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분단의 초상, 황장엽 前 비서 사망

입력 2010.10.16 (09:25) 수정 2010.10.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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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황 전 비서가 숨진 날, 북한의 김정은은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공개적으로 후계자 등극을 과시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엘리트이자 주체사상의 대부로, 남한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김정일 독재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엇갈리는 삶을 살아온 황장엽 씨의 생애를 되돌아봅니다.



황장엽 전 비서가 지난 10일,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호원이 자택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다 숨진 황 전 비서를 발견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 안병정(강남경찰서장/지난 10일):"타살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재 상태로 검안 결과는 자연사로..."



갑작스런 황 전 비서의 죽음에 수양딸 김숙향씨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김숙향(황장엽 전 비서 수양딸):"북한의 독재가 삼대로 이어지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마 울분으로 인해서 심장마비까지 온 것이 아닌가...."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정관계 인사들과 탈북자들의 조문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김소울(조문객/황 전 비서 제자):"원하시는 조국통일을 못보고 돌아가셔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2일, 고 황장엽 전 비서에게 국민훈장 중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습니다.



<녹취> 맹형규(행정안전부 장관):"북한의 민주화와 북한의 발전, 개혁 개방 이런 것들을 위해서 헌신을 하셨던 이러한 점들이 고려가 돼서……. "



이에 따라 황 전 비서의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황 전 비서가 영면에 드는 날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논평을 통해 당과 제도를 등지고 일신의 향락을 찾아 남쪽으로 뺑소니쳤던 자에게 하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했습니다.



황장엽 전 비서는 지난 1997년 4월에 남한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최측근인 김덕홍 여광무역연합 사장과 함께 같은 해 2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일본에서 치러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에서 전과 다름없이 김정일 체제를 찬양하고 중국을 거쳐 귀국하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황 전 비서를 망명시키기 위해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황 전 비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중국 측에 전달했고, 수차례의 접촉 끝에 한 달여 만에 ‘제3국을 통해 보내주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마침내 황 전 비서는 필리핀을 거쳐 67일 만에 망명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으며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최고위직 인사가 망명하면서 그 배경을 두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황장엽 전 비서는 북한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어 남한으로 오게 됐다고 망명 동기를 밝혔습니다.



<녹취> 황장엽 전 비서 망명 기자회견(1997년 4월 20일):"북조선은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미 희망을 잃은 지 오래됐습니다. 출로는 오직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북한은 황 전 비서가 망명한 이튿날 그가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했지만, 중국이 황 전 비서의 한국행을 허용하면서 망명이 사실로 드러나자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며 태도를 바꿨습니다.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 후 쓴 유서에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묻어나있습니다.



<내레이션>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를 바라오.

북한에 남겨졌던 황 전 비서의 가족들은 그의 망명 이후, 예상대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녹취> 김영삼(전 대통령):"자기가 중국에 온 다음에 자기 부인이 자살해서 죽었지, 바로. 부인이 이북에 있었잖아요. 아들도 자살해서 죽었지, 딸 죽었지. 가족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황장엽 전 비서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북한으로 돌아온 그는 1954년부터 김일성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1958년에 노동당 총비서 서기실 서기로 발탁됐고 이후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논리로 김일성 주석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특히 김일성 주체사상을 철학으로 뒷받침하는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녹취> 황장엽(전 북한 노동당 비서):"‘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런 구호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더 튼튼히 더 철저히 무장하자’ 이런 두 개의 구호를 제가 썼습니다.

황 전 비서는 마흔 두 살의 젊은 나이에 김일성대학 총장을 맡아 14년간 재직했고, 마흔 아홉부터 11년간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쉰여섯부터 망명 직전인 일흔 네 살까지 조선노동당 비서를 맡는 등 북한 권력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망명 직전까지 권력서열 20위권을 유지했던 북한의 최고위급 엘리트였습니다.



그만큼 누구보다 북한의 실상과 내부기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황 전 비서는 망명 이후 북한의 표적 1호로 지목됐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24시간 밀착 경호를 받으며 ‘안가’에서 생활했고 최근에는 국무총리보다 높은 수준의 경호를 받았습니다.



북한은 고정간첩 등을 통해 황장엽 전 비서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왔습니다.



지난 2004년과 2006년에는 황 전 비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 앞으로 핏빛 페인트칠이 된 그의 사진과 살해를 위협하는 유인물이 배달됐습니다.



올해 4월에는 북한의 정찰총국장 김영철로부터 ‘황장엽이 자연사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지령을 받고 남파된 공작원 2명이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황 전 비서는 자신을 향한 북한의 끊임없는 위협에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개의치 않는다’며, 북한 체제와 김정일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녹취> 황장엽(전 조선노동당 비서):"수백만 사람 굶겨 죽였지,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었지. 핵무기 개발해 위협하고

이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거, 시대착오적이라는 것."



황 전 비서는 망명 이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북한 주민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 간 ‘고난의 행군’의 참상을 전했고, 아웅산 테러, 칼기 폭파사건 등 북한의 국가범죄를 증언했습니다.



그는 가장 권위 있는 북한 정보를 가진 최고위급 탈북자로서, 숨지기 직전까지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벌이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황 전 비서가 운명한 뒤 공개된 자작시에 분단 현실에 대한 노 망명객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내레이션>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앞날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황장엽 전 비서의 죽음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과 아픔을 곱씹게 합니다.



