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그리고 무죄

입력 2011.02.28 (07:36) 수정 2011.02.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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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딸과 아들이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사형당할 당시 서른 한 살 새댁이었던 큰딸은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팔순넘은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는 20여분간.. 가족들은 미동도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곤 무죄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청석 여기저기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죽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채 사형당한 오욕의 세월을 지워 버리는데는 채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다신 정적을 없앤 이런일이 일어나선 안되겠죠. 정적을 없애는 이런..."

지난 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후 52년만에 지난 달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 받았습니다. 유족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간첩의 후손이라는 멍에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산 조봉암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사법 판단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들어 봤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벗은 뒤에도 죽산의 딸 조호정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백지에 반야심경을 한자 한자 적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리곤 집 근처 사찰로 가서 태워 버립니다,

<녹취> 조호정 : "나도 이제 80이 넘고 그러니까 나 가기전에 됐으면 좋겠다고 그 얘기밖에 다른게 없어요."

독립운동가로 제헌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등을 지낸 죽산 조봉암은 1952년 제2대,,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80여만표와 200여만 표를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59년 7월.사형당했습니다. 국가 변란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조봉암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이 50여년만에 판결을 뒤집으며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인터뷰>이동근(前 대법원 공보관) : "간첩죄는 증거가 부족해 무죄이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52년만에 종전 판결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습니다."

당시 가족들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단 것도 몰랐습니다. 하얀 수의에 덮여 돌아온 아버지의 시신이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구명 탄원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조호정 :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그렇게 험하게 가셨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얼굴이 편안해. 아..이런 말 한번도 안 해봤는데..조금 미소짓고 가만히 있어..아유 참...그러고 끝이 나거예요."

장남 규호씨의 고통은 더 컸습니다. 당시 10살이었던 조규호씨는 간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직장 생활 조차 힘들었습니다. 감시의 눈초리는 삼엄했고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 꿈도 꿀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조규호(62/죽산 조봉암의 장남) : "얘기하면 뭐해...편안하게 할려고 그랬는데 본인이 아니면 모르지."

유족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생가터를 발굴하고 추모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강화도의 한 마을. 조봉암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생가터는 알수 없습니다. 간첩 혐의로 사형됐기 때문에 행적을 알만한 사람 대부분이 언급 조차 꺼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김기헌(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장) : "죽산 선생이 이곳에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물론 공부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선생의 제적등본입니다. 등본에는 사형 당했다는 것만 표기돼 있을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때문에 현재 생가터로 추측되고 있는 곳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인터뷰>이응식(강화읍장) : "세 군데 이사를 다니면서 다 조봉암 선생님이 사셨거던요. 첫번째 어느 자리든 택해서 생가로(지정해야하지 않나)"

대구에 있는 한 공원묘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묘를 위해 찾았습니다. 지난 1975년.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사형수들의 유가족들입니다.

<인터뷰>신동숙(82/故 도예종씨 부인) : "사형했다는 걸 알고 와서 그 소리 듣고 통곡 말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갔었어요."

성묘를 마친 85살의 강창덕옹은 개인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모셔둔 영정앞에서 또 한번 묵념을 올립니다.

<녹취>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애국 선열에게 간곡히 기원합니다. 첫째 영면하시고 명복을 빌고."

지난 74년 소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강창덕옹은 8년8개월의 옥고를 치른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인터뷰>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왜 나도 안죽고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꾸 나고."

같은 무기수로 살다 풀려난 나경일씨는 대장암과 투병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아들 문석씨는 아버지가 투병중에 수술을 받을때도 고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아버님이 고문실로 착각하셨어요. 수술실을. 당시에 고문실이 조명이라든지 비슷했던가봐요. 그 악몽을 재연하고 계신거예요. 나쁜 놈들..나를 왜 여기 잡아 넣느냐. 참. 그때 아들로서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그렇게 강인한 분이 셨는데."

김진생 할머니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간뒤 1년만에 유골로 돌아온 남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83살 노인의 응어리가 녹아있는 알 듯 모를듯한 내용의 메모만이 당시 김 할머니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김진생(83/故 송상진씨 부인) : "(왜 이걸 쓰신거죠? 어머니) 뭐 한때 내가 이래저래 내 생각대로 이래 한게 있었지."

지난 1975년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해전 반독재를 주도하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면서 불거졌습니다. 관련자들은 당시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불과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가족들이 기록한 증언록에는 간첩 가족으로 한평생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절절합니다.

