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6.25전쟁이 남긴 포로들

입력 2010.10.02 (09:28)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수많은 포로와 그 가족들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채 남과 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60년이라는 긴 세월은 비극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습니다.

지난 25일,비전향장기수 출신 박선애씨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시 비전향장기수였다, 10년 전 북송된 남편 윤희보씨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쓸쓸히 빈소를 지킨 것은 외동딸.

그리고 북한에 있는 남편 대신 항상 곁을 지켜줬던 여동생입니다.

<인터뷰>박순애(박선애씨 동생) : “희선이가 하는 말이 ‘어머니 좋은 데 가셨어.’ ‘그래?’ 하도 담담하게 그러니까 나도 그게 실감이 안 나고. (장례식장으로) 사람들을 따라와서 글씨를 보니까 그 때서야 실감이 난 거예요. 아 가셨구나. 정말 가셨구나.”

전남 임실 출생으로 6.25전쟁 때 좌익 활동을 하던 박선애씨는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자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직후 체포된 박씨는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온갖 고문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전향을 거부했고, 결국 14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습니다.

이후 같은 빨치산 출신이었던 윤희보씨를 만나 1968년에 결혼했지만,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시행되면서 전향을 거부한 부부는 재수감됐고, 일곱 살짜리 외동딸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인터뷰>고희선(박선애 씨 딸) : “비전향장기수와 빨치산 활동을 한 집안의 딸을 친척들이 반갑게 맞아줄 상황이 전혀 아니었고…”

고아가 되다시피 한 딸을 보살펴준 건 박선애씨의 여동생입니다.

딸 희선씨는 이모부의 호적에 오르면서 윤봉혁’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게 됐습니다.

<인터뷰>고희선(박선애 씨 딸) : “이모를 엄마로 호적에 올리면서 그렇게 이름도 바뀌고 그래서 그 때부터 이모랑 같이 이모부랑 산 거예요.“

5년 후인 1979년 박선애씨는 출소했고, 윤희보씨는 1989년이 돼서야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15년 만에 단란한 네 식구가 한 집에 모였습니다.

<인터뷰>고희선(박선애 씨 딸) : “처음에 아버지가 오시고 조그만 집을 구해서 되게 허름한 공간이지만, 네 식구가 딱 모여서 같이 지내게 되니까 그런 때 기억하고...“

하지만 또 다른 생이별이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같은 해 9월,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됐습니다.

윤희보씨도 북한을 선택한 장기수 중 하나였습니다.

아내 박선애씨는 딸과 동생을 떠날 수 없어, 남쪽에 남았습니다.

<인터뷰> “통일이 이제 멀지 않았다. 그 때 당시에 그런 믿음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고... 그런 속에서 많이 울기는 많이 울었죠, 떠나실 때.”

비전향장기수였던 고인의 삶은 20년 감옥살이에 남편과의 생이별까지 더해져 개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곡의 세월이었습니다.

유족과 장례위원회는 고단한 생애를 산 박선애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남편 윤희보 씨가 지켜볼 수 있도록 조치해줄 것을 통일부에 요청했습니다.

<인터뷰>이재춘(박선애 씨 장례위원회 관계자) :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통일부 당국에서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조치를 취해주시면 우리도 초청할 수 있도록 협조를 바랍니다, 이런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통일부는 현재 경색된 남북관계를 이유로 들어 정부 차원의 조치는 어렵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인터뷰> “많이 서운하고 안타깝고 그래요. ”빈소에서 부부로서 떨어져있었는데 작은 씨앗으로서 그렇게 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좀 아쉽기도 하고... “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쪽에 많은 포로들을 남겼습니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도 모두 생존해있을 경우 7만 명이 넘는데요.

고령의 국군포로들은 가족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최근 탈북에 성공하고도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국군포로의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외교적 절차 문제로 7개월째 중국내 한국영사관에 머물고 있는 올해 84살의 김모 씨입니다.

고혈압과 왼쪽 팔다리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김 씨는 기약 없는 고국행을 기다리며 올 추석을 쓸쓸히 보내야 했습니다.

<녹취> “24세에 고향을 생이별하고 떠나 60년 세월이 지난 84살에서야 찾아온 한국땅 고향입니까. 지난 60년 세월 고향 그리움을 제 말로 어찌 표현하겠습니까.”

6.25전쟁 때 입대한 김 씨는 1951년 설악산 전투에 참가했다 인민군 포로가 됐습니다.

