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공사, 명성황후 시해후 통신차단…조직적 은폐”

입력 2010.10.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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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일본 미우라 고로 공사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 당시 본국 외무성으로의 통신체계를 차단하고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당시 일본 외교관의 증언이 공개됐습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명성황후 시해 115년을 맞아 1893년 영사 신분으로 경성에 근무하며 시해사건을 지켜본 우치다 사다즈치의 '부임지 주요사건 회고록'의 회고록 공개를 통해 이 같이 밝혔습니다.

회고록은 1895년 10월 8일 아침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 매우 시끄러운 일이 일어났다며 공사에게 보고하자 미우라 공사는 이로써 조선도 일본 것이 되었다며 안심이라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일본인이 피묻은 칼을 들고 대낮에 경성거리를 걷는 것을 외국인들도 보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이 사건에 관계돼 있다는 점을 숨길 수 없다고 하자 미우라 공사도 그 점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회고록은 이 사실을 외무성이 알리려고 해도 전신이 공사관의 명령으로 금지돼 있었고 공사관 이외의 사람은 일체 전보를 칠 수 없게 돼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회고록은 또, 사건 초기모의 과정에 대해 대원군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왕비 살해 당일 밤 대원군이 주저하며 나오지 않으려 해 억지로 대원군을 끌어냈다고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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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공사, 명성황후 시해후 통신차단…조직적 은폐”
    • 입력 2010-10-08 10:55:05
    정치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일본 미우라 고로 공사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 당시 본국 외무성으로의 통신체계를 차단하고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당시 일본 외교관의 증언이 공개됐습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명성황후 시해 115년을 맞아 1893년 영사 신분으로 경성에 근무하며 시해사건을 지켜본 우치다 사다즈치의 '부임지 주요사건 회고록'의 회고록 공개를 통해 이 같이 밝혔습니다. 회고록은 1895년 10월 8일 아침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 매우 시끄러운 일이 일어났다며 공사에게 보고하자 미우라 공사는 이로써 조선도 일본 것이 되었다며 안심이라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일본인이 피묻은 칼을 들고 대낮에 경성거리를 걷는 것을 외국인들도 보았기 때문에 일본인이 이 사건에 관계돼 있다는 점을 숨길 수 없다고 하자 미우라 공사도 그 점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회고록은 이 사실을 외무성이 알리려고 해도 전신이 공사관의 명령으로 금지돼 있었고 공사관 이외의 사람은 일체 전보를 칠 수 없게 돼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회고록은 또, 사건 초기모의 과정에 대해 대원군을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왕비 살해 당일 밤 대원군이 주저하며 나오지 않으려 해 억지로 대원군을 끌어냈다고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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