<녹취> "수사관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비틀고 단단한 몽둥이로 발바닥,허벅지, 팔을 때렸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두 번인가 세 번정도 실신을 했습니다."

<인터뷰>김형태(사건 담당 변호사) :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거들 그런 것도 받아줘야 되거든요. 근데 다 기각하고 그냥 항소심 같은데선 아무것도 안하고 결심을 해버려요."

당시 사형 선고를 내렸던 대법관들은 재판장이었던 민복기 대법원장. 주심이었던 이병호 판사를 비롯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이일규 판사만 사실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판절차가 위법하다며 사형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냈고 나머지 12명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지난 2007년. 이일규 판사는 타계를 앞둔 1년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녹취>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습니다."

인혁당이 배후로 지목됐던 민청학련 사건도 대학생과 일반인등 대규모 구속 사태를 불러 왔습니다. 지난 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후 1000여명의 위반자를 조사했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한다는 혐의로 180명을 구속기소했습니다.

<인터뷰>이철(민청학련 관련 1심서 사형선고) : "아버지는 몸져 누우시고, 어머니는 고생하시다가 몸이 불편해지시고, 딸들은 행방불명이 되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본인은 병들어 눕고, 이런 집안이 한 두곳이 아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돼 12년 형을 선고 받았던 최민화씨도 가족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등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민화(민청학련 관련 1심서 12년 선고) : "“이 사회에 다시는 우리와 같은 그런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되는 그런 세상은 이제 오지 않겠지라고 하는 그런 회한도 좀 있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이들 사건은 지난 2005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두 사건은 모두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과 배상 결정이 내려지면서 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인터뷰>오승용(전남대 정치학 박사) : "국가는 단순히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하는 것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권의 최후보루인 사법부...그 성스러운 곳에서 내려진 잘못된 판결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굳이 시계를 과거로 돌리지 않더라도 시대의 아픔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유족들은 뒤늦게 국가를 상대로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이 문제는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그걸 보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걸 많다고 얘기한다면 저는 당연히 안받아야 되는거죠. 그 대신 35년전에 우리 가족들의 삶으로 돌려달라는 거죠. 그거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게 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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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형 그리고 무죄
    • 입력 2011-02-28 07:36:15
    • 수정2011-02-28 09:56:02
    취재파일K
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딸과 아들이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사형당할 당시 서른 한 살 새댁이었던 큰딸은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팔순넘은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는 20여분간.. 가족들은 미동도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곤 무죄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청석 여기저기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죽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채 사형당한 오욕의 세월을 지워 버리는데는 채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다신 정적을 없앤 이런일이 일어나선 안되겠죠. 정적을 없애는 이런..." 지난 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후 52년만에 지난 달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 받았습니다. 유족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간첩의 후손이라는 멍에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산 조봉암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사법 판단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들어 봤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벗은 뒤에도 죽산의 딸 조호정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백지에 반야심경을 한자 한자 적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리곤 집 근처 사찰로 가서 태워 버립니다, <녹취> 조호정 : "나도 이제 80이 넘고 그러니까 나 가기전에 됐으면 좋겠다고 그 얘기밖에 다른게 없어요." 독립운동가로 제헌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등을 지낸 죽산 조봉암은 1952년 제2대,,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80여만표와 200여만 표를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59년 7월.사형당했습니다. 국가 변란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조봉암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이 50여년만에 판결을 뒤집으며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인터뷰>이동근(前 대법원 공보관) : "간첩죄는 증거가 부족해 무죄이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52년만에 종전 판결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습니다." 당시 가족들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단 것도 몰랐습니다. 하얀 수의에 덮여 돌아온 아버지의 시신이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구명 탄원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조호정 :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그렇게 험하게 가셨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얼굴이 편안해. 아..이런 말 한번도 안 해봤는데..조금 미소짓고 가만히 있어..아유 참...그러고 끝이 나거예요." 장남 규호씨의 고통은 더 컸습니다. 당시 10살이었던 조규호씨는 간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직장 생활 조차 힘들었습니다. 