<녹취> “5월 18일 가리봉 방어전투에 밤 12시경 적의 공격을 전초해서 방어하다 적탄에,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 평양 인민군 중앙병원 39호 병원까지 와서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1953년 휴전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지만, 중립국 감시위원회가 조사할 당시 북한이 군군포로들을 모두 산으로 숨기면서 수포로 돌아갔다고 김 씨는 전합니다.

국군포로라는 신분 때문에 박해와 차별 속에 북에서 한 서린 60년을 살아온 김 씨.

눈을 감기 전에 고향땅을 밟겠다는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자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김 씨를 탈북 시켰습니다.

<녹취> “내가 남조선에 간 것을 정부에서 알면 남은 자식들에게 큰 영향이 미치게 될 것임을 생각하여 내가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영사관에 왔습니다. ”

하지만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을 줄 알았던 기대는 현실의 높은 벽에 다시 부딪혔습니다.

6.25전쟁 때 전사통보를 받고 김 씨가 숨진 줄로만 알았던 남한의 가족들은 60년만의 생환소식에 감격하면서도, 타국에서 하릴없이 고향행을 기다려야하는 김 씨의 처지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인터뷰> 김 씨 동생 : “나라의 부름으로 나갔다가 나가서 60년 동안을 이렇게 고향에도 못 오고, 이북 생활을 60년을 했으니 그 고역이 얼마나 크겠어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나온 사람을 이렇게 못 내보내니….”

6.25전쟁 때 북한에 잡힌 국군포로는 모두 8만여 명.

이 가운데 8천여 명만 송환되고 7만 여명은 북한 땅에 남아 포로로 고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대부분 여든을 넘겨 이제 생존하고 있는 포로는 수백 명에 불과할 것으로 정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죽더라도 고향에 가겠다며 목숨을 건 탈북을 통해 생환한 국군포로는 지금까지 79명입니다.

정부는 한중관계를 고려해 늘 조용한 외교로 일관했고, 살아서 남한 땅을 밟는 것은 온전히 국군포로의 몫이었습니다.

지난해 두만강을 헤엄쳐 탈출한 여든한 살 국군포로 정모 씨와 지난 2007년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 일가족 9명은 우리 정부의 이런 기조 속에 결국 북송되고 말았습니다.

