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응찬 52년 금융인생 ‘사실상 마감’

입력 2010.10.30 (16:2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금융업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인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52년 금융 인생을 30일 사실상 마감하게 됐다.

라 전 회장은 고국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재일교포들과 함께 설립한 신한은행을 3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금융업계의 삼성'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신한은행의 태생적 아킬레스건인 차명계좌에 발목이 잡혀 결국 박수받지 못한 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금융업계는 라 전 회장이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와 2인자인 신상훈 사장과의 갈등 등으로 명예롭게 퇴진하지는 못하게 됐지만, 신한은행 성공 신화를 통해 국내 금융산업을 업그레이드 시킨 공로는 재평가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금융계 이병철', 차명계좌에 발목

라 전 회장은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1959년 농업은행에 입행해 대구은행과 제일투자금융을 거쳐 1982년 신한은행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1991년 신한은행장에 선임되면서 상고 출신 행장 신화를 만든 라 전 회장은 행장 3연임에 성공했지만, 신한은행이 반석 위에 올라섰다고 생각해 1999년 2월 임기를 1년 앞두고 용퇴했다.

라 전 회장은 2001년 신한금융지주 창립 때 이인호 당시 행장과 주주들의 청을 수용해 대표이사 회장을 맡은 뒤 올해 3월 4연임에 성공하면서 10년 넘게 신한금융을 이끌 수 있게 됐다.

라 전 회장이 금융업계 최장수 CEO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영 성과와 뛰어난 리더십 때문이다.

창립 당시 자본금 250억원에 점포 3개, 직원 280명에 불과했던 후발 은행이 리딩 금융회사로 도약하는 과정에는 라 전 회장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라 전 회장은 기존 금융권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불친절하고 문턱 높은 은행', '커미션으로 불리던 대출 사례금', '끼리끼리 패거리를 짓던 파벌문화' 등을 일소하며 금융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고 이러한 정신은 지금까지 '신한정신' 또는 '신한 웨이(Way)' 등의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굿모닝증권을 시작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의 조흥은행과 국내 점유율 1위의 LG카드 등 대형 인수.합병(M&A)을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신한금융을 가장 이상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춘 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 결과 2004년 3월 6조1천억원이던 신한금융의 시가총액은 약 21조원으로 3배 이상 급증하면서 업계 1위를 굳혔다.

2008년과 2009년 금융업계 최고 실적을 거둔 신한금융은 올해 1∼9월 당기순이익 2조원을 돌파하면서 가장 먼저 `2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신한은행 설립을 위해 불가피했던 차명계좌에 발목이 잡히면서 아름다운 퇴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재일교포 주주들은 1982년 신한은행 설립 당시 외국인이 비상장법인인 신한은행 주식을 살 수 없는 제한 때문에 대부분 내국인 자격으로 주식을 취득했고 일부는 1993년 금융실명제 이후로도 실명계좌로 전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라 전 회장은 15년전 신한은행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관리 논란 때 경영 능력을 인정한 당국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당국의 심판을 받는 신세가 됐다.

3월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전 회장 연임에 성공한 지 한 달도 안돼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실명제법 위반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고 결국 당국의 중징계를 앞두고 사퇴하게 됐다.

◇30년 동지 신 사장과의 파국

라 전 회장의 퇴진이 거의 30년간 동지적 관계였던 신 사장과의 갈등과 무관치 않은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라 전 회장과 신 사장은 1982년 신한은행 창립 때 각각 상무와 개설준비위원으로 합류해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됐다.

라 전 회장은 2001년 신한금융 출범 때 신 사장을 상무로 승진시켰고 2003년 신한은행장 선임 때는 이른바 `4룡'으로 불리던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비주류였던 신 사장을 행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신 사장도 라 전 회장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면서 최영휘 전 사장 해임 등 위기 때마다 오사카 지점 시절부터 절친했던 이백순 신한은행장과 함께 힘을 합쳐 라 전 회장을 도왔다.

신 사장은 2006년 옛 조흥은행과의 통합을 원활하게 마무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합 은행장으로서 연임에 성공했고 작년 3월 이인호 전 사장을 제치고 지주사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2인자에 올랐다.