감시의 눈초리는 삼엄했고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 꿈도 꿀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조규호(62/죽산 조봉암의 장남) : "얘기하면 뭐해...편안하게 할려고 그랬는데 본인이 아니면 모르지." 유족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생가터를 발굴하고 추모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강화도의 한 마을. 조봉암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생가터는 알수 없습니다. 간첩 혐의로 사형됐기 때문에 행적을 알만한 사람 대부분이 언급 조차 꺼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김기헌(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장) : "죽산 선생이 이곳에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물론 공부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선생의 제적등본입니다. 등본에는 사형 당했다는 것만 표기돼 있을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때문에 현재 생가터로 추측되고 있는 곳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인터뷰>이응식(강화읍장) : "세 군데 이사를 다니면서 다 조봉암 선생님이 사셨거던요. 첫번째 어느 자리든 택해서 생가로(지정해야하지 않나)" 대구에 있는 한 공원묘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묘를 위해 찾았습니다. 지난 1975년.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사형수들의 유가족들입니다. <인터뷰>신동숙(82/故 도예종씨 부인) : "사형했다는 걸 알고 와서 그 소리 듣고 통곡 말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갔었어요." 성묘를 마친 85살의 강창덕옹은 개인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모셔둔 영정앞에서 또 한번 묵념을 올립니다. <녹취>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애국 선열에게 간곡히 기원합니다. 첫째 영면하시고 명복을 빌고." 지난 74년 소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강창덕옹은 8년8개월의 옥고를 치른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인터뷰>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왜 나도 안죽고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꾸 나고." 같은 무기수로 살다 풀려난 나경일씨는 대장암과 투병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아들 문석씨는 아버지가 투병중에 수술을 받을때도 고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아버님이 고문실로 착각하셨어요. 수술실을. 당시에 고문실이 조명이라든지 비슷했던가봐요. 그 악몽을 재연하고 계신거예요. 나쁜 놈들..나를 왜 여기 잡아 넣느냐. 참. 그때 아들로서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그렇게 강인한 분이 셨는데." 김진생 할머니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간뒤 1년만에 유골로 돌아온 남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83살 노인의 응어리가 녹아있는 알 듯 모를듯한 내용의 메모만이 당시 김 할머니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김진생(83/故 송상진씨 부인) : "(왜 이걸 쓰신거죠? 어머니) 뭐 한때 내가 이래저래 내 생각대로 이래 한게 있었지." 지난 1975년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해전 반독재를 주도하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면서 불거졌습니다. 관련자들은 당시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불과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가족들이 기록한 증언록에는 간첩 가족으로 한평생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절절합니다. <녹취> "수사관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비틀고 단단한 몽둥이로 발바닥,허벅지, 팔을 때렸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두 번인가 세 번정도 실신을 했습니다." <인터뷰>김형태(사건 담당 변호사) :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거들 그런 것도 받아줘야 되거든요. 근데 다 기각하고 그냥 항소심 같은데선 아무것도 안하고 결심을 해버려요." 당시 사형 선고를 내렸던 대법관들은 재판장이었던 민복기 대법원장. 주심이었던 이병호 판사를 비롯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이일규 판사만 사실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판절차가 위법하다며 사형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냈고 나머지 12명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지난 2007년. 이일규 판사는 타계를 앞둔 1년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녹취>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습니다." 인혁당이 배후로 지목됐던 민청학련 사건도 대학생과 일반인등 대규모 구속 사태를 불러 왔습니다. 지난 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후 1000여명의 위반자를 조사했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한다는 혐의로 180명을 구속기소했습니다. <인터뷰>이철(민청학련 관련 1심서 사형선고) : "아버지는 몸져 누우시고, 어머니는 고생하시다가 몸이 불편해지시고, 딸들은 행방불명이 되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본인은 병들어 눕고, 이런 집안이 한 두곳이 아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돼 12년 형을 선고 받았던 최민화씨도 가족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등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민화(민청학련 관련 1심서 12년 선고) : "“이 사회에 다시는 우리와 같은 그런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되는 그런 세상은 이제 오지 않겠지라고 하는 그런 회한도 좀 있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이들 사건은 지난 2005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두 사건은 모두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과 배상 결정이 내려지면서 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인터뷰>오승용(전남대 정치학 박사) : "국가는 단순히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하는 것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권의 최후보루인 사법부...그 성스러운 곳에서 내려진 잘못된 판결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굳이 시계를 과거로 돌리지 않더라도 시대의 아픔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유족들은 뒤늦게 국가를 상대로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이 문제는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그걸 보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걸 많다고 얘기한다면 저는 당연히 안받아야 되는거죠. 그 대신 35년전에 우리 가족들의 삶으로 돌려달라는 거죠. 그거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게 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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