남과 북에는 아직도 많은 이산가족과 국군포로, 납북자 등이 분단의 장벽에 가로막혀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남과 북이 하나가 돼 한국 현대사가 남긴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슈&한반도] 6.25전쟁이 남긴 포로들
    • 입력 2010-10-02 09:28:31
    남북의 창
한국전쟁이 남긴 수많은 포로와 그 가족들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채 남과 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60년이라는 긴 세월은 비극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습니다. 지난 25일,비전향장기수 출신 박선애씨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시 비전향장기수였다, 10년 전 북송된 남편 윤희보씨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쓸쓸히 빈소를 지킨 것은 외동딸. 그리고 북한에 있는 남편 대신 항상 곁을 지켜줬던 여동생입니다. <인터뷰>박순애(박선애씨 동생) : “희선이가 하는 말이 ‘어머니 좋은 데 가셨어.’ ‘그래?’ 하도 담담하게 그러니까 나도 그게 실감이 안 나고. (장례식장으로) 사람들을 따라와서 글씨를 보니까 그 때서야 실감이 난 거예요. 아 가셨구나. 정말 가셨구나.” 전남 임실 출생으로 6.25전쟁 때 좌익 활동을 하던 박선애씨는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자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직후 체포된 박씨는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온갖 고문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전향을 거부했고, 결국 14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습니다. 이후 같은 빨치산 출신이었던 윤희보씨를 만나 1968년에 결혼했지만,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시행되면서 전향을 거부한 부부는 재수감됐고, 일곱 살짜리 외동딸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인터뷰>고희선(박선애 씨 딸) : “비전향장기수와 빨치산 활동을 한 집안의 딸을 친척들이 반갑게 맞아줄 상황이 전혀 아니었고…” 고아가 되다시피 한 딸을 보살펴준 건 박선애씨의 여동생입니다. 딸 희선씨는 이모부의 호적에 오르면서 윤봉혁’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게 됐습니다. <인터뷰>고희선(박선애 씨 딸) : “이모를 엄마로 호적에 올리면서 그렇게 이름도 바뀌고 그래서 그 때부터 이모랑 같이 이모부랑 산 거예요.“ 5년 후인 1979년 박선애씨는 출소했고, 윤희보씨는 1989년이 돼서야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15년 만에 단란한 네 식구가 한 집에 모였습니다. <인터뷰>고희선(박선애 씨 딸) : “처음에 아버지가 오시고 조그만 집을 구해서 되게 허름한 공간이지만, 네 식구가 딱 모여서 같이 지내게 되니까 그런 때 기억하고...“ 하지만 또 다른 생이별이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같은 해 9월,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됐습니다. 윤희보씨도 북한을 선택한 장기수 중 하나였습니다. 아내 박선애씨는 딸과 동생을 떠날 수 없어, 남쪽에 남았습니다. <인터뷰> “통일이 이제 멀지 않았다. 그 때 당시에 그런 믿음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고... 그런 속에서 많이 울기는 많이 울었죠, 떠나실 때.” 비전향장기수였던 고인의 삶은 20년 감옥살이에 남편과의 생이별까지 더해져 개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곡의 세월이었습니다. 유족과 장례위원회는 고단한 생애를 산 박선애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남편 윤희보 씨가 지켜볼 수 있도록 조치해줄 것을 통일부에 요청했습니다. <인터뷰>이재춘(박선애 씨 장례위원회 관계자) :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통일부 당국에서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조치를 취해주시면 우리도 초청할 수 있도록 협조를 바랍니다, 이런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통일부는 현재 경색된 남북관계를 이유로 들어 정부 차원의 조치는 어렵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인터뷰> “많이 서운하고 안타깝고 그래요. ”빈소에서 부부로서 떨어져있었는데 작은 씨앗으로서 그렇게 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좀 아쉽기도 하고... “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쪽에 많은 포로들을 남겼습니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도 모두 생존해있을 경우 7만 명이 넘는데요. 고령의 국군포로들은 가족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최근 탈북에 성공하고도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국군포로의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외교적 절차 문제로 7개월째 중국내 한국영사관에 머물고 있는 올해 84살의 김모 씨입니다. 고혈압과 왼쪽 팔다리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김 씨는 기약 없는 고국행을 기다리며 올 추석을 쓸쓸히 보내야 했습니다. <녹취> “24세에 고향을 생이별하고 떠나 60년 세월이 지난 84살에서야 찾아온 한국땅 고향입니까. 지난 60년 세월 고향 그리움을 제 말로 어찌 표현하겠습니까.” 6.25전쟁 때 입대한 김 씨는 1951년 설악산 전투에 참가했다 인민군 포로가 됐습니다. <녹취> “5월 18일 가리봉 방어전투에 밤 12시경 적의 공격을 전초해서 방어하다 적탄에,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 평양 인민군 중앙병원 39호 병원까지 와서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1953년 휴전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지만, 중립국 감시위원회가 조사할 당시 북한이 군군포로들을 모두 산으로 숨기면서 수포로 돌아갔다고 김 씨는 전합니다. 국군포로라는 신분 때문에 박해와 차별 속에 북에서 한 서린 60년을 살아온 김 씨. 눈을 감기 전에 고향땅을 밟겠다는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자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김 씨를 탈북 시켰습니다. <녹취> “내가 남조선에 간 것을 정부에서 알면 남은 자식들에게 큰 영향이 미치게 될 것임을 생각하여 내가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영사관에 왔습니다. ” 하지만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을 줄 알았던 기대는 현실의 높은 벽에 다시 부딪혔습니다. 6.25전쟁 때 전사통보를 받고 김 씨가 숨진 줄로만 알았던 남한의 가족들은 60년만의 생환소식에 감격하면서도, 타국에서 하릴없이 고향행을 기다려야하는 김 씨의 처지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인터뷰> 김 씨 동생 : “나라의 부름으로 나갔다가 나가서 60년 동안을 이렇게 고향에도 못 오고, 이북 생활을 60년을 했으니 그 고역이 얼마나 크겠어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나온 사람을 이렇게 못 내보내니….” 6.25전쟁 때 북한에 잡힌 국군포로는 모두 8만여 명. 이 가운데 8천여 명만 송환되고 7만 여명은 북한 땅에 남아 포로로 고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대부분 여든을 넘겨 이제 생존하고 있는 포로는 수백 명에 불과할 것으로 정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죽더라도 고향에 가겠다며 목숨을 건 탈북을 통해 생환한 국군포로는 지금까지 79명입니다. 정부는 한중관계를 고려해 늘 조용한 외교로 일관했고, 살아서 남한 땅을 밟는 것은 온전히 국군포로의 몫이었습니다. 지난해 두만강을 헤엄쳐 탈출한 여든한 살 국군포로 정모 씨와 지난 2007년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 일가족 9명은 우리 정부의 이런 기조 속에 결국 북송되고 말았습니다. 남과 북에는 아직도 많은 이산가족과 국군포로, 납북자 등이 분단의 장벽에 가로막혀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남과 북이 하나가 돼 한국 현대사가 남긴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