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사상’ 최고 이론가…최근까지 ‘北 비판’ 활동

입력 2010.10.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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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된 황장엽(87)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선군사상'과 함께 북한의 2대 통치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꼽힌다.

13년 전 북한을 탈출할 당시 노동당의 국제담당 비서를 지내 역대 `최고위 탈북 인사'로 통하기도 했던 그는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비교적 활발한 외부활동을 해, 타계 소식을 접한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황 전 비서는 모스크바 대학 철학부로 유학을 다녀온 뒤 1952년 29세의 나이로 김일성대 철학과 교수가 됐고,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거쳐 39세 때인 1962년에는 일약 김일성대 총장 자리에 올랐다,

남한에 와서는 줄곧 북한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원래는 김정일 위원장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의 권력승계 정당성을 다지기 위해 `백두산 출생설'을 주민들에게 퍼뜨리는 등 후계 구축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김 위원장이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때는 주체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후 황씨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노동당 사상담당 비서,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을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로 있던 1997년 2월12일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해, 북한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북한은 망명 다음날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며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억지를 쓰기도 했지만 같은해 4월20일 황 씨가 국내에 들어와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을 때는 이를 `선전포고'로 규정, "민족 파멸의 전쟁 불씨를 퍼뜨리는 노망한 자의 망발이며, 황 역적을 반드시 황천객으로 만들 것"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최근까지도 김정일 체제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늦추지 않았고. 북한도 기회만 있으면 그에 대한 신변 위협을 가했다.

일례로 2006년 12월에는 빨간 물감이 뿌려진 황씨의 사진과 손도끼, '쓰레기 같은 입 다물라'는 협박 편지가 담긴 소포가 배달되는가 하면 최근에는 황씨 암살 지시를 받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의 2인조 간첩이 우리 당국에 검거되기도 했다.

북한의 살해 협박과 위협이 이어지면서 황 씨는 하루 24시간 경찰의 밀착 경호를 받으며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귀순 후 황씨는 한 때 정부 연구기관의 책임자로서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주로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같은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강연과 방송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는데 힘써왔다.

지난 4월 초청 강연을 하러 미국와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부정기적으로 대학생 안보강연을 하는가 하면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민주주의 강좌'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타계 직전까지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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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체 사상’ 최고 이론가…최근까지 ‘北 비판’ 활동
    • 입력 2010-10-10 16:12:16
    연합뉴스
10일 오전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된 황장엽(87)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선군사상'과 함께 북한의 2대 통치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꼽힌다. 13년 전 북한을 탈출할 당시 노동당의 국제담당 비서를 지내 역대 `최고위 탈북 인사'로 통하기도 했던 그는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비교적 활발한 외부활동을 해, 타계 소식을 접한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황 전 비서는 모스크바 대학 철학부로 유학을 다녀온 뒤 1952년 29세의 나이로 김일성대 철학과 교수가 됐고,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거쳐 39세 때인 1962년에는 일약 김일성대 총장 자리에 올랐다, 남한에 와서는 줄곧 북한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원래는 김정일 위원장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의 권력승계 정당성을 다지기 위해 `백두산 출생설'을 주민들에게 퍼뜨리는 등 후계 구축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김 위원장이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닐 때는 주체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후 황씨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노동당 사상담당 비서,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을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로 있던 1997년 2월12일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해, 북한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북한은 망명 다음날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며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억지를 쓰기도 했지만 같은해 4월20일 황 씨가 국내에 들어와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을 때는 이를 `선전포고'로 규정, "민족 파멸의 전쟁 불씨를 퍼뜨리는 노망한 자의 망발이며, 황 역적을 반드시 황천객으로 만들 것"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최근까지도 김정일 체제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늦추지 않았고. 북한도 기회만 있으면 그에 대한 신변 위협을 가했다. 일례로 2006년 12월에는 빨간 물감이 뿌려진 황씨의 사진과 손도끼, '쓰레기 같은 입 다물라'는 협박 편지가 담긴 소포가 배달되는가 하면 최근에는 황씨 암살 지시를 받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의 2인조 간첩이 우리 당국에 검거되기도 했다. 북한의 살해 협박과 위협이 이어지면서 황 씨는 하루 24시간 경찰의 밀착 경호를 받으며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귀순 후 황씨는 한 때 정부 연구기관의 책임자로서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주로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같은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강연과 방송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는데 힘써왔다. 지난 4월 초청 강연을 하러 미국와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부정기적으로 대학생 안보강연을 하는가 하면 대북 단파라디오 `자유북한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민주주의 강좌'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타계 직전까지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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