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 있던 ‘사상의 은사’ 리영희

입력 2010.12.0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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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세력의 정신적 스승..4번 해직ㆍ3번 구속
70∼80년대 대학생 필독서 '전환시대의 논리' 등 저술

리영희 교수는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언론과 민주주의, 후학 양성에 바친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학자였다.

1929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난 리 교수는 경성공립공업고(현 서울공고)와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에 통역장교로 입대해 7년 간 군 생활을 한 뒤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에 배속받아 지리산과 속리산의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됐고, 국군 간부들이 군수물자와 돈을 빼돌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군 예편 후 합동통신(연합뉴스의 전신)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외국 언론에 기고했으며, 1964년에는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각각 4년간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다. 기자 생활 때 2번의 해직까지 합치면 4번이나 해직된 것이다.

1977년 저서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복역했고,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됐다.

리 교수는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폭넓은 지식과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한 활발한 저술을 통해 진보세력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다.

그는 사회비평가이자 사민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해직과 구속이 반복된 고달픈 삶 탓이었는지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저술 활동은 자제했지만 사회참여와 진보적 발언은 계속됐다.

이런 그를 두고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사상의 은사'라는 표현으로 한국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전하기도 했다.

70∼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우상과 이성' '베트남 전쟁' '자유인ㆍ자유인' '스핑크스의 코' '동굴속의 독백' '21세기 아침의 사색', 회고록 '대화'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리 교수는 1974년 출간한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반공주의의 철가면을 벗겨 내고 중국, 일본, 미국, 베트남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깨뜨렸다.

특히 붉은 공산주의 국가로만 치부되던 중국의 혁명사를 역사적 사실과 논리에 따라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베트남전은 제국주의와 반민중적 권력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투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중국이 손잡는 전환시대에는 진실을 아는 국민이 국가를 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오로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한국의 현대사를 생생히 지켜보면서 참된 민주주의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후세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그는 떠났지만 숱한 저서와 강연을 통해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 자신의 못남은 도외시한 채 외부의 작용이나 음모공작에 주된 책임을 전가하기만 하는 주장이나 태도를 나는 경계한다. 이제 21세기로 넘어왔으니 우리 민족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우리 역사가 겪은 실패들을 외세에만 돌리지 말고 뼈아픈 자기비판을 통해서 노신(루쉰.魯迅)이나 프란츠 파농이 그들 동포에게 요구했던 그런 민족적 각성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전환시대의 논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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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깨어 있던 ‘사상의 은사’ 리영희
    • 입력 2010-12-05 10:22:01
    연합뉴스
진보세력의 정신적 스승..4번 해직ㆍ3번 구속 70∼80년대 대학생 필독서 '전환시대의 논리' 등 저술 리영희 교수는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언론과 민주주의, 후학 양성에 바친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학자였다. 1929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난 리 교수는 경성공립공업고(현 서울공고)와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에 통역장교로 입대해 7년 간 군 생활을 한 뒤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에 배속받아 지리산과 속리산의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됐고, 국군 간부들이 군수물자와 돈을 빼돌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군 예편 후 합동통신(연합뉴스의 전신)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외국 언론에 기고했으며, 1964년에는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각각 4년간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다. 기자 생활 때 2번의 해직까지 합치면 4번이나 해직된 것이다. 1977년 저서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복역했고,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됐다. 리 교수는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폭넓은 지식과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한 활발한 저술을 통해 진보세력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다. 그는 사회비평가이자 사민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해직과 구속이 반복된 고달픈 삶 탓이었는지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저술 활동은 자제했지만 사회참여와 진보적 발언은 계속됐다. 이런 그를 두고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사상의 은사'라는 표현으로 한국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전하기도 했다. 70∼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우상과 이성' '베트남 전쟁' '자유인ㆍ자유인' '스핑크스의 코' '동굴속의 독백' '21세기 아침의 사색', 회고록 '대화'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리 교수는 1974년 출간한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반공주의의 철가면을 벗겨 내고 중국, 일본, 미국, 베트남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깨뜨렸다. 특히 붉은 공산주의 국가로만 치부되던 중국의 혁명사를 역사적 사실과 논리에 따라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베트남전은 제국주의와 반민중적 권력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투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중국이 손잡는 전환시대에는 진실을 아는 국민이 국가를 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오로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한국의 현대사를 생생히 지켜보면서 참된 민주주의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후세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그는 떠났지만 숱한 저서와 강연을 통해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 자신의 못남은 도외시한 채 외부의 작용이나 음모공작에 주된 책임을 전가하기만 하는 주장이나 태도를 나는 경계한다. 이제 21세기로 넘어왔으니 우리 민족이 자기만족에 도취되거나 우리 역사가 겪은 실패들을 외세에만 돌리지 말고 뼈아픈 자기비판을 통해서 노신(루쉰.魯迅)이나 프란츠 파농이 그들 동포에게 요구했던 그런 민족적 각성을 통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전환시대의 논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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