황 전 비서가 망명 이후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북한의 민주화와 통일은 이제 우리의 숙제로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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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분단의 초상, 황장엽 前 비서 사망
    • 입력 2010-10-16 09:25:49
    • 수정2010-10-16 16: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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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황 전 비서가 숨진 날, 북한의 김정은은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공개적으로 후계자 등극을 과시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엘리트이자 주체사상의 대부로, 남한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김정일 독재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엇갈리는 삶을 살아온 황장엽 씨의 생애를 되돌아봅니다.

황장엽 전 비서가 지난 10일,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호원이 자택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다 숨진 황 전 비서를 발견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녹취> 안병정(강남경찰서장/지난 10일):"타살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재 상태로 검안 결과는 자연사로..."

갑작스런 황 전 비서의 죽음에 수양딸 김숙향씨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김숙향(황장엽 전 비서 수양딸):"북한의 독재가 삼대로 이어지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마 울분으로 인해서 심장마비까지 온 것이 아닌가...."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정관계 인사들과 탈북자들의 조문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김소울(조문객/황 전 비서 제자):"원하시는 조국통일을 못보고 돌아가셔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2일, 고 황장엽 전 비서에게 국민훈장 중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습니다.

<녹취> 맹형규(행정안전부 장관):"북한의 민주화와 북한의 발전, 개혁 개방 이런 것들을 위해서 헌신을 하셨던 이러한 점들이 고려가 돼서……. "

이에 따라 황 전 비서의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황 전 비서가 영면에 드는 날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논평을 통해 당과 제도를 등지고 일신의 향락을 찾아 남쪽으로 뺑소니쳤던 자에게 하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했습니다.

황장엽 전 비서는 지난 1997년 4월에 남한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최측근인 김덕홍 여광무역연합 사장과 함께 같은 해 2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일본에서 치러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에서 전과 다름없이 김정일 체제를 찬양하고 중국을 거쳐 귀국하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황 전 비서를 망명시키기 위해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황 전 비서를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중국 측에 전달했고, 수차례의 접촉 끝에 한 달여 만에 ‘제3국을 통해 보내주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마침내 황 전 비서는 필리핀을 거쳐 67일 만에 망명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으며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최고위직 인사가 망명하면서 그 배경을 두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황장엽 전 비서는 북한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어 남한으로 오게 됐다고 망명 동기를 밝혔습니다.

<녹취> 황장엽 전 비서 망명 기자회견(1997년 4월 20일):"북조선은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미 희망을 잃은 지 오래됐습니다. 출로는 오직 남쪽 형제들과 손잡고 전쟁을 막아보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북한은 황 전 비서가 망명한 이튿날 그가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했지만, 중국이 황 전 비서의 한국행을 허용하면서 망명이 사실로 드러나자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며 태도를 바꿨습니다.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 후 쓴 유서에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묻어나있습니다.

<내레이션>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를 바라오.
북한에 남겨졌던 황 전 비서의 가족들은 그의 망명 이후, 예상대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녹취> 김영삼(전 대통령):"자기가 중국에 온 다음에 자기 부인이 자살해서 죽었지, 바로. 부인이 이북에 있었잖아요. 아들도 자살해서 죽었지, 딸 죽었지. 가족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황장엽 전 비서는,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북한으로 돌아온 그는 1954년부터 김일성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1958년에 노동당 총비서 서기실 서기로 발탁됐고 이후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논리로 김일성 주석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특히 김일성 주체사상을 철학으로 뒷받침하는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녹취> 황장엽(전 북한 노동당 비서):"‘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런 구호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더 튼튼히 더 철저히 무장하자’ 이런 두 개의 구호를 제가 썼습니다.
황 전 비서는 마흔 두 살의 젊은 나이에 김일성대학 총장을 맡아 14년간 재직했고, 마흔 아홉부터 11년간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쉰여섯부터 망명 직전인 일흔 네 살까지 조선노동당 비서를 맡는 등 북한 권력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망명 직전까지 권력서열 20위권을 유지했던 북한의 최고위급 엘리트였습니다.

그만큼 누구보다 북한의 실상과 내부기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황 전 비서는 망명 이후 북한의 표적 1호로 지목됐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24시간 밀착 경호를 받으며 ‘안가’에서 생활했고 최근에는 국무총리보다 높은 수준의 경호를 받았습니다.

북한은 고정간첩 등을 통해 황장엽 전 비서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해왔습니다.

지난 2004년과 2006년에는 황 전 비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 앞으로 핏빛 페인트칠이 된 그의 사진과 살해를 위협하는 유인물이 배달됐습니다.

올해 4월에는 북한의 정찰총국장 김영철로부터 ‘황장엽이 자연사하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지령을 받고 남파된 공작원 2명이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황 전 비서는 자신을 향한 북한의 끊임없는 위협에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개의치 않는다’며, 북한 체제와 김정일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녹취> 황장엽(전 조선노동당 비서):"수백만 사람 굶겨 죽였지,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었지. 핵무기 개발해 위협하고
이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거, 시대착오적이라는 것."

황 전 비서는 망명 이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북한 주민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 간 ‘고난의 행군’의 참상을 전했고, 아웅산 테러, 칼기 폭파사건 등 북한의 국가범죄를 증언했습니다.

그는 가장 권위 있는 북한 정보를 가진 최고위급 탈북자로서, 숨지기 직전까지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벌이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황 전 비서가 운명한 뒤 공개된 자작시에 분단 현실에 대한 노 망명객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내레이션>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앞날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

정든 산천과 갈라진 겨레는 또 어떻게 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황장엽 전 비서의 죽음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과 아픔을 곱씹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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