남봉

입력 2010.07.29 (13:0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9일 타계한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본명 박두식)씨는 성대모사와 원맨쇼로 40여년간 따뜻한 웃음을 주며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했다.



투병생활 직전이던 2008년에도 KBS ’가요무대’나 케이블 TV 실버채널의 MC, 교통방송 ’2시가 좋아’의 MC로 활동하면서 ’영원한 현역’임을 과시했다.



1939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친을 따라 평안도로 간 뒤 6.25 피난길에 아버지를 잃고 이후 남쪽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아원을 나와 구두닦이, 장돌뱅이 등으로 거리 생활을 전전하며 밑바닥 삶의 애환을 체험한 그는 이 시절 팔도 사투리나 장타령처럼 자신의 코미디 인생에서 소중한 자산이 된 장기를 익혔다.



이때 발견한 남을 웃기는 재주로 길거리 무대의 스타로 발돋움한 그는 28세가 된 1967년 물랑루즈쇼단에서 활동하며 예능계에 본격 입문했다.



방송에 데뷔하기는 2년 뒤인 1969년 TBC ’라디오 장기자랑’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김장 재료들을 이용한 ’김장 마라톤’을 중계방송 식으로 선보이며 화제가 됐으며 이때부터 희극계에 백남봉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영화 ’팔도사나이’에 출연하고 각종 방송ㆍ공연 무대를 휩쓸며 활약하던 그는 1980년대 후반에는 KBS의 ’전국일주’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코미디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연예예술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원맨쇼와 성대모사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선배 코미디언 남보원씨와 명콤비이자 라이벌로 활동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60년대 예능 극단인 ’새나라쇼단’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으며 고인은 성대모사에 있어서는 현재까지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고인의 장기인 원맨쇼는 전국 8도 사투리라는 그 만의 그릇에 해학과 풍자를 담아내며 서민을 달래줬다는 점에서 ’한국적’ 코미디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콤비 없이 혼자 마이크 앞에 서면서도 수많은 청중, 시청자를 쥐락펴락하며 웃음을 주던 그의 코미디는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창피를 주기보다는 따뜻하게 아우르는 쪽이었다.



고인은 무대 뒤에서도 코미디언을 웃기는 코미디언으로도 유명하다.



동료 코미디언 이상해씨는 "지방 공연에서 같이 방을 쓸 때에는 코미디 소재가 생각나면 자는 사람을 깨워서라도 웃기려고 했었다"고 회상했으며 2008년 한 TV 방송에서 가족들은 "손자를 코미디언으로 키우려고 자꾸 이상한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죽음은 그가 노년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데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했다는 점에서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고인은 자전거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자전거를 통해 건강관리를 해왔으며 투병 생활 중에도 가족이나 후배 코미디언들에게 방송활동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서민에게 따뜻한 웃음 주고 떠난 백남봉
    • 입력 2010-07-29 13:04:15
    연합뉴스
 29일 타계한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본명 박두식)씨는 성대모사와 원맨쇼로 40여년간 따뜻한 웃음을 주며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했다.

투병생활 직전이던 2008년에도 KBS ’가요무대’나 케이블 TV 실버채널의 MC, 교통방송 ’2시가 좋아’의 MC로 활동하면서 ’영원한 현역’임을 과시했다.

1939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친을 따라 평안도로 간 뒤 6.25 피난길에 아버지를 잃고 이후 남쪽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고아원을 나와 구두닦이, 장돌뱅이 등으로 거리 생활을 전전하며 밑바닥 삶의 애환을 체험한 그는 이 시절 팔도 사투리나 장타령처럼 자신의 코미디 인생에서 소중한 자산이 된 장기를 익혔다.

이때 발견한 남을 웃기는 재주로 길거리 무대의 스타로 발돋움한 그는 28세가 된 1967년 물랑루즈쇼단에서 활동하며 예능계에 본격 입문했다.

방송에 데뷔하기는 2년 뒤인 1969년 TBC ’라디오 장기자랑’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김장 재료들을 이용한 ’김장 마라톤’을 중계방송 식으로 선보이며 화제가 됐으며 이때부터 희극계에 백남봉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영화 ’팔도사나이’에 출연하고 각종 방송ㆍ공연 무대를 휩쓸며 활약하던 그는 1980년대 후반에는 KBS의 ’전국일주’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코미디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연예예술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원맨쇼와 성대모사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선배 코미디언 남보원씨와 명콤비이자 라이벌로 활동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60년대 예능 극단인 ’새나라쇼단’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으며 고인은 성대모사에 있어서는 현재까지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고인의 장기인 원맨쇼는 전국 8도 사투리라는 그 만의 그릇에 해학과 풍자를 담아내며 서민을 달래줬다는 점에서 ’한국적’ 코미디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콤비 없이 혼자 마이크 앞에 서면서도 수많은 청중, 시청자를 쥐락펴락하며 웃음을 주던 그의 코미디는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창피를 주기보다는 따뜻하게 아우르는 쪽이었다.

고인은 무대 뒤에서도 코미디언을 웃기는 코미디언으로도 유명하다.

동료 코미디언 이상해씨는 "지방 공연에서 같이 방을 쓸 때에는 코미디 소재가 생각나면 자는 사람을 깨워서라도 웃기려고 했었다"고 회상했으며 2008년 한 TV 방송에서 가족들은 "손자를 코미디언으로 키우려고 자꾸 이상한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죽음은 그가 노년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데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했다는 점에서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고인은 자전거 마니아라고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자전거를 통해 건강관리를 해왔으며 투병 생활 중에도 가족이나 후배 코미디언들에게 방송활동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