그러나 올해 4월 라 전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30년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명제법 위반 논란의 발원지가 신 사장측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신 사장의 횡령과 배임 혐의를 포착한 이 행장이 지난달초 신 사장을 검찰에 고소하면서 라 전 회장과 신 사장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됐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독립자금으로 일컬어지는 재일교포의 돈으로 만들어진 신한은행의 특성상 라 전 회장이 실명제법 관련 문제를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국내 금융업계를 한 단계 도약시킨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며 "라 전 회장의 사퇴를 계기로 애증 관계인 신한금융 3인방이 화해하는 것이 신한금융이나 은행권을 위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라응찬 52년 금융인생 ‘사실상 마감’
    • 입력 2010-10-30 16:21:15
    연합뉴스
금융업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인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52년 금융 인생을 30일 사실상 마감하게 됐다. 라 전 회장은 고국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재일교포들과 함께 설립한 신한은행을 3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금융업계의 삼성'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신한은행의 태생적 아킬레스건인 차명계좌에 발목이 잡혀 결국 박수받지 못한 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금융업계는 라 전 회장이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와 2인자인 신상훈 사장과의 갈등 등으로 명예롭게 퇴진하지는 못하게 됐지만, 신한은행 성공 신화를 통해 국내 금융산업을 업그레이드 시킨 공로는 재평가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금융계 이병철', 차명계좌에 발목 라 전 회장은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1959년 농업은행에 입행해 대구은행과 제일투자금융을 거쳐 1982년 신한은행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1991년 신한은행장에 선임되면서 상고 출신 행장 신화를 만든 라 전 회장은 행장 3연임에 성공했지만, 신한은행이 반석 위에 올라섰다고 생각해 1999년 2월 임기를 1년 앞두고 용퇴했다. 라 전 회장은 2001년 신한금융지주 창립 때 이인호 당시 행장과 주주들의 청을 수용해 대표이사 회장을 맡은 뒤 올해 3월 4연임에 성공하면서 10년 넘게 신한금융을 이끌 수 있게 됐다. 라 전 회장이 금융업계 최장수 CEO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영 성과와 뛰어난 리더십 때문이다. 창립 당시 자본금 250억원에 점포 3개, 직원 280명에 불과했던 후발 은행이 리딩 금융회사로 도약하는 과정에는 라 전 회장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라 전 회장은 기존 금융권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불친절하고 문턱 높은 은행', '커미션으로 불리던 대출 사례금', '끼리끼리 패거리를 짓던 파벌문화' 등을 일소하며 금융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고 이러한 정신은 지금까지 '신한정신' 또는 '신한 웨이(Way)' 등의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굿모닝증권을 시작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의 조흥은행과 국내 점유율 1위의 LG카드 등 대형 인수.합병(M&A)을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신한금융을 가장 이상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춘 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 결과 2004년 3월 6조1천억원이던 신한금융의 시가총액은 약 21조원으로 3배 이상 급증하면서 업계 1위를 굳혔다. 2008년과 2009년 금융업계 최고 실적을 거둔 신한금융은 올해 1∼9월 당기순이익 2조원을 돌파하면서 가장 먼저 `2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신한은행 설립을 위해 불가피했던 차명계좌에 발목이 잡히면서 아름다운 퇴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재일교포 주주들은 1982년 신한은행 설립 당시 외국인이 비상장법인인 신한은행 주식을 살 수 없는 제한 때문에 대부분 내국인 자격으로 주식을 취득했고 일부는 1993년 금융실명제 이후로도 실명계좌로 전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라 전 회장은 15년전 신한은행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관리 논란 때 경영 능력을 인정한 당국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당국의 심판을 받는 신세가 됐다. 3월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전 회장 연임에 성공한 지 한 달도 안돼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실명제법 위반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고 결국 당국의 중징계를 앞두고 사퇴하게 됐다. ◇30년 동지 신 사장과의 파국 라 전 회장의 퇴진이 거의 30년간 동지적 관계였던 신 사장과의 갈등과 무관치 않은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라 전 회장과 신 사장은 1982년 신한은행 창립 때 각각 상무와 개설준비위원으로 합류해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됐다. 라 전 회장은 2001년 신한금융 출범 때 신 사장을 상무로 승진시켰고 2003년 신한은행장 선임 때는 이른바 `4룡'으로 불리던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비주류였던 신 사장을 행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신 사장도 라 전 회장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면서 최영휘 전 사장 해임 등 위기 때마다 오사카 지점 시절부터 절친했던 이백순 신한은행장과 함께 힘을 합쳐 라 전 회장을 도왔다. 신 사장은 2006년 옛 조흥은행과의 통합을 원활하게 마무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합 은행장으로서 연임에 성공했고 작년 3월 이인호 전 사장을 제치고 지주사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2인자에 올랐다. 그러나 올해 4월 라 전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30년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명제법 위반 논란의 발원지가 신 사장측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신 사장의 횡령과 배임 혐의를 포착한 이 행장이 지난달초 신 사장을 검찰에 고소하면서 라 전 회장과 신 사장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됐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독립자금으로 일컬어지는 재일교포의 돈으로 만들어진 신한은행의 특성상 라 전 회장이 실명제법 관련 문제를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국내 금융업계를 한 단계 도약시킨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며 "라 전 회장의 사퇴를 계기로 애증 관계인 신한금융 3인방이 화해하는 것이 신한금융이나 은행